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3세(대립교황)
11세기 후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반발해 옹립한 대립교황.
1025년생으로 속명은 귀베르토였다. 30대 나이로 이탈리아의 제국상서를 하는 등 유능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1061년에 대립교황 호노리오 2세를 옹립하기에 찬동한 경력이 있지만, 하인리히 4세가 교황 알렉산데르 2세를 달랜 덕분에 주교가 되었다. 1075년 그레고리오 7세에게 성무집행중지를 명령받았고, 이듬해(1076) 그레고리오 7세를 반대하는 주교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파문받았다. 1077년에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났다. 하인리히 4세는 1080년에 귀베르토를 교황으로 지명했다.
하인리히가 로마를 점령하자. 1084년 귀베르토는 '클레멘스 3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하인리히를 황제로 대관해주었다. 그러나 적군이 로마로 접근하자 로마를 버리고 라벤나로 돌아가 1080년부터 그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1090년대 중반부터 권력과 권위가 흔들리다가 1098년에 지지세력이 로마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1099년에도 재기하려고 했지만 다시 쫓겨나 1100년에 70대 중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원래부터 잘 교육받은 유능한 정치인인 데다가, 말빨도 뛰어나고 특유의 카리스마도 있었다고 한다. 그 덕에 놀랍게도 하인리히 4세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신념에 따라 교황직을 수행했다. 성직매매를 금지하고 개혁을 실천했다. 뛰어난 정치술로 추기경들을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민중에게도 지지받았다. 또한 포르투갈, 헝가리, 덴마크, 영국 등에서도 지지받은 적이 있었다.
추기경들에게 당근들 던져주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고 적대자였던 교황 우르바노 2세도 따라했다고 하니, 정치인으로서도 고단수였던 듯하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