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

 



하인리히 4세(가운데 인물)가 클뤼니 수도원장 후고(St. Hugh the Great. 1024-1109)(왼쪽 인물)와 마틸데 여백작(오른쪽 인물)에게 간청하는 장면을 묘사한 12세기의 유명한 삽화이다. 하단에 라틴어로 "Rex rogat abbatem / Mathildim supplicat atque"(국왕이 아빠스에게 부탁하다. 또한 마틸데에게 탄원하다)라고 적혀 있다.
'''역사적 정보'''
'''날짜'''
1077년 1월 25일 - 1077년 1월 28일(그레고리력)
'''장소'''
이탈리아 토스카나 카노사 성
(현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 레조넬에밀리아 카노사)

'''언어별 명칭'''
'''이탈리아어'''
l'umiliazione di Canossa
'''독일어'''
Gang nach Canossa
'''영어'''
Walk to canossa
1. 개요
2. 오해
3. 사건의 시작
4. 파문의 의미
5. 파문 선포, 하인리히의 선택
6. 또 한 번의 파문, 하지만...
7. 하인리히의 복수
8. 그 후
9. 의의
10. 여담
11.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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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77년 1월경 신성 로마 제국황제 하인리히 4세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을 취소해 달라고 관용을 구한 사건.
일반적으로는 중세 종교세력의 전성기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카노사의 굴욕은 '''황제와 봉신들의 알력 싸움'''으로 교황권이 대두된 경우이지, 교황 영향력 자체가 주요 사안이 아니었다.
강력한 행정 세력이면서, 물질적 세속 권력인 영지까지 대규모로 쥐고 있는 주교 영주들은 서유럽의 군주들에게 있어 상당한 문제 거리였는데, 특히, 황권과 봉신 권력간의 싸움이 잦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 황제의 황권 강화 노력의 일환으로 '''주교 서임권'''을 황권에 두려 하였으며, 이러한 황권을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받는 교황청은 교리를 명분으로 내세워 '''봉신 권력'''에 편승하여, 주교 서임권을 교황청에 존속 시키려 하였다.
별다른 기반 세력 없는 한직한 출신이었던 하인리히 4세는 매우 유능한 인물로써, 말 안 듣고 반란이나 주구장창 일으키는 봉신 권력을 약화 시킬 목적으로 주교 서임권을 주장하였는대, 이에 그레고리오 7세가 격렬히 반발하면서, "황권 강화를 싫어하는 황제의 봉신들과, 신성 로마 제국 자체를 견제할 수 있는 노르만 세력 및 이탈리아 독립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인리히 4세와 정면 충돌한 결과가 카노사의 굴욕이다. 이 와중에 퇴물 취급이긴 해도 최후의 거점 바리를 통해 교황청에 무력 시위를 하던 동로마 제국까지 얽힌 상당히 복잡한 상황이 배경에 깔려 있다. 즉, 교황권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되, 실상 주인공은 '''황제와 반란쟁이 봉신들 & 다 X까라 하고 때려부수는 기스카르 feat 알렉시오스''' 인 사건이다.

2. 오해


교황 권력의 위상은 교황청에 군사적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세력의 존재 유무에 크게 달려 있었으며, 해당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교황청은 중세 서유럽의 핵심 행정 세력이자 상당한 세속 세력이기도 한 교회 영지들에 달린 이권 문제 활용, 교리를 명분으로 내세워, 왕권과 봉신 권력 간의 알력 싸움에서 줄타기 해왔다. 교황이 무소불위의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은 실질적으론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 권력의 증대, 최후의 거점 바리 상실로 인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 상실, 그리고 교회와 교황권에 친화적인 강력한 세속 영주들의 지지가 모두 모인 결과였으며, 그로인해 십자군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원정으로 전 서유럽이 해딩하러 가는 것이 가능해젔던 것이다.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가르치는 교과서에서는 카노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를 각각 기독교와 왕권의 '정점'이라고만 설명하고 끝내다보니, 아비뇽 유수를 이 사건의 연장선으로 인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비뇽 유수는 카노사의 굴욕과는 '''아예 무관하다.''' 아비뇽 유수는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의 충돌 조차 아닌, 프랑스 왕국과 교황청의 충돌로,[1] 세속 권력과 교황청이 충돌한 사건이란 점만 같지 본질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 '''중앙 권력 vs. 지방 권력'''이라는 중대한 담론을 철저히 무시하는 황당한 처사이다.
이는 교황권이라는 것이 교회가 서유럽 세계에 가지는 위상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주변 세력으로 부터 교황청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다. 무려 서로마 붕괴 이후 나폴레옹의 공격으로 교황청이 개박살날 때까지 이어온 기나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로마 교구의 줄타기가 핵심이고, 그게 잘 풀리면 자연스럽게 교황청이 세속 권력마저 강력하게 쥐는 것이고, 안 풀리면 사코 디 로마 같은 꼴이 났다.
아비뇽 유수는 기존 세속 권력의 꽃(?)이었던 개별 봉신들의 권력이 대폭 약화됨에 따라, 왕권으로 결집되는 세속 권력의 영향을 교황청이 억누를 수 없게 됨과 함께, 질질 끌면서 매번 실패하는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교회 권위의 후퇴, 각종 세력 변동과, 특히, '''흑사병'''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인한 서유럽 사회 구조의 급변의 결과, '''교황이 적대적인 세속 군주로 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게된 상황'''이 일으킨 사건이다.
물론, 교황의 처신 문제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카노사의 굴욕과 같다고 할 수 있긴 하나, 그 둘을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애초에 위협을 가한 세속 권력이 신성로마제국이 아니라 '''프랑스 왕국'''인대 이 둘을 어떻게 이어진 사건으로 보겠는가?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고, 세속 권력도 쇠락하고, 서유럽 세력 구조가 교황에 적대적으로 변한 결과 교황권이 총체적으로 약화된 것이 교황청의 강제이전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났을 뿐이지, 아비뇽 유수 한참 이전부터, 기존 사회 구조가 격변을 겪으면서 교황권 개념 자체가 십자군 원정과 그 이전의 교황권과 전혀 다른 형태가 된 지 오래였다.
물론, 숙고 집회의 결성과, 그를 통한 필연적인 권력 분립에 따라 왕권의 개념이 단순 철권 통치가 아닌, '''권위를 통한 은은한 압력'''으로 변모한 것을 따지면, 카노사의 굴욕이나 아비뇽 유수 모두 진주인공이 실질적 세속 권력보다는 ''권위''에 특히 의존하는 교황권은 단순히 교황의 처세술 따위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명백한 "권력"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권위를 통한 압력을 이용하는 후대의 세속 군주권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교황권이 정말로 불안정한 입지에 있었음은 무시하기 어렵다.[2]
한편, 교황권은 단순히 아비뇽 유수등으로 그 실추된 위상을 악랄하게 알리고 종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꾸준히 강력한 종교적 권위 행사를 통해 서유럽의 정신적 지주로써 교회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시즌 2를 찍어왔다. 여전히 꾸준히 막대한 위상을 자랑하던 교황청은, 하필이면 '''소빙하기'''로 인해 천하 만민들이 고통받으며 교회에 간절히 답을 구할 때, '''면벌부 장사나 해처먹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로 인한 막대한 반발로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이것이 '''변동하는 서유럽의 이해 관계'''와 결부되어 30년 전쟁으로 이어젔다.[3]
'''세속 권력간의 알력 싸움'''이 사건의 중요한 축이란 점에서 차라리 30년 전쟁이 카노사의 굴욕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 이치에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아비뇽 유수와 연장선 상에 있는 사건은 나폴레옹의 교황청 침공이다.[4]

3. 사건의 시작


먼저 이 사건의 시작에 깊게 관련된 '성직자 임명권'에 대해 알아야하는데, 이 '성직자 임명권'의 역사는 꽤 멀리 올라가야 한다. 성직자 임명권 자체는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왕이 가지고 있던, 꽤나 역사깊은 왕가의 권한 중 하나였다. 다만 이때까지 종교와 왕권이 서로 부딪힐 이유도 적었기에 오랜 기간 크게 영향을 끼치진 않다가 하인리히 1세가 카롤링거 왕족도 프랑크족도 아닌 자신의 출신이라는 취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왕이 쓸 수 있는 온갖 권리를 동원해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고, 서임권 또한 하인리히 1세때 실질적이며 적극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인 오토 1세는 아예 성직자들에게 '''봉토를 하사하고 충성을 맹세받는 것'''으로 기존의 봉건영주에 맞설 '''성직제후'''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는 명분으로는 기독교의 수호자겸 지지자라는 의지표명이었고, 속물적으로는 주교 개개인의 충성에 더불어 그들을 통해 종교세력에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세습제인 봉건영주에 비해 성직제후는 세습이 아니었으므로[5] 그들이 죽으면 다시 나라로 봉지가 반환되었다. 즉 그들에게 '하사'한다기보단 '대여'하는 것에 가까워서 성직제후들이 늘어나봤자 봉건영주들을 늘리는 것에 비해선 왕권에 크게 타격이 되지도 않았다.
그 후 계속 임명권은 황권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1073년 교황이 된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그레고리오 7세는 원칙주의와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동시에 당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가 작센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틈에 성직자 임명권은 교황과 교황청에 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작센 반란 진압에만 집중하던 하인리히 4세는 난데없이 들어온 이 통보에도 신경쓰지 않았으며 2년 뒤 1075년에 반란을 진압한 뒤 교황의 사전 주장을 일방적으로 묵살하고 여전히 밀라노의 주교 선출 권리를 행사했다.
결국 이를 빌미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1076년에 황제를 기독교에서 파문시키게 된다.

4. 파문의 의미


파문이라는 건 단지 황제 한 명을 비종교인으로 만들고 끝인 게 아니라 나라 자체를 교회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가지던 큰 명분 중 하나인 '기독교의 수호자'자리를 박탈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 소리는 대놓고 '''우리(교황청)랑 너네(신성 로마 제국)는 이제 적이다!'''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종의 선전포고이기도 했으므로 '''잘못하면 그대로 교황이 모가지될수도 있었다.'''[6] 실제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은 교황'''따위'''가 침범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서 하인리히 4세의 선대황제이자 친부인 하인리히 3세는 '''자기 재위기간에만 교황을 세 번 갈아치웠다.''' 그 외에도 역대 황제들 중엔 교황을 통해 타국을 위협한다거나 하는 등 교황청과 기독교 세력은 사실상 황권에 종속된 상태였다.
문제는 하인리히 3세의 말기들어서 이런 상황에 반전을 꽤하는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이게 바로 그레고리오 7세가 소속되었던 클뤼니 수도원을 기점으로 발발한 것으로 이들은 속세에 찌들고 종속된 현재의 종교세력을 다시 독립시키고 그 위상을 드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겐 다행이게도 이 당시 하인리히 3세가 어린 아들을 두고 급사해버리고 그 전에는 봉건영주들과의 대립으로 성직제후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황제측도 이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기연도 있었다. 결국 이들은 이 기회를 최대한 살리고자 배수진을 쳤던 것. 물론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독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종교세력 가지고 막 작센을 진압하고 황권을 드높이던 하인리히 4세에게 단독으로 덤비는 건 딱 죽기 좋은 수였겠지만...

5. 파문 선포, 하인리히의 선택


'''황제가 너무 우수한 게 발목을 잡았다.''' 작센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위하는 하인리히 4세는 나라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누리게 되었고 이에 독일 제후들이 그에게 위기감을 느끼면서 막 반발하기 시작한 교황측과 담합하게 된 것. 교황측도 독일제후들을 등에 업고 실질적 무력을 갖추게 되자 황제가 서임했던(즉 교황을 까기 바빴던) 주교들마저 이에 지레 겁먹어버리고 교황과 화해를 시도하는 등 간을 보게 되고 제국 각지에서도 교황의 파문을 구실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인리히 4세는 부황처럼 무력으로 교황청을 찍어 누르지도 못했다. 교황청은 독일 제후들만이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해 한창 이름을 알리던 노르만 족과도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교황측의 반발을 크게 생각하지 않던 하인리히 4세는 적당히 화해하는 시츄에이션을 보여주고 내부반란부터 진압하고자 교황 측에 사신을 보냈다.
사자를 통해 하인리히 4세는 독일 남부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만나자고 요청했으나 교황은 이를 군사적 위협으로 생각해 거부했고 하인리히 4세는 친히 이탈리아로 내려가야 했다. 문제는 하인리히 4세의 남하를 들은 교황은 황제가 선대 황제처럼 종교세력을 무력으로 찍어누를 거라 생각해 겁을 먹어버렸고 이때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마틸데 디 카노사 여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녀가 있던 카노사 성으로 피난가버린다.
결국 만나고자 했던 교황을 만나지 못한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뭐라하긴커녕 그대로 길을 돌려 1077년 1월 말, 카노사 성에 당도했고 '''누추한 옷에 맨발로 카노사 성문 앞에 나서서 교황과의 주선을 요청한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의 모략이라 여겨 거절했으나 그 이후 계속 성문에 무릎 끓고 기다리던 하인리히 4세의 행동에 마음이 흔들린 성직자들과 마틸데 여백작이 변호해주자 마음을 돌려 '''황제가 도착하고 3일 뒤'''에서야 그를 받아들이고 파문을 취소한다.[7]
이때 전후 사정을 보면 그레고리오 7세가 하인리히 4세와 만나는걸 피한 것은 정치적 제스쳐보다는 상술했던 대로 '설마 저래놓고 내가 나가면 지 애비처럼 날 처리하려는 게 아닐까?'하고 의심하는 동시에 황제와 다시 손잡아도 될지 고민하느라 늦어졌던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6. 또 한 번의 파문,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이 취소되자마자 바로 제국으로 복귀했으나 그 몇달 사이에 이미 제국은 환란에 빠졌고, 잔류했던 교황파 제후들이 슈바벤 공작인 루돌프를 대립 국왕으로 추대하고 그를 황제로 옹립시킨다는 명분[8]하에 작센 대반란으로 명칭되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 직후엔 하인리히 4세의 적대세력인 루돌프를 '적의 적은 친구'라는 생각으로 그를 편들었으나 파문을 취소하고 하인리히 4세 세력이 약세인 것 같자 루돌프를 지지했던 것을 그대로 철회하고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한다는 의지표명을 한다. 문제는 3년 뒤 하인리히 4세가 내전을 거의 정리하자 교황이 루돌프를 지지한다고 말을 다시 바꾸고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다.'''라고 선언해버린다. 문제는 서로 격돌중이던 양대 세력에선 물론이요, 상황을 지켜보던 중립세력들까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교황의 태도에 분개하다 못해 대부분이 하인리히 4세에 합류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1081년 바이스 엘스터 강 전투에서 반란군의 왕 루돌프가 패사하고 구심점을 잃은 작센 제후들은 제각기 활동하다가 하인리히 4세에게 각개격파되어 작센 대반란은 종결된다.

7. 하인리히의 복수


내란을 끝낸 뒤 황권을 복구시킨 하인리히 4세는 교황편을 들었던 배신자들을 죄다 숙청하는 동시에 자기 측근들을 키워주는 등 황권을 튼튼하게 굳힌다.
그러던 찰나 같은 해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의 수장 로베르 기스카르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자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외교전의 일환으로 하인리히 4세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며 군사 협정을 요청했다. 노르만족은 교황세력의 주요 군사기반 중 하나였으므로 그들을 소모시킬수만 있다면 동로마 제국을 돕는 것도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기에 하인리히 4세는 기꺼이 이 협정을 받아들인다.
이후 노르만족들을 발칸 반도까지 격퇴시킨 뒤에 곧장 브릭센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이전과 정반대로 본인이 교황을 폐위시키고 그 대신 해임되었던 라벤나의 대주교 귀베르토를 클레멘스 3세로 선포하여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4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로마가 함락되고 그레고리오 7세는 카스텔 산탄젤로(산탄젤로 성)에 유폐되었으며 하인리히 4세는 클레멘스 3세가 집전하는 대관식을 통해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올랐다. 이후 알렉시우스 1세와의 협상을 준수하기 위해 하인리히 4세는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영토를 공격하였으나, 그에 대한 보고와 교황의 다급한 지원 요청을 받은 노르만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급하게 복귀하였기 때문에 하인리히 4세는 로마에서 철수하였고 그레고리오 7세는 구출되었다.

8. 그 후


그러나 교황인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한 로베르 기스카르는 로마로 돌아가면 그대로 하인리히 4세에게 노려질 수 있다는 명목으로 그를 강제로 자신의 근거지인 살레르노로 거처를 옮기게 했고, 결국 그레고리오 7세는 1년 뒤 먼 타지에서 유언[9]을 남기고 선종하게 된다. 교황을 사실상 납치감금했던 로베르 기스카르는 1085년 제국과의 전장으로 복귀했다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황제로서 실권을 회복한 하인리히 4세는 반란으로 황폐화된 제국을 재건하는 한편 귀족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시민과 하급 기사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하여 하급 기사들과 백성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는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카노사의 굴욕사건 때 교황을 받아들였던 여백작 마틸데와 교황 우르반 2세는 은밀히 하인리히 4세의 반대파를 규합한 후 롬바르디아를 다스리고 있던 하인리히 4세의 장남 콘라트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성격이 급하고 변덕스러운 아버지가 자신에게 제위를 물려줄지 확신을 못 하고 있었던 콘라트는 마틸데와 교황의 유혹에 넘어가 1097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콘라트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하인리히 4세는 1098년 콘라트를 차기 황제인 독일왕에서 폐하고, 차남 하인리히 5세를 새로 독일왕위에 올렸으나, 1104년 하인리히 5세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감금하고 폐위시켰다.
하인리히 4세는 곧 탈출하여 여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휘하의 귀족들과 백성들을 결집시켜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하인리히 4세는 기세를 몰아 제위 탈환을 목전에 두었으나 1106년 병으로 몸져 눕게 되었고 몇 주 후 사망하고 말았다. 폐위될 뻔 했던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제위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백성들의 신망을 잃은 하인리히 5세가 행사하는 황권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레고리오 7세의 후임 황제들은 다시 교황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결국 하인리히 5세는 1122년 교황 갈리스토 2세가 내민 보름스 협약에 서명하면서 1075년 시작된 서임권 투쟁에서 사실상 패배를 선언하고 말았다.

훗날 종교개혁이 일어난 시기에 하인리히 4세프로테스탄트 측으로부터 "독일의 수호자이자 난폭하고 억압적인 가톨릭에 맞서 싸운 위대한 황제"로 칭송받았다. 독일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다시 살아나 독일을 구원할 거라는 전설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말이다. 그 후에도 독일 및 북유럽에서는 '굴복하지 않고 맞서 나간다' 는 의지를 표명하거나 '하기 싫어도 억지로 굴복, 복종함' 따위를 말할 때면 이 사건을 언급하게 되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우리의 영혼과 몸, 둘 다 카노사에 가지 않을 것이다" 라 하였고, 아돌프 히틀러도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 이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다만 알렉시오스 1세는 다른 셋과 달리 이후 다 망한 동로마 제국을 다시 재건하고, 콤니노스 왕조를 본격적으로 개창함으로서 로마 제국의 사실상 중시조가 된다. 알렉시오스는 1118년까지 오래오래 살면서 제국을 재건했으며, 아들 요안니스 2세도 그 업적을 이어갔다. 결국 손자 마누일 대제 때에 가서는 마르지 않는 자금력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유럽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강대국 자리에 완전히 복귀하게 된다.

9. 의의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 간의 충돌은 그레고리오 7세의 압도적 패배로 끝났지만, 중앙집권을 싫어하는 봉신들의 본능이 사라진건 아니었기에, 결국 후대까지 분쟁이 이어진 끝에 주교 서임권이 교황 측에 반환되면서 '전투에선 졌지만 전쟁에선 이긴' 상황이 되었다.
정치적 퍼포먼스이긴 했지만 황제를 무릎 꿇이고 추운 밖에서 기다리게 한 것이나, 교황의 파문에 호응하여 반란이 발호한 것 등, 교황세력 자체로는 힘에 부처도, 교황을 지지하는 봉신 세력까지 동원하면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도 교황권 상대로 간단히 일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당대의 영주들이 강성함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론 교황 측의 승리로 카노사의 굴욕과 그와 관련된 이후 사건들이 정리되었고, 동로마 제국이 교황청에 압력을 넣도록 해주던 최후의 거점 바리도 박살나면서 교황청은 위협 없이 떵떵 거리며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이렇게 정점을 찍은 교황권은 십자군 전쟁이라는 희대의 삽질[10]을 일으키게 되고, 이후 십자군 원정 중에 발생한 오만가지 병폐와 형편 없는 원정 성과, 흑사병 등을 겪으며 교황권은 천천히 쇠퇴하게 된다. 이후, 종교개혁의 열풍을 거치면서도 역개혁을 통해 어느 정도는 견뎌 내었으나, 변화하는 유럽 속에서 교황청은 이전과 같은 위상을 유지할 수 없었고, '''사코 디 로마''' 같은 치욕까지 겪게 된다.
하지만 사코 디 로마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교황청이 서유럽에 가지는 권위는 여전히 대단한 것이었으며, 카톨릭의 권위가 세속 권위에 완벽히 굴복하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주교 서임권이고 뭐고 아무 의미가 없어지게 만든 앙시앵 레짐의 폐단[11] 덕할 교황청이 의존할 세속 권력 자체가 증발해 버린 후였다. 물론 이 모든 세속주의 vs. 종교주의 대결에서 교황청에 가장 뼈아픈 치명타를 날린 것은 바로 세속의 문민 사교 조직, 곧 프리메이슨과 같은 단체들이었다.[12]

10. 여담


  • 참고로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3세는 카노사의 마틸다 대백작의 아버지와 원수지간이었다. 그래서 마틸다의 가족들 중 아버지는 암살당하고, 유일한 상속자인 남동생마저 황제의 포로로 끌려가 죽었다. 이때 마틸다와 과부가 된 그녀의 어머니에게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탐내며 우선 첫 표적으로 이탈리아 왕 자리를 노리던 하로렌의 고드프리 3세[13]가 접근하게 된다. 고드프리는 로렌 지방의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고 있어 하인리히 3세와는 앙숙지간이었다. 그는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영지에서 추방되기를 밥 먹듯이 했고[14] 과부가 된 마틸다의 어머니에게 접근해 마틸다 가문의 엄청난 영지와 자신의 영지를 합쳐서 황제에게 대항하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찌질한 황제가 아니었던 하인리히 3세는 폭풍처럼 군대를 휘몰아쳤다. 결국 고드프리는 결혼한 마누라와 양녀를 팽개치고 도주하였다.
하인리히 3세는 적이 많았고 이러한 것을 해소하여야 했지만 하인리히 3세가 죽고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한 그의 황후 아그네스 덕분에 황제가 적잖이 넓혀놓은 직할령이 공작들의 환심을 사고자 뿌려지면서 황제권이 약화되고 제후들이 황제를 업신여기게 되었다. 더욱이 하인리히 3세의 깽판짓으로 이미 불구지천의 대원수가 된 하로렌의 고드프리와 카노사의 마틸다는 이를 갈다 못해 칼을 갈았고 하인리히 4세는 그의 몰락마저도 카노사의 여백작과 함께하게 된다. https://en.m.wikipedia.org/wiki/Matilda_of_Tuscany
  • ○○의 굴욕이라는 표현이 나오면 사실상 이것이 어원이라고 보면 된다.
  • 일본에서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것 중 가장 멋있는 단어로 이 카노사의 굴욕이 뽑히기도 했다(…). 왠지 한번 들으면 이상하게 잊혀지지 않는 임팩트 때문이라고. 참고로 2위는 근소한 차이로 장미전쟁, 3위는 보스턴 차 사건.
  • 후지TV에서는 1990년에서 1991년까지 이 이름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 예능프로그램을 방송하기도 했다. 현대 일본의 소비문화사를 20세기 이전의 역사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인기에 힘입어 방송 종료 후에도 2008년에도 일시 특집이 방송되었다.
  • 1997년 IMF 사태를 당시 이탈리아 신문에서는 이것으로 비유했다.
  • 칼치오폴리 당시 ACF 피오렌티나는 처음에는 유벤투스의 악행에 반대하고 맞섰으나 유벤투스가 도리어 압도적인 자금력과 영향력을 앞세워 그들에게 보복을 가하자 그들에게 굴복하고 칼치오폴리 공범이 되었다. 이에 칼치오폴리 대법원 판결문에서 대놓고 현대판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할 정도.

11.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루이지 피란델로의 희곡 엔리코 4세[15]는 하인리히 4세의 시점에서 카노사의 굴욕을 다룬 작품이다. 해당 희곡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이탈리아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 갓 오브 하이스쿨에서 초반부에 패러디가 나온 적이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그림에서의 자세만 그대로 흉내낸 것이고 의미는 다르다.
  • 판타지 소설이지만 중세 고증이 뛰어난 작품인 늑대와 향신료에서도 짤막하게 언급 된다. 10권 25P에서 크래프트 로렌스가 '교회의 총본산에 앉아 있는 교황이 속세의 황제와 대립하고 있던 시절에는 황제를 눈이 펑펑 내리는 들판에 사흘간 내버려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상대가 상인이라면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라는 독백을 한다.
[1] 오히려 이 시기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령 펀이었다.[2] 이는 근현대의 '''문명화된''' 권력 구조와, 전근대적인 주먹구구식 (Ad Hoc) 권력 구조의 본질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그만큼 '''숙고집회'''의 존재는 중요하다.[3] 고통스러운 시기에 면벌부 장사나 해처먹는 교회에 대한 서유럽 사람들의 배신감이 얼마나 막대했는지, 일련의 사태를 계기로 서유럽의 미술이 완전히 뒤집어 엎어졌을 정도이다. 그 충격은 가히 '''아우구스투스의 신격화'''에 맞먹는 수준이다.[4] 마침, 교황청을 위협한 세속 권력이 둘다 프랑스 (...) [5] 정확히는 주교들은 공식적으로 아이를 낳게하는 성행위가 금지되어 있었으니 봉지를 계승할 자식이 없었다.[6] 유명한 사례로 후대에 교황이 나폴레옹을 파문시켰다가 신변을 위협받기도 했다. 결국에는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까지 건재했지만.[7] 이때 하인리히는 그레고리오 7세 앞에 십자가 모양으로 누워 복종의 의미를 표현했다.[8]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후계자 시절에 로마인들의 왕부터 되라는 의미에서 독일 왕에 먼저 봉해진 다음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고 황제에 오르게 된다.[9]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이렇게 추방당해 죽게 되었다. (Ho amato la giustizia e ho odiato l'iniquità. perciò muoio in esilio.)"[10] 물론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이유는 엄연히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오스가 서유럽 세력을 이용해 먹을 목적으로 끌어들인 것에 있었지만, 결과물은 그 능구렁이 알렉시오스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크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헤딩 레이드였다.[11] 주교직을 고위 귀족 가문이 '''조세 회피 수단'''으로 악용하며 돌려 먹으면서, 교황과 세속 군주의 주교 서임권 분쟁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이 완벽한 탈세 수단은 교황권을 보태줄 세속 세력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상태에 들어서게 만들었다.[12] 이런 이유로 카톨릭은 프리메이슨이 그냥 망한 지금까지도 프리메이슨 및 유사 단체 가입을 자동 파문 사유로 정해두고 있다.[13] https://en.wikipedia.org/wiki/Godfrey_III,_Duke_of_Lower_Lorraine[14] 그의 형제가 교황 스테파노 9세 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_%EC%8A%A4%ED%85%8C%ED%8C%8C%EB%85%B8_9%EC%84%B8[15] 당연히 하인리히 4세의 이탈리아 국왕으로서의 칭호에서 따온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