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후지 히로사키지점 방화 살인사건
武富士弘前支店強盗殺人・放火事件
1. 개요
2001년 일본에서 발생한 강도 미수[1] 및 방화 살인사건.
2. 사건 경위
2001년 5월 8일 오전 10시 50분경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의 타케후지[2] 히로사키지점[3] 택시기사로 일하던 코바야시 미츠히로(小林光弘, 당시 43세)라는 남성이 쳐들어와 창구 안으로 휘발유를 뿌리면서 "돈을 내놔라, 안 그러면 불질러 버리겠다"고 직원들을 협박했다. 그러나 지점장이 요구를 거부하고 경찰에 신고하자, 이에 격분한 코바야시는 정말로 점포 안에 불을 지르고 그대로 도주하고 말았다. 당시 지점 금고에는 1000만 엔이 들어 있었으나, 코바야시는 자신이 일으킨 화재가 생각보다 커지자 놀란 탓인지 금고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밖에 세워둔 초록색 스바루 삼바 차량을 타고 아오모리시 방향으로 도주했다.
범인이 일으킨 화재로 지점 내부가 순식간에 거의 전소되었으며, 인근 건물에서 유리창 청소를 하던 청소업체 직원과 근처 패스트푸드점의 점장 등이 화재 현장을 목격하고 사다리를 가져와서 직원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이들 중 5명은 끝내 탈출하지 못하고 숨졌다. 또한 가까스로 구출된 지점장 포함 4명은 중상을 입었고[4] , 구조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화상을 입었다. 게다가 지점장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주소를 잘못 말하는 바람에 경찰의 출동이 지연되는가 하면, 하필이면 당일이 소집일이었던 탓에 긴급수배에 시간이 걸리는 등 초동 대응이 늦어져 범인의 도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일단 범인의 몽타주와 현장에서 도주한 차량 정보를 통해 코바야시가 용의자로 특정되기는 했으나, 그가 도주중 알리바이 조작을 벌여 수사가 한동안 난항을 빚었다. 게다가 히로사키지점에 설치된 CCTV도 화재로 내부가 전소되면서 함께 불타버리는 바람에 과학수사연구소에 넘길 수 있는 자료도 없었다. 그러던 중 수사본부는 범인이 방화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략 2주 분의 지역신문 뭉치의 타고 남은 잔해를 분석한 결과, 이 신문이 쓰가루 지역에 배포된 것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현장에서 발견된 신문은 쓰가루의 나미오카정[5] 에 배달되었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또한 해당 지역 거주자 중 범인이 사건 현장에서 타고 도주한 것과 같은 차종 및 색상의 차량 소유주는 코바야시가 유일했기 때문에 바로 유력 용의자로 특정되었고, 이에 수사본부는 사건 다음 해인 2002년 3월 3일 코바야시에게 임의동행을 요청하는 한편 자택 압수수색을 벌였다. 그 결과 방송국 앞으로 보낸 범행 성명문의 필압이 남은 편지지와 범행 당시 입었던 작업복이 발견되었다.
결국 코바야시는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 2002년 3월 4일 새벽 1시 30분경 강도살인 및 현주건조물 등 방화 혐의로 체포되었다.
3. 범행 동기
코바야시 미츠히로는 아오모리현 미나미쓰가루 출신으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치바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주유소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하다 1987년 고향 아오모리로 돌아와 택시 회사에 취직하여 택시기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회사 동료들의 증언으로는 사교적이고 근무 태도도 매우 성실했다고 알려졌다.
그가 범행을 일으킨 직접적인 동기는 다름아닌 도박빚이었다. 1998년경 자신이 일하는 택시회사의 노동조합을 통해 10~20만엔 가량을 대출받아 아오모리 경륜장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대출금은 급여에서 공제되었기 때문에 크게 지장이 되지는 않았으나, 문제는 경륜 자금으로 여러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렸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의 빚 총액은 무려 2300만엔까지 불어나 있었다.
그러나 코바야시를 강도 및 방화살인범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따로 있었는데, 1997년 자신이 결혼할 때 중매인이었던 여성 A의 부탁으로 대부업체 4곳에서 총 200만엔을 대출받아 빌려 주었던 것. 당시 코바야시의 아내도 대부업체를 통해 50만엔 정도를 마련해 주었으나, A가 일가족과 함께 행방불명되면서 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었다. 도박빚 독촉에 더해 A에게 빌려준 돈도 돌려받지 못해 코바야시는 갈수록 정신적인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3년이 지난 2000년 4월 신문 기사를 통해 A를 포함한 일가족 4명이 이와테현 미야코시의 한 항구에서 동반자살한 것을 알게 된 그는 완전히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범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코바야시는 사건 현장이었던 히로사키 지점을 이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얼굴이 탄로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범행 대상으로 골랐다고 진술했다. 또한 체포된 후에는 "5명이나 죽을 줄은 몰랐다", "불을 지른 것은 도주하기 위해서였을 뿐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라고도 진술했다.
4. 타케후지의 대응
당시 일부 언론에서 점장이 코바야시의 요구를 거부한 것에 대해 실적 압박으로 인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보도한 탓에 잠시 논란이 있었다. 이를 의식한 듯 타케후지는 사건 발생 후 약 1년간 TV 광고를 자제하는 한편, 전국에서 판촉용으로 나눠주던 티슈 뒷면에 범인의 몽타주를 실어 시민들의 제보를 유도하는 등 범인 검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 논란은 곧 사그러들었다. 또한 사건 이후 히로사키시에 위치한 쵸쇼지(長勝寺)라는 절에 위령비와 공양탑을 세워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사망한 직원 5명의 유가족들은 점포에 제대로 된 비상구가 없고[6] 평소 방범훈련 등의 안전 대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타케후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후에 합의가 성립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히로사키 지점은 그대로 폐점했으며, 지점이 입주했던 건물은 2001년 말 완전히 철거되었다.
5. 재판
아오모리지검은 2002년 3월 24일 코바야시를 강도살인 및 강도살인 미수, 현주건조물 등 방화 혐의로 아오모리 지방법원에 기소했다. 이후 2003년 2월 12일 1심에서 검찰의 구형대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코바야시는 이에 불복하여 재판 직후 센다이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그러나 2004년 2월 19일 센다이고법은 항소를 기각했고, 코바야시는 한국의 대법원 격인 최고재판소에 상고했다.
2007년 3월 27일 최고재판소는 달아날 곳이 없는 실내에 불을 질러 피해자들을 소살(燒殺)하여 매우 끔찍한 결과를 낳은 흉악하고 잔학한 범죄라는 이유로 코바야시의 상고를 기각,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이 확정된 후에도 코바야시는 일관되게 살인 의도가 없었음을 주장하면서 3회에 걸쳐 재심을 청구했으나 이마저도 모두 기각되었고, 결국 2014년 8월 29일 법무성의 사형 집행명령에 따라 미야기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 범인이 강도 목적으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금품에는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강도 미수다.[2] 과거 일본 대부업계 1위를 차지했던 대부업체. 현재는 J트러스트에 인수되었다.[3] 히로사키시 타마치(大字田町)에 있었으며 현재는 공터로 남아 있다. 사건 당시는 3층 건물의 3층에 입주해 있었고 같은 건물 1층과 2층에는 비디오 대여점이 입주해 있었다.[4]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반대 방향에 있는 관리실 쪽으로 피했으나, 불이 번지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긴급피난용 장비도 사용할 틈이 없었다고 한다.[5] 2005년에 아오모리시에 합병되었다.[6] 사망자들의 시신이 모두 구석 쪽 벽에 몰린 상태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