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마소 부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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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Tommaso Buscett 1928년 7월 13일 ~ 2000년 4월 2일(향년 71세)
라 바르베라 코스카 파벌 소속 조직원. 그리고 '''마피아 역사상 최초로 오메르타를 깬 인물.'''
코를레오네시 파 측 총잡이들에게 부하들을 잃고 앙심을 품고 밀고자가 되었지만, 그 대가로 친지들이 다치는 불행을 겪었다.

2. 생애


톰마소 부셰타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빈곤한 가정의 17명의 자녀들 막내로 태어났다. 부셰타는 어린 나이에 범죄에 연루되었고, 그는 1945년에 마피아에 가입하였고, 이후 포르타 누바 패밀리의 일원이 되었다.[1] 1963년 마피아 전쟁 중 일어난 학살 이후 부셰타는 미국으로 도망쳐서 감비노 패밀리를 만나기도 했다.
1970년, 부셰타는 뉴욕에서 체포되었지만, 이탈리아 당국은 그의 송환을 원하지 않았기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 부셰타는 브라질로 이주해 마약 밀매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나, 결국 브라질 군사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이탈리아로 강제 추방되어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80년 감옥에서 하루 빨리 석방된 그는 마피아 전쟁에서 휘말리지 않으려고 브라질로 도주했고, 그후 부셰타의 많은 조직원들이 사망했다.
1983년에 체포된 부셰타는 이탈리아로 송환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인생에 절망을 느낀 부셰타는 자살을 기도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이에 경찰은 그가 마피아 생활에 환멸을 느낀다고 생각, 부셰타는 지오반니 팔코네 판사에게 대화를 부탁하고, 밀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탈리아에서 부셰타와 팔코네 판사, 그리고 파올로 보르셀리노 판사[2]와 함께 막시 재판을 이끌어서 마피아 338명을 유죄판결을 받도록 하는 기염을 토했고, 무려 미국에선 사상 최대로 긴 재판인 피자 커넥션에서 증인으로 출석했다.[3] 부셰타의 증언 덕에 수사당국은 시칠리아 마피아와 미국 마피아 간의 연결고리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남은 여생을 지내다 2000년 뉴욕에서 암으로 세상을 떴다.

3. 기타


  • 넷플릭스에서 부셰타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청할 수 있고, 2019년에 이탈리아에서 그의 전기영화 "배신자"가 촬영되어 호평을 들었다.
  • 그의 밀고 이후, 그의 친족들이 살해되었는데, 그중 동료 마피아 중 한 명이 1993년 재판에서 두 아들들을 교살했다고 하는데, 부셰타는 그가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단 것을 알아 용서했다.
  • 미국 연방 검사 루돌프 줄리아니는 부셰타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들을 상대로 증언을 하는 남자"라 묘사했다.
  • 여담으로 증언 도중 살바토레 리이나와 말싸움을 한 적 있다. 리이나 왈, "부셰타는 아내를 여러 명 두고 있는 부도덕한 사람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모두 도덕적으로 산다."며 대화 나누길 거부했는데, 부셰타는 격분하며 살인자가 도덕성을 운운한다며 찰지게 까댔다. 그러나 최고책임자를 만나자 자부심을 가졌지만, 정작 아들들을 살해한 자를 만나자 눈에 띄게 내성적으로 변했다고.
[1] 그런데 부셰타가 처음으로 한 범죄는 다름 아닌 담배 밀수(...)[2] 팔코네 판사와 부셰타와 함께 막시 재판을 이끈 주역이다. 그러나 결국 1992년에 마피아에게 팔코네 판사가 암살당한 지 며칠 후 암살당하고, 그를 기념해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공항은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으로 바뀌었다.[3] 피자 커넥션이 뭐냐면, 1975년 ~ 1984년 사이에서 시칠리아 마피아와 미국 마피아의 연합이 유럽, 북미, 남미, 서남아시아를 아우르는 일련의 체계를 이용, 미국 북동부와 중서부에 있는 피자 가게를 이용해 16억 5천만 달러의 마약을 공급한, 그야말로 대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