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함대사건
1. 개요
토모즈루 사건처럼 일본해군이 '조약의 한계까지 함의 성능을 추구한다'는 과도한 개함우월주의로 벌어진 해양사고.
2. 사고원인
일본 해군은 1934년에 일어난 수뢰정 토모즈루의 전복사건을 계기로 보유 함정의 복원성 개선공사에 착수해 이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발효되면서 국제정세가 악화되자 해군력의 확충에 매우 분주했다.
제4함대는 4년에 한 번 있는 대연습에서 가상적군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35년 9월 26일에 해군연습을 위해서 임시로 편성된 제4함대의 사령관 마쓰시타 하지메(松下元) 중장은 이와테 현(岩手県) 동쪽 해협 250해리에서 9월 24일부터 25일에 걸쳐 보급부대, 수뢰전대, 주력부대, 잠수전대를 하코다테 항에서 출발시켰다.
25일 당시 제7호 태풍은 이미 일본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훈련에는 큰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런데 25일 22시에 새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풍이 일본을 지나가게 되었다. 다만 그래도 기후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공식적인 기상예보였다.
그리고, 9월 26일 오전 6시의 기상예보로 '''25일의 기상예보가 틀렸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원래 예측과 달리 정오 무렵에는 함대가 태풍의 영향을 받게 될 상황이 된 것. 이 때문에 함대를 회항시키려 했지만, 이미 해상의 상황은 악화되어 있던 상태라 무리해서 항해하다가는 잘못하면 함선끼리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고, 이미 약 20m/s의 속도로 진행중인데다 점점 더 성장하는 태풍의 영향을 벗어나기 힘들겠다고 판단한 해군은 결국 훈련을 계속했다.
14시 30분경, '''제4함대는 약 40m/s의 속력으로 돌진하는 태풍 속으로 진입하였고, 이 때 파도 높이는 약 14m에서 18m 사이였다.''' 이 때문에 류죠, 호쇼의 함교 유리창이 파손되었으며, 15m의 파도를 맞은 하츠유키와 유우기리는 함체가 절단되어 함수가 뜯겨나갔다.
3. 피해
참가함 41척 중 반 수에 해당하는 19척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최신예 후부키(吹雪)형 구축함 2척은 파랑에 의해 함교 부근에서 앞 함수부분이 절단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절단된 함수에는 수병들이 남아있었지만 구조가 곤란하고 그 부분의 통신실에 있던 암호표가 표류해서 다른 나라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포격으로 처분'''했다고 한다.
당시의 함대 편성은.
피해결과는 다음과 같다.
- 후부키급 구축함 하츠유키, 유기리는 함교 부근에서 함체가 절단.
- 무츠키급 구축함 무츠키, 키쿠즈키, 미카즈키, 카미카제급 아사나기는 함교 대파.
- 항공모함 호쇼는 전방 비행갑판 대파.
- 항공모함 류죠는 함교 파손.
- 중순양함 묘코는 선체 중앙부 리벳이 뜯겨져나감.
- 경순양함 모가미는 함수부 외판이 떨어져나가고 균열 발생.
- 잠수모함 타이게이는 선체중앙 및 함교 전방 상부외판에 대형 균열이 발생.
- 기타 다수의 구축함이 손상되고 하츠유키의 절단된 함수 부분에 있던 수병들을 포함, 사망 및 실종자 54명
4. 원인
- 당시 세계적으로 상정된 '악천후의 파도'는 파고 / 파장의 비율이 1/20 파도이었지만, 제4함대가 마주친 파도는 각 함의 관측에 따르면 1/10에 도달하는 등 당시 함체 설계 강도를 훨씬 넘는 폭풍이었다.
- 군축 조약에 의해 보유 함정 제한을 받은 일본 해군은 규정의 배수량 내에서 전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군함에 과무장을 장비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당연하게도 선체 강도의 하락이었다.
- 이에 앞서 같은 해 7월 함체 이상 보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훈련을 강행했다.
5. 결과
그 전에 일어난 토모즈루 사건과 함께 군축조약 아래에서 건조된 전 함정을 검사한 후 거의 모든 함선이 개조를 받게 되었다. 주요 대책은 선체 강도 확보를 위한 보강 공사 및 경량화를 위한 무장의 일부 철거했고 또한 사건 이후에는 설계 단계부터 1/10 이상의 파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선체 설계를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