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영어 명칭
Washington Naval Treaty[1]
장소
워싱턴 D.C.
시기
1921년 11월 12일 ~ 1922년 2월 6일
1. 개요
2. 배경
3. 국가별 상황
4. 조약 내용
5. 결과
5.1. 생존 함선 목록
5.2. 단계적 퇴역과 건조 일정
5.3. 즉시 퇴역 함선 목록
5.4. 조약형 해군 시기 함선들
5.5. 일본의 반응
5.6. 미국의 반응
5.7. 그 외의 국가들의 반응
6. 기타
7. 관련 문서


1. 개요


1921년 ~ 1922년 두 해에 걸쳐 타결되어 1936년 말까지 예고된 미국, 영국, 일본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5대 열강국가의 해군 군축조약. 끔찍했던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인류가 더이상의 대규모 전쟁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 특히 일본 제국의 해군팽창을 억제하는 데 공헌하였던 이 조약은 군축이행완료 약속 시점인 1936년을 2년을 앞둔 1934년, 일본 제국에 의해서 깨지게 된다.
이 조약의 전문은 미국 정부에서 공개하고 있다. #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로 늘 거론되는 것이 영국독일 제국건함경쟁이다.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와 해군제독 알프레히트 폰 티르피츠가 추진한 건함정책에 맞서, 1 > 2+3 정책이라고 해서 해군력 2위, 3위 국가의 전력합계보다 더 강력한 해군력을 상시적으로 유지한다는 영국의 전통적인 해군전략을 유지하기위한 영국의 대규모 건함, 그리고 이에 자극받은 다른 열강들의 건함 경쟁 합류는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1차대전 이전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이유였다.
결국 이런 과열된 건함경쟁은 전후 승전국들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다. 건함경쟁의 당사자 중 하나인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여기서 밀려났고,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인해 다시 부활할 가능성도 제로에 육박했지만, 전쟁에서 이긴 5대 열강국가들은 여전히 막대한 예산을 퍼부으면서 건함 경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특히 1차대전으로 신흥국으로 떠오른 미국서태평양의 패권국가로 발돋음한 일본을 중심으로 한 건함경쟁은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를 만들어냈다. 실제 미국에서는 1920~1921년 사이에 '''건조스케줄상 미국과 일본 제국의 전함 총량이 균형에 도달하는 1923년에 전쟁이 터진다'''는 예측을 하는 저서들이 횡행하고 있었을 정도다.
게다가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출현한 이후 전함은 날로 거대해졌고, 건조비용도 폭발적으로 상승하였다. 따라서 전함을 포함한 해군력 확충은 각 국의 재정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으며, 참혹한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각국의 국민들도 이런 군비경쟁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이에 따라 각국의 정치가들은 새로운 타개책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3. 국가별 상황



3.1. 미국


미국은 1차대전에서 '''별 피해도 안 입고 돈만 잔뜩 벌었다.''' 참전 자체도 1917년의 일이었으며, 그동안 유럽국가들에 돈 빌려주고 물건을 팔아먹었고 참전 직후에는 대규모로 병력을 파병하여 최종적인 전쟁승리에 기여했다. 때문에 국제외교가에서 미국의 입지와 영향력이 상당해졌다. 하지만 아직 군사적으로 미국은 별것 아닌 상황이었다.
그러는 동안 미 해군은 대대적으로 건함경쟁에 나섰다. 유럽 국가들이 피터지게 싸우는 중이던 1916년에 8척의 주력함을 건조하기로 했으나, 1918년에는 28척으로 늘려서 의회에 예산달라고 징징거렸다. 행정부와 의회가 '''돈 없다!'''며 삭감한 것이 16척.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의 건함 슬로건은 'second to none.' 즉, 2등은 필요없고 무조건 해군 세력 1등이 되겠다는 것이었고, 실제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세계 1위의 전함 세력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미 해군이 이렇게 어마무시한 목표를 세우게 된 배경은 바로 '''영일동맹'''이었다. 미 해군은 대서양 방면에서 영국을, 태평양 방면에서 일본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있었다. 당시 미 해군은 두 해역에서 강대국을 상대로 하는 양면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물론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양면전쟁을 한 적은 있지만 그때는 상대가 스페인 하나뿐이라 양면전쟁이라는 조건은 똑같았고 스페인의 국력도 메롱이었으므로 사실상 논외였다.
미 행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외교적 이상주의로 타개하고자 했다. 이상주의자였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국제연맹 제안으로 시작된 미 행정부의 이상주의는 워런 하딩 행정부에도 이어졌다. 결론은 '우리랑 남들이랑 다 같이 억제하면 세계는 평화로워질 것이다.'였다.

3.2. 영국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목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양면 전쟁에서 물적, 질적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었다. 대영제국으로 전세계에 군림하던 영국은 '2위, 3위, 4위 등등의 해군력을 가진 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영국에게 도전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고민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나름대로 내놓은 해결책은 2위, 3위의 합산보다 더 큰 해군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영일동맹은 최전성기였으나, 카이저마리네는 스캐퍼플로에서 몰락하였으므로, 결국 영국의 건함 목표는 미국과 일본의 함대 총합보다 거대한 해군력을 운영하겠다는 것이 되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각각 4척의 전함과 순양전함을 건조하는 N3/G3 건함 계획이 진행되게 된다.[2]
그러나 아무리 세계최강, 팍스 브리타니카대영제국이라지만 독일 제국과 미칠 듯한 건함경쟁을 벌이고, 5년 동안 세계 대전을 치르며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 전후에는 '''건함경쟁을 벌일 힘이 없었다.''' 이미 팍스 브리타니카는 유지하기 버거워지고 있었으며, 막대한 전비지출로 전후 경쟁은커녕, 기존 주력함들의 유지조차 힘든 실정이었다.[3] 독일에게 베르사유 조약으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기로 되어있었지만, 망신창이가 된 독일은 그럴 여력이 없었으며, 그걸 어떻게든 내려고 아둥바둥하다가 나치와 히틀러가 득세하고, 결국 배상금의 면제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영국이 돈을 쥐어짜낼 구석이라고는 공장을 돌려 식민지에 강매하며 더욱 더 수탈하고 저소득계층을 국가 계획에 동원하는 것 뿐이었으나, 영국이 하원과 인텔리 계층의 반발을 진압하며 의회민주주의를 집어던지고, 독일이나 일본처럼 국가 사회주의+군국주의 테크를 타면서 식민지에 기관총을 긁어대려는 게 아닌 이상은, 앞서 말한 두 방안을 실행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영국은 세계 모든 해역에서 제해권을 유지해야하는 판국이었다.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이상 미국은 대서양을 두고 대립하는 가상적국이었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은 연합국이라고 하기에는 영원한 숙적이자 라이벌이고, 이탈리아 왕국지중해에서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이었으며,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상황에서 일본 제국과의 영일동맹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팍스 브리타니카를 외치며 기존의 1 > 2+3 정책의 유지를 한다는 것은 제국의 해체를 가속화시키든가, 혹은 영국 스스가 자부심을 가지며 쌓아올린 정치적 유산을 모두 내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했다. 따라서 건함 경쟁을 자제하는 것이 영국 내부적으로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미국의 이상주의에 따른 제안에 적극 찬동하게 된다.
그리고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언뜻 보기엔 도가 지나쳐보였던 영국의 악몽은 2차례의 군축 조약을 거친 결과, 독일 + 이탈리아 + 일본의 동남아 해군 세력 >>>> 영국의 총 해군 세력이 되면서 현실이 되버린다. 하지만 2차 대전 직전의 영국이 군축외에 다른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리고 세계 1위의 국가가 결국 같은 진영으로 참전했으니 말이다.

3.3. 일본 제국


러일전쟁러시아 혁명으로 북방세력의 남하 걱정이 사라지면서 영일동맹은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일본은 독자적인 세력강화와 이를 뒷받침하기위한 막강한 해군력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여기에는 러일전쟁 승리, 특히 쓰시마 해전에서의 승리로 힘이 강해진 해군의 강력한 요구와 군부의 팽창주의적 사고가 결합되어 있었으며 해군은 1916년 84함대, 1918년 86함대에 이어 전후인 1920년에 88함대 편성을 요구, 의회의 승인을 받고 예산까지 타냈다.
88함대란 말 그대로 전함 8척[4]순양전함 8척으로 구성된 해군 주력함대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론이 나온 이유는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사토 데츠타로가 러일전쟁 직후 세계해전의 역사와 러일전쟁에서의 해전상황을 분석하여 포격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중심으로 해군전력을 구축하고, 예비전력으로서 노후화된 포격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보유하는 것- 즉, 전함 총 16척과 장갑순양함 16척 -이 이상적이라는 결과를 내면서 일본해군에서 88함대 이론이 전개되었던 것이다.[5] 일본 해군은 보유함 대부분이 건조된지 오래된 노후함이거나 러일전쟁 당시 노획하여 편입시킨 노후함이라는 이유로 신조함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사실 '''그 노후함들은 이미 예비전력이었다.''' 즉, 핑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21년 시점에서 '''국방 예산'''도 아니고 '''국가 예산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해군의 건함사업에 자연스레 반발이 일어났다. 아무리 당대의 건함사업이 중요하다지만 이건 분명히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19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함은 주력화기로 11~12인치 거포 4문을 탑재하고, 장갑순양함은 8~9.4인치 중간포 4문을 주력화기로 사용하는 물건이어서 당시 일본의 재정 상황으로도 88함대는 충분히 보유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일본해군은 32척의 주력전투함은 환상이나 다름없고 16척이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포다수탑재함인 드레드노트와 일반적인 장갑순양함을 넘어서는 덩치 및 전함의 주포와 동등한 화포를 다수 탑재하는 인빈시블급 순양전함이 등장하면서 주력함 건조비용이 '''척당 3배 이상''' 치솟아 버렸고, 일본 내에서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게 된다.
게다가 전함과 순전 8척씩만 찍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그것을 호위할 수 있는 순양함 수십 척과 구축함 백수십 척, 항공정찰과 포격관측을 위한('전함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항공력이 필요하다는 사상이었다) 항공모함 다수, 그들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보조함대 수십 척, 잠수함 백여 척에 지원함대까지 건조해 해군 자체를 일신하는 계획이었으니... 88함대 계획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동인지인 88함대 1934에 따르면 '88함대를 건조하는 것만으로 끝없이 총력전'이라고...[6]

3.4. 프랑스 제3공화국이탈리아 왕국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주력함 건함경쟁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있는 입장이었다. 이는 두 나라 해군전략에 기인하는데, 프랑스는 영국의 제해권에 정면도전하기보다는 통상파괴전과 어뢰정을 중심으로 한 기습, 그리고 현존함대 전략에 치중했다. 이탈리아 역시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았으며 해군의 작전해역이 본국 주변인 지중해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규모 함대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러나 전후의 국제적 환경이 달라지면서 양국 역시 주력함 건함의 필요성을 느꼈는데, 두 나라 모두 승전국임에도 피해는 엄청나게 입고 전비지출도 막대해서 건함경쟁에 나서기에는 국가적 여력에 제약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와서 건함경쟁을 한들, 영국이나 미국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양국은 공통적으로, 괜히 건함경쟁을 해서 격차가 더 벌어지느니 차라리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 미국·영국과의 해군력 격차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4. 조약 내용


여기서는 대략적인 조약 내용을 소개하며, 부가설명은 별도의 표시로 추가한다. '''조약 내에서 ''으로 표기된 것은 미터법 표기에서의 톤(1,000 킬로그램)이 아니고 영국식 표기인 롱 톤(2,240 파운드, 1,016 킬로그램)인 것에 주의'''. 이에 대한 혼동을 막기 위해 조약 내용에서도'' '별도로 '미터법 톤'으로 언급하지 않는 경우 1톤은 2,240 파운드(1,016 킬로그램)으로 규정한다.' ''라는 문장이 있다.
  • 1921년 11월 12일부터 모든 주력함의 신규 건조는 10년 동안 중단한다. 현재 건조 중인 주력함은 모조리 건조중단 및 폐기하고 계획 중인 함선은 폐기한다.
  • 예외 2: 영국은 아래의 조항들을 지키는 선에서 2척에 한하여 주력함 신규 건조가 가능하다. 물론, 신규건조를 할 경우 다른 전함들을 폐기해야한다.
예외 1, 2는 당시 일본이 이미 16인치급 전함을 2척 보유했기에 그 비율을 맞추기 위한 조항이었다. 미국은 사실 일본의 16인치급 전함 중 무츠도 폐기하라고 요구했지만 일본이 강력히 거부했다. 일본이 강력하게 거부할 만도 한 게, 무츠는 회의 개시 직전에 미국기준으로도 의장을 거의 다 마치고 시험항해마저 종료하여 아주 사소한 공사만 마치면 바로 완공판정을 받을 수 있는 상태였고 건조과정만 따져도 완성도가 95% 이상이었다. 따라서 폐함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자 심정이었다.
일본 내의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그 결과 일본은 미래의 적국에게 16인치 주포를 탑재한 전함 4척을 '''추가로 허용'''하는 바람에 전략, 전술상으로 크게 불리해졌다고 비판한다. 당시에야 나가토와 무츠를 '''나라의 자랑'''이라고까지 했다지만 무츠 한척과 영/미의 4척과 바꾸는 게 대전과였을 거라며 무츠의 어이없는 최후와 맞물려 더 비판하고 있다.
반면 반론으로는, 무츠를 사수하지 못했다면, 당시 야마토급 전함의 건조도 정해지지 않았던 시점에서 일본의 주력 전함은 나가토 한 척에 불과하게 되어, 일본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해진다. 따라서 무츠의 건조 진도와는 별도로, 강짜를 부릴 만한 상황이었다.[7]
게다가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에 각각 전함을 배치해야했고, 영, 일, 미는 조약 협상 내내 삼각 대립을 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숫적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즉,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조인 시점만 두고 보면 일본, 미국, 영국[8]이 1:1:0에서 2:3:2로 비율이 바뀌었고, 미국은 대양 두 곳에 전함을 두어야하므로 단순 계산 시 일본:미국&미국:영국의 비율이 1:1 & 0:0에서 2:1.5 & 1.5:2의 비율이 되므로 일본이 이득을 본 셈이다. [9]
그리고 결과론이긴 하나, 이 양보의 결과물로 나온 미국의 콜로라도급 전함과 영국의 넬슨급 전함은 완성도가 그닥 높지 않았다.
다만 그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일본 입장에서 제일 큰 문제점은 이런 과정을 통해 겨우 살려낸 무츠가 제대로 전함 전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모항에서의 탄약고 폭발로 침몰했다는 것이었다. ||
  • 미·영·일·프·이 5개국의 주력함 및 항공모함 보유비율은 5 : 5 : 3 : 1.75 : 1.75[10]로 한다.
협상과정에서 미국은 국무부의 암호부서 "Black Chamber"에서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하여 기밀사항-대미 7할을 관철하되 미국이 강경하게 고집할 경우 6할 유지 및 무츠의 완공함 인정을 받아내라는 내각명령을 알아챘고, 결국 강경대응한 끝에 일본은 대미 6할 수용 및 무츠 보유의 대가로 미영에게 16인치 포격전함의 추가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정보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헌데 이후 취임한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 국무장관이 암호해독을 '''비신사적'''이라면서 암호부서를 폐지하고 부서 책임관이었던 Herbert Yardley 가 1930년대에 일본 측 암호를 해독했다고 자랑하는 저서를 내면서 들통나 버렸다.[11] 이 폭로는 일본해군이 군축조약에 대해서 더이상의 미련을 가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 이 비율에 따라 미국과 영국은 525,000톤, 일본 제국은 315,000톤, 프랑스 제3공화국과 이탈리아 왕국은 175,000톤의 한계 내에서 주력함 보유가 가능했다.
기준배수량 기준이다. 워싱턴 조약은 각 함의 배수량 기준까지 세밀하게 규정했는데 기준배수량은 탄약 적재 및 승조원 탑승이 된 상태이나 연료 등은 싣지않은 상태를 기준배수량으로 규정했다. 이후 이 규정이 기준배수량의 기본이 된다.[12]
  • 역시 같은 비율에 따라 항공모함 보유한도로 미국 및 영국이 135,000톤, 일본 제국이 81,000톤, 프랑스 제3공화국과 이탈리아 왕국 60,000톤이라는 상한선이 생겼다.
  • 주력함의 최대 배수량은 35,000톤을 넘기면 안 되며, 함포구경의 최대치는 16인치(406mm)이다.
예외가 가장 많은 조항이다. 일단 아무리 허용된 배수량 쿼터가 많아도 16인치 함포를 단 전함을 각국의 동의없이 함부로 추가 건조할 수 없으며, 영국의 순양전함 후드처럼 이미 만들어진 상태인데 35,000톤을 넘기는 경우에는 협상의 결과에 따라 존속이 결정되었다.
  • 항공모함의 최대 배수량은 27,000톤이다. 항공모함의 함포구경 최대치는 8인치(203mm)이다.
항공모함이란 간판만 붙인 채 수상기 몇대 정도만 보유하는 전함을 만드는 꼼수를 금지하는 조항이다. 따라서 이런 꼼수를 써도 제대로 된 전함으로 만들 수 없는 10,000톤 미만의 항공모함은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성립하기 전까지는 예외대상이 되었다. 이럴 경우 미국은 7천 톤대의 랭글리를, 일본도 7천 톤대의 호쇼를 조약외 항공모함으로 취급하면서 보다 신형의 항공모함을 허용된 항공모함 총배수량 범위내에서 추가로 만들 수 있었다.
  • 예외: 각국은 각 2척씩, 건조 중이던 주력함을 재활용하여 항공모함으로 개조, 건조할 수 있다. 이럴 경우의 배수량 제한은 33,000톤으로 늘어난다.
도크에서 한참 건조 중이던 함선을 몽땅 박살내고 고철로 처리해야 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국가들에게 일부 함선을 '''재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조항이다. 이 조항에서 배수량 제한이 늘어난 것은 기존의 전함과 순양전함의 배수량이 크기 때문에 이들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하더라도 배수량을 줄이기 힘들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조항을 이용해서 항공모함으로 변신한 전함과 순양전함들은 함령이 오래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어느 정도 활약을 하게 된다. 당장 덩치가 커서 신형 항공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베아른급 항공모함처럼 예외는 있었다.
  • 주력함 및 항공모함을 제외한 '보조함'들의 함포구경 최대치는 8인치(203mm)이며, 최대배수량은 10,000톤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단, 수송선 및 지원함은 이 규정에서 제외한다.
이 조항은 10,000톤급 이상의 배를 만들고 이 배가 구축함이나 경순양함 드립을 치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1900년대까지만 해도 8~9.4인치 포 다수을 탑재하는 상비배수량 15,000톤대의 장갑순양함들은 영국을 중심으로 여러 척이 만들어졌고, 함포의 발달을 고려해보건데 순양함에는 공수주의 균형을 위해서는 그 이상의 배수량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약토의 당시에서는 5.5인치~6인치 포를 주력으로 하는 6,000톤에서 7,500톤대의 경순양함들이 만들어지고있던 시점인 데다 당사자들이 전함과 항공모함에만 신경쓰고 '''순양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를 한 나라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일이 보유한 8인치포 4문 장비 장갑순양함의 상비배수량 상한인 10,000톤을 '보조함' 기준배수량의 상한선으로 적당히 타협하게 되었다. 바로 이렇게 엉성하게 순양함의 배수량 상한을 정해놓는 바람에 조약형 중순양함들은 "양철판 순양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하나같이 극심한 방어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 폐기하는 군함을 타국이 이용할 수 없게 해야한다.
수출하지 말라는 소리다. 이외에도 형식상으로 독립시켜놓은 식민지 종속국에게 서류상으로만 판매했다가 유사시 다시 끌어와서 재사용하는 것을 금지할 목적이기도 하다.
  • 주력함 및 항공모함은 함령이 20년이 넘어야 대체건조가 가능하며, 대체건조 시에도 이를 다른 조인국들에게 통보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대신, 사고로 손실된 함정의 대체건조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전력의 현상유지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조항이며, 대체건조시기를 늦춘 이유는 당장 함선건조예산을 크게 줄이기 위함과 동시에 새로 등장하는 신기술을 함선에 빠르게 적용시켜서 숫자상으로는 균형이 맞으나 실제로는 개함간 능력격차가 커져서 전력균형이 안맞는 문제를 막기 위함이었다.
  • 프랑스 제3공화국 및 이탈리아 왕국은 10년간의 주력함 건조금지 기간 종료 이후, 대체함 건조에 따른 퇴역함을 각 2척씩 훈련목적으로 보유가 가능하다.
이는 주력함 비율이 가장 낮은 양국에 대한 일종의 혜택이다.
  • 미국, 일본 제국, 영국은 조약상 명시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태평양 지역에서 해군기지 및 요새를 현 상황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해당 지역은 다음과 같다.
주력함 비율을 5대 3.5로 하자던 일본 제국의 제안을 미국이 강력 거부하자, 그 대안으로 일본 제국이 요구한 것을 미국과 영국이 수용했다. 영국의 경우, 홍콩이 동경 110도 동쪽에 위치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홍콩 요새화에 실패하여 훗날 홍콩이 손쉽게 함락되는 원인이 되었다. 싱가포르의 경우 동경 110도 서쪽에 위치했기에 요새화를 할 수 있었으나 싱가포르 전투에서 너무 졸전하는 바람에 무의미했다. 미국 역시 이 조항으로 , 웨이크 섬을 손쉽게 내주어야 했으나 대신 예외지역으로 인정받은 하와이에 우주방어급 요새를 건설하였다.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 버틴 드럼 요새의 경우 '''1919년에 완공'''되어 조약의 논의대상이 아니었고, 워싱턴조약 파기 이후 강화조치가 이뤄졌다. 일본 제국도 태평양 도서 지역에 대한 요새화를 하나도 하지 못하여 미군의 반격이 시작된 이후 쭉쭉 밀려 나갔다.
  • 각국은 전시에 타국을 위해 건조 및 보유, 인도준비 중이던 함정을 사용해선 안된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장관이던 이 아자씨칠레오스만 제국의 주문을 받아 건조중이던 전함들을 강탈한 것 때문에 추가된 조항.[13]
  • 이 조약은 1936년 12월 31일까지 유효하며, 탈퇴하는 국가는 2년 전에 사전고지해야 한다.
조약의 실효일을 미리 정해둠으로서 조약이 지속되지 않을 경우 각국이 미리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탈퇴하는 국가가 독자적으로 해군 전력을 증강할 것에 대비해서 조약에 아직 남아있는 국가들이 서로 협의를 통해 조약을 개정하고 전력을 증강할 여유가 있어야 하므로 2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 말고도 수두룩하다. 각 조항마다 부칙도 수두룩 달려있고, 항공모함의 조건부 개장 옵션이라든가, 장착가능 화포의 숫자 및 구경 제한도 더 자세하고, 폐기처분하는 주력함의 폐기방법 및 그 수단 등등….
함의 크기의 기준이 전장이 아닌 배수량(무게)으로 정해진 이유는 파나마 운하의 존재 때문. 미국은 함대의 운용을 위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게끔 함선의 전폭에 제한이 있었고, 커다란 함을 만들기 위해선 전폭을 줄이는 대신 그만큼 전장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전장을 기준으로 함선의 크기를 결정할 경우 미국에게만 불리해지는 규정이었던 것. 미국의 잔머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조약의 취지가 "예산 좀 아낍시다"였기 때문에, 그때만 해도 배수량 = 배값이라 여기에도 부합한다.

5. 결과



5.1. 생존 함선 목록


capital ship으로 서술된 함을 서술하면 아래와 같은데, 조약에서는 구분하지 않으나 전함과 순양전함만 서술되어 있다. 조약문에서는 항공모함은 건조 가능한 조건만 작성되어 있고, 살생부(?)는 없다. 순양함은 물론 그 탄생 배경상, 식민지를 운영하던 열강들이 국가별로 보유한 순양함의 배수량 합계를 스스로 규제할리가 없는 함종이고...
* 미국
* 전함
* 콜로라도급 전함 1척 - 메릴랜드
* 테네시급 전함 2척 - 테네시, 캘리포니아
* 뉴멕시코급 전함 3척 - 뉴멕시코, 미시시피, 아이다호
*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2척 - 펜실베이니아, 애리조나
* 네바다급 전함 2척 - 네바다, 오클라호마
*드레드노트급 전함[14]
* 뉴욕급 전함 2척 - 뉴욕, 텍사스
* 와이오밍급 전함 2척 - 와이오밍, 아칸소
* 플로리다급 전함 2척 - 플로리다, 유타
*드레드노트급 전함 : 조건부[15]
* 델라웨어급 전함 2척 - 델라웨어, 노스 다코다
* 영국
* 전함
* 리벤지급 전함 5척 - 로열 소버린, 로열 오크, 리벤지, 라밀리즈, 리졸루션
*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5척 - 말라야, 밸리언트, 버럼, 퀸 엘리자베스, 워스파이트
* 아이언 듀크급 전함 4척 - 벤보우, 엠퍼러 오브 인디아, 아이언듀크, 말보로
* 순양전함
* 어드미럴급 순양전함 1척 - 후드
* 리나운급 순양전함 2척 - 리나운, 리펄스
* 타이거급 순양전함 1척 - 타이거
* 전함 : 조건부[16]
* 오라이언급 전함 1척 - 썬더러
* 킹 조지 5세급 전함[17] 3척 - 킹 조지 5세, 센츄리온, 에이잭스
* 일본
*전함
* 나가토급 전함 2척 - 무츠, 나가토
* 이세급 전함 2척 - 휴가, 이세
* 후소급 전함 2척 - 후소, 야미시로
*순양전함
* 공고급 순양전함 4척 - 키리시마, 하루나, 히에이, 공고
* 프랑스
*전함
* 브르타뉴급 전함 3척 - 브르타뉴, 로렌, 프로방스
*드레드노트급 전함
* 쿠르베급 전함 4척 - 파리, 프랑스, 장바르, 쿠르베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
* 당통급 전함 3척 - 콩도르세, 디드로, 볼테르[18]
* 이탈리아
* 전함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 2척 - 안드레아 도리아, 카리오 두일리오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3척 - 콘테 디 카보우르, 줄리오 체자레[19], 레오나르도 다 빈치[20]
* 드레드노트급 전함
*단테 알리기에리급 전함 1척 - 단테 알리기에리
*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
*레지나 엘레나급 전함 4척 - 로마, 나폴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레지나 엘레나

5.2. 단계적 퇴역과 건조 일정


1922년에 즉시 퇴역 함선 목록의 배들이 폐기되었다. 이후로는 아래와 같은 식으로 1942년까지 계획되어 있었으나, 일본이 군축 조약 탈퇴를 선언한 1934년 12월까지만 준수되었다. 아래의 표는 미국, 영국, 일본만 정리한 것이다.
표를 보면 알겠지만 다들 대공황에 허덕이던 시기여서, 영, 미, 일 모두 신규 건조 옵션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킹 조지 5세급 항목의 설명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군축 조약에서 합의한 일정에 맞춰 퇴역시키기 위해 노력한 국가는 오로지 영국뿐이었고, 미국은 1930년의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협상이 시작되자, 플로리다만 퇴역시키고 나서 관망세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미국'''
'''영국'''
'''일본'''
연도
건조시작
취역
퇴역
건조시작
취역
퇴역
건조시작
취역
퇴역
1922년

콜로라도[21], 웨스트버지니아[22]
즉시 퇴역대상
넬슨, 로드니

즉시 퇴역대상[23]


즉시 퇴역대상
1923~4년









1925년




넬슨[24], 로드니[25]
킹 조지 5세[26], 에이잭스[27], 센츄리온[28], 썬더러[29]



1926~30년









1931년
C, D


C, D


A


1932년
E, F


E, F


B


1933년
G


G


C


1934년
H, I
C, D
플로리다[30], '''유타'''[31], '''와이오밍'''[32]
H, I
C, D
'''아이언듀크'''[33], 말보로[34], 엠퍼러 오브 인디아[35], 벤보우[36]
D
A
'''공고'''[37]
1935년
J
E, F
'''아칸소'''[38], '''텍사스'''[39], '''뉴욕'''[40]
J
E, F
타이거[41], '''퀸 엘리자베스''', '''워스파이트''', '''버럼'''
E
B
'''히에이'''[42], '''하루나'''
※ 1935년까지 군축조약에 따르지 않은 배는 볼드 처리.

5.3. 즉시 퇴역 함선 목록


'''그 어느 해전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만큼 많은 주력함을 침몰시킨 적이 없다.''' 당시 폐함처분된 함선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미국
*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
* 메인급 전함 2척 - 메인, 미주리
* 버지니아급 전함 5척 - 버지니아, 네브라스카, 조지아, 뉴저지, 로드아일랜드
* 코네티컷급 전함 6척 - 코네티컷, 루이지애나, 버몬트, 캔자스, 미네소타, 뉴햄프셔
* 드레드노트급 전함
* 사우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척 - 사우스 캐롤라이나, 미시간
* 델라웨어급 전함 2척 - 델라웨어, 노스 다코타[43]
* 전함
* 콜로라도급 전함 1척 - 워싱턴
* 사우스다코타급 전함(1920) 6척 - 사우스다코다, 인디애나, 몬타나, 노스캐롤라이나, 아이오와, 메사추세츠
* 순양전함
* 렉싱턴급 순양전함 4척 - 컨스텔레이션, 레인저, 컨스티튜션, 유나이티드스테이츠[44]
* 영국
*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
* 킹 에드워드 7세급 전함 1척 - 커먼웰스
* 로드 넬슨급 전함 1척 - 아가멤논
* 드레드노트급 전함
* 드레드노트급 전함 1척 - '''드레드노트'''[45]
* 벨레로폰급 전함 3척 - 벨레로폰, 슈퍼브, 테메레르
* 세인트 빈센트급 전함 2척 - 세인트 빈센트, 콜링우드[46]
* 넵튠급 전함 1척 - 넵튠
* 콜로서스급 전함 2척 - 콜로서스[47], 허큘리스
* 전함
* 오라이언급 전함 4척 - 오라이언, 모나크, 컨커러, 썬더러[48]
* 킹 조지 5세급 전함[49] 3척 - 킹 조지 5세, 센츄리온, 에이잭스[50]
* 애진코트급 전함 1척 - 애진코트
* 에린급 전함 1척 - 에린
* 순양전함
* 인빈시블급 순양전함 2척 - 인도미터블, 인플렉시블
* 인디패티거블급 순양전함 2척 -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 라이온급 순양전함 2척 - 라이온, 프린세스 로열
* 일본
*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
* 시키시마급 전함 3척 - 아사히, 시키시마[51], 미카사[52]
* 히젠급 전함 1척 - 히젠[53]
* 카토리급 전함 2척 - 카시마, 카토리
* 사쓰마급 전함 2척 - 사쓰마, 아키
* 드레드노트급 전함
* 카와치급 전함 1척 - 셋츠
*전함
* 카가급 전함 1척 - 토사[54]
* 키이급 전함 2척 - 키이, 오와리[55]
*순양전함
* 쓰쿠바급 장갑순양함 1척 - 이코마[56]
* 쿠라마급 장갑순양함 2척 - 이부키, 쿠마라[57]
* 아마기급 순양전함 2척 - 아타고, 타카오[58]
* 프랑스
* 노르망디급 전함 4척 - 노르망디, 랑그도크, 가스코뉴, 플랑드르
* 이탈리아
*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급 전함 3척[59] -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마르칸토니오 콜론나, 프란체스코 모로시니

이 모든 전함 및 순양전함들이 현역이었던 건 아니다. 저중엔 대전 직후 바로 퇴역한 함선, 건조중이던 함선, 예비함이던 함선, 현역인 함선이 다 섞여 있다. 그러나 퇴역이건 예비역이건 얄짤없이 폐기처분해야 하는 강력한 군축조약의 규정상 모두 몇 년 내로 폐함되어서 고철로 처분되었다.
위의 함선들 외에도, 건조 중이던 주력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장 가능하다는 규정을 이용해 항공모함으로 용도변경된 전함도 상당수 있으며, 군축조약 타결 시점에서 아직 건조가 시작되지 않은 프로젝트 함선들도 상당하는 걸 생각하면 워싱턴 군축 조약의 여파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보조함 전력비율에 대한 규정이 없었지만, 이는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통해 완성되었다. 사실상 인류가 만들어 낸 최대규모의 군축 성과이다.
한편 이 시기에 건조된 주력함들을 조약형 전함이라 부르며, 이 시기 해군을 역시 조약해군이라고 부른다. 조약 해군 시기는 주력함 보유의 제한으로 보조함 및 항공모함에 대한 연구 및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거함거포주의가 종말을 맞이하고 항공모함 중심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기반이 된다.

5.4. 조약형 해군 시기 함선들


* 영국
* 이글급 항공모함 - 캐나다급 전함 2번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
* 커레이저스급 항공모함 - 커레이저스급 순양전함 커레이저스, 글로리어스를 항공모함으로 개조
* 퓨리어스급 항공모함 - 퓨리어스급 순양전함 1번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60]
* 넬슨급 전함 - 미-일의 16인치 전함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위해 건조가 허가된 영국의 16인치 전함
* 미국
* 렉싱턴급 항공모함 - 렉싱턴급 순양전함 1번함 렉싱턴을 항공모함으로 개조. 3번함인 새러토가도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
* 콜로라도급 전함 - 메릴랜드를 제외한 웨스트 버지니아, '''콜로라도가 조약에 따른 웨스트 버지니아급 전함'''으로 건조되었다.
* 프랑스
* 됭케르크급 전함 - 조약 이후 최초로 건조
* 리슐리외급 전함 - 조약시기 신규설계함
* 베아른급 항공모함 - 노르망디급 전함 5번함 베아른을 항공모함으로 개조
* 쉬르쿠프급 잠수순양함 - 규정대상이 아닌 보조함으로 만들어본 테스트함
* 일본
* 아마기급 항공모함 - 아마기급 순양전함 1번함 아마기와 2번함 아카기를 항공모함으로 개조.[61]
* 카가급 항공모함 - 카가급 전함 1번함 카가를 항공모함으로 개조
* 류조급 항공모함 - 조약시기 수상기 모함의 설계를 변경해 신규 설계함. 10,000톤급 이하는 모두 보조함 취급하는 조약상 허점을 이용해 9,700톤급으로 만든 경항공모함이다.

5.5. 일본의 반응


일본은 이 군축조약에 매우 불만이었다. 총리대신 하라 타카시가 1921년 조약 체결 직전에 암살된 이후, 일본 정계는 어수선해졌고 민간정부와 의회의 힘은 차츰 약화되어 갔다. 해군은 해군대로 미국 및 영국 대비 '''겨우 60%'''라는 해군전력 수준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며 민간정부를 맹공격했다.
반면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 조약의 진정한 의미는 일본이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영/미를 5로 묶은 것이다.'라면서 오히려 일본에 유리한 조약으로 평가했다.[62] 하버드대 유학과 주미대사관 무관 근무로 미국의 엄청난 공업생산력을 체감하고 있던 야마모토는 본격적인 '건함 경쟁'을 하게되면 일본 해군미해군의 전력격차가 1:10까지 벌어진다고 예측하였으며, '''이는 2차대전 말기에 실제로 증명되었다.''' 또한 조약대로라면 양 대양으로 전력을 나누어야 하는 미국, 전 세계에 전력이 분산된 영국에 비해 일본은 해군력의 집중이 가능했다. 즉, 저 60%로도 여차하면 미영 해군에 대한 우세를 점할 수가 있었다. 이 부분도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공습에서 실증해보였다.
이외에도 일본 국내 한정으로 함선 건조에 관련된 흑역사가 있다. 바로 워싱턴, 런던 해군 군축조약 아래에서 각 함선의 전투력을 어떻게든 높이려고 무리를 한 결과, 각 함선의 무게중심이 상승하고 구조재에 균열이 가거나, 아직 제대로 익히지 않은 최신기술인 전기용접을 대량으로 적용한 것이다. 덕분에 파도가 조금 거칠다고 어뢰정이 뒤집어지는 토모즈루 사건이나, 태풍과 접촉해서 각종 함선이 큰 피해를 보는 제4함대 사건이 발생했고[63], 결국 일본군은 다시 돈을 들여서 함선들을 대규모로 재수리하고 무게중심을 낮추고 속도를 줄이는 등의 고생을 하게 된다.[64]
이 동안 함선들을 군축조약 아래에서 항해성능을 개선하려는 과정에서 용접을 포기하고 리벳접합으로 회귀하는 기술적 퇴보까지 벌어졌으며, 기본적인 항해성능조차 불안한 조약형 군함에 대한 불안을 가지게 된 중립적인 대다수 해군장교들은 군축조약을 부정하는 군령부 위주의 '''함대파'''와 조약의 유지를 주장하는 해군성 위주의 '''조약파'''간 대립에서 함대파에 대거 가담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쓰시마 해전의 영웅으로서 해군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도고 헤이하치로가 함대파의 영수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군령부총장을 지지하는 듯한 언행을 보인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래서 1934년에 조약을 탈퇴한다.
일본은 조약형 경순양함이라는 미명하에 조약의 헛점을 악용해서 주포를 8인치로 바꿀 수 있게 모가미급 경순양함을 건조한 다음 조약 탈퇴 후 바로 8인치 함포로 교체하여 중순양함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원래 8인치 함포는 1만 톤급 미만에서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힘들다. 함포는 운용가능할지는 몰라도 방어력이 종잇장이라 6인치를 잘못 맞아도 함이 위험해진다. 그러므로 이때 일본이 배수량을 속였을 것이라고 대체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실재 일본의 모가미급은 8인치 함포를 단후 기준 배수량이 12,400톤(만재 15,057톤)이 넘어가게 된다.
1930년 런던 군축조약 이후 기준 배수량 1만 톤 이상 중순양함
연도
국가
함급
기준 배수량
만재 배수량
1935년
일본
모가미급 중순양함
12,400 톤
15,057 톤[65]
1939년
독일
아드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14,050 톤[66]
18,200 톤
1943년
미국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14,733 톤
17,273 톤
1948년
미국
디모인급 중순양함
15,653 톤
18,991 톤
조약이 휴짓조각이 된 이후 각국이 건조한 중순양함의 배수량은 사실상 1만 톤 ~ 2만 톤 사이의 8인치 함포를 단 전투함 호칭으로 변질되게 되었다. 원래 중순양함과 경순양함이 모두 1만 톤 미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조약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5.6. 미국의 반응


미국의 해군장교들은 군축조약의 진정한 승리자는 일본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예산을 타낼 핑계가 생겼으므로 같이 건함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태평양 지역에 있던 미국 식민지인 필리핀, , 웨이크, 미드웨이에서 요새 공사를 중지시킬 수 있었고, 어쨌든 일본은 모든 종류의 군함들을 망라한 총배수량이 미국 대비 5할도 안 되는 판(전함만이라면 6.7할)이라 타국과는 달리 대규모의 함선건조가 조약 내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와는 별도로, 미국은 협정 외적인 거대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다. 미국은 '영일동맹이 유지된다면 조약에서 결정된 건함 비율이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다'는 점을 들어, 조약에 조인하는 조건으로 영국 측에게 영일동맹의 종료를 요구하였다. 영국 측 역시 군축이 매우 절실하였고, 영일동맹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효용성이 떨어지는 반면, 군축으로 평화 기조가 유지된다면 동맹 자체도 그다지 쓸모가 없는 것이 되므로, 미국의 요구를 순순히 수용한다. 이 밀약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일환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으나, 표면상으로는 워싱턴 해군 회의 기간 동안에 공개적으로 진행된 회의[67]였기 때문에 일본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결과 일본이 무츠를 지키기 위해서 계산했던 모든 것들이 이 한 방으로 싸그리 어그러지게 되고, 일본만이 조약의 유일한 패배자로 남게 된다. 더 길게 보자면, 2차 대전의 양대 세력인 영미 연합군과 추축군의 구도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5.7. 그 외의 국가들의 반응


영국은 이 군축조약으로 엄청난 해군력 유지부담을 한번에 훌훌 털어버리게 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무리한 건함경쟁을 할 필요가 사라지게 되면서 세계는 전쟁없는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소련은 이를 대항해서 '극동피압박인민대회'를 개최하여 워싱턴 회의 비난을 하였다.

6. 기타


워런 하딩 미국 대통령이 개최한 워싱턴 해군 회의에서는 해군 군축문제외에도 중국문제와 영일동맹 문제도 같이 다루어졌다.
중국문제를 다룬 회의에서는 일본이 중국정부에게 강요한 21개조 요구를 취소시키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인정된 산동성의 독일 이권들을 중국에게 넘기도록 하는 한편, 공평한 문호개방을 내세워서 중국의 현유영토의 유지와 균등한 중국 내 상업기회 보장 등을 요구하는 9개국 조약[68]을 성립시켰다. 중국은 스자오지를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여 산동반도 문제, 조계지 문제, 관세자주권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때 중화민국 대표로 참석한 구웨이쥔은 불리한 정세 아래에서도 중국의 국익을 되찾아왔다면서 "민국외교영웅" 등으로 불리며, 군벌내전에서 총리 후보로 단골 추대되는 등 여러 정파의 추대를 받았다. 훗날 중화민국 외교부장에 임명되는 뤄원간은 이때 중국 대표단의 고문으로 참석했다.
영일동맹은 이미 제정 러시아독일 제국이 대전이 끝나면서 사라지면서 그 효력이 의심받게 되었지만, 미국과 밀착관계에 있던 신대륙오세아니아영연방 국가-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영일동맹이 지속될 경우 미일간의 전쟁에서 자치령의 이익보호를 위해 종주국인 영국과 전쟁(!)을 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협박(?) 및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독주를 영국이 묵인할지도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 등이 겹치게 되었다. 실제로 이 당시 미국은 서류상의 계획이긴 하지만 '레드 계획'이라 하여 캐나다 등지에서 영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작전 시나리오를 구상하기도 했다. 따라서 워싱턴 조약에선 일본의 폭주를 견제하는 목적으로 영일동맹을 해소하고 이를 대체하는 조약으로서 중국 지역에 다대한 이권을 가진 미국/영국/일본/프랑스 4개국이 이권보장을 추구한다는 4개국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즉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모든 종류의 회의에서 일본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추구를 제한당하게 된 셈이다.''' 사실,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팽창양상은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인 미국과 서유럽 제국들조차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것'''이어서 일본의 팽창욕을 제한하려는 의식이 서양국가들에게 있었다.[69] 물론 이 사건이 오히려 일본의 팽창욕을 자극해서 20년 뒤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고 말긴 하지만..
그리고 받아먹기만한 감은 있지만 워런 하딩 최고의 업적으로 꼽힌다.
한편 이 회의에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참석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제국주의 열강간의 과도한 군비경쟁 해소 및 이권조정이 회의의 목적이였던만큼 독립 등의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마침 사회주의 운동이 커지면서 좌익과 우익 분화를 촉진하였고, 더 나아가 친일파로 변절하는데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행정학자인 파킨슨은 1914년부터 1928년까지 영국 해군의 함선 수와 장병 수가 모두 감소했음에도 행정인력은 오히려 증가했음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공무원 수와 업무량과 관계 없이 증가한다는 파킨슨의 법칙을 제시한다. 파킨슨의 법칙은 관료제에 대한 유명한 설명 중 하나이지만, 하필 예시로 든 영국 해군이 이 군축조약의 거대한 영향 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보편적으로 확대 가능한 사례가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

7. 관련 문서


[1] Washington Naval Conference는 Washington Naval Treaty를 조인하고, 중국 문제와 영일동맹 문제를 논의한 전체 회합을 가리킨다.[2] 스펙상으로는 전함은 아직 계획조차 없던 야마토 급과 비등했고, 순양 전함은 후드 이상이었다. 이를 건조하기 위해 필요한 함포는 실제로도 시제품이 제작된다.[3] 전함 수병들에게 줄 봉급이 없어서 수병들이 파업을 했다. 여기서 유혈 진압이 있었다면 러시아 혁명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갔겠지만, 수병들은 계급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파업하려 했고, 이를 받아들인 일선 장교들이 중재하면서 주동자 수병 몇몇이 퇴역하는 선에서 가라앉게 된다.[4] 근데 나가토키이의 방어력은 거의 고자 수준이다. 항목 참조[5] 현대 일본에서 88함대는 구축함 8척과 이들 함정이 운용하는 헬리콥터 8기를 의미한다.[6] 작중에서는 88함대를 건설하기 위해 중일전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역사를 개변했다.[7] 아래 서술될 미국의 도청 행위는 이 점을 알아낸 뒤 '미국의 2척 추가 건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일본 협상단은 본국에 가져가야하는 최저한의 성과도 얻지 못할 거라고' 윽박지른 것이다.[8] 이 나열 순서는 지도에서 연상하기 편하도록 구성한 것임.[9] 반대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이 광대하므로 시간을 벌 수 있고, 자국의 전함을 파나마를 통해 오가도록 세팅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전자의 가정이 일본에게 박살나고 만다.[10] 조약 초기의 비율은 본문과 같으나 일본이 전함 무츠의 보유를 인정받음으로써 미·영/일본의 한계톤수가 500,000톤/300,000톤에서 525,000톤/315,000톤이 되어 최종적인 비율은 5 : 5 : 3 : 1.67 : 1.67로 조정되었다.[11] 이때 나온 유명한 말이 "신사는 남의 편지를 열어보지 않는다(gentlemen don't read each other's mail)" [12] 이 관행은 현재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위키백과 등에 등재되는 군함 배수량은 대부분 만재배수량이지만, 정부에서 사용하는 배수량은 기준배수량인 경우가 많다. 정당한 이유가 있는데, 임무에 따라 만재배수량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13] 이 사건으로 오스만 제국의 대영 감정이 매우 악화되었고, 이를 노린 독일 제국의 개입으로 결국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을 필두로 한 동맹국에 붙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14] 뉴욕, 텍사스, 아칸소는 2차 대전에도 참전하였다.[15] 콜로라도급 전함 웨스트버지니아와 콜로라도를 건조하려면 폐기하도록 되어 있다. 참고로, 조인 문서에는 이 2척의 콜로라도급 전함이 웨스트버지니아급으로 간주된다.[16] 2척의 전함을 건조하려면 폐기하도록 되어 있다.[17] 제2차 세계 대전당시 킹 조지5세와는 다른 함급[18] 나머지는 이미 전함 구실을 못하는 배들이어서, 폐기 목록에도 올라가지 못했다.[19] 풀네임인 카이오 줄리오 체자레가 아니라 이렇게 적혀있다.[20] 조약 체결 당시 폭발사고로 큰 손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예산 부족으로 수리가 중단되어 1923년 해체되었다.[21] 1923년에 취역함[22] 1923년에 취역함[23] 썬더러와 킹조지 5세급 제외[24] 1927년에 취역함[25] 1927년에 취역함[26] 1926년에 스크랩됨[27] 1926년에 스크랩됨[28] 표적함이 되었다가 1941년에 가짜 주포를 달고 재취역, 1944년에 오마하 해변에서 둑으로 쓰기 위해 자침.[29] 1926년에 스크랩됨[30] 1931년에 퇴역[31] 표적함으로 전환, 1946년에 퇴역[32] 훈련함으로 전환, 1947년에 퇴역[33] 훈련함으로 전환, 1946년에 스크랩됨[34] 1932년에 스크랩됨[35] 1932년에 스크랩됨[36] 1931년에 스크랩됨[37] 이 함 대신 히에이가 훈련함으로 전환[38] 1946년에 퇴역[39] 1948년에 퇴역[40] 1946년에 퇴역[41] 1932년에 스크랩됨[42] 훈련함으로 전환되었으나 조약 탈퇴 후 개장을 받고 현역 복귀[43] 콜로라도급 2척이 추가로 취역시 폐기 조건[44] 렉싱턴과 사라토가는 이미 건조를 시작했기 때문에, 렉싱턴급 항공모함으로 바뀌게 된다.[45] 건함경쟁을 일으키고 결국 이 군축조약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만든 그 드레드노트급의 네임쉽이다. 매우 역사적인 함선인 만큼 보존할 가치가 있었지만, 군축조약의 대상에 포함되었다.[46] 콜링우드는 비전투함으로 사용 가능한 옵션이 있었다.[47] 콜로서스는 비전투함으로 사용 가능한 옵션이 있었다.[48] 썬더러는 넬슨급 건조 시작시 폐기 조건[49] 제2차 세계 대전당시 킹 조지5세와는 다른 함급[50] 넬슨급 취역시 폐기 조건[51] 아사히와 시키시마는 비전투함으로 바꾸는 옵션을 행사했다.[52] 쓰시마 해전 그 자체를 상징하는 배이기에 일본에서 이것만은 살려달라고 한 결과 콘크리트로 부어서 육지에 고정시켜버렸다.[53] 러일전쟁때 황해에서 일본 해군에 격침된뒤 인양된 레트비잔이다.[54] 카가는 항공모함으로 변경[55] 이 둘은 실제로 건조에 착수되진 않았고, 함명까지 부여받은 상태에서 건조를 목전에 둔 채로 계획이 취소되었다.[56] 순양전함으로 재분류되었다.[57] 순양전함으로 재분류되었다.[58] 아마기는 항공모함으로 개장 도중 지진에 의해 대파되어 폐기. 아카기는 항공모함으로 변경.[59] 네임쉽인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는 항공모함으로 개장이 결정되면서 조약 효력 발생 시점에는 폐기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이후 예산 부족으로 계획이 중단되면서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도 26년경 해체되었다.[60] 퓨리어스를 커레이저스급의 개량형으로 보는 관점이 주이기 때문에 커레이저스급 항공모함 3번함으로 분류하기도 한다.[61] 상술했듯 아마기는 건조 도중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용골 파손으로 폐기[62] 단, 그의 이 부분 발언은 맡은 직책이 다를 때 달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항목 참조.[63] 다만 저 경우는 함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저런 상황에서 훈련을 강행한 지휘부의 잘못이 크다. 저런 상황은 일본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함정이라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할만큼 악천후였다. 가령 미국도 태풍 때문에 호되게 고생한적이 있다. 코브라(태풍) 문서를 참고.[64] 하지만 일본은 이 대규모 개장으로 태평양 전쟁 동안 태풍으로 인한 함선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제7차 다호 작전 중 태풍을 만난 구축함 타케는 태풍을 조우했지만 무사히 귀환했다.[65] http://ru.wikipedia.org/wiki/Микума_(1935)[66] http://ja.wikipedia.org/wiki/%E3%82%A2%E3%83%89%E3%83%9F%E3%83%A9%E3%83%AB%E3%83%BB%E3%83%92%E3%83%83%E3%83%91%E3%83%BC%E7%B4%9A%E9%87%8D%E5%B7%A1%E6%B4%8B%E8%89%A6[67] 기타 단락에서 설명하고 있다.[68] 9국 공약, 9국 조약으로도 불린다.[69]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열강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할 당시에도 일본이 열강들 중 가장 많은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병하여 여차하면 시베리아를 병탄하려고 시도하였고 또 가장 늦게 철군하였다. 서구에서 전간기라 부르는 시기 일본은 내내 전쟁하며 점령지를 늘리고 있었으니 이해의 범위를 넘어설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