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카쿠 요시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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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角義賢
1521년 ~ 1598년 4월 19일, 음력 3월 14일
일본 센고쿠 시대오미(지금의 시가현)(近江)의 다이묘이자 오미 롯카쿠 가문(近江六角家)의 15대 당주이다. 롯카쿠 사다요리의 아들로 1552년 아버지 사다요리가 죽자 당주가 된다.
당주 자리에 오른 후 검호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호소카와 하루모토를 도와 미요시 나가요시와 에구치 전투를 벌였지만 연패를 거듭했으며, 1558년에 그나마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미요시 나가요시를 중개하여 쇼군을 교토로 귀환시키며 체면치레를 하였다. 아자이 히사마사가 공격하자 이를 격퇴하여 아자이 가문을 종속시키면서 히사마사의 장남(후의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자기 이름 글자 '카타'를 하사해 카타마사로 이름을 짓게 하고 가신인 히라이 사다타케의 딸을 시집보냈다. 1559년 당주 자리를 아들 롯카쿠 요시하루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불교에 귀의해 법명을 쇼테이(承禎)로 하였으며, 1560년 아자이 나가마사가 반기를 들자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나 노리다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1561년에 아들인 롯카쿠 요시하루가 사이토 요시타츠와 동맹을 맺을 때 서신을 통해 반대의 뜻을 표했지만 동맹은 성사되었다고 한다. 한편 하타케야마 타카마사와 손을 잡고 반 미요시 전선을 형성해 교토에서 미요시 요시오키마츠나가 히사히데와 대치하였고, 1562년 하타케야마 타카마사가 쿠메다 전투에서 미요시 짓큐를 죽이고 승리하자 미요시 요시오키와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하타케야마와 롯카쿠에 모두 대응하기 위해 함께 셋츠로 물러나면서 교토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하타케야마 타카마사의 요청을 무시하고 계속 교토에만 눌러앉아 있다가, 쿠메다 전투의 패배를 수습하고 세력을 끌어모은 미요시씨가 쿄코지 전투에서 하타케야마 타카마사를 격파하자 교토에서 물러나 미요시 가문과 강화했다.
1563년 요시하루가 가신 고토 타카토요를 간논지성에서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가신들이 반기를 드는 간논지 소동으로 아들인 요시하루와 함께 간논지 성에서 쫓겨난다. 이 때 가모 사다히데, 가모 가타히데[1] 부자의 중재로 간신히 성으로 귀환한다. 1566년 아자이 나가마사가 영토를 침략하기 시작하자 신나게 털린다. 이런 상황에서 1568년 오다 노부나가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교토로 진군하자 저항을 벌이나 또 패배하여 간논지성을 빼앗기면서 결국 오미 롯카쿠 가문(近江六角家)은 멸망한다.
이후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오다 노부나가가 대립하여 반 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자 한 축을 담당하여 1570년에 노다 성, 후쿠시마 성 전투에 참전하거나 코가 군에서 출진하여 미나미오미에서 노부나가와 싸우다가 오오기마치 덴노의 칙령으로 화목했다가 시바타 가츠이에가 지키는 쵸코지 성을 공격하나 또 패배한다. 이후 보다이지 성에서 저항을 벌이다가 노부나가에게 항복한다. 이후 사쿠마 노부모리의 감시하에 있었으나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이후 행적에 대해서 계속해서 호족들을 규합해 저항을 벌였다거나, 혼간지에 몸을 숨겼다거나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등 확실하지 않다. 이후 1598년 사망한다. 향년 78세.
헤키류는 전설적인 인물로 일부에선 신성시되는 헤키 단죠(日置弾正)가 창시한 궁술 유파로 일본의 궁술은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요시다 시게카타(日置弾正와 동일 인물설이 있다)가 요시다류를 창시하여 크게 흥했고 현재 요시다류는 헤키류 요시다파 정도로(물론 그 안에 복잡한 계파가 있다) 칭하고 있다. 일본 궁도계의 역사에서 이토록 중요한 인물인 요시다 시게카타에게 유일하게 면허 개전을 받고 오의를 전수받은 인물이 바로 롯카쿠 요시카타인것이다. 이로 미루어 당대에서도 독보적인 궁술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성이 쪼잔해서 요시다류의 전승은 살짝 꼬이게 된다. 요시다 시게카타의 장남인 시게마사는 훗날 가전 절학인 요시다류의 오의를 전수해줄 것을 롯카쿠 요시카타에게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이에 열받은 요시다 시게마사는 롯카쿠가를 떠나 일시 아사쿠라 가에 몸을 의탁하게 된다. 훗날 롯카쿠 요시카타는 롯카쿠 가문으로 복귀한 요시다 시게마사와 양자 결연을 맺고서야 요시다류의 오의를 전수해줘서 요시다류는 겨우 종가가 이어받게 됐다.
요시다 시게마사로서는 정말 힘들게 배운 오의인지라 쉽게 남에게 전수해주기 싫었을지도 모르지만 노부나가의 침공으로 요시다류가 끊길 것을 우려해 넷째 아들인 吉田重勝에게도 오의를 전수했고 그는 쿄토로 이주하여 사관은 하지 않고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여 요시다류 전파에 성공했다. 일본 궁도의 근간이 되는 헤키류 요시다류인지라 워낙에 크게 퍼져 유파라 계보는 정말 많다. 그중 특이한 것이 요시다 종가라고 할수 있는 요시다 시게마사의 장남인 시게타카는 주군인 롯카쿠 요시카타에게 전수받아 혈통상으로는 종가인 出雲派는 사실 롯카쿠에게서 이어지는 등 복잡한 계보를 자랑한다.
아무튼 궁술의 독보적인 달인이고 승마술도 大坪流, 佐々木流등을 배워 말타고 활쏘는 사람이라는 무사의 본래 소양에 있어서는 절정 고수였을것으로 추정되나 때는 전국 시대였고(즉 이미 한물 가도 한참 간 개념이었다는 소리) 상대가 하필 노부나가여서 정말 심하게 털린 것이 저평가의 이유이다. 조상 때부터의 전법인 18개의 지성(방위 거점으로 작게는 진채 목책에서 작은 성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을 거느린 간논지성에서 농성했지만[2] 노부나가 입장에선 병력도 적은 놈이 그걸 19개로 쪼개놓은 상태였으니.... 자잘한 지성 따위 싹 무시하고 부대를 셋으로 나눈 오다 군에 의해 주요 거점들이 순식간에 붕괴되자 본거지인 간논지성을 싸워보지도 않고 버리고 달아나버렸으며 결국 각개격파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도망을 제때 친 덕분에 멸문을 면하고 이후로도 계속 오다 군과 싸울 수 있었으니 아주 어리석은 선택은 아니었겠지만 워낙 꼴사나운 패배라 평가가 박할 수 밖에 없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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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신장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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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코에이 게임에서는 늘 박한 능력치를 받아들었으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도 병과 적성이 생긴 이후로는 대출세했다. 능력치는 여전히 형편없지만 궁술의 달인 중의 달인인 덕에 병과 적성 S에 천도에서는 강력한 고유 전법(적장을 저격 부상시키는 부가 효과도 있다.)을 소유한데다가 강력한 병과인 攻城櫓를 다루는데 있어서 게임 내에서도 우수한 성능을 자랑한다. 궁술 S에 병기 S는 한명도 없고 병기 A가 4명에 불과해서 병기 B를 가진 롯카쿠 요시카타는 1000명이 넘는 등장 인물 중에서도 다섯번째쯤 되는 攻城櫓 적성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4] 태합입지전에서도 궁술 비기를 가지고 있다.이는 일본 궁도의 근간이 되는 헤키류(日置流) 혹은 요시다류(吉田流)의 계보에서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궁도의 또 다른 축은 오가사와라류가 있지만 이는 궁마술로 유명한 유파로서 보병 궁술은 요시다류에 기초를 두게 된다)
태합입지전5에서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궁술 비기를 가지고 있고 궁적성이 4레벨. 족경 레벨이 낮긴한데 대신 기마 적성도 4레벨이라 통솔이 별로 안높긴 해도 기마대로는 꽤 쓸만하다.
[1] 가모 우지사토의 조부, 부친이다.[2] 흔히들 말하는 우주 방어 모드로 수많은 방위 거점을 무시할 수 없으니 오다 군도 결국엔 군사들을 자잘하게 쪼개어 일일히 대처해야 한다는 점을 노렸다. 오다 군이 흩어지면 그중 병력이 집중된 주요 거점에서 반격하여 흩어진 오다 군을 각개격파하고 각 거점은 그 때까지 버틴다는 전략이었다. 선대에 재미꽤나 본 방법이었지만 시대가 바뀌었고 상대를 정말 잘못 만났다.[3] 그렇긴 해도 할아버지 롯카쿠 타카요리 역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와 아시카가 요시키 2대에 걸쳐 공격을 받아 간논지 성을 잃었으나 쇼군의 원정군이 못 견딜 때까지 게릴라전으로 버텨서 아시카가 요시히사는 진중에서 병사하고, 아시카가 요시키는 비워둔 본거지에서 일어난 정변으로 축출돼서 가문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4] 참고로 궁술 S에 병기 B도 5명 뿐이다. 궁술 S에 병기 A는 정말 전국 시대 100년 역사의 레전드급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