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4세

 


[image]
'''Heinrich IV'''
'''가문'''
잘리어 왕조
'''생몰년도'''
1050년 11월 11일 ~ 1106년 8월 7일 (55세)
'''출생지'''
작센 공국 고슬라어 황궁
'''사망지'''
로트링겐 공국 리에주
재위
기간
'''신성 로마 황제'''
1056년 10월 5일 ~ 1105년 12월 31일[1]
'''독일 국왕''' (로마왕)
1053년 11월 ~ 1105년 12월 31일
'''이탈리아 왕국 국왕'''
1056년 10월 5일 ~ 1105년 12월 31일
'''부르군트 왕국 국왕'''
1056년 10월 5일 ~ 1105년 12월 31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독일어: Heinrich IV. (하인리히 4세)
이탈리아어: Enrico IV (엔리코 4세)
라틴어: Henricus IV (헨리쿠스 4세)
신성 로마 제국 잘리어 왕조의 황제.
카노사의 굴욕(1077)으로 유명하다. 그의 치세는 여러 반란과 교황과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인리히는 비교적 통찰력 있는 안목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시대적 상황과 본인의 너무나 급한 성격 등으로 불운이 겹쳐진 황제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다. 그러나 섭정기에 어머니가 5대 부족 공국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그 결과 황권이 약화되고 권세를 얻은 제후들이 황권에 도전하여 반란을 자주 일으키게 되었다. 게다가 서임권을 놓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시비를 걸어와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희대의 개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 탓에 아들들마저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까지만 보면 무능하고 변덕스러운 암군으로 보이지만, 내치에서만큼은 좋은 모습을 보였으며 백성들에게 자비롭게 대해 인망이 높았다. 즉, 내우외환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하인리히 4세는 민심을 잡기 위해 노력한 정치감각 있는 황제였다. 그는 시민과 기사의 권익을 보호, 신장시켜주어 국민들로부터 신망과 인기가 높았다. 게다가 그는 개인의 양심에 따라 개종의 자유를 허가했다. 이처럼 그는 내치에 있어서 시대를 앞서나간 진보적인 군주였다. 그래서 파문도 당하고 반란이 그치지 않았으나 그 와중에도 국민들은 황제를 지지했을 정도다.

2. 생애


1056년 겨우 6살의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으며 어머니인 아그네스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1062년 이 어린 왕이 쾰른 대주교 안노 2세가 이끄는 독일 귀족들의 음모로 납치되었다. 카이저베르트에서 하인리히는 라인 강에서 보트를 탑승했으나 즉시 밧줄을 풀어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귀족들 중의 한 명에 의해 구출되어 쾰른으로 보내졌다. 아그네스는 수녀원으로 물러났으며 정부는 안노 2세가 운영했다. 안노의 첫 번째 움직임은 대립교황 호노리오 2세에 맞서 교황 알렉산데르 2세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아그네스는 알렉산데르 2세를 처음 인정했으나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안노의 통치는 인기가 없었다. 브레멘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하인리히의 수호성인이 될 때 하인리히 4세의 교육과 훈련을 안노가 감시했으며 안노는 어둠의 집행자라고 불렸다. 하인리히의 교육은 방치된 것처럼 보였으며 그의 고집 센 성격은 어린 시절 동안 환경 아래서 발달되었다. 함부르크의 아달베르트는 곧 하인리히의 가차 없는 친구가 되었다. 결국, 안노가 독일을 비웠을 때 하인리히 4세는 그의 업무 통제권을 얻었고 안노에게는 기독교 자리 하나만 남았다.
1065년 3월에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이 성년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그의 치세 대부분은 제국의 힘을 통합하기 위한 수고로 점철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귀족들의 충성심과 교황의 지원을 유지하기 위한 조심스럽고 균형잡힌 행동이었다. 1066년 그는 15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내각에서 아달베르트를 퇴출했다. 또한 그는 최근에 독일을 침범하고 함부르크를 포위했던 슬라브 이교도들에 대항하는 긴급한 군사적 방법을 체택했다.
1066년 7월에는 사보이 오토 백작의 딸인 베르타와 결혼했다. 베르타와는 이미 1055년에 약혼한 사실이 있었다. 또 1066년에 교황의 요청으로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인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그가 토스카나의 고드프루아에 대한 소식을 받았을 때 하인리히의 군대는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했다. 고드프루아는 마틸다 토스카나 후작 부인의 남편이었으며 벌써 노르만 인들을 공격했다. 그래서 원정은 중단되었다.
1068년 성급한 성격과 부정 때문에 하인리히 4세는 베르타와 이혼하려고 시도했다. 마인츠에서 열린 의회에서 장황한 연설을 했으나 교황의 특사 베드로 다미아노가 거부했다. 하인리히는 특사의 결정에 따랐고 베르타는 다시 궁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반대가 기독교 지배층의 찬성을 얻어 제국 내에서 정권을 타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1060년대 말에 하인리히 4세는 반대를 줄이고 국가의 경계를 확대하려는 그의 결심을 입증했다. 그는 슬라브 이교도들과 동부 작센 변경백에 대항하는 원정을 실시했고 곧 나중에 슈바벤의 루돌프와 카린시아의 베르톨트가 일으킨 반란군을 진압해야 했다.
만년에는 왕후와 장남 콘라트에게 배반을 당하고 이어 차남인 하인리히 5세에게 감금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1] 아들에게 폐위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