쿄코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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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요시 나가요시 정권과 반미요시 연합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 미요시 요시오키가 전선을 총지휘한 미요시 군과 하타케야마 타카마사가 지휘하는 하타케야마 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양측 합쳐 거의 10만에 달하는 군세가 부딪힌 대전투였다.
2. 전투 이전
2.1. 쿠메다의 전투, 미요시의 퇴각
반미요시 세력과 미요시 정권 사이의 전투는 1562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전쟁은 미요시 정권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이 해가 되자 반미요시 세력은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였고, 결국 전황은 미요시 정권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쿠메다 전투였다. 미요시 짓큐가 지휘하던 미요시 군과 하타케야마 군 사이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짓큐가 전사하고 미요시 군이 패퇴하고 만 것이다. 짓큐를 깨뜨린 하타케야마 군은 이 전투의 결과를 "천하의 승리"라고 선전하고 다니며 기세를 올렸다.
쿠메다의 패전 소식은 곧 거성 이이 모리야마 성에 있던 미요시 나가요시에게는 물론이고, 교토에서 반미요시 연합의 롯카쿠 요시카타 군과 대치하고 있던 사람들, 나가요시의 후계자 미요시 요시오키와 나가요시의 측신이자 막신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도 전해졌다. 상황의 불리함을 인지한 요시오키와 히사히데는 교토를 포기하고 후퇴하기로 결단했다.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이전 요시오키와 히사히데와 만나 미요시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상태였기 때문에 교토를 버리고 퇴각하는 미요시군과 함께했다. 교토를 버린 요시오키와 히사히데는 셋츠 일대에서 교토에 입성한 롯카쿠를 견제하는 포진을 취했고, 셋츠 일대의 국인중과 탄바 군단장 마츠나가 나가요리 (당시 이름은 나이토 무네카츠) 등에게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2.2. 하타케야마의 공세, 미요시의 출격
교토와 셋츠의 정세가 변화하는 동안 쿠메다의 승전자 하타케야마 타카마사는 야마토의 여러 국인중들을 포섭하여 군대에 합류시키고 카와치의 미요시 거점들을 공격, 낙성시켰다. 기세등등해진 하타케야마 군은 그대로 북상을 개시, 쿠메다 전투의 한달 뒤인 1562년 4월이 되자 나가요시의 거성인 이이 모리야마 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하타케야마 군보다 소규모였던 이이 모리야마 성의 농성군은 나가요시의 지휘 하에 두 차례의 총공세를 막아내며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버텨냈다. 공세를 계속한 하타케야마 군과는 달리 롯카쿠 군은 교토 점거 후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타카마사는 요시카타에게 속히 군을 움직일 것을 독촉했지만 요시카타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 미요시 군의 태세 정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5월 초까지 요시오키가 부른 셋츠의 국인중들과 나가요리는 물론이고 쿠메다 전투 뒤 후퇴하였다가 태세를 정비한 시노하라 나가후사 등의 짓큐 가신단이 지휘하는 군대까지 요시오키에게 합류하여 미요시군은 대략 5만 정도의 대군을 이루었다. 그렇게 규합된 미요시 군은 나가요시의 구원을 위해 출격, 남하를 개시하였다. 소식을 접한 타카마사는 모리야마 성의 포위를 풀고 후퇴하여 요시오키 군에 대한 요격 태세를 갖추었다. 포위가 풀린 것으로 한숨 돌린 나가요시는 휘하 농성군을 요시오키와 합류시키고 본인은 모리야마 성에 남았다. 이렇게 하여 약 6만에 달한 미요시 군과 4만의 하타케야마 군은 쿄코지 인근에 포진하고 대치하였다.
하타케야마 군의 철포대, 정확히는 하타케야마 군에 합류해있던 철포 용병대인 사이카슈와 네고로슈를 경계한 미요시 군은 철포를 사용할 수 없는 비오는 날 전투를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 그리고 그 원인이 된 경계심은 사이카슈 자체의 강력함 뿐 아니라 쿠메다 전투에서 짓큐가 전사한 원인이 네고로슈의 저격에 당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3. 전투
전투는 시종일관 미요시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미요시군은 실질 총지휘를 맡은 미요시 요시오키의 지휘권이 확고했고, 기타 지휘관들은 그 지휘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하타케야마군은 그렇지 못했다. 사이카슈의 지휘권은 츠치바시 일족, 스즈키 사다유, 스즈키 시게히데 등 스즈키 일족이 가지고 있었고, 다른 국인중들 역시 그들의 수장의 지휘를 받았다. 이 분열된 지휘 체계로 인하여 하타케야마군은 시종일관 수동적으로 미요시군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승패를 좌우하였다. 전투 내내 미요시군에게 끌려다닌 하타케야마군은 결국 미요시군의 전선 총대장 미요시 요시오키 이하 전원이 감행한 총공세를 맞고 패퇴하였다. 기세를 잡은 미요시군은 그대로 하타케야마군을 추격하였다.
4. 전후
하타케야마군의 참패를 접한 롯카쿠 요시카타는 이미 패한 싸움이라고 판단, 교토를 버리고 본국 오우미로 귀환하여 미요시와 강화를 진행하였다. 한편 하타케야마는 전투에서 큰 타격을 받은 것에 이어 미요시군의 추가 공세가 이어지자 결국 이즈미, 카와치, 야마토 등에 확보한 거점을 상실하고 키이로 도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기나이 내에서 미요시 정권에 대항할 세력은 다시 한번 사라지게 되었고, 승리를 이끈 미요시 요시오키는 지용겸비의 명장으로 나가요시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카즈마사의 죽음과 쿠메다 전투로 시작된 미요시 가문의 불행은 끝나지 않아, 결국 미요시의 몰락을 가지고 왔다.
[1] 야전의 실질 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