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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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동아일보사'''
株式會社 東亞日報社
DONG-A 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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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689><colcolor=#fff> '''국가'''

'''설립'''
1920년 4월 1일
'''창간'''
'''창업주'''
인촌 김성수
'''본사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 (서린동)
'''대표자'''
김재호, 임채청
'''임원진'''
'''대표이사 사장''' 김재호
'''발행·편집·인쇄인 · 대표이사 부사장''' 임채청
'''부사장''' 이희준
'''출판편집인 · 상무''' 김정훈
'''업종명'''
신문발행업, 정기간행물출판업
'''상장여부'''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중견기업
'''임직원'''
659명 (2020년 4월)
'''매출액'''
2,945억 7,056만 원 (2019년 연간)
'''영업이익'''
45억 9,464만 원 (2019년 연간)
'''순이익'''
22억 4,975만 원 (2019년 연간)
'''최대주주'''
재단법인 인촌기념회 (지분 24.14%)
'''사이트'''
<colbgcolor=#008689><colcolor=#fff> '''홈'''

'''SNS'''

1. 개요
2. 사시
3. 사가
3.1. 옛 버전
3.2. 새 버전
4. 사옥
5. 지배 구조
6. 상징
7. 역사
7.1. 1920년 창간 ~ 1936년
7.2. 1937년 ~ 1940년
7.3. 1945년 광복 이후
8. 성향
10. 기획·특집기사
11. 자매지 및 정기간행물
12. 주관 대회
12.1. 현존
12.2. 폐지
13. 계열사
14. 산하기관
15. 공익재단
16. 제휴 신문사
17. 여담
18. 관련 인물
19. 관련 문서
20. 관련 문헌
21. 역대 임원
21.1. 상임고문
21.2. 명예회장
21.3. 회장
21.4. 부회장
21.5. 사장
21.6. 부사장
22. 역대 법정등록인
22.1. 발행인
22.2. 편집인
22.3. 인쇄인
22.4. 출판편집인
23. 역대 주요 간부
23.1. 편집감독
23.2. 주간
23.3. 주필
23.4. 편집/논설상임고문
23.5. 논설고문
23.6. 논설주간
23.7. 논설위원실장
23.8. 수석논설위원
23.9. 수석해설위원
23.10. 편집고문
23.11. 편집국장
23.12. 출판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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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상을 보는 맑은 창, 신뢰받는 신문 東亞日報'''

동아일보 비전

대한민국의 조간 종합 일간 신문.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창간호. 전라도 지역의 부호였던 김성수[1]가 설립하였다. 그래서인지 1980,90년대에는 "전라도 사람은 껌은 해태 껌을 씹고 신문은 동아일보를 본다"는 말도 있었다. "동아일보"라는 명칭은 창간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유근이 지었다.
현재 발행되고 있는 중앙 일간지 중에서는 서울신문[2], 조선일보[3]에 이어 세 번째로 역사가 오래 된 일간지다. 처음부터 민족지로 창간되었고 조선인들을 잘 대변해주어서였는지 1928년 총독부 경무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동아일보의 발행부수는 4만868부로 매일신보(2만3946부), 조선일보(1만8320부)보다 많았다.
사실 1980년대 이후 전두환 정부와 결탁한 조선일보가 급속한 성장세로 구독 부수 1위를 기록하며 신문 업계의 원톱이 되기 이전까지는 한국일보와 더불어[4] 구독 부수나 매체 영향력 면에 있어서 쌍두마차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강한 신문이었고 사실상 신문 업계에서 '''2위 없는 압도적 1위'''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2020년 현재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함께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 우파 성향의 3대 신문사로 꼽힌다. 그렇지만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종이신문 산업 자체가 하락세를 타면서 동아일보도 유료부수나 신문의 열독률이 급격하게 감소하였고[5] 전반적으로 과거에 비해 매체의 존재감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일례로 2019년 기준 신문 열독률이 2.6% 수준에 불과하다.[6] 물론 이것은 종이신문의 얘기이기 때문에 온라인 상에서의 독자층도 미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노조는 미가맹이다. 원래는 언노련 소속이었지만, 2000년 민주노총 산하의 산별노조화면서 탈퇴했다.

2. 사시


'''▲ 동아일보 창간호 1면에 실린 동아일보의 사시'''

1. 본보는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함

2. 본보는 '''민주주의'''를 지지함

3. 본보는 '''문화주의'''를 제창함

'''동아일보 사시'''

주지를 밝히노라

'''主旨를 宣明하노라'''

'''(1) 조선 민족의 표현 기관을 자임한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소수 특권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단일한 전체로서의 2000만 민중의 기관으로 자임하니, 그 의사와 이상과 의도와 운동을 여실히 표현하며 보도하고자 한다.

'''(2)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이는 국체(國體)니 정체(政體)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다. 곧 인류 생활의 일대 원리요 정신이니 강력을 배척하고 인격의 고유한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국내 정치에 적용하면 자유주의며, 국제정치에 적용하면 연맹주의요, 사회생활에 적용하면 평등주의요, 경제조직에 적용하면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라.

특히 동아시아에 있어서는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 가운데 친목과 단결을 의미하며, 세계 전체에 있어서는 정의와 인도(人道)를 승인한 가운데 평화와 연결(聯結)을 의미한다. (중략)

'''(3) 문화주의를 제창한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 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심원함과 오묘함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세계 문명에 공헌하게 하며 조선 강산으로 하여금 문화의 낙원이 되게 함을 높이 제창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조선 민족의 사명이며 생존의 가치라고 사유한 까닭이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사 중 일부[7]


3. 사가



3.1. 옛 버전


작사는 춘원 이광수, 작곡은 김영환이 맡았으며, 1926년부터 제정되어 1985년까지 사용했다.

'''1절'''

삼천만 가슴속에 졸던 자유혼

깨어라 소리치어 자유의 소리

나날이 새힘자라 새는 날마다

영원히 외치도다 자유의 소리

'''2절'''

이 붓대 보았는가 정의의 붓대

의 아닌 것 보고는 못 참는 붓대

차라리 의에 싸워 꺾일지언정

곧고 곧은 그 절개 꺾지 못하네

'''3절'''

횃불은 들렸도다 진리의 횃불

삼천만 우리 강산 두루 비치러

옛 역사 새 정신 타는 광명은

천만대 내리 전할 진리의 횃불

'''4절'''

원컨대 복이 되어 사랑의 꾸리[8]

끝없는 실을 끌고 동포의 가슴

낱낱이 들어나어 삼천만 혼을

짜리라 새 조선의 빛난 깃발로

'''후렴'''

동아일보 동아의 종소리 자유종 소리

삼천만 자유혼의 외치는 소리

만국에 울려라 만세에 울려라


3.2. 새 버전


1985년 창간 65주년을 맞이해 제정되었으며, 작사는 강인섭, 작곡은 김성태, 편곡은 장일남이 맡았다.

'''1절'''

동녘의 빛이어라 민족의 길 밝힌 등불

삼일정신 받들어 새벽을 헤쳐오다

밝히리라 온누리에 자유의 횃불

누구도 영원한 그 앞을 막지 못하리

'''2절'''

나라가 없을 때도 깨어있던 종소리

진리와 함께 가는 보람찬 길이로다

외치리라 온누리에 민주의 소리

누구도 의로운 그 붓은 꺾지 못하리

'''3절'''

아― 세계로 뻗어가는 겨레의 기상

시대에 앞장서서 문화의 발을 간다

알리리라 진실이 무엇인가를

천 년 뒤 만나도 살아있는 글자기를

'''후렴'''

동아일보 겨레의 얼 나날이 새로와라

나라 위한 바른 말 역사에 전하리라


4.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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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동아일보 구 사옥'''[9]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52 (세종로)
'''세종로 동아일보 동아미디어센터'''[10]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 (서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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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로 동아일보 사옥'''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29 (충정로3가)
'''상암동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11]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75 (상암동)
건축적으로는 2000년 완공된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빌딩 옆에 1926년에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마코토가 설계한 구사옥이 바로 옆에 붙어있는데, 근대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이 나란히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광화문 구 사옥은 현재 일민미술관과 신문박물관으로 사용되고있고 국내에 남아있는 언론사 건축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참고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중동#s-6이라고 불리던 신문사들 중 구 사옥은 사라지고 신 사옥만 번듯하게 있는 조선일보, 일찍 폐간되어 농협으로 사용되는 구 사옥만 남아있는 조선중앙일보[12]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별도로 1992년 완공한 충정로 사옥이 있다. 원래 동아일보는 충정로 사옥 완공 이후 이곳으로 본사를 이전하였으나, 광화문 구 사옥 옆에 동아미디어센터가 건설되자 다시 이곳으로 본사를 옮겼다. 2014년에는 디지털미디어시티채널A와 함께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를 신축하였다.

2019년 3월 20일부터 2020년 12월 31일까지 프랑스현대 미술가 다니엘 뷔렌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사옥의 외벽을 미술작품으로 바꾸었다. 한국의 색, 동아일보 X 다니엘 뷔렌

5. 지배 구조


'''주주명'''
'''보유주식수'''
'''지분율'''
인촌기념회
724,319
24.14%
김재호
666,491
22.22%
자기주식
457,759
15.26%
기타주주
1,151,431
38.38%
총계
3,000,000
100.00%
동아일보 주요 주주 목록
(출처: 2019년 감사보고서)

6. 상징


'''▲ 동아일보의 로고'''
왼쪽의 에메랄드색 원형 로고는 1920년 창간 당시부터 사용해왔던 오래된 로고이며 타원 속에 한자 ''''東(동녘 동)''''이 가로세로로 반복된 형태이며 45도로 기울여 보면 亞(버금 아)자 형태도 드러나는 그 당시엔 보기 드물게 꽤 복합적이고 모던한 형태의 로고다. 1920년 이후 단 한 번도 바뀌거나 폐기된 적이 없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로고이다.
창간 당시 서화협회에 위촉해 협회 회원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東'자를 도형으로 도형화하자는데 의견을 모았으며 이것을 본사가 채택함으로써 결정됐다. 처음에는 배달부의 배달용 덧저고리[13]에 마크로 새겨 사용했다. 동아일보 지면에 로고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22년 10월 15일자 3면으로, 동아일보 후원으로 열렸던 제3회 전선(全鮮)야구대회의 동아일보에서 제정한 우승기 사진이 실렸다.#

7. 역사



7.1. 1920년 창간 ~ 1936년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 놀란 일제는 조선의 통치 방식을 문화통치로 바꾸기로 했고 이 일환으로 민간 신문들을 허가하게 되었다. 민간 신문이 허가될거라는 소문에 민족계 신문을 창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최두선[14]김성수에게 이런 움직임을 전하면서 민족계 신문 창간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당시 김성수는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던 중이었다. 최두선이 "학교도 급하지만 이것은 당장 급한 일이다. 또 마침 일본 관헌이 민간신문을 한두 개 허락한다니 이 틈에 애국진영, 민족진영에서 하나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김성수는 처음엔 "내가 신문에 생소하고, 그러자고 할 것 같으면 여러 가지 준비가 있어야 될텐데 간단하지 않다."며 사양했다. 그러나 유근[15]이상협[16]도 창간을 권유하자 김성수는 마침내 이를 수락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는 10여건의 신문 창간 신청서가 접수되었다. 김성수는 정치적 역학 관계를 고려하여 일제가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박영효를 사장으로 내세웠다. 발행인 겸 편집인은 이상협이었다. 유근이 "동아일보"라는 이름을 제안하여 그대로 정하고 1919년 10월 9일에 총독부에 신청서를 냈다. 그 후 김성수는 주식회사의 형태로 동아일보를 차리기로 결정하고 동아일보의 창간 취지를 설명하며 전국에서 주주 모집에 나섰다.
1920년 1월 6일 총독부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의 창간을 허가했다. 3.1 운동을 본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표출 창구 없이 계속 틀어막기만 하다간 언젠가 폭발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당시 조선총독이던 사이토 마코토는 동아일보 창간에 항의하는 일본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아일보는 조선민족의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가스를 배출하는 굴뚝이다. 가스는 배출하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서 끝내는 폭발한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을 차별없이 통치하고 있다고 국내외에 선전할 명분으로 삼을 의도도 있었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민족주의 진영의 신문으로서 동아일보 창간을 허가해주는 한편 일제를 대변할 신문 2개(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조선일보[17], 역시 친일단체인 국민협회의 시사신문) 이렇게 총 3개 신문의 창간을 허가한 것이었다.
원래는 3.1 운동 1주년에 맞춰 1920년 3월 1일에 창간할 계획이었으나 사옥 마련과 설비 마련에 시간이 부족하여 1달 뒤인 4월 1일에 창간호를 냈다. 발행인 겸 편집인에 이상협, 인쇄인 이용문, 주식회사 발기인 대표 김성수, 사장 박영효, 편집감독 유근, 양기탁, 주간 장덕수, 편집국장 이상협, 영업국장 이운이었고 기자 16명이 있었다. 이 문서 2번째 문단에 있는 "주지를 밝히노라"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창간사는 장덕수가 썼다.[18] 창간 당시는 석간 신문이었다.
창간 당시 기자였던 김동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동아일보에 모인 사람들은 그 때 3.1 만세 직후여서 누구나 애국심에 불타고 있었다. 직장으로 동아일보를 택했다기보다 "남은 감옥에 가서 고생도 하는데 이렇게 편안히 앉아 문필보국을 한다. 그런데 뭐가 괴로우냐."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1920년 4월 11일부터 3차례에 걸쳐 "조선인의 교육용어를 일본어로 강제함을 폐지하라"는 사설을 실었다.
1920년 4월 15일에 평양에서 만세 소요가 일어났고 수십명이 체포당했다는 사실을 보도하여 총독부로부터 첫 발매 금지를 당했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수시로 발매 금지와 기사 삭제를 당했다.
5월 8일에는 조선의 유림들이 중국만 빨아대는 사대주의에 빠져있다고 비판한 "가명인두상에 일봉"[19]이라는 논설(##)로 인해 유림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게되어 해명 사설을 냈으나 그래도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박영효가 사과문을 게재할 것을 지시했지만 사원 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박영효는 자리에만 앉아있는 이런 바지사장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며 사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 뒤 창업주 김성수가 2대 사장에 올랐다.
도쿄유학생들 모임인 학우회가 동아일보의 지원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하던 중 서울집회에서 "조선산업의 장래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하다가 '불온한 언사'라며 경찰에 의해 강연이 강제 중단되었다. 동아일보는 1920년 7월 22일자 신문에서 이를 비판하였다가 다시 발매 금지를 당했다.
1920년 9월 24일 장덕수가 쓴 "제사 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사설에서 텐노의 상징인 삼종신기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첫번째 무기 정간'''을 당했다. 당시 제사 문제를 놓고 기독교계와 유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 때 동아일보가 저 사설에서 조상을 기념하는 것과 우상숭배의 구별에 대해서 논하면서 "설령 사람의 형태를 본떠 만든 우상은 없을지라도 혹은 거울로, 혹은 주옥으로, 혹은 칼로, 그밖에 어떤 모양으로든 물건의 형태를 만들어 어떤 곳에 받들어 모신 뒤 '신이 여기에 있다', 혹은 '영혼이 여기에 있다'하며 이를 숭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썼는데 여기서 '거울', '주옥', '칼'이 바로 텐노삼종신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1921년 1월에 정간이 해제되었으나 정간의 타격으로 인해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바로 속간 하지 못하고 한달 뒤인 2월 21일에서야 속간했다.
1920년 10월에 일본군이 북간도 일대의 조선인 2200여 명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덕준룽징으로 가서 일본영사관과 토벌군사령부에 대해 취재를 하다가 여관에서 11월 초에 행방불명됐다. 한국 언론사 최초의 순직 기자였다. 당시 여러 정황과 현지인, 가족 등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 4월 23일엔 대한독립단이 친일행각을 하는 조선인을 포살할 것을 선언했다는 보도를 했다가 압수당했다.
2차 주식 모집 후 1921년 9월에 동아일보는 비로소 주식회사가 되었다. 이후 김성수는 사장에서 이사진으로 물러나고 그의 절친한 동지인 송진우가 3대 사장에 올랐다.
1922년 2월 3일에는 "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라는 사설을 실었다.
1923년 1월부터는 물산장려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2월에 경찰이 물산장려회의 시가행진을 금지하자 이를 비판하는 보도(#1 #2)를 했다가 발매 금지를 당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나 총독부의 보도통제로 며칠지나서야 보도를 할 수 있었다.#1 #2
1923년 5월에는 1000호를 기념해 민족 지도자들에 대한 지지도를 알아보는 "현대인물 투표"를 기획했는데 총독부의 간섭으로 첫날만 시행하고 중단되었고 첫날 투표 결과는 총독부에게 검열되어 지워진 상태로 나갔다. 하얗게 검열된 모습. 투표가 중단됐음을 알리는 기사. 첫날 투표의 실제 결과는 이승만이 49표로 1위, 최린 25표, 안창호 22표, 최남선 18표, 서재필 17표, 이춘재 12표, 이상재 10표, 이동휘 7표, 여운형 강일성 각 6표, 이승훈 김원봉 윤상은 신흥우 각 4표, 김좌진 3표였다고 한다.#
1923년 6월 30일에는 여성의 지위향상과 계몽을 위해 전조선여자정구대회라는 최초의 조선인 여자 스포츠 대회를 열었다.
1923년 9월 관동대학살이 일어나자 이상협이 급히 일본으로 가서 학살을 취재했으나 일본의 강력한 통제로 생존자 명단 정도 외에는 보도할 수가 없었다. 동아일보는 9월 8일에 이재조선인 구제회를 조직하여 일본에 보낼 구원금을 모금했는데 9월 10일 내보낸 "참화에 죽어가는 동포를 위하야"라는 기사에서 '다소 귀에 들리는 소식으로도 당국의 금지로 인하야 터지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무릎 밑에 집어넣는 형편이라'는 부분에서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모금운동마저 총독부에 의해 금지되었다.
1924년 1월 2일 이광수가 쓴 "민족적 경륜"이라는 사설이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사설의 요지는 '정치적 결사, 산업적 결사, 교육적 결사를 조직해야한다. 지금까지 해온 정치적 운동으로는 계속 비밀결사의 형태일 수 밖에 없으며 새 활로를 모색하려면 조선 내에서 허용되는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 정치 결사를 조직해야 장래 정치운동의 기초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광수는 그 전해인 1923년 10월에 중국으로 가서 안창호를 만났는데 당시 안창호는 국내 산업개발과 교육진흥을 강조하고 있었고 이 사설도 그런 노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설의 주장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겨져 거센 공격을 받았다.
1924년 3월, 각파유지연맹이라는 단체가 한일병합은 합당하다는 선언문을 발표하자 동아일보는 이를 비판했다. 그 후 김성수송진우가 각파유지연맹의 이풍재에게 연락을 받고 식도원이라는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그러자 옆방에 대기하던 각파유지연맹원들이 몰려와 총으로 위협하고 물건들을 깨부수고 구타하며 해당 기사를 취소하고 3000원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결국 송진우는 "주의 주장은 반대하나 인신공격한 것은 온당하지 못한 줄로 증함"[20]이라는 쪽지를 적어 건네주었고 김성수는 3000원은 자기 개인 재산에서 주겠다고 얘기했다. 그 후 이 식도원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안재홍을 비롯한 수십명이 언론탄압 반대 대규모 민중 집회를 조직했으나 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는 송진우가 건넨 그 쪽지를 서약서라고 대서특필하며 동아일보를 공격했다. 동아일보는 이런 행태를 강력하게 규탄하고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기사를 1924년 4월 11일자로 내보냈다. 그러나 정작 동아일보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상협송진우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상협은 결국 퇴사했고 여러 간부들도 이상협을 따라 회사를 떠났다. 송진우도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1924년 5월 14일에 이승훈이 4대 사장에 올랐고 홍명희가 편집국장이 되었다.
1924년 10월부터는 다시 김성수가 사장을 맡았다.
1925년 1월에 한국 언론사 최초로 신춘문예를 열었다. 윤석중도 이 1회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상자였다.
1925년 3월 19일에 동아일보는 전국여자웅변대회를 열었다. 같은 해 허영숙이 신문사상 첫 여성 부장에 올랐다.
1926년 3월 5일에 소련 국제농민회본부가 조선 농민에게 보낸 "오늘 귀국민의 슬픈 기념일을 맞아 세계 40개국의 농민단체를 대표하여 가장 깊은 동지로의 동정을 농업국민인 조선동포에게 드린다. (중략) 자유를 위하여 죽은 이들에게 영광이 있을지어다. 감옥에 있는 여러 동지와 분투하는 여러 동지에게 형제적인 사랑의 문안을 드리노라."는 내용의 축전을 실었다가 '''두번째 무기 정간'''을 당했다.
1927년 1월 15일에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간디의 메세지를 실으며 간디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했다.
1927년 10월에는 앞서 언급한 식도원 사건 이후 물러났었던 송진우가 다시 사장에 올랐다.
1928년 3월 16일에 동아일보는 창간 8주년인 4월 1일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할 것임을 발표했으나 총독부의 중단 명령으로 시작 3일전 무산되었다.
1929년 4월 2일에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전해준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라는 메세지를 실었다. 흔히 더 긴 버젼의 글이 타고르의 글이라며 알려져있는데 그건 누군가에 의해 짜깁기된 것이고 원문은 동아일보에 실린 저것이다. 다음날인 4월 3일에는 타고르의 영어 원문[21]실었다.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그 다음해인 1920년 4월 1일에 동아일보가 민주주의, 신문화 건설, 민중의 표현기관이라는 3대 강령을 걸고 탄생하얏다. 세계대전과 조선민족의식의 각성, 이것이 구체화된 것이 동아일보다. 그 때부터 조선과 조선인은 동아일보를 통하야 그 재생(再生) 과정의 의사와 감정을 표현하얏고 아울러 조선과 조선인의 역사를 기록하얏다. 동아일보의 10년은 곧 조선민족의 10년이엇다.

동아일보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 사설 중.#

1930년 4월 16일 미국 '네이션'지의 주필 빌라즈가 보내온 창간 10주년 기념 축사를 실었다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삭제되고 '''세번째 무기 정간'''을 당했다. 해당 축사는 현 조선의 상황에서 동아일보의 사명이 중대하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으며 조선민족과 그 사명을 위해서 분투하기 바란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1931년부터 일어난 만주사변을 전후해 더욱 심해진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동아일보를 포함한 민간 신문들은 극도로 위축되었고 동아일보는 문화운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일환으로 1931년 7월부터 제1회 브나로드 운동[22]을 시작으로 1933년까지 3회의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했다. 또 지금은 없어진 박문사[23]에서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을 단죄한다는 목적으로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이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쇼를 벌였는데 이 쇼를 일제강점기 유력언론들 중에서 유일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1935년 ~ 1936년에 걸쳐 정인보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 440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연재는 후에 "조선사연구"라는 책으로 간행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자 이를 보도했는데 손기정의 유니폼에 달린 일장기를 흐릿하게 삭제한 사진을 내보냈다. 교과서에서도 등장하는 '''일장기 말소사건'''이다.[24] 사실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하는 일이 기존에도 허다했다.[25] 1932년 LA 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의 사진을 실을때도 일장기를 말소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별 탈없이 넘어갔었지만 1936년 당시는 그 이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사장이던 송진우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고 말하며 역정을 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해 오는 미나미 총독이 폐간과 같은 극단적인 태도로 나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군벌은 미친 개여서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도 말했다. 결국 총독부는 8월 29일 동아일보에 대해 '''네번째 무기 정간'''을 시켰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10여명이 연행되었다. 일제는 현진건, 이길용, 신낙균, 서영호, 최승만에게 앞으로 언론기관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게 하고 동아일보에서 쫓아냈다. 사장 송진우를 비롯하여 부사장 장덕수,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도 모두 쫓겨났다. 김성수는 갖고 있던 동아일보 주식을 모두 내놓아야 했다. 총독부 기록[26]에 의하면 "동아일보의 실권을 김성수송진우 일파의 수중에서 완전히 절리시켰다."고 나온다.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복간된 후 이 때 쫓겨난 직원들 중 희망자들을 전원 복직시켰다.[27] 더 자세한 내용은 일장기 말소사건 문서를 참조바람.

7.2. 1937년 ~ 1940년


백관수를 사장에 앉히는 조건으로 1937년 6월 3일 속간된 이후부터 1940년 폐간전까지 이 3년간 동아일보는 완전히 총독부 영향력 하에 놓이게되면서 친일지로 전락하였다. 한겨레를 비롯한 진보진영에서는 동아일보 창간부터 이 시기 전까지 16년간의 민족지로서의 행적은 애써 숨긴채 이 기간의 행적만을 강조해 동아일보가 일제시대 친일 어용지였다고 매도하곤 하지만 진영논리를 제거하고 보면 실제 동아일보는 오랜기간 분명히 민족지였고 단지 중간에 이 3년의 짧은 암흑기를 거쳤다고 보는게 이성적이다. 1937년 6월 3일 속간되었는데, 속간 공지 중 원래는 "언론기관으로서의 공정한 사명을 기하려 하오니"라는 부분이 일제의 강요로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통치의 익찬을 기하려 하오니"라는 내용으로 변경되어 실렸다. 1938년 2월에는 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동아일보를 포함한 모든 신문사는 조선춘추회라는 어용단체에 가입했다. 2월 10일부터는 기존에 제호 배경에 있던 한반도와 무궁화 그림도 삭제되었다. 남경함락을 축하한다는 삼하인단주식회사의 광고를 싣기도 했다.#
사옥에 내선일체, 보도보국이라는 간판이 걸려있기도 했다.
1937년 6월 5일에는 김일성이 보천보를 습격한 것을 보도했다.#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며 분위기가 좋았던 1998년 당시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이 김정일에게 '''보천보 전투를 호외보도한 기사를 새긴 금판을 기증'''하기도 했다.# 물론 이후에 남북 관계가 경색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급정색했지만.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1939년 11월 총독부는 동아일보의 폐간을 종용했다. 자진 폐간을 하면 총독부가 모든 직원들의 1년치 봉급을 지급하고 윤전기도 사들이겠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폐간을 거부하고 6개월을 버텼으나 총독부는 회계 부정을 구실로 경리부장을 구속하고 보성전문학교에 2만원을 빌려준 사실을 구실로 사장인 백관수와 고문 송진우, 상무 임정엽, 영업국장 국태일을 체포 구금했다. 그 후 임정엽의 명의로 폐간계가 제출되었고 1940년 8월 11일자 신문을 끝으로 동아일보는 폐간되었다. 폐간 공지 폐간사
이 마지막 1940년 8월 11일자 신문에서 차마 직접적으로 외치지는 못하고 뜬금없이 포도송이 사진을 올려놓은 뒤 "'''포도송이처럼 서로 정답게 엉키라'''"라는 말로 간접적으로 민족의 단결을 외쳤다.# 복간된 뒤인 창간 30주년 1950년 4월 1일 신문에서 이를 언급하기도 했다.#

7.3. 1945년 광복 이후


1945년 12월 1일에 사장 송진우, 주간 설의식, 편집국장 고재욱 체재로 재정비하고 드디어 복간되었다. 중간사에서 창간 때의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함"을 다시 쓰며 창간 정신을 되새겼다.#
1945년 12월 27일에 동아일보에서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일어났다.# 고의적인 오보는 아니었으나 이 사건은 한국 근현대사를 완전히 바꿔났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대사건이었다. 쉽게 말해서 분단의 시초가 된 사건이며 이 사건으로 좌우익은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져 싸워 결국 찬탁하는 북한과 반탁하는 남한으로 분단되게 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당시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이를 오보라고 시인하며 극렬한 반탁운동을 삼갈 것을 촉구하다가 반탁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김성수가 다시 사장을 맡았다.
1950년대 이후로는 미군정과 6.25 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신문 중 경향신문과 함께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반(反)독재지로 자리매김한다.[28] 이 당시 동아일보는 '반(反)독재 민주화'를 내걸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게 되는데 이것은 동아일보의 창립자인 김성수의 정치행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내기반이 전무했던 이승만은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김성수와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승만이 초대 내각 구성 당시 한국민주당은 내각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이때부터 동아일보는 이승만과 결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성향이 심화된 것은 김성수의 부통령 취임 이후였다. 6.25 전쟁 도중 국민방위군 사건에 실망한 이시영이 부통령을 사퇴하자, 국회에서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김성수에 우호적인 세력들이 제2대 부통령으로 김성수를 선출하였다. 하지만 이승만과 불편한 동거를 계속하던 김성수는 결정적으로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반발하면서 부통령을 사퇴하고 반(反)이승만 노선을 걷게 된다. 당연히 동아일보도 이승만 독재를 공격하면서 김성수 계열이 주도한 민주당에 우호적인 신문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고바우 영감이라는 시사만화가 연재되고 있었는데 1958년 1월 23일자에 실린 만화경무대의 심기를 거슬리게했는지 정부는 '허위사실 유포'라는 혐의로 김성환 화백을 즉결심판에 처해 벌금을 먹였다. 이후 동아일보는 시사 풍자 만화를 가지고 허위보도라니 졸렬하다며 까는 기사들을 내보냈다.#1 #2 1960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자유당의 부정선거 준비 실태를 보도하고 사설을 통해 부정선거와 정부를 규탄했다.#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진압을 보도하고, 정부가 마산 시위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자 "마산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지 말라"는 사설을 냈다.
박정희 정권 때에는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치밀한 언론 탄압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대표적인 탄압이 바로 1974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이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반발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면서 투쟁하자 정권의 외압으로 동아일보의 광고면이 전면 백지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시민들이 기자들을 지지하며 동아일보에 개인광고를 내주는 등 지원을 했으나 유신체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결국 경영진의 굴복으로 1975년에 일부 기자들이 해직되었다. 이때 해직된 기자들을 주축으로 13년 뒤인 1988년에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었다.
박정희가 암살당한 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어서고 정부는 또다시 언론 탄압과 통제에 나섰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다음날인 19일 이 사태에 대한 사설을 썼다. 당시는 계엄령 중이었기 때문에 모든 기사는 정권의 사전 검열을 거쳐야 했고 이 과정에서 사설의 중간중간이 뭉터기로 잘려나갔다. 이런식으로 잘려나간 사설을 싣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동아일보는 항의의 의미로 19일부터 23일까지 아예 사설 없이 신문을 발행했다.
외압과는 그다지 관련은 없지만 서울 지하철 1호선을 건설하면서 광화문 사옥이 헐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29]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의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그 유명한 발언을 하였다. 동아일보는 1월 16일부터 부검의 오연상과 박종철의 삼촌인 박월길 등의 증언을 상세히 보도하며 단순 사망이 아님을 피력했다.#1 #2 그리고 1월 17일에는 김중배의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칼럼을 실었다. 그리고 1월 19일에는 "물고문으로 질식사"를 1면 탑기사로 실으며 대서특필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박종철 형의 인터뷰. 당시 이런 기사들을 보고 동아일보로 많은 시민들의 격려 전화가 왔다고 한다. 특히 동아일보의 이 보도는 6.10 민주 항쟁을 촉발한 결정적인 보도였다.
그 후 5월 18일 김승훈 신부가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사건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은 일부 언론에서 '사제단이 이러이러하다고 주장했다'는 정도의 단편적인 보도만 나오고 제대로 보도되지 않다가 5월 22일 동아일보에서 경찰의 사건 은폐와 가담자 축소 사실의 구체적인 내용을 처음으로 대서특필하고 이후에도 관련 후속 보도를 이어나갔다. 이 보도들로 동아일보 취재팀[30]은 1987년에 한국기자상을 받았고 1988년에도 한국기자상[31]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원래는 김대중의 주요 지지언론이었으나 2000년 즈음부터 김대중 정부와 각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홍보수석인 이동관이 대표적인 동아일보 출신이다. 박근혜 정부 때는 최순실 게이트와 탄핵 정국에서 동아일보는 딱히 중요한 역할을 하진 못했으며 그나마 채널A가 단독 보도를 많이 하며 체면치레를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탈북자 출신 주성하 기자가 독자 브랜드 구축에 성공했으며, 김순덕 논설위원은 반(反)문재인 정부 스탠스를 강고히 유지하면서 도널드 트럼프의 북미협상을 적극 반대하며 조 바이든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다소 특이한 스탠스를 견지했다.
2020년 4월 1일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축사를 보냈다.영상

8. 성향



동아일보는 대표적인 보수 성향의 신문 중 하나다. 같은 보수 언론으로 평가받는 조선일보가 주로 북한 같은 안보 문제를 다루고, 중앙일보가 경제 문제를 다루는데 비해 동아일보는 문화 방면을 더 다루는 경향이 있다. 창간 당시 사시(社是)가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였는데 일제강점기 당시에 검열이 심하니까 민족주의, 민주주의보다는 문화주의가 강조되어 발행되었다. 딱히 큰 공연이 없어도 항상 2면 이상을 문화면에 할애한다.
2001년 세무조사 사건 이전까지는 지금보다 좀 더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김대중의 주요 지지언론이기도 했고 서중석이 10여 년 동안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나중에 한겨레 신문을 창간하는 송건호도 원래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6개월 정도 했었다. 유시민이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5월 19일부터 5일간 전두환 정권의 검열에 저항하는 의미로 사설을 싣지 않았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여러 지면을 할애하여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바 있다. 그 후에도 지역기반이 같은 김대중을 적극 지지해 주었으며[32] 김대중 정권 초기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대중도 동아일보의 창업주였던 김성수를 적극적으로 감싸주었는데 실제로 김대중은 1980년대 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동아일보의 창업주이자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로 중흥시킨 김성수친일파라며 규탄했을 때 김성수를 옹호해주면서 그 고대생들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 특별기고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촌[33]

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김대중,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 동아일보 특별기고

2000년 3월 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는 "인촌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는 그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맞는 새천년에도 참으로 합당하다."라고 동아일보와 인촌 김성수를 칭찬하였다.
김대중이 1987년 대선에서의 실패 이후로 여러차례 위기에 빠졌음에도 제1야당을 전두지휘하는 인물이자 차기 대권주자로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데에는 호남권에서의 압도적인 지지와 함께 동아일보가 김대중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사들의 논조를 보면 조선일보야 말 할 것도 없고, 중앙일보도 14대 대선15대 대선에서 김영삼, 이회창을 대놓고 밀어주었을 정도로 김대중에게 영 고까운 시선을 보냈던데다가 방송사들의 논조도 김대중과 민주당에게 친화적이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일보와 친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김대중과 야권이 버틸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것이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그 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는데, 동아일보 창립자 김성수가 호남출신이고 역시 호남 기반의 김대중이 김성수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고는 하지만 신문 창간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서 동아일보 일가의 후손들은 호남과 민주당 쪽에 대한 특별한 정서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동아일보는 김대중 정권에 대해서도 비판을 이어나갔는데[34] 그 후 김대중 정권은 2001년 언론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나섰다. 이 세무조사 때 동아일보 '''회장의 부인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모욕감을 느껴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과 동아일보의 관계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로 틀어졌다. 언론사 세무조사는 군부독재정권 때부터 이미 5년마다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었고 최초의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시절에만 중단되었었기 때문에 기업이라면 원래 받아야할 세무조사를 시행한 것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김대중이 추진하던 '''대북사업 관련 기업에는 세무조사를 자제'''하라고 국세청장이 지시했고 집권층 내부에서 특정 신문사들 이름을 거론하며 "당장 작살내겠다", "두세 달 내에 그냥 안 둔다. 국세청 상속세로 뒤집어버리겠다" 등의 발언이 나왔던 것[35]을 보면 김대중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보복 의도도 분명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가 이전보다 더 보수 쪽으로 이동하게된 계기로 평가된다.
단, 많은 한국인들이 '진보 = 민주화 세력' '보수 = 독재 세력' 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지만 실제론 과거 독재 정권 당시의 구도는 민주 vs 반민주 로 보는게 맞지 진보 vs 보수 로 보는것은 맞지 않다. 그러므로 동아일보도 과거엔 진보였다가 지금 보수로 변했다는 말은 사실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런 착각 때문에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보수진영에서 활동하는 과거 민주화 운동가 출신들을 '배신자', '변절자'로 모는 이상한 풍토가 생긴 것이다. 민주화 세력들 안에서도 세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당연히 진보가 있고 보수가 있다. 이건 독재, 반독재와는 전혀 다른 얘기다. 보수 정치인인 김영삼만 해도 김대중과 함께 군부 독재시대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이렇게 볼 때 동아일보는 대북정책문제, 노동문제 등에서 과거에도 보수에 가까운 신문이었다.
어쨌거나 동아일보는 2000년대 이후 친재벌 성향으로 더 변화하게 되는데 그 이유로 꼽히는게 삼성그룹과의 관계이다. 1998년 외환위기 직후 동아일보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가 삼성생명으로부터 500억 긴급대출을 받아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대출의 배경에는 삼성 오너 이건희와 동아일보 오너 김병관의 사돈 관계가 있다. 김병관 회장의 차남인 김재열이 1999년 이건희의 2녀인 이서현과 결혼한 것이다. 김재열은 이후 제일모직 사장, 삼성엔지니어링 경영기획총괄 사장을 거쳐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이 된다. 이 때문에 중앙일보만큼이나 삼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언론으로 꼽힌다. 그리고 외환위기로 인해서 경제가 심각하게 위축되고 개인의 구매력이 떨어지면서[36]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몇몇 대기업 광고에 대한 재정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아지게 되었다. 말 그대로 비판 기사 한 번 썼다가 대기업에서 광고 빼버리면 회사가 흔들리기 때문에 언론사들이 대기업 눈치를 보면서 알아서 기는 행태가 만연하게 되었다.[37]
이후에는 뉴라이트의 등장 때에 특집기사로 스포트라이트를 주었으며,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보수 노선이 상당 부분 강조되면서 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조선일보를 뛰어넘었다는 평가까지 있었다.[38] 이는 박근혜 정부 때에도 계속되었고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한국당홍준표 후보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기사들이 많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에는 고공행진하는 지지율과 함께 문재인이 직접 동아일보 지령 3만호 기념 축사를 보내고, 비판의 수위도 상당히 낮아져서 과거 친민주당 성향으로 돌아가는게 아닌가하는 말도 있었으나 2018년 말부터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보수 신문으로 돌아왔다.# 다만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전두환에 매우 비판적이다.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이라며 갈수록 보복과 혐오와 갈라치기의 정치를 하자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던 김대중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9. 논란 및 사건사고




10. 기획·특집기사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동아일보에서 대대적으로 벌였던 캠페인 특집기사이다. 본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가장 먼저 보도했으나, 대대적으로 전두환과 군부정권에 반기를 들고 보도를 쏟아낸 것은 동아일보였다. 이 기사는 특히 6.10 민주 항쟁을 이끌어낸 원동력 중 하나로도 꼽힐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창간 98주년 기획특집기사로, 과거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부당한 악습들을 타파하는 내용이 많아 호평을 받았다. 특히 추석편은 간소한 차례상에 관한 이야기를 실어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어냈다.
창간 99주년, 3.1 운동 100주년 기획특집기사로, 3.1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과정, 의의 등을 재조명하였다. 특히 이 기사와 연계하여 국사편찬위원회와 함께 학술회의를 개최하였고, 동아닷컴에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디지털 전시관'이라는 3.1 운동 데이터베이스를 공개하기도 하였다.
고령화사회를 맞아 연재된 특집기사이며 기자가 직접 노인과 비슷한 조건으로 도심을 걸어다니며 느낀 체험내용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다. 노인들에게 위험한 구조물이나 시설 등을 주목하여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20년에 5회에 걸쳐 연재된 시리즈. 대법원에서 실종 선고된 6,000여명의 판결문을 분석하여 그 중 자발적 실종 즉, '증발'해버린 사람들을 추적해 그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어냈는데 일러스트와 그래픽적 요소가 결합되어 일반적인 보도글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고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다.

11. 자매지 및 정기간행물



12. 주관 대회



12.1. 현존



12.2. 폐지


  • 국수전 (1956~2016)
  • 동아사이클대회 (1958~1997)

13. 계열사


  • 채널A : 동아방송을 계승했다고 하는 동아일보 계열의 종합편성채널
  • 동아닷컴[39] : 동아미디어그룹의 인터넷뉴스 사이트. 주로 동아일보의 기사를 전달.
  • 동아사이언스
  • 동아프린테크
  • 동아PDS
  • 스포츠동아
  • 동아 E&D
  • 디유넷
  • 동아이지에듀
  • 동아애드넷
  • 동아MD
  • 미디어렙A
  • 채널A미디어텍
  • 스포엑스컴
  • 동아마이스

14. 산하기관


  • 미래전략연구소 : <동아비즈니스리뷰>를 발행하고 있다.
  • 뉴센테니얼본부 : 동아일보 100주년 사업 기획 및 진행
  • 청년드림센터 : 청년일자리지원 및 취업사이트 운영

15. 공익재단


  • 인촌기념회
  • 일민문화재단
  • 화정평화재단
  • 동아꿈나무재단

16. 제휴 신문사



17. 여담


  • 동아일보는 일제시대 동안 총 무기정간 4회, 판매금지 63회, 압수 489회, 기사삭제 2,423회를 당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pdf
  • 1926년 이완용 사망 직후 이완용의 매국 행위를 비꼬는 명대사를 연달아 날리기도 했다. 그 명대사는 이러하다.

'''‘구문공신(口文功臣)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였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신료 이완용이 지옥에 들어갔으니 장래에 지옥마저도 팔아먹을지 걱정된다.)

1926년 2월 13일 동아일보 1면 횡설수설 기사 중.#

'''도 갔다. 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1926년 2월 13일[40]

동아일보 1면 사설 기사 중.[41]

  • 1931년부터 매년 3월에 마라톤대회를 열고 있는데 이 대회가 국내 대표적인 마라톤 대회 중의 하나인 동아마라톤대회다. 1982년부터는 국제마라톤대회로 확대돼 치러지고 있다. 1947년부터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를 주최하고 있다.
  • 신문 내에 '횡설수설'과 '휴지통'이라는 코너가 있는데 무려 1920년부터 존재했던 유서깊은 코너이며 2020년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 라디오 방송국이었던 동아방송(DBS)도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상 앞부터 시청 뒤편까지 광장을 만들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이때 정부로부터 여의도 부지를 받아서 이전할 뻔했다. 물론 계획이 사라지면서 안 헐렸지만.#
  •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심사위원 조경란이 예심에서 떨어진 응모작을 표절한 것으로 의심받은 희대의 막장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건 동아일보의 문제라기보단 문단의 문제인데, 문단에서 특유의 친목질쉴드를 가동해서 결국 표절이 의심되는 조경란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고 이문열, 신경숙 등 빵빵한 작가들이 심사하는 동인 문학상까지 받았다. 사실 표절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작품의 아이디어 자체도 워낙 흔한데다가 조경란이 저 아이디어로 이미 등단 직후에 출판사와 책을 계약하기도 한 것이 밝혀져 쉽게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 1990년대 특종 기사 중 하나를 꼽자면 신촌 그레이스백화점을 날려버린 여자화장실 몰카 설치 보도가 있다.# 몰카에 대한 인식을 확립시켜 준 사건이라는 의미도 있다. 잘나가던 백화점 하나를 그렇게 순식간에 날려버렸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이 매우 대단했다. 이후 외환위기와 겹쳐 운영사였던 양정물산이 1998년에 망했고, 점포는 금강개발산업이 세운 신규법인 현대쇼핑으로 넘어가 현대백화점 신촌점이 되었다.
  • 2010년 11월 18일엔 위키백과를 디스했는데 위키백과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 자체는 합당했으나 위키백과에 북한군들이 주민번호를 도용해서 가입한 뒤 편집하는 것 같다는 해괴한[42]내용을 싣는 병크를 저질렀다.# 2011년 7월 16일에 또 위키백과를 디스했다.#
  • 동아일보에서는 전국 경영학도를 대상으로 DBR(Donga Business Review)을 무료배포하고 있다. 한 권에 12,000원이나 하는 책이니 많이 이용하자(...). 경영학 실제 케이스와 연구분석사례들이 나와 있다. 대학에 있는 경영학과 건물에서 배포하는 듯.[43]
  • 대한민국 최초의 바둑기전인 국수전을 1956년부터 주최해왔다.(2016년을 끝으로 폐지)
  • 일제강점기인 1920 ~ 30년대엔 '응접실'이란 코너에서 독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이를 기자들이 대답하는 코너를 연재했다. 문답 내용들을 보면 시대를 초월한 개드립들이 여럿 있다. #
  • 허영만식객이 원래 동아일보에서 2002년 9월 2일 처음 연재되어 2008년 12월 18일까지 연재되었다. 도 2008년 1월 1일부터 2010년 3월 31일까지 연재되었다.#
  • 2020년 창간 100주년을 맞아 창간 이후 모든 기사와 지면을 볼 수 있는 동아 디지털 아카이브를 개설했다. 동아 디지털 아카이브

18. 관련 인물


가나다순

19. 관련 문서




20. 관련 문헌


  • 동아일보사사 (전 6권, 1975 ~ 2005): 이중 1, 3권은 국가기록원에서 열람 가능하다.
  • 민족과 더불어: 동아일보 80년사 (2000)
  • 동아일보 대해부(전 5권) - 문영희, 강기석, 김종철, 김광원 공저. 안중근평화연구원. 2014.
  • 동아일보 80년사 홈페이지 # #

21. 역대 임원



21.1. 상임고문


  • 김상기, 김성열 (1989.3 ~ 1993.3)
  • 이채주, 이종석 (1997.2 ~ 1998)
  • 송수항 (2000.2 ~ 2003)
  • 어경택 (2003 ~ 2006.1)

21.2. 명예회장



21.3. 회장



  • 고재욱 (1971.2 ~ 1971.12/편집인, 1971.12 ~ 1975.2)
  • 김상만 (대표이사 발행인, 1977.2 ~ 1977.3/대표이사, 1977.3 ~ 1981.2)
  • 이동욱 (대표이사 발행인 편집인, 1981.2 ~ 1981.3/대표이사, 1981.3 ~ 1983)
  • 김상기 (대표이사 발행인, 1983.2 ~ 1983.3/대표이사, 1983.3 ~ 1989.3)
  • 김병관 (대표이사 발행인, 1993.3 ~ 1995.2/대표이사 발행인 인쇄인 1995.2 ~ 1995.12, 1997.2 ~ 1999.2/대표이사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 1995.12 ~ 1996.3/대표이사 발행인 편집인, 1996.3 ~ 1997.2/대표이사, 1999.2 ~ 2001.2)
  • 오명 (대표이사, 2001.2 ~ 2001.7)
  • 김학준 (2008.3 ~ 2010.3)

21.4. 부회장


  • 김상기 (이사회부회장, 1977.2 ~ 1981.2)

21.5. 사장



  • 박영효 (대표이사, 1920)
  • 김성수 (대표이사, 1920/1924~1927/1945~1947)
  • 송진우 (대표이사, 1920~1924/1927~1936/1945.12)
  • 이승훈 (대표이사, 1924)
  • 사장대리 양원모 (대표이사, 1936~1937)
  • 백관수 (대표이사 발행인 편집인 편집국장, 1937.6 ~ 1939.10/대표이사 발행인 편집인, 1939.11 ~ 1940.7)
  • 임정엽 (대표이사, 1940)
  • 최두선 (대표이사, 1947.2 ~ 1963.7)
  • 이희승 (대표이사, 1963.7 ~ 1965.7)
  • 고재욱 (대표이사, 1965.7 ~ 1968.12/대표이사 발행인, 1968.12 ~ 1971.2)
  • 김상만 (대표이사 발행인, 1971.2 ~ 1977)
  • 이동욱 (대표이사 편집인, 1977.2 ~ 1977.3/대표이사 발행인 편집인, 1977.3 ~ 1981.2)
  • 김상기 (대표이사, 1981.2 ~ 1981.3/대표이사 발행인, 1981.3 ~ 1983.2)
  • 오재경 (대표이사, 1983.2 ~ 1983.3/대표이사 발행인, 1983.3 ~ 1985.2)
  • 김성열 (대표이사, 1985.2, 1987.4 ~ 1989/대표이사 발행인 1985.3 ~ 1987.3)
  • 김병관 (대표이사 발행인, 1989.3 ~ 1993)
  • 권오기 (대표이사 편집인, 1993.3 ~ 1995.12)
  • 오명 (대표이사 인쇄인, 1996.6 ~ 1997.2/대표이사 편집인, 1997.2 ~ 1999/대표이사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 1999.2 ~ 2001)
  • 김학준 (대표이사 발행인 인쇄인, 2001.2 ~ 2002.5/대표이사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 2002.5 ~ 2006.3/대표이사 발행인 편집인, 2006.3 ~ 2008.3)
  • 김재호 (대표이사 발행인 편집인, 2008.3 ~ 2016/대표이사, 2016.12 ~ 현재)

21.6. 부사장


  • 장덕수 (1921.9 ~ 1937)
  • 고재욱 (주필, 1961.7 ~ 1965.7)
  • 김상만 (발행인, 1965.12 ~ 1968.12/1968.12 ~ 1971.2)
  • 김두일 (1973.2 ~ ?)
  • 김상기 (1973.2 ~ 1974.2)
  • 이언진 (1973.2 ~ 1975.2)
  • 이동욱 (주필, 1975.7 ~ 1977.2)
  • 김성열 (1983.2 ~ 1985.2)
  • 김병관 (대표이사 인쇄인, 1985.2/대표이사, 1985.3 ~ 1987.3/대표이사 발행인, 1987.4 ~ 1989.3)
  • 권오기 (대표이사 편집인, 1989.3 ~ 1993.3)
  • 송수항 (신문담당, 1999.2 ~ 2000.2)
  • 김병건 (출판담당, 1999.2 ~ 2001.7)
  • 김재호 (대표이사 인쇄인, 2006.3 ~ 2008.3)
  • 최맹호 (대표이사 인쇄인, 2010.3 ~ 2015.3)
  • 이희준 (2016.12 ~ 현재)
  • 임채청 (대표이사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 2016.12 ~ 현재)

22. 역대 법정등록인



22.1. 발행인


  • 이상협 (1920.4 ~ 1921.11)
  • 한기악 (1921.11 ~ 1924.4)
  • 설의식 (1924.4 ~ 1924.10)
  • 김철중 (1924.10 ~ 1927.1)
  • 양원모 (1927.1 ~ 1927.11)
  • 김석중 (1927.11 ~ 1930.9)
  • 송진우 (1930.9 ~ 1936.8)
  • 백관수 (1937.6 ~ 1940.7)
  • 임정엽 (1940.7 ~ 1940.8)
  • 김승문 (1945.12 ~ 1947.3)
  • 국태일 (1947.3 ~ 1961.7)
  • 김상만 (1961.7 ~ 1968.12/1971.2 ~ 1977.3)
  • 고재욱 (1968.12 ~1971.2)
  • 이동욱 (1977.3 ~ 1981.3)
  • 김상기 (1981.3 ~ 1983.3)
  • 오재경 (1983.3 ~ 1985.2)
  • 김성열 (1985.3 ~ 1987.3)
  • 김병관 (1987.4 ~ 1999.2)
  • 오명 (1999.2 ~ 2001.2)
  • 김학준 (2001.2 ~ 2008.3)
  • 김재호 (2008.3 ~ 2016)
  • 임채청 (2016.12 ~ 현재)

22.2. 편집인


  • 이상협 (1920.4 ~ 1921.11)
  • 한기악 (1921.11 ~ 1924.4)
  • 설의식 (1924.4 ~ 1924.10/1945.12 ~ 1947.3)
  • 김철중 (1924.10 ~ 1927.1)
  • 국기열 (1927.1 ~ 1930.9)
  • 송진우 (1930.9 ~ 1936.8)
  • 백관수 (1937.6 ~ 1940.7)
  • 임정엽 (1940.7 ~ 1940.8)
  • 고재욱 (1947.3 ~ 1966.1/1971.12 ~ 1975.3)
  • 우승규 (1966.1 ~ 1966.8)
  • 천관우 (1966.8 ~ 1968.12)
  • 이동욱 (1968.12 ~ 1971.12/1975.3 ~ 1981.3)
  • 권오기 (1981.3 ~ 1995.12)
  • 김병관 (1995.12 ~ 1997.2)
  • 오명 (1997.2 ~ 2001.2)
  • 이현락 (2001.2 ~ 2002.5)
  • 김학준 (2002.5 ~ 2008.3)
  • 김재호 (2008.3 ~ 2016)
  • 임채청 (2016.12 ~ 현재)

22.3. 인쇄인


  • 이용문 (1920.4 ~ 1921.11)
  • 최익진 (1921.11 ~ 1924.10)
  • 조의순 (1924.10 ~ 1933.2)
  • 김병석 (1933.2 ~ 1935.7)
  • 황영모 (1935.7 ~ 1936.8/1937.6 ~ 1938.3)
  • 장석태 (1938.3 ~ 1940.8)
  • 이언진 (1945.12 ~ 1975.3)
  • 김성칠 (1975.3 ~ 1983.3)
  • 김병관 (1983.3 ~ 1985.2/1995.2 ~ 1996.6/1997.2 ~ 1999.2)
  • 최준철 (1985.3 ~ 1987.9)
  • 한갑수 (1987.9 ~ 1988.2)
  • 신용순 (1988.2 ~ 1989.3)
  • 김광희 (1989.3 ~ 1995.2)
  • 오명 (1996.6 ~ 1997.2/1999.2 ~ 2001.2)
  • 김학준 (2001.2 ~ 2006.3)
  • 김재호 (2006.3 ~ 2008.3)
  • 최맹호 (2008.3 ~ ?)
  • 임채청 (2016.12 ~ 현재)

22.4. 출판편집인


  • 이재호 (2009.3 ~ 2012.7)[47]
  • 김정훈 (2020.12 ~ 현재)

23. 역대 주요 간부



23.1. 편집감독



23.2. 주간



23.3. 주필


  • 장덕수 (1921 ~ 1923)
  • 홍명희 (1924.5 ~ 1925)
  • 송진우 (1925.4 ~ 1927)
  • 김준연 (1935.2 ~ 1936)
  • 고재욱 (1946.4 ~ 1949.5/1952.10 ~ 1955.4/1955.10 ~ 1965/1971~1974.9)
  • 김삼규 (1949.5 ~ 1952.10)
  • 천관우 (1965.12 ~ 1968)
  • 이동욱 (1968.12 ~ 1971.12/1975.2 ~ 1977.2)
  • 권오기 (1981.2 ~ 1989.3)
  • 이채주 (1994.3 ~ 1997.2)
  • 이현락 (1999.2 ~ 2000.5/2000.10 ~ 2001.2)
  • 배인준 (2010.3 ~ 2015.3)

23.4. 편집/논설상임고문



23.5. 논설고문


  • 이종석 (1994.11 ~ 1997.2)
  • 김학준 (1999.1 ~ 2000.10)
  • 황호택 (2016.12 ~ 현재)

23.6. 논설주간


  • 홍승면 (1974.9 ~ 1977.2)
  • 김성한 (1977.2 ~ 1979.12)
  • 박권상 (1980.1 ~ 1980.7)
  • 권오기 (1980.8 ~ 1981.2)
  • 김진현 (1989.3 ~ 1990.11)
  • 이채주 (1990.11 ~ 1993)
  • 남중구 (1998.1 ~ 1999.2)
  • 최규철 (2002.5 ~ 2005.2)
  • 배인준 (2006.12 ~ 2010.3)
  • 황호택 (2013.1 ~ 2016.12)
  • 김순덕 (2016.12 ~ 2018.12)
  • 박제균 (2018.12 ~ 현재)

23.7. 논설위원실장


  • 우승규 (1964 ~ 1965.12)
  • 김진현 (1985.3 ~ 1989.3)
  • 남시욱 (1989.3 ~1991)
  • 이종석 (1991.8 ~ 1994.10)
  • 정종문 (1994.11 ~ 1995.9)
  • 민병문 (1995.9 ~ 1997.2)
  • 남중구 (1997.2 ~ 1997.12)
  • 김종심 (1998.1 ~ 1999.2)
  • 어경택 (1999.2 ~ 2001.7)
  • 최규철 (2001.7 ~ 2002.5)
  • 이규민 (2002.5 ~ 2003.7)
  • 전진우 (2003.7 ~ 2005.2)
  • 배인준 (2005.2 ~ 2006.12)
  • 이재호 (2006.12 ~ 2009.3)
  • 황호택 (2009.3 ~ 2013.1)
  • 심규선 (2013.1 ~ 2013.12)
  • 김순덕 (2013.12 ~ 2016.12)
  • 박제균 (2016.12 ~ 2018.12)
  • 이기홍 (2018.12 ~ 현재)

23.8. 수석논설위원


  • 홍승면 (1972.4 ~ 1973.8)
  • 송건호 (1973.8 ~ 1974.9)
  • 권오기 (1980.1 ~ 1980.8)
  • 정종문 (1991.8 ~ 1994.3)
  • 민병문 (1994.3 ~ 1995.9)
  • 남중구 (1995.9 ~ 1997.2)
  • 김종심 (1997.4 ~ 1997.12)
  • 배인준 (2003.7 ~ 2005.2)
  • 이재호 (2005.3 ~ 2016.12)
  • 최영훈 (2015.9 ~ 2016)

23.9. 수석해설위원


  • 이동수 (1971 ~ 1974.9)
  • 권오기 (1974.9 ~ 1977.7)

23.10. 편집고문


  • 이광수 (1927 ~ 1929)
  • 고재욱 (1949 ~ 1951/1955)
  • 우승규 (1965.12 ~ ?)

23.11. 편집국장


  • 이상협 (1920 ~ 1924)
  • 홍명희 (1924.5 ~ 1925)
  • 이광수 (1926.11 ~ 1927.10/1929.12 ~ 1933)
  • 김준연 (1927.10 ~ 1928.5)
  • 주요한 (1929.11 ~ 1929.12)
  • 설의식 (1935.2 ~1936)
  • 백관수 (1937.6 ~1939)
  • 고재욱 (1939.11 ~ 1940.8/1945.12 ~ 1946.4/1947.7 ~ 1947.9/1952.10 ~ 1953.2/1954~1955.4/1958.11 ~ 1960.7)
  • 임병철 (1946.4 ~ 1947.6)
  • 김삼규 (1947.9 ~ 1949.5/1950.10 ~ 1952.3)
  • 장인갑 (1949.12 ~ 1950.6)
  • 곽복산 (1952.3 ~ 1952.10)
  • 민재정 (1953.2 ~ 1954)
  • 우승규 (1956.4 ~ 1958)
  • 김영상 (1960.7 ~ 1962.1)
  • 천관우 (1963.1 ~ 1965.12)
  • 변영권 (1965.12 ~ 1969.2)
  • 홍승면 (1969.2 ~ 1971.3)
  • 박권상 (1971.4 ~ 1973.8)
  • 김성한 (1973.8 ~ 1974.9)
  • 송건호 (1974.9 ~ 1975.3)
  • 최호 (1975.4 ~ 1977.7)
  • 권오기 (1977.7 ~ 1979.12)
  • 이웅희 (1980.1 ~ 1980.8)
  • 신용순[48] (1980.8 ~ 1983.5)
  • 이채주 (1983.5 ~ 1987.1)
  • 남시욱[49] (1987.1 ~ 1989.3)
  • 장행훈 (1989.3 ~1990.6)
  • 김중배 (1990.6 ~ 1991.7)
  • 홍인근 (1991.8 ~ 1994.10)
  • 이현락 (1994.11~1997.12)
  • 정구종 (1998.1 ~ 1999.2)
  • 박기정 (1999.2 ~ 2000.5)
  • 최규철 (2000.5 ~ 2001.7)
  • 김용정 (2001.7 ~ 2002.7)
  • 어경택 (2002.7 ~ 2003.7)
  • 이규민 (2003.7 ~ 2005.4)
  • 임채청 (2005.4 ~ 2008.11)
  • 심규선 (2008.11 ~ 2012.6)
  • 최영훈 (2012.6 ~ 2013.12)
  • 김차수 (2013.12 ~ 2016.12)
  • 김정훈 (2016.12 ~ 2018.12)
  • 천광암 (2018.12 ~ 현재)

23.12. 출판국장


  • 김상기 (1965 ~ 1966)
  • 조병륜 (1966 ~ 1970)
  • 김성한 (1970 ~ 1973.8)
  • 홍승면 (1973.8 ~ 1975)
  • 김성한 (1974.9 ~ ?)
  • 임순묵 (1975.4 ~ 1980)
  • 안재준 (1980.10 ~ 1981)
  • 이채주 (1981 ~ 1983.5)
  • 남시욱 (1983.5 ~ 1987.1)
  • 장행훈 (1987.1 ~ 1989.3)
  • 김중배 (1989.3 ~ 1990)
  • 이준우 (1990 ~ 1991.1)
  • 이정윤 (1991.2 ~ 1994)
  • 이대훈 (1994 ~ 1995)
  • 정구종 (1995 ~ 1997)
  • 어경택 (1997 ~ 1999.2)
  • 김종심 (1999.2 ~ 2001)
  • 민병욱 (2001 ~ 2005.2)
  • 최맹호 (2005.2 ~ 2006)
  • 고승철 (2006.12 ~ 2008.1)
  • 황의봉 (2008.3 ~ 2009)
  • 이재호 (2009.3 ~ 2012)
  • 권순택 (2012.6 ~ 2014)
  • 박태서 (2014.6 ~ 2016.12)
  • 박성원 (2016.12 ~ 현재)
[1]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이자(엄밀히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를 창립한 것이지만) 이승만 정부 시절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지냈고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와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때문에 형제지간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는 사이가 끈끈한 편이다.[2] 1904년 창간[3] 1920년 3월 5일 창간[4] 1990년대 초반가지만 해도 한국일보의 위상은 상당해서 1990년대 초반에도 구독부수가 상당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망테크를 타기 시작했고, 지금은 후발주자인 한겨레 신문보다도 못 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일보 항목 참조.[5]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이어 3위였으나(유료부수에서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안났었지만) 2016년부터는 ABC 유료부수 기준으로 오히려 중앙일보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건 동아일보의 구독자 수가 늘어서는 아니고, 그냥 중앙일보 구독부수가 매우 빨리 줄어든 바람에 본의 아니게 2위에 올랐을 뿐이다. . 2019년 기준으로 발행부수 92만 부, 유료부수 73만 부이다. 부수 통계가 부풀려져 있다는게 중론이라 실제 유료부수가 통계와 다르더라도 부풀려진건 모든 신문사가 마찬가지기 때문에 순위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신문 항목 참조.[6]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9년 언론 수용자 조사.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종이신문 전체의 상황이라서 열독률 1위 조선일보도 3.3%에 불과하고 한겨레는 0.7%에 불과하다.[7] 국역본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을 참조했음. 원문은 이곳 참조[8] 둥그런 실타래를 뜻하는 순우리말.[9] 현재는 일민미술관신문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10] 채널A와 사옥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광화문 구 사옥의 바로 오른쪽에 있다.[11]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 동아미디어그룹이 건설한 사옥이다. 청계천의 동아미디어센터와 달리 채널A가 중심이다.[12] 다만, 현재 조중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홍진기와 삼성의 중앙일보는 중앙일보빌딩(흑갈색건물로개국 초기 JTBC의 사옥으로도 쓰였던 그 건물) 옆에 구 사옥이 존치 중이며, JTBC빌딩(DMCC 타워)가 세워지기 전까지 구 사옥에 임시로 중앙일보가 세들어 사는 케이스는 있긴 있었다.[13] 당시엔 일본어로 '핫피'라 했음.[14] 독립운동가. 최남선의 동생[15] 독립운동가. 한때 황성신문 사장이기도 했다.[16] 매일신보에서 일한 적 있는 언론인. 이 당시엔 투옥된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일하고 있었다.[17] 그러나 일제의 창간 의도와는 다르게 조선일보도 일선기자들의 항일 논조의 보도들로 인해 창간 직후부터 여러차례 압수와 정간을 당했다.[18] 장덕수는 원래 독립운동을 했으나 일제시대 말부터 친일로 변절한다.[19] '명나라 사람 행세를 하는 유림의 머리에 몽둥이 한 대'라는 뜻[20] 니네가 했던 주장에는 반대하는데 니들을 인신공격한건 온당하지 못했다.[21]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22] 브나로드란 '민중 속으로' 정도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다. narod는 영어로 치면 people정도의 의미로, 현 러시아의 유명 웹호스팅 서비스인 나로드 러시아(http://narod.ru)의 이름이기도 하다.[23] 博文寺. 현재 장충동 서울신라호텔 면세점 부지[24] 일각에서 여운형조선중앙일보가 먼저 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실제로는 동아일보가 먼저 한 것이 맞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25]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길용은 1948년 발행된 수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방이건 서울이건 신문지에 게재해야 할 무슨 건물의 낙성식이니, 무슨 공사의 준공식이니, 면소니 군청이니 또는 주재소니 등등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를 정면에 교차해 다는데 이것을 지우고 싣기는 부지기수였다.", "세상이 알기는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에서 일본 본토를 가리킬 때 쓰도록 강요한)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26] 朝保秘 제1100호 동아일보 발행정지처분의 해제에 이르는 경과에 관한 건(1937년 6월 11일)[27] 이길용, 백운선, 설의식, 장덕수, 김준연, 임병철. 현진건은 1937년 6월 속간 때 복직.[28] 당시 경향신문은 가톨릭 계열이었다.[29] 그래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종각 드리프트. 만약 원안대로 추진했으면 아예 철거되어 몇 년씩 정간당하는 사태가 생겼을 것이다. 당시 윤전기가 진동에 약했는데 지하철을 그대로 지으면 윤전기가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아무리 당시 정권이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건 충분한 언론탄압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30] 김차웅, 윤상삼, 임채청, 황열헌, 황호택[31] 정동우, 황호택[32] 실제로 김대중이 가장 아꼈던 기자는 이낙연인데 이 사람도 동아일보 기자였다.[33] 김성수의 호[34] 언론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걸 가지고 한겨레21은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이 김대중에게 몇 가지 특혜를 요구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대한 반발로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 기사를 사실이라 가정하면 정부에 요구한 특혜는 경기도 일산 지역 농지 2만 6천 평 지목 변경, 서울 충정로 사옥건물 매입, 저금리 대출, 부동산 환수 소송 지원 등이다. 물론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35] "DJ는 왜 지역갈등 해소에 실패했는가", 성한용, 2001[36] 대부분의 가정이 돈이 쪼들리면 제일 먼저 신문을 끊는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 직후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고, 당시 한화그룹은 가지고 있던 경향신문 지분을 모두 포기하고 그냥 독립시켜 버린다.[37] 겉으로는 재벌타파를 외치는 한겨레, 경향신문도 재벌에 대한 비판 기사는 광고 떨어질까봐 스스로 수위조절 한다는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시사인 창간으로 이어진 2005년 시사저널 파업 사태도 삼성 비판 기사를 경영진이 (연락도 안 왔는데) 알아서 잘라내면서 촉발된 것이다.[38] 사장 김재호2010 G20 서울 정상회의 준비위원회의 민간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39] 구 마이다스동아일보[40] 희대의 매국노 이완용이 죽고 난 후 이틀 뒤의 기사다.[41] 현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는 이 기사를 볼 수 없다. 조선총독부가 위 사설을 포함해 당시 동아일보의 ‘이완용 비난 부고 기사’들을 모조리 압수하고 이를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42] 위키백과는 실명제가 아니기에 주민번호는커녕 휴대전화 인증도 필요 없다.[43] 배포처 :건국대학교 - 경영관 2층 경영학과 사무실 앞. 고려대학교 - LG-POSCO 경영관 3층 수당학술정보관. 서울대학교 SK경영관 (58동) 1층. 성균관대학교 - 경영관 4층 경영경제대 행정실. 연세대학교 - 신경영관 4층 경영대학 행정실 앞. 서울시립대학교 - 미래관 5층 경영대학 행정실 내. 간혹 미래관 3층 경영경제전문도서관 대출데스크에 비치하는 경우도 있으나 요즘은 최신호를 잘 안 가져다가 놓는듯. 포항공과대학교 - 무은재 기념관 101호 앞, 충남대학교 - 경영학부 사무실(경상관 233호) 앞. 한국외국어대학교 - 경영학부장실 앞.[44] 동아일보 가문 참조[45] 두 작품 모두 심훈이 동아일보에서 퇴사한 후 나온 작품인데, "탈춤"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상록수"는 동아일보 공모전에 응모하여 당선된 작품이다.[46]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 당시 해직기자들이 주도하여 창립하였다.[47] 초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임명 후 퇴사.[48] 퇴사 이후 1993년에 강원일보 사장 역임. 1996년 작고.[49] 퇴사 이후 문화일보 사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