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모즈루 사건

 



友鶴事件
1. 개요
2. 상세
2.1. 상황 전개


1. 개요


1934년, 제4함대사건과 같이 과도한 개함우월주의에 젖은 일본군 해군이 저지른 사고. 선체 설계이론의 오류와 워싱턴, 런던 해군 군축조약 아래에서 전투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한 과도한 무장, 거기에 악천후 스케줄 강행이라는 삼박자가 겹쳐져 일어난 해양사고. 토모즈루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어 우학사건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2. 상세


일본 해군은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따라 주력함 척수가 제한받았기 때문에, 보조함인 순양함ㆍ구축함ㆍ잠수함 등 보조함을 보강하는 것으로 대응하려고 했다.
하지만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 때문에 보조함까지 제한받자, 일본 해군은 기존 함선의 전력을 강화하고, (조약의 제약대상이 아닌) 기준배수량 600 t 이하 함정들을 구축함만큼 중무장으로 건조하여 조약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치도리급 어뢰정을 만들었는데, 기준배수량 544톤짜리가 12.7 cm 50구경장 함포 2연장, 단장 하나씩에 533 mm 2연장 어뢰발사관 2개(어뢰는 8발 휴대)로 엄청나게 과적했다.[1] 이렇게 함정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무장하느라 함의 복원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해군본부의 건조 책임자 후지모토 기쿠오 소장은 해군의 요구사항을 어떻게든 맞추어서 만들어내었다.

2.1. 상황 전개


이 와중에 1934년 2월 경순양함 타츠타(龍田)를 기함, 치도리급 수뢰정 1번함 치도리(千鳥), 2번함 마나즈루(眞鶴), 3번함 토모즈루(友鶴)로 하는 사세보 경비대 제21수뢰대가 편성되었다. 제21수뢰대는 1934년 3월 12일 오전 1시, 폭풍우를 무릅쓰고 사세보항의 테라섬(寺島)에서 출항해 치도리, 토모즈루의 순서로 오타테섬(大立島) 남쪽 바다로 나아가 기함 타츠타와 연습전투 훈련을 진행했는데, 점점 풍랑이 거세졌다.
오전 3시 25분 훈련을 종료하고 타츠타와 휘하 함대가 사세보로 귀항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풍량이 거센 탓에 함이 점점 더 심하게 동요하고, 3시 58분에는 토모즈루가 무전 불능상태가 되어 서로 발광신호로 연락을 유지하였다. 그로부터 14분 뒤인 4시 12분에 토모즈루에서 발광신호마저 끊어지자, 다른 함선들은 즉시 토모즈루가 실종된 지점으로 돌아가 높은 파도 사이로 탐조등을 비췄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전 7시 45분에 토모즈루가 행방불명되었다고 판단, 제1보를 발령했다. 타츠타는 기상이 악화되고 파도가 높아져 더 이상은 탐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오전 9시 45분에 임시 정박지에 입항했다. 11시 12분 타츠타는 탐색을 재개했으며, 사세보 진수부 소속 함선의 각 수상기들도 제21구축대와 함께 근해를 수색하였다.
제1보가 발령된 지 7시간 20분만인 오후 2시 5분에야 전복된 채로 표류 중인 토모즈루를 발견하였다. 타츠타가 토모즈루를 예항을 준비하는 도중 생존자 2명이 해수면 위로 올라온 모습을 타츠타의 병력들이 목격했지만, 이들은 바로 가라앉아 실종되었다. 구조된 승조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혹시 잘못되면 사세보에 있는 가족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외부인원과 접촉을 시도한 인원으로, 탈출하는 중 시간을 너무 지체하여 체력이 다 떨어져 가라앉았다고 추정되었다. 여하튼 이들 때문에 배 안에 생존자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토모즈루 발견 30분 후 오후 4시 26분, 타츠타가 토모즈루를 예항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예항용 밧줄이 절단되어 교체하는 데 시간을 소비했지만, 이튿날 오전 7시 15분 사세보항에 무사히 입항했다. 입항 후 생존자 위치를 확인하고 함체를 부상시킨 뒤, 생존자 반응이 있던 제4병사실로 잠수부가 공기를 보냈다.
오후 8시에 도크에 입거시켜 배수시킨 후, 배 밑에 직경 50 cm로 구멍을 뚫었다. 구조원은 구멍에 뛰어들어 겹겹히 쌓인 시신들 사이에서 생존자를 구출했다. 구조작업 중에 자력으로 탈출한 인원도 있었다고 한다. 정원 113명 중 생존자는 13명이었으며, 정장 이와세 오쿠이치 소좌 이하 100명이 사망, 실종되었다.
사고원인은 무장이 과도하여 무게중심이 올라간 것, 조함미숙, 탁상에서만 계산한 당시의 미숙한 복원성 기준에 맞춘 것 등이 있다.
이 사건 때문에 당시 건조 중이던 모든 함선을 전면적으로 재설계하고 기존 함선을 개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후지모토 키쿠오 소장은 자신이 설계한 함선들을 재설계하던 중 과로로 뇌졸중을 일으켜서 사망하였다.
여담이지만 토모즈루 사건은 당시 조선에도 호외로 보도될 만큼 큰 사건이었다. 동아일보에서 3월 12일 토모즈루 실종을 호외로 내보낸 이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구조과정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1] 배수량의 24%가 무장무게. 비슷한 시기에 건조된 구축함 하츠하루급 구축함이 1530톤에 12.7 cm 50구경장 함포 연장 2문, 단장 1문, 90식 3연장 61 cm 어뢰발사기 3기(어뢰는 18발 휴대)였다. 하츠하루급과 비교하더라도 무지막지한 과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