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베른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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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의 작가.'''"그렇지만,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작가이고 싶은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모범으로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문맹, 아고타 크리스토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스스로를 '전형적인 이야기 파괴자'라 일컬을 만큼 사건의 전개를 배체하고 의식의 흐름에 지독하게 천착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2. 생애
1931년, 네덜라드에서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인 헤르타 화브얀은 사생아 출산으로 부모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떠나 네달란드에서 홀로 아이를 낳는다. 아버지는 잘츠부르크 출신 목수였으나 아동청소년국으로부터 친부 판정을 받았음에도 끝내 베른하르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고, 베른하르트는 한 평생 자신의 친부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출산을 마친 헤르타는 돈을 벌기 위해 아기를 탁아소에 맡기고 한 달에 한두 번 시간을 내어 아기를 만나러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외조부모에게 맡겨지고 양육된다. 후일 베른하르트는 교양이 넘치던 외조부모 슬하에서 지낸 유년기를 자신의 삶에서 가장 평화롭게 아름다운 시절로 회상한다.
이후 독일에서 어머니가 결혼하였고 베른하르트라는 성을 의붓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다. 당시 7살이던 베른하르트도 함께 이주하지만 새로운 가정과 학교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며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그는 어머니는 아들의 버릇을 고치고자 그를 나치 감화원으로 보낸다. 이곳에는 베른하르트는 각종 체벌과 감금, 정신적인 학대와 따돌림에 시달렸고 이것은 트라우마로 남아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불신과 조소로 나타난다. 이후 잘츠부르크에 폭격이 떨어지자 외할머니가 그를 데려왔고, 향토문학 작가인 외할아버지로부터 음악과 미술을 공부한다.
전쟁이 끝난 후, 나치가 물러서고 가톨릭으로 바뀐 학교 기숙사로 돌아와 김나지움에 다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학업을 그만둔다. 학교를 나온 그는 슬럼가의 지하 식품점에서 견습 점원으로 일하면서 상인 수업과 함게 음악 교육을 병행한다. 그러나 이때 가난과 감기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걸리고 폐결핵으로 악화되어 1949년부터 2년여간 요양소에서 지낸다. 당시 베른하르트는 매일같이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면서 정신적으로 고통받았고 자살까지 생각한다.
1949년에는 외할아버지가, 이듬해인 1950년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뜨지만 바로 그 해에 영혼의 반려인 헤트비히 스타비아니체크와 만나게 된다. 헤트비히는 37살 연상의 여성으로 베른하르트가 빈의 문화계에 진출하도록 도왔으며, 이후로도 한평생 후견인 역할을 자처한다. 그녀의 도움으로 베른하르트는 그녀를 "내가 살아있는 이유"라고 표현할 만큼 그녀에게 헌신적이었다. 훗날 그녀가 세상을 뜨는 순간까지 곁에서 지켜주고 돌보아 준 사람은 베른하르트 뿐이었다.
이후 빈 예술 대학에 입학해 음악과 연극을 공부하며, 각종 신문과 잡지에 평론과 사설을 기고하는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나 오래 지나지 않아 잘츠부르크 극장에 관해 쓴 기사로 인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기자 생활을 그만둔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음악과 연극 공부를 계속하는데, 이 시기 베른하르트는 오페라 가수를 꿈꾸었으나 만성적인 폐질환으로 인해 꿈을 접는다. 학업을 마치고 1957년, 데뷔작인 시집 '지상과 지옥에서' ''Auf der Erde und in der Hölle''를 출간하며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자전적 경험을 담은 '추위' ''Frost''를 필두로 소설들을 잇달아 발간하며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는다. 1968년에는 오스트리아 국가상을 수상하는데, 이때 수상소감 연설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해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조직"이라 일컫고, 오스트리아인들을 향해선 "빈사 상태에 빠진 인간들"이라 독설을 퍼부으며 국가와 대립각을 세운다. 그럼에도 1970년에는 독어권 문학 최고의 영예라 불리는 게오르크 뷔히너상을 비롯해 그릴파르처 상, 오스트리아 문학대상 등을 잇달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베른하르트의 날선 시선은 그가 속한 국가, 사회, 예술계를 가리지 않았고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켰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나치 독일 합방 50주년과 빈 궁중극장의 100주년 기념 공연작인 '영웅광장'에서 정점을 찍는다. 희곡은 오스트리아가 나치와 병합한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정계와 언론를 뜨겁게 달군다. 정치권에서는 베른하르트의 작품과 공연에 대해 검열과 금지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여론몰이를 하였고, 당시 집권 여당인 자유당의 대표는 수도 빈에서 베른하르트를 몰아내고 그의 작품들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89년 향년 58세로 오스트리아 북부 그문덴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의 시신은 평생의 반려였던 헤트비히 곁에 묻힌다. 베른하르트는 사망 이틀 전 직접 공증을 마친 유언장에서 저작권법에 의거,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자신의 작품을 절대 출판해서는 안되고 연극 무대에 올리는 것도 금지한다.
3. 저서
3.1. 국내 번역
3.1.1. 소설
- 추위 Frost (1963)
- 혼란 Verstörung (1967)
- 단편집 Prosa (1967)
- 슈틸프스의 미들랜드 Midland in Stilfs (1971)[1]
- 원인 Die Ursache (1975)
- 지하실 하나의 탈출 Der Keller (1976)
- 호흡 Der Atem (1978)
- 한 아이 Ein Kind (1982)
-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Wittgensteins Neffe (1982)
- 몰락하는 자 Der Untergeher (1983)
- 벌목꾼들 Holzfällen (1984)
- 옛 거장들 Alte Meister. Komödie (1985)
- 소멸 Auslöschung (1986)
3.1.2. 희곡
- 보리스를 위한 파티 Ein Fest für Boris (1968)
- 습관의 힘 Die Macht der Gewohnheit: Komödie (1974)
- 미네티 Minetti. Ein Portrait des Künstlers als alter Mann (1977)
- 영웅광장 Heldenplatz (1988) [2]
3.2. 미번역
3.2.1. 소설
- Das Kalkwerk (1970)
- Korrektur (1975)
- Ja (1978)
- Die Billigesser (1980)
- Beton (1982)
- In der Höhe (1989)[3]
3.2.2. 시집
- Auf der Erde und in der Hölle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