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시 짓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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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好実休(みよし じっきゅう)
1526년(1527년) ~ 1562년
미요시 모토나가의 차남이자 미요시 나가요시의 첫째 동생. 아명은 센미츠마루(千満丸)이며 가명은 히코지로(彦次郎). 짓큐라는 이름은 법호로, 본명은 '''유키토라(之虎)'''. 아들로 미요시 나가하루, 소고 마사야스, 아타기 진고로(安宅神五郎)[1]가 있다.
1. 소개
2. 아와에서의 동향
3. 독자적인 군사 활동의 시작
4. 사망 이후
5. 이름에 대해
6. 기타


1. 소개


나가요시키나이로 진출하자 미요시씨의 본국인 아와를 통치해나간 무장. 아와슈고(阿波守護)인 호소카와 모치타카(細川持隆)를 살해하여 미요시씨 중심의 권력을 구축하였으며 아와 대부분의 코쿠진을 규합하여 대외 진출을 주도해나간 인물이다. 다도에도 조예가 깊어 여러 명품 자기들을 소유하고 유력자들과 많은 교류를 가진 당대의 문화인이기도 하였다.

2. 아와에서의 동향


1532년에 아버지 모토나가가 사망하게 되어 아와에 잠적하고 있었으나, 형 나가요시가 단 1년만에 키나이로 복귀함에 따라 짓큐도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2] 기본적으로 미요시씨는 아와 호소카와씨의 가신이었기에 짓큐는 모치타카를 보좌하며 아와 및 시코쿠의 통치를 진행해나갔다. 1539년에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미요시씨의 정적인 호소카와 우지츠나(細川氏綱)가 이즈모아마고 하루히사 등을 포섭하자 모치타카와 짓큐는 사누키에 군사를 집결시켜 츄고쿠로 도해해 10월 28일에 아마고의 세력과 격돌하였다.
이후로도 짓큐는 모치타카의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며 1546년에 나가요시가 우지츠나 세력에게 포위되자 10월에 모치타카와 함께 사카이로 도해하여 우지츠나 세력을 깨뜨리는 공을 세웠다. 짓큐는 이번 도해 당시 하루모토와 나가요시를 군사적으로 여러번 도와주었으며 여러 지역을 전전해 야마시로와 셋츠에도 킨세이를 발급할 정도였다. 또한 이번 킨세이는 모치타카의 명령으로 발급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같이 종군해온 시노하라 나가마사(篠原長政)가 짓큐의 명으로 킨세이를 발급하는 등 짓큐는 독자적인 가신층을 만들기 시작하였다.[3] 잠시 키나이에서 활동한 짓큐는 1548년 5월에 아와로 귀환하였다.
한편 동년의 나가요시는 하루모토와 적대하게 되어 그를 지지하는 하타노 히데타다(波多野秀忠)의 딸과 이혼하고 우지츠나를 지지하는 유사 나가노리(遊佐長教)의 딸과 재혼하는 등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게 되었다. 이렇듯 나가요시가 호소카와 정권을 배제시킬 움직임을 보이자 짓큐는 모치타카와 함께 키나이로 출진하는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1553년 6월, 짓큐는 동생인 소고 카즈마사와 연합하여 모치타카를 쇼즈이의 켄쇼지(見性寺)에서 살해하는 쇼즈이 소동(勝瑞騒動)을 일으켰다.[4] 모치타카를 살해한 짓큐는 그의 아들인 호소카와 사네유키를 살해하는 일 없이 대신 양육해주었다.[5] 1차 사료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번 소동 이후 묘도군(名東郡)에서 코쿠진들의 반란이 일어나 짓큐가 이들을 제압했다고 한다.

3. 독자적인 군사 활동의 시작


아와를 어느 정도 제압하는데 성공한 짓큐는 직접 군세를 이끌고 타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554년의 하리마 공격 때는 10월에 아와지 스모토 성(洲本城)에서 나가요시, 아타기 후유야스, 카즈마사와 회담을 가졌고, 1558년의 아시카가 요시테루와의 전쟁에선 9월 3일에 다시 아마가사키에서 회담을 가지는 등 대규모의 군사작전에서 언제나 일정 이상의 발언력을 가지며 전쟁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559년에는 시코쿠 동부의 평정을 위해 아와의 통치를 적남 미요시 나가하루와 가신 시노하라 사네나가(篠原実長), 카지 모리토키(加地盛時), 미요시 야스나가에게 맡기고 자신은 시노하라 나가후사, 미요시 모리나가(三好盛長) 등과 함께 사누키로 진격, 이요의 코노(河野)씨와 무라카미 수군과 연합하여 반미요시를 표방하는 카가와(香川)씨를 공격하였다. 한편 짓큐의 대대적인 북상에 모리 모토나리는 비젠 방면의 침공을 경계하기 시작하여 모리 - 미요시 간의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나가요시는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통해 요시테루에게 오토모 소린을 회유시킬 것을 요구하였고, 요시테루는 11월 9일에 소린을 큐슈탄다이(九州探題)와 오우치씨의 가독에 임명시켰다. 바쿠후에게 이런 조치를 받은 소린은 곧바로 오우치씨의 구령인 큐슈 북부를 공격하였기에 모리 - 미요시 전선의 긴장감은 비교적 풀어지게 되었다.
1560년이 되자 짓큐의 군세는 4월 8일 스모토에서 회담을 가졌고, 6월에는 나가요시의 카와치 침공을 도와주기 위해 키나이로 도해, 카와치에 도착하여 하타케야마(畠山)씨와 싸워나갔다. 결국 짓큐는 10월 27일에 하타케야마의 세력을 물리는데 성공하여 카와치 남부의 최대 거점인 타카야 성(高屋城)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짓큐는 시코쿠 뿐만이 아니라 키나이에서도 자신의 세력을 만드는 것에 성공하였다. 1561년에는 쇼반슈(相伴衆)에 취임하게 되어 명실공히 아와슈고 가문을 극복하고 나가요시와 필적할만한 가격을 얻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키나이에서 반 미요시 세력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오미의 롯카쿠 요시카타의 공격은 미요시 요시오키와 히사히데가 맡고 키이의 하타케야마 - 네고로지(根来寺)의 공격은 짓큐가 맡게 되었다. 이윽고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짓큐는 1562년 3월 5일, 이즈미 쿠메다 전투(久米田の戦い)에서 전사하였다.

4. 사망 이후


짓큐를 전사시킨 하타케야마 세력은 이번 승리를 "천하의 승리(てんかの御かち)"라고 선전하고 다녔으며 짓큐의 세력은 사카이의 몇 명을 제외하면 전원이 아와로 후퇴하게 되었다. 아와로 돌아온 야스나가, 카지 모리토키, 미요시 모리마사(三好盛政), 시노하라 나가히데(篠原長秀), 야노 토라무라(矢野虎村)는 곧바로 군을 정비해 5월 10일에 아마가사키로 도해하였고, 곧 요시오키히사히데와 연합해 하타케야마 세력을 깨부수고 롯카쿠 세력을 오미로 물리는데 성공하였다.
이번 전쟁으로 타카야 성을 되찾은 짓큐의 가신들, 시노하라 나가히데, 카지 모리토키, 미요시 야스나가, 야노 토라무라, 요시나리 노부나가(吉成信長), 미요시 모리마사, 미요시 모리나가, 이치하라 나가타네(市原長胤), 이자와 나가츠나(伊沢長綱)는 소츄(惣中)로서 연서하여 짓큐의 후계자인 나가하루에의 충절을 맹세했으며, 집단 지배체제를 통해 남카와치를 지배하게 되었다.

5. 이름에 대해


보통 짓큐의 본명은 요시카타(義賢)라고 알려져있지만 이는 군키모노같은 창작물에서만 발견되는 이름이며 1차 사료에서는 전혀 확인되고 있지 않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다름 아닌 짓큐의 차남 소고 마사야스의 이름과 관련되어있다.
중앙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했던 미요시 야스나가가 훗날 하시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인해 히데요시의 조카를 양자로 받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히데요시의 조카는 이름을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로 바꾸고 야스나가의 가신단을 인계받고 시코쿠의 통치에 관여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키나이 미요시 가문이 완전히 토요토미 정권에 흡수당하고 시코쿠의 통치권을 침해받기 시작한 마사야스는 자신의 이름을 미요시 요시오키 대부터 키나이 미요시 가문의 돌림자가 된 요시(義)가 들어간 이름인 '''요시카타(義堅)'''로 바꾸어 자신이 미요시 가문의 정통인것을 주장하였고 이 이름으로 수많은 서장을 발급하였다.
문제는 이 이후에 일어났다. 짓큐와 마사야스는 본거지가 쇼즈이 관(勝瑞館)으로 같았고 자신들이 쓴 서장은 사누키의 호족 앞으로 보내진것이 많이 남아있었기에 그들의 사후에 혼동이 일어난 것이다. 거기에 서장의 화압(花押)에 표기된 堅마저 賢로 후세 사람들에 의해 오기되어 일부 가계도나 군키모노에서 그들의 이름은 미요시 요시카타와 소고 마사야스가 되었고 이 이름들이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6]
특히 天野忠幸 씨는 위의 주장과 더불어, 미요시씨와 아시카가씨가 화의를 맺는 1558년 이후라면 몰라도 그 이전에 미요시씨와 적대 관계인 아시카가씨의 통자 "요시(義)"가 들어간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요시카타라는 이름을 완전히 부정하는 의견을 표했다.[7]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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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신장의 야망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정치·지략·통솔이 골고루 높고 무용만 약간 떨어지는 만능형으로 묘사되어 형 다음으로 능력치가 좋다. 이름은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까지 요시카타로 나오다가 최신작인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에서 짓큐로 나온다. 태합입지전 5에서는 짓큐로 나온다.
상기의 초상화말고 다른 초상화가 존재하는데 다른 사람마냥 천지 차이로 그려져 있다.
형, 동생들 못지않게 짓큐 또한 당대의 문화인이었다. 특히 다도가로 유명했으며 본인이 이즈미에 위치한 사카이에 들릴 일이 많았기 때문인지 센 리큐같은 다도가들과 교류가 많았으며 최고의 다도인 중 한명이라는 말까지 들을정도로 나가요시후유야스에 뒤지지 않는 명성을 가지고있었다. 명품 차기나 자기도 많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오다 노부나가의 상락 작전 이후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하며 혼노지의 변 당시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본거지 쇼즈이 관에서의 발굴 조사로 인해 수량은 물론이고 보존 상태까지 좋은 자기들이 발견되어 속속히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와의 코쿠진들은 주로 슈고의 명령을 따랐고, 아와 전역의 코쿠진들이 미요시씨를 따르는 것도 아니기에 여러 전투와 정국에서 이것에 발목이 잡혀 미요시 유키나가미요시 모토나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반면 짓큐는 아와 전역과 아와지 남부의 코쿠진을 통솔할 만큼 슈고에 의지하지 않는 권력을 쌓아올리는 것에 성공하였다.
군키모노인 무카시아와모노가타리(昔阿波物語)에서는 문화와는 거리가 먼 무장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그의 일대기와 곧바로 상충한다(...). 미요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무카시아와모노가타리는 미요시와 쵸소카베의 다음 가문인 하치스카 가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하치스카 마사카츠의 가문) 시대에 작성되었고 당연히 옛 영주가 현 영주보다 위대하거나 그 시절이 더 좋았다고 공공연하게 작성하면 안되므로 인물의 성격에 대해 살짝 조정을 가했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8]

[1] 2차 사료인 미요시 벳키(三好別記)에선 짓큐의 삼남이라고 하지만 1차 사료에서는 그저 '짓큐의 아들 진고로'라고만 언급된다. 1572년 쯤에 아타기씨의 양자로 들어갔다. 동시기에 숙부인 아타기 후유야스의 적남이자 흔히 노부야스라고 알려진 진타로(神太郎)가 버젓이 있었지만 동년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진타로의 행적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를 이어 아타기씨의 당주로 활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미요시 진고로라고 불러질 때도 있었으며 후에 하시바 히데요시에 의해 아와지에서 하리마로 영지가 바뀌어 수군으로써의 활동을 끝냈다.[2] 여기서 짓큐는 꽤 독특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나가요시가 자신은 키나이에서만 정무를 돌보고 아와 미요시씨에 대한 권한은 짓큐에게 일임시킨 것이다. 오다, 이마가와, 모리 등의 사례를 봐도 형제나 일문들에게 권력을 수여하지 않고 오히려 배제하며 숙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이렇게 동생에게 하나의 쿠니를 덜컥 맡기는 것은 상당히 독특한 방식이었다.[3] 1551년엔 쿄토의 토지(東寺)의 킨세이 발급 요청에 응답하여 나가마사를 통해 9월 21일부의 서장을 전달한 일도 있었다. 이처럼 짓큐는 성인이 되면서 점점 모치타카의 비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4] 호소카와료케키(細川両家記)에 의하면 9일, 토지카코쵸(東寺過去帳)에 의하면 17일에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원인으로, 당시 나가요시가 하루모토 소속의 슈고다이와 코쿠진들을 추방하고 우지츠나를 지지하는 나이토(内藤)씨나 마츠라(松浦)씨 등을 포섭하고 있었기에, 하루모토의 원래 가문인 아와 호소카와씨와의 상하관계를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을 꼽고있다. - 阿波三好氏(2012년, 岩田書院) p.38[5] 주가를 찬탈하거나 뒤엎은 센고쿠 다이묘들이 그들의 당주나 후계자를 살해하지않고 옹립하거나 양육하는 것은 나름의 예의이자 전통이며, 정통성을 주장하고 죄상을 회피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다. 이를 행한 대표적인 인물들은 미요시 나가요시, 호죠 우지야스, 우에스기 켄신, '''오다 노부나가''' 등등.[6] 화압은 보통 자신의 이름이나 관위명으로 작성한는데 몇몇 무장들은 그냥 자신들만의 사인을 그려넣기도 하였다. 화압은 흘려쓰기 때문에 판별하기도 어려운데 짓큐는 화압을 그림 그리듯 그려넣은데다 그 종류도 많았기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에게도 적잖은 혼동을 주었을 것이다. 이런 혼동 때문에 쇼즈이 성(勝瑞城)이 쇼즈이 관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되었으나 최근의 발굴 조사로 쇼즈이 성은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침공으로 마사야스가 급히 쌓은 성이며 전투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7] 阿波三好氏(2012년, 岩田書院) p.15[8] 실제로 에도 시대 토쿠시마 번에서 시작되었다는 쪽 염료(藍)와 목재 교역은 호소카와 - 미요시 시대부터 활성화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