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
1. 개요
통일민주당의 창당대회를 조직폭력배들이 방해한 사건.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지시로 안기부가 개입한 대표적인 정치공작 중 하나이다.
2. 상세
1986년 12월 24일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내각제를 전제로 한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지만 이 발언에 김대중과 김영삼은 즉각 반발했다. 그도 그럴듯이 이민우는 비록 당의 총재였지만 어디까지나 양김이 전면에 나서기 힘들어서 내세운 정치 원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민우 구상은 유야무야 흘러갈때 이철승이 87년 월 내각제로의 개혁을 주장하자 당지도부는 이철승을 당기위원회에 제소하게 된다. 그러자 이철승계 의원들의 강력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양김은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회의를 가진 뒤 "신민당 내분은 수습될 수 없으므로 분당이 불가피하다."란 결론을 내고 신민당 탈당과 신당창당에 합의한다. 이때 신민당 현역의원 중 대다수인 73명이 신당 창당에 동참했고 당명은 통일민주당, 총재는 김영삼, 고문에 김대중을 선출한다.
1987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통일민주당 창당대회를 열었는데, 이 기간 동안 통일민주당 사무실 47곳 중 18곳이 조직폭력배들에 의해 불에 타고 잿더미가 되었다. 창당대회 기간이 끝난 후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1] 김용남과 이선준(당시 45세·신민당 청년국 제1부장) 등이 폭력배를 동원한 사실을 밝혀냈다. 김용남에게 창당 방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신민당 총무국 부국장 이용구는 사건 이후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 후 김용남은 1년 6개월간 도피생활을 하다가 경찰에게 검거됐고, 1990년 3월 5일에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이승완 호국청년연합회 의장도 구속됐다.
검찰은 수사 끝에 배후에 이택돈, 이택희가 있었다고 발표하고 사건을 종결처리했지만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다시 재수사를 실시했고, 장세동 안기부장의 후원이 있었단 사실을 알아냈다. 검찰은 장세동을 구속해 전두환의 개입여부를 집중적으로 조사했지만 장세동은 단독행동이라고 주장해 결국 장세동 본인만 형기를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