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지침

 


1. 개요
2. 설명
3. 특징
4. 폭로
5. 폭로 결과
6. 그 후
7. 기타
8. 관련 문헌


1. 개요


報道指針
정부당국이 언론에 대해 정치·경제·사회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 보도하라고 내리는 지침. 이는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방식의 하나로, 현존하는 독재국가나 공산국가에서는 언론에 이러한 보도지침을 내려서 그에 따라 기사를 쓰도록 강요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한 제5공화국 시절 정부가 언론통제를 위해 각 언론사에 시달하던 지침을 말한다. 대한민국 언론계의 흑역사.

2. 설명



이현이 말하는 보도지침 사건

KBS 미디어 포커스에서 2007년에 방영했던, 전두환 정권 당시의 보도 행태 관련 다큐멘터리
제5공화국 시절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계엄령하인 1980년 봄 K공작계획, 7~8월 언론인 자율정화, 11월의 언론통폐합에 이어 12월 언론기본법을 제정하여 언론통제의 기초를 마련하고, 일상적으로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계엄하의 언론검열단을 대체할 새 조직으로서 문화공보부 산하에 홍보조정실을 신설하였다.
여기서 거의 매일 각 언론사에 기사보도를 위한 가이드라인인 보도지침을 작성하여 은밀하게 시달하였고, 또한 동시에 국가안전기획부, 국군보안사령부, 경찰 정보국등을 동원하여 노골적으로 겁박하는 방법으로 정부는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그러나 홍보조정실은 형식적인 부처였고,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실상 보도지침 등의 모든 언론에 대한 내용은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수석비서관실로부터 통보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도지침에 충실하게 따랐던 언론사들에 한해서 취재한 기사의 비중이나 보도가치와는 상관 없이 정권의 비호 하에 신문·잡지를 발행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대중조작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3. 특징


보도지침(홍보조정지침)은 정권안보를 위해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매일 각 언론사에 은밀하게 시달했던 것으로 뉴스의 비중이나 보도 가치에 관계없이 사건이나 상황, 사태의 보도여부는 물론 보도방향과 보도의 내용 및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 '가(可), 불가(不可), 절대불가'의 지시를 내렸다. 어떤 기사를 어떤 내용으로 어느 면 어느 위치에 몇 단으로 싣고 제목도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사진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또는 사용해야 하고 당국의 분석자료를 어떻게 처리하라는 등 세부사항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특히 기사 크기에 대해서는 '조그맣게', '조용히', '너무 흥분하지 말고', '크지 않게', '눈에 띄게', '돋보이게', '균형 있게', '적절하게' 등의 표현까지 동원해 가면서 세밀하게 통제했다. 심지어 방송의 경우에는 9시 뉴스 큐 시트를 정무수석실과 홍보조정실로 보내 뉴스의 크기, 배열, 기자가 리포트하는 말까지 사전에 심의받기까지도 했다.
당시 보도지침 폭로의 주인공이었던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언론사가 보도지침을 어겼을 경우에는 안기부보안사 등의 기관원들이 편집국에 와서 신문사의 존폐 문제를 언급하며 협박했다고 한다. 또한 언론사에 드나들면서 보도를 직접 통제한 기관원들의 규모에 대해서는 "안기부 1명, 보안사 1명, 문공부 홍보조정실 1명, 치안본부와 종로경찰서 직원 등 가장 많을 때는 7명 정도 됐다"고 설명했다. 심지어는 보도지침 위반과 관련하여 언론인들에 대한 구타와 고문까지 상당수 있었다.[1]
한편 각 언론사들은 강압적 군사 독재 정권의 일방적 피해자만은 아니었다. 일례로 보도지침은 언론사 기자 출신의 홍보정책실이나 정무비서실 관료들이 전두환 정권에 적극 부역하면서 수행된 측면도 있었는데,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서, 언론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해직된 후 한겨레 기자와 논설주간까지 거친 신홍범 기자의 표현에 의하면, 보도지침은 '전두환 정권과 제도 언론의 공동 정범'행위였다. 특히 전두환 정권의 청와대와 정부는 보도지침에 협조한 댓가로 청와대나 정부에 출입하는 일선 기자들을 촌지, 뇌물 등으로 철저히 관리했고, 기자들도 받아 챙기는 것을 당연시했다.[2]
일례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을 때는, 정부 당국에서 각 언론사의 사회부장들을 데리고 도고온천 등에 놀러가서 거액의 촌지를 돌렸다. 촌지를 받은 언론들은 권인숙 씨의 성고문 폭로 내용은 보도하지 말고 검찰의 조작, 은폐된 수사 결과만 집중 보도하고, 권인숙 씨의 성고문 폭로를 ‘성을 혁명의 도구화하는 좌경 세력의 책동’으로 몰아가라는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충실하게 따랐다. 법원의 출입 기자들 또한 검찰의 발표 당일 이 사건을 담당한 인천지검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법무부 고위 당국자들로부터 거액의 촌지를 받아서 두둑하게 챙겼다.[3] 심지어 당시 전두환 정권은 1983년도부터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 금싸라기 땅에 지어진 '기자 아파트' 특례 분양 등의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한국기자협회를 통해 일선 기자들에게 안겨주면서, 언론인 전반에 걸쳐 적극적으로 결탁하기도 했다.참고 기사 뉴스타파 '기자와 부동산'
보도지침의 일부를 발췌하자면,
  • 1985년
    • 11월 4일: KNCC[4] 고문대책위 구성, 보도하지 말 것
    • 11월 18일: 대학생 민정당사 난입사건을 사회면에서 다루되 비판적 시각으로 할 것. 구호나 격렬한 플랜카드 사진 피할 것
    • 12월 2일: 김근태 첫 공판 스케치 기사나 사진 쓰지 말고 공판 사실만 1단으로 쓸 것[5]
  • 1986년
    • 1월 15일: 민정당 전당대회 대통령 치사 1면 톱기사로 할 것.
    • 3월 31일: 고려대 교수들 개헌지지 성명 사회면 1단으로. "김영삼, 김대중 야욕 버려야" 발언은 눈에 띄게 보도할 것
  •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관련
    • 오늘 오후 4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크기는 재량에 맡김).
    • 검찰 발표문 전문은 꼭 실어줄 것.
    •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 줄 것.
    •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할 것.
    •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보도 내용 불가.
    •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여성단체 등의 사건 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또한 보도지침은 해외 사건도 얄짤없었는데, 일례로 1986년 세계적인 톱뉴스였던 필리핀 민주혁명이 헤드라인이 아닌 국제면에 작게 취급되는 것으로 끝났다. 정부가 필리핀 국민들이 독재 정부에 대해 반대 시위를 하는 모습이 국내에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 또한 혁명 이후 1986년 2월 7일 필리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을 때도, 독재자 마르코스와 맞서는 세력에 대해 잘 써주지 말라는 보도지침('야권 후보인 코라손 아키노 이야기를 부각하지 말 것')을 내렸다. 또한 '필리핀 선거 기사를 너무 크게 취급하지 말 것', '필리핀 선거 관련 기사는 1면에 싣지 말고 외신면에 실을 것' 등을 지시했다. 특히 2월 10일 자 보도지침에서도 '필리핀 선거 관련 기사 (1) 1면에 내지 말 것, (2) 가급적 간지의 한 면으로 소화하되 여러 면으로 확대 보도하지 말 것, (3) AFP 통신의 가상 시나리오와 미국, 일본, 유럽에서 본 필리핀 선거 등은 박스 기사로 싣지 말 것' 등의 보도지침을 내렸다.
그 외의 사례들은 여기를 참조.

4. 폭로


1986년 9월, 해직언론인 단체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지를 통해 폭로함으로써 처음 알려졌다. '말'지는 김주언 당시 한국일보 기자가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권력과 언론의 음모―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이라는 제하의 특집기사를 통해 1985년 10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문화공보부가 각 언론사에 시달한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하였다. 당시 민언협 사무국장 김태홍의 저서 <작은 만족이 아름답다>에서 증언한 내용 등을 토대로 얘기하자면, 김주언이 가져온 보도지침은 김도연 민통련 홍보국장과 이석원 <말>지 홍보차장의 손에 들어간 후, 민통련과 민언련이 폭로 주체를 놓고 온갖 의견이 나온 끝에 김태홍이 극구 주장해 민언련이 폭로키로 결정했다.[6] 기사 원고는 경향신문 해직기자 홍수원이 썼고, 인쇄비는 연합통신 경제부기자 조성부[7]와 재야운동가 김정남이 각각 낸 200~300만 원으로 충당했다.

5. 폭로 결과


폭로 후 세상이 뒤집혀 버렸다. <말> 지 담당이었던 마포경찰서는 사건 후 보복인사를 당했고, 담당형사까지 좌천당했다. 독이 바짝 오른 치안본부 대공수사처는 보도지침을 폭로한 김태홍 민언협 사무국장과 신홍범 실행위원,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하여 남영동 대공분실로 보내 버렸고, 1987년 1월 27일에 서울지검은 이들을 외교상 기밀누설, 국가모독죄, 국보법 위반, 집시법 위반 등을 적용해 기소했다. 3월 6일에 박우정 민언협 실행위원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동월 9일에 정상모 사무국장도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구류 7일을 살았다. 관련자 김태홍은 법정에서 판사가 "보도지침 폭로가 국민에게 득이 되냐?"고 하자, 그는 "국내 최대의 범죄 집단인 현 정권의 비행의 뒷면을 알리는 게 애국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22,000부가 발간됐는데, 22만 부를 못 찍어낸 게 아쉽다"고 목소리 높여 답했다.
이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화추진협의회 등 재야단체들의 비난성명이 잇따랐고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미국언론인보호위원회, 미국·캐나다 신문협회 등도 석방요구서한을 보냈다.
당연히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건조차 국내에선 보도지침에 의해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1987년 5월 13일 5차 공판 때 동아일보가 공판내용을 스케치 형식으로 보도했고,[8] 6월 4일에는 조선일보를 빼고 동아, 중앙, 한국 3개 신문이 보도통제 와중에도 용감히 박스기사식으로 공판내용을 보도했다.[9] 심지어 <월간조선> 및 <신동아> 7월호 역시 각각 '재판방청기'가 게재되었다.

6. 그 후


보도지침이 폭로되자 전두환 정권은 1986년 12월 김태홍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신홍범 조선투위 실행위원, 김주언 기자를 잇달아 구속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 누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와 함께 국가모독죄까지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1987년 6월 3일 서울형사지법에서 김태홍은 징역 10월에 집행 유예 2년, 김주언은 징역 8월에 집행 유예 1년, 신홍범은 선고 유예 판결을 받고 모두 풀려났다.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은 1994년 7월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1995년 12월 대법원은 세 사람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보도지침 사건은 이듬해인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더불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으며, 6.29 선언 이후 언론기본법이 폐지됨과 동시에 문공부 홍보조정실이 폐지되면서 프레스카드제와 함께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 시절엔 '보도요강'이란 이름으로 언론을 통제한 바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1988년 11월 서울지하철노조가 사장실에서 입수해 공개한 <지하철 파업 결의에 대한 대책>이나 '북한 바로알기 운동' 성행 당시 통보된 <북한과 공산권 국가에 대한 보도요강>이 있었고, 동년 10월 국정감사 당시 공개된 <매체조정 활동 보고서>에 의하면 정권 출범 뒤에도 문공부의 언론인 협조요청이 계속되고 있었다.
2013년 5월 발생한 윤창중 대변인 성추행 의혹당시 KBS 내부에 보도지침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는 바, 정권의 언론통제 수단으로 공영방송을 대상으로 부활한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고,# 2016년 6월,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세월호 참사 보도와 관련하여 KBS에 압박을 가한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대통령님이 오늘 KBS를 봤다며 기사를 바꿔달라고 직접 KBS에 압박을 가했다. 심지어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사실상 3, 4, 5공화국 때의 보도지침을 답습한 일이 2010년대에 버젓이 일어났다. 사실은 이러한 지침이 내려지고 있다는 것이 보도만 되지 않을 뿐, 지금도 여기저기서 되풀이된다. 한 지방지에서 중앙 유력지의 청와대 수석의 비리사건 의혹 보도를 인용보도했는데, 여당의 유력 의원실에서 지방지 기자에게 전화해 회사 문 닫을 거냐는 협박을 가하는 등 언론 자유를 침해했다.
보도지침 폭로 당시 기록했던 원고 원본은 1988년 임상택 당시 월간말 상무가 보안을 위해 보관해 오다 2019년 민언련에 기증했고, 2020년 6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기증하면서 일반에 공개했다.(참고)

7. 기타


[image]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위르겐 힌츠페터의 동료인 한국인 기자(정진영)가 다방에서 한국의 정치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작은 보도용 수첩 하나를 보여주는데, 이것이 이 당시의 보도지침을 적은 내용이다. 다만 작중 배경이 계엄하였던 1980년이기 때문에 '보도지침'은 없었고, 보안사에 의한 '보도검열'을 받았다.
영화 1987에서도 동아일보 편집국장 역의 고창석조사 받던 중 사망한 서울대생 언급을 일체 금지하는 보도지침을 지우개로 지워버린다.
2018년 보도지침과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언론 통제의 주체가 정부에서 민간 기업으로 바뀐 것.
5공 당시 나온 보도지침 외에 그 이후 정부에서도, 각종 사건에 대한 보도지침을 내면서 언론을 장악한다.

8. 관련 문헌


  • 보도지침 -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편. 두레. 1988.
[1] 전두환 정권에서 KBS 사장을 거쳐 문공부 장관을 지낸 이원홍 씨의 증언.[2] CBS 변상욱 전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에는 출입처 기자실에 가면 한 쪽에서는 기자단의 총무가 촌지로 받은 돈 봉투를 세고 있고, 한 쪽에서는 고참 기자가 골프 스윙 연습을 하고 있는 광경이 일상적이었을 정도라고 한다.[3] 출처 : 김삼응, '곡필로 본 해방 50년', 한울, 1995년, 381~384쪽.[4] 국내 개신교 교단들의 협의체.[5] 일반적인 신문 지면은 한 면당 총 세로로 5단으로 나뉘어 지는데, 본문을 보면 사이사이 단이 나뉘어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1단은 정말로 별것도 아닌 지면 채우기용 기사를 넣을 때 쓰인다.[6] 원 출처: <작은 만족이 아름답다> - 김태홍 저. 인동. 1999. p116~117.[7] 현 연합뉴스 사장.[8] 해당 기사에 따르면, 당시 변호인측 증인으로 나왔던 박권상과 청암 송건호는 동아일보 출신임이 밝혀지지 않았다.[9] 원 출처: <보도지침> -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편. 두레. 1988. p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