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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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7년 창당되어 1990년까지 존속했던 개혁보수주의[1] 정당. '''민주당계 정당의 직계 조상이면서도 보수정당의 직계 조상'''이다. 민주당 계열의 친노, 동교동계의 정계 발판이면서도 보수정당 계열의 상도동계, 민주계의 정계 발판이기도 하다.
신한민주당의 다수파인 상도동계(YS)와 동교동계(DJ)가 1987년 4월 선도탈당해 창당한 정당.[4] 그러나 대선 갈등으로 같은 해 10월 말 동교동계가 탈당하면서 평화민주당을 창당, 상도동계와 일부 비주류가 남았다. 그해 12월의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패배하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제2야당(제3당)이 되었다. 이후 3당 합당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뿌리 중 하나가 됐다. 특히 바른정당은 자신들을 YS의 통일민주당을 계승하는 보수정당이 되겠다고 선언하였다.[5]
주로 불린 약칭은 "'''민주당'''"이었으나, '통민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군부독재 시대 이래 약칭으로 민주당을 사용한 첫번째 정당으로, 후술하는 꼬마 민주당 세력이 평화민주당(잠시 신민주연합당)과 민주당(1991년)을 구성하면서 민주당의 계보가 2010년대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2. 역사
2.1. 창당과 분열
이민우 구상에 반대한 김영삼과 김대중의 "빅딜"로 1987년 4월 창당되었다.
창당 당시 전주파 보스 용팔이 등 정치깡패들의[6] 테러로 온갖 동정표를 잔뜩 받은 상태에서 출발했고, 전두환 정권에 대대적으로 반발하며 6월 항쟁을 주도하였고, 결국 6.29 선언이 나오게 하는 기염을 토하였지만....
애초에 쌍두마차 체제로 움직이던 파벌이라 대통령 후보를 놓고 단일화에 실패해 김대중 파벌이 탈당해서 평화민주당을 만드는 바람에 김영삼 파벌만이 남게 된다.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고[7]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부진을 면하지 못하여 제 2야당으로 전락했다.[8][9] 게다가 대통령 선거 직후 한겨레민주당으로 일부 양김이 아닌 세력들이 탈당했다. 하지만 한겨레민주당은 폭망.[10]
이후 평민당, 신민주공화당과 연합해 노태우 정권에 대한 정치적인 견제를 효과적으로 선보여 당시 리더십이 부족했던 노태우에게 '물태우'란 별명을 안겨주기까지 했었다. 도리어 초기에는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평민당보다 강경했던 측면도 있었다고.
2.2. 위기와 3당 합당
강원도 동해시 국회의원 보궐선거의 후보 매수 사건으로 김영삼 총재의 측근인 서석재 사무총장이 위기에 놓이면서 김영삼의 차기 대선 자체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태우가 이미 김종필을 끌어들인 상황에서 김영삼을 꼬셔서 '''보수대연합'''을 추구했고 민주자유당으로 3당 합당을 했다. 당연하게도 당시에는 보수주의라는 이념을 떠나서 저마다의 목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민주세력이 뭉쳐서 독재정권에게 저항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재야를 중심으로 '''"김영삼이 민주화를 뒤로 한 채 군부와 야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대한 김영삼의 답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
물론 3당 합당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쪽에서는 결국 야합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니 군부세력에 빌붙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폄하하지만, 당내 소수파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하나회'''를 완전히 뿌리뽑아버리고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사실상 주도한 점은 긍정적이다.
원래 김영삼과 그를 위시로 한 부산경남 민주세력의 일원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경력에 있어서 첫 정당이기도 한데, 이때 3당 합당을 반대하면서 잠시 유명해졌다. 합당 반대 인사들은 당에 잔류해 민주당(꼬마민주당)으로 재창당했다. 또한 통일민주당은 이인제의 첫 정당이기도 한데, 그는 노무현과 달리 3당 합당에 참여했다.[11] 김무성 역시 이 당에서 YS 휘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고 YS를 따라 3당 합당까지 김영삼을 도왔다.
3. 상도동계의 신한국당 장악
이들 상도동계 일명 "민주계"는 김영삼 집권기를 거치며 '''신한국당'''의 주류가 되었고, 계속되는 보수정당의 계보에서 이탈하지 않고 보수정당에 잔류해있었기에 현재는 보수로 분류된것이 굳혀졌다. 다만 김영삼도 정계를 은퇴했고,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더이상 단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는 파벌은 아니다. 다들 알아서 각개약진.[12][13] 이로서 3당 합당을 계기로 보수정당도 민주화 세력의 후계를 자처할 수 있게 되었다[14] . 다만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덕룡, 문정수 등 김영삼계 일부 정치인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였다.
4. 지지층
1987년 대선 후 한국갤럽이 조사한 예상 득표율 자료를 인용한 분석 기사에 따르면 20~30대와 대학생, 화이트 칼라 및 고소득층의 지지율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15] 지역구도로 봤을 때는, 양김 분열 후에 김영삼과 상도동계가 주축이 된만큼 PK 지역, 즉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가 주요 지지 기반이었다. 부산이 한때 '''야도(野都)'''였다는 말은 민자당에 흡수된 3당 합당 전까지[16] 라고 보면 된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곳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17] 을 올렸으며 다음 해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부산에서는 금정구, '''단 1석'''을 제외[18] 하고 싹쓸이 했는데 당시 부산, 경남에 출마한 인물들로는 김영삼을 비롯하여 노무현, 김정길, 서석재, 최형우, 신상우, 이기택, 황낙주, 강삼재, 김동영 등 당의 간판급 인물들이었다. 경상남도 중에서도 대도시인 마창진과 진주 그리고 김영삼의 고향인 거제군 정도가 대표적인 지역 기반이었다. 공업, 산업 도시에 젊은 층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향도 있던 셈. 다만 서부 경남지역(특히 대구와 가까워 대구권이라고 불리는 창녕군, 합천군 등)은 민정당 우세 지역들도 많았고, 군사 정권 시절 경제 개발의 덕을 봤던 울산도 민정당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19] , 강동구[20] 등 중산층 거주 지역도 우세지역이었다. 강남3구, 강동구 일부와 당시 새로 개발된 목동, 과천시 등 대규모 아파트 주거 지역이 거의 김영삼 우세 지역이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도 서울특별시 대부분 지역에서는 김대중, 경기도에서는 노태우가 앞섰으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평화민주당 바람이 불었지만[21] , 강남권에서만큼은 김영삼과 통일민주당 지지세가 타 지역에 비해 더 높았다. 이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중산층 이상 계층 및 고학력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22][23] 이러한 지역들은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으로 재편되고 나중에 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꾸면서 '''자연스럽게 보수 강세 지역'''이 되었다.[24] 이렇게 강남3구 및 영남지역의 통일민주당 지지층은 결과적으로 보수화가 진행되며 전체 보수진영의 지지층이 되었고, 2000년대와 2010년대에 걸쳐서 상당기간 동안 1940년대와 50년대생의 보수정당 지지율이 60%대를 넘나들게 하는데 공헌(?)하게 된다. 이 흐름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다만 3당 합당이 이뤄지기 전에도 김영삼의 지지층은 보수 쪽에 훨씬 더 가까운 편이었다. 비록 노태우와 김영삼은 각각 군부정권의 후신과 민주화운동가로서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보수주의자이고, 양측의 지지층 또한 이념적 동질성이 크다는 것이 사실이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투표자 조사를 실시한 한국갤럽의 대표 박무익 소장은 "여론조사를 해보니 우리 사회에 '''보수온건세력'''이 놀라울 정도로 두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65%쯤 될 것인데, 이것은 '''노태우 김영삼의 공동표밭'''[25] 이기도 하다. 그동안 역대 정권이 이룩한 경제성장의 영향을 양김씨는 과소평가한 것 같다. 김영삼 씨는 너무 군정종식론에만 치중했고 집권능력을 확신시켜 주는 데 실패했다."라고 분석했다. #
즉 김영삼 지지층은 노태우 지지층과 함께 보수온건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김대중의 지지층과는 상당히 이념적으로 괴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김영삼의 지지층이 김대중의 지지층과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뭉치기는 했었지만, 이념적으로 분류했을 때 물과 기름같은 관계이고, 오히려 노태우의 지지층과 화학적 결합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3당 합당을 통해 이러한 화학적 결합은 현실화되었다.
5. 정당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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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로고 색깔은 하얀색으로 태극기와 같은 하얀 바탕을 거울삼아 나라와 국민에 힘써 이바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심벌마크는 남색 원 안에 하얀 한반도를 본딴 무늬를 새겨넣었다. '백의민족'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설도 있고, 한민족이 민주주의로 하나되는 정당을 표방한다는 일설도 있고, 민주정의당과 전두환의 어둠에서 벗어나 광명어린 세상으로 가자는 뜻에서 하얀색을 정했다는 일설도 있다. 방송사 선거방송 때도 하얀색으로 나왔던 적이 있다.
당의 색깔이 빨간색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고정된 색깔은 아니었으며, 이런 얘기는 주로 평민당의 노란색과 대비되는 87년 대선 시절 때 나온 소리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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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막 창당했을 무렵의 당기는 이렇게 생겼었다.
1987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3면 기사 참조
6. 역대 총재
7. 역대 선거결과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 김영삼 28.0% (낙선)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24.3% (59/299)
8. 통일민주당 출신 정치인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1] 자유보수주의와 동의어로 보면 된다.[2] 두산백관 신한민주당[3] 한국근현대사전 신한민주당[4] 민주화 이후 YS의 영향이 강한 신한국당, DJ의 영향이 강한 평민당의 뿌리가 이 당이었기 때문에 현재 모든 정당이 이 당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다. 다만 박근혜와 문재인은 YS/DJ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서 통일민주당과의 뚜렷한 연관성이 없다고 평가된다.[5] 실제 통일민주당은 중도좌파인 지금의 더불어민주당과 달리 중도우파 성향의 온건한 자유보수주의 정당이었다.[6] 이승완 전 호국청년연합회 회장도 사건 당시 배후로 지목되었다.[7] 이는 단일화 실패, 군인의 부재자투표의 사실상의 공개투표의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영향이 크다.[8] 득표율에서 2위를 기록했지만 정작 지역구에서 2등으로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시 전국구 의석배분 방식도 득표율이 아닌 지역구의석비율을 따른 배분이었기에, 호남을 석권하고 서울에서 의석수 1위를 차지한 평화민주당에 밀렸다.[9] 평민당이 호남 전지역을 1석 빼고 석권한 반면 통일민주당은 부산에서는 1석 빼고 석권하였으나 경남에서는 민정당에게 패배하였다.[10] 한겨례민주당은 박형오 1명이 당선됐으나, 평화민주당에 입당한다.[11] 참고로 이인제는 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경기도 안양시 갑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12] 사실 2010년 이후에도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옛 상도동계 인사도 거의 없다. 이건 오랜 라이벌이었던 동교동계도 마찬가지. 각자 보스도 이미 정치를 떠났고, 다들 나이도 먹었고. 이제는 가끔가다 모여서 친목회나 하는 정도로 보면 된다.[13] 참고로 3당 합당 당시 상도동계에서 나이가 적은 편이었던 '김무성'이 2017년에 '''66세'''로 새누리당 대표였으며, 정병국 역시 바른정당 1대 대표였다.[14] 당시 민주화 운동은 참여한 각 주체의 세부적 이념은 다를지라도 반독재정권이라는 기치로 모였으므로 이념을 가릴 것이 없었다. 애초에 프랑스 혁명부터 보수적인 혁명이다.[15] 이전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1위라고 나와있었는데 해당 갤럽 자료에서 해당 종교 신자들에게 1위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후보는 김대중 후보였다. 김영삼 후보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2위, 노태우 후보가 3위.[16]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학생 시위도 마산과 부산에서 시작됐으며 부마민주항쟁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6월 항쟁 때도 서울과 함께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곳이었다.[17] 의외로 노태우가 부산, 경남지역에서도 30~40%의 득표율을 올려 크게 선전하였다. 또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 등 서부 경남지역에서는 노태우가 아예 1위를 차지한 곳도 있었다. 김대중 측에서도 4자필승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근거가 김영삼이 고향인 PK에서 70% 이상 압도적인 득표율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노태우가 이곳에서 표를 잠식시키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18] 당시 부산에서 유일하게 민정당 후보가 당선된 곳이 바로 금정구. 가장 영향력 있는 지역 유지인 동일고무벨트 회장 김진재가 민주당 바람을 뚫고 2위인 이대우 통일민주당 후보에게 1,800여 표차로 신승했다. 워낙 지역기반이 탄탄하게 다져놓아 나중에는 아들인 김세연에게도 지역구를 물려줬다.[19] 당시 강남구와 서초구 일대로, 1988년에 각각 분구되었다.[20] 당시 강동구와 송파구 일대로, 1988년에 각각 분구되었다.[21] 물론 서울에서도 김대중이 큰 표차로 앞선 곳이 아니라 많아야 3% 차이로 앞섰을 뿐이었다. 단 총선 때는 평민당 의석수와 득표율이 전부 앞섰다.[22] 이전 버전에는 이 지역의 PK 지역 출신 상경자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해당 지역은 전라도나 충청도 등지에서 상경한 주민들이 많은 서울 타 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경상도 원적자들이 많기는 하나 해당 지역 전라도, 충청도 원적자들의 인구 비중과 비교할 때 선거를 좌우할 만큼 크게 유의미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 지역이다. 또한 서울 다른 지역에 비해 의외로 서울경기 출신 원적자 비중이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이 당시 선거는 경상남도 출신 후보와 경상북도 출신 후보가 동시에 출마했음을 상기하면...[23] 이 지역의 투표 결과를 좌우한 요소는 주민들의 출신지나 원적지보다도 계급 투표적 측면이 더욱 강했다. 아래 후술하지만 김영삼은 화이트칼라, 경제적 상류층에서 지지도 1위를 차지했다. 하기한 갤럽 자료에서, 김영삼은 중산층 이상에게 높은 지지도를 보이고 나머지 노태우와 김대중, 김종필 후보 지지층은 거의 유사한 소득 계층 분포를 보이고 있다.[24] 예를 들어 88년에 통일민주당 당적으로 서초구 을 지역에서 당선된 김덕룡 의원은 이후 해당 지역에서 보수 정당 간판으로 4선을 더해서 5선까지 한다(...)[25] 즉 김대중의 표밭은 좌익세력이라는 뜻이다.[26] 프로필[27] 참조[28] 민주당계 정당으로 분류되지만 이 당의 대다수가 현재의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며, 보수정당 내의 계파 중 하나인 민주계를 형성하기에 보수정당으로 분류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