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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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대 알렉산데르 2세

'''제157대 성 그레고리오 7세'''

제158대 복자 빅토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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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그레고리오 7세 (Gregorius VII)
'''본명'''
힐데브란트 (Hildebrand)
'''출생지'''
신성 로마 제국 소바나
'''선종지'''
아풀리아 공국 살레르노
'''생몰년도'''
1020년 ~ 1085년 5월 25일
'''재위기간'''
1073년 4월 22일 (6월 30일) ~ 1085년 5월 25일
'''시복'''
1584년, 그레고리오 13세
'''시성'''
1728년, 베네딕토 13세
'''축일'''
5월 25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제157대 교황.
1059년 교황 니콜라오 5세에 의해 로마 교회의 대부제로 서품되었고 교황 알렉산데르 2세선종하자 시민과 성직자들의 환호 속에 교황으로 옹립되었다. 당시 알렉산데르 2세의 장례 행렬에서 성직자들과 평신도 무리들이 "헬테브란트를 교황으로!!"라고 외치자 장례식 직후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으로 승인했다.

2. 생애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만이 교회의 으뜸이고 주교를 폐하거나 복직시킬 권한이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세속 권력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황제를 폐위시킬 자격이 있으며 따라서 교회와 세계의 주인이라고 말하였다.
교황은 '''성직자 서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성직자 계층이 황제권의 지배 아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국가의 권력과 사회구조를 흔드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하인리히 4세였다.[1]
교황권과 황제권의 투쟁에서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격돌은 밀라노 주교 자리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서 비롯됐다. 알렉산데르 2세 때부터 밀라노 지역에서 주교 문제로 자주 폭동이 일어나자, 하인리히 4세가 주교를 일방적으로 파면시키고 교황에 의해 성직매매죄로 이미 고소당한 고드프리란 사람을 임명했다. 알렉산데르 2세 교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밀라노 시민단체가 선출한 오토를 합법적인 주교로 인정했지만, 자신의 선종으로 사태를 마무리 짓지 못한 상태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밀라노 주교 임명권에 대해 간여치 말 것을 당부하는 한편, 1075년 2월 로마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해 평신도에 의한 성직 서임을 금지하는 법령을 선포하며 27개 항목의 '교황 훈령'을 선포했다.
하인리히 4세는 때마침 독일 북부의 작센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수긍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해 여름 반란을 진압한 후 자기가 임명한 밀라노 주교가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며, 1076년 1월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를 개최하여 그레고리오 7세를 파면했다. 이에 그레고리오 7세는 그해 2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황제권의 행사를 금지시켰다. 아울러 제국의 신하들에게 황제에 대한 충성선언과 복종 의무를 해제하고 황제를 지지하던 주교들을 파문 또는 성직 수행 금지로 처벌했다.
황제에 대한 전대미문의 이 조처는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독일 제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한편으로 하인리히 4세와 갈등을 빚고 있던 일부 제후들은 황제를 제거할 명분을 얻었다. 반대파 제후들은 1076년 10월 마인즈의 트리부르에서 회의를 열고, 1년 안에 황제가 교황으로부터 사면을 받지 못하면 황제를 퇴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선출할 것을 결의, 1077년 2월 아우크스부르그에서 교황의 참석하에 회의를 열기로 했다.
황제파가 급속히 붕괴되자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 제후들의 동맹을 막기 위해 눈덮힌 알프스를 넘어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하려고 로마를 떠나 카노사에 머무르고 있던 교황을 찾아갔다. 3일 간의 참회 끝에 교황은 황제를 사면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이다.
한편 하인리히를 반대해 그를 제거하려 했던 제후들은 교황의 사면에 반대해 1077년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대립 국왕으로 선출했고, 이에 하인리히 4세 세력과 대립왕 루돌프 세력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내전에서 하인리히 4세의 황제파 세력이 우위를 차지하자 1080년 그레고리오 7세는 슈바벤의 루돌프를 황제로 인정하고 하인리히 4세를 파문에 처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떨어지자 중립파를 비롯한 독일 제후들은 교황의 지나친 권력 남용에 분개하며 황제를 지지했다. 이에 힘을 얻은 하인리히 4세는 곧 반대파를 평정하고 실질적인 황권을 회복했다. 여세를 몰아 하인리히 4세는 1080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하고 라벤나 대주교 구이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했다.
1081년 내전에서 완전히 승리를 거둔 하인리히 4세는 로마로 쳐들어가 1084년 함락시켰고, 그레고리오 7세는 로마를 탈출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간다. 그레고리오 7세는 그를 도와준 연합 세력이던 노르만족 로베르 기스카르[2]에 의해 안전을 명목으로 강제로 살레르노에서 지내다가 1년 후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기에 유배지에서 죽는다. (Ho amato la giustizia e ho odiato l'iniquità. perciò muoio in esilio.)"'''는 말을 남기고 선종했다.
마지막만 보자면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하인리히 4세의 대립은 교황의 패배로 끝난 듯 보이지만, 우선 로마 함락 당시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옹립한 클레멘스 3세는 정식 교황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대립교황이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추구했던 대부분의 개혁[3]들은 후임 교황들에 의해 1세기 가량 이어지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어진다. 단순히 '''폐위되어 쫓겨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역사 속의 패자라고 볼 수는 없다'''는 걸 보여준다.
1584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8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됨으로써 성인으로 공경받게 되었다. 축일은 5월 25일.
[1] 훗날 교황청은 서임권 문제로 중국과 갈등을 겪는다. 교황청은 성직자를 임의로 임명하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항의 표시로 대만으로 밀려난 중화민국과 국교를 유지하며,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수교하지 않았다.[2] 보에몽 1세의 아버지로 이탈리아 남부에 자리잡은 노르만족이다. 군사적으로는 뛰어났던 인물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해운에 보급을 전적으로 의존하다보니 점령이 통치로 이어지지 못해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없었다.[3] 성직매매 금지, 성직자 결혼 금지, 평신도(특히 황제)의 성직자 서임 금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