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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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5공화국 당시 대통령경호실장,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했다.
전두환 정부의 실질적인 2인자로 그전에 박정희 정권에 인사로 대입하면 그 권세가 이후락+차지철이라 할 수 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4] 으로 직속 상관인 장태완 소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수장 전두환을 따라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였다. 장태완이 말한 "반란군 놈의 새끼들", "역적놈의 새끼들" 중 1명. 실제로 장태완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장세동을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리기도 했다.
2. 생애
장세동은 1936년 9월 27일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현 도양읍) 용정리 상유마을에서 아버지 장정국[5] 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대방(韓大方)[6] 사이의 3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떠도는 말에 장세동의 본적이 경상북도 구미시이며 그의 아버지는 대구광역시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도 없을 뿐더러 장세동의 14대조 장걸(張杰)로부터 그 이하 직계 선조들의 묘소가 모두 그의 고향인 용정리 상유마을과 그 인근에 있기 때문에[7] 떠도는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또한 경상도 인동도호부 및 성주목 등지에 세거하던 윗대 선조들의 생몰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세거지를 떠나 고흥군 용정리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세동의 13대조 장현윤(張顯允)의 6촌 형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생몰년대가 1554년~1637년임을 감안하면, 못해도 임진왜란 후에는 고흥군에 정착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겠다.
따라서 이러한 낭설은 장세동의 본관지인 인동이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와 칠곡군에 있었던 지역이고, 실제로 현재까지도 이 지역에 인동 장씨가 다수 세거해오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하나회 회원들 중 대다수가 경상도 출신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본관지로만 따지면 장세동의 상관이었던 전두환의 본관은 완산 전씨인데 완산은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이다. 본관으로 지역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하나회는 영남 출신 군인을 우대하기는 했지만 여러 조건[8] 중 월등히 뛰어난 부분이 있으면 1~2가지 조건이 안 맞아도 가입시켰고 장세동은 성적이 좋아서 호남 출신임에도 영입된 것이다.[9] 그런데 정작 국가안전기획부장 시절에 고흥 지역 원로들이 자신을 만나려는 것도 거부했는데, 당시 원로 방문이라는게 주로 청탁에 가깝다보니 이는 처세를 잘 한 것에 가까우며, 실제로 고향 고흥군민들이 박종규 전 대통령경호실장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은 그들의 고향인 창원과 울산을 많이 발전시켰는데 정작 장세동은 높은 자리에 있어도 고향을 위해 해놓은 일이 하나도 없다며 불평하자 "나는 고흥의 안기부장, 경호실장이 아니다. 나라 전체 일을 하라는 자리지, 특정 지역을 발전시키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마인드는 청렴하고 유능한 관료라는 평가를 받았던 남덕우 전 경제기획원장과 흡사했으며, 남덕우 또한 원로 방문을 거절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편, 장세동이 4살 되던 해, 아버지가 있던 경성부로 가족 전체가 이사하여 신설정(현 동대문구 신설동)에 정착하였다. 그의 아버지 장정국은 8.15 광복 후 서울성북경찰서 순경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곧 그만두고 대한토건협회에서 근무하였는데, 집안 형편은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한다. 신설동에서 살면서 당시 집 근처에 있던 서울창신국민학교에 입학하여 훗날 육군사관학교 16기 동기생이 되는 이종찬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1945년 광복이 되자 3학년이던 그의 가족들은 동대문구 돈암정(현 돈암동)으로 이사하였고, 학교 또한 돈암국민학교로 전학하여 1949년 졸업하였다. 국민학교 졸업 후에는 엔지니어가 되려는 꿈을 안고 성동공업중학교 기계과에 진학했는데,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당시 전쟁 발발 하루 전인 24일에 부친의 수술로 인해 미처 피난을 하지 못했던 그의 가족들은, 8월 말에 식량을 구하러 집을 나간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는 비극을 겪었고, 이에 9.28 서울 수복 때까지 인민군 치하에서 3개월을 지냈다.
9.28 수복 후에는 2대 독자인 아들을 찾으러 상경한 조부 손에 이끌려 경상남도 부산시로 내려갔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고향 전라남도 고흥군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향 마을 인근 신양리(현 도덕면 신양리)에 있던 고흥도양중학교(현 고흥도덕중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 학업을 계속 하면서 농촌 생활을 경험했다. 이후 어머니와 형 장세태(張世太)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그는 동생 장세용(張世湧)과 고향에 있게 되었는데,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동생으로 하여금 할아버지를 모시게 하고 1952년 단신으로 상경했다. 이때 한강 도강증(渡江證)이 없어 차 밑에 숨어 집으로 돌아 왔다고 한다.
상경 후 그는 성동공업고등학교에 복학하였고, 부친의 유업인 토건업을 잇고자 원래의 기계과가 아닌 건축과로 전과했는데, 1951년 9월에 학제가 변경되는 바람에 중학교 3학년 과정을 제대로 이수치 못했던 그는 중학교 졸업장이 없었던 탓에 7년 만에야 중,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의 학업 성적은 뛰어났고 특히 수학에 재능을 보여 당시 담임교사는 공과대학 건축학과로 진학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1956년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하였고, 3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였다.#
1960년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고 임관된 그는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하나회는 PK, TK 등 경상도 출신 군인들이 주축인데 호남 출신인 장세동이 가입한 건 장세동이 소위 '난 놈'으로 통했던 셈. 베트남전에 파병된 장세동은 퀴논 북쪽 24km 탄광 지역에서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어깨에 총격을 당하여 중상을 입었지만 견디면서 전투를 계속해서 부대원들의 사기를 올려 결국 43명을 사살하고 1개 중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귀국해서 육군 수도보병사단 30경비대대에서 작전 장교로 근무하다가 2번째로 베트남에 파병을 갔는데 이 때 베트남에 와있던 전두환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귀국 후 전두환이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할 때 장세동은 그 밑에서 장교로 근무하는 등 전두환의 심복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육군본부와 대통령경호실 경호관을 거쳐 1977년 대령 시절에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부임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는데 장세동이 전두환의 힘만으로 군 내에서 출세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전두환과 인연을 쌓기 전에 베트남전에서 주목받을 정도의 무공을 쌓았기 때문에 귀국 후 군 내에서 출세가 보장된 상황이었다. 때문에 장세동의 능력과 자질을 알아본 전두환이 장세동에게 먼저 접근하여 심복으로 만든 것이라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서 지휘 계통을 어기고 하나회 인맥에 의해 신군부에 가담하고 직속 상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체포하였다. 이 공로로 준장에 승진하며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을 맡게 되었다.
1981년 현역 장군 신분을 유지한채 제3공수특전여단장에서 대통령경호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위의 경호실장 임명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임명 선서 당시 특이한 일화가 있는데 전두환은 장세동에게 임명 내용을 낭독하라 한 뒤 선서를 장세동이 아닌 전두환 본인이 하였다.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경호실장을 임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경호실장이 대통령으로부터 선서를 받은 것이 된 셈. 전두환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는 경호실장이니 경호실장으로부터 임명 낭독 내용을 들으며 자신이 직접 선서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여느 육군 장성들처럼 육군참모총장을 꿈꾸었던 장세동 개인으로서는 별로 원치 않던 자리였으나[10] 각하가 하라면 해야지 어쩔 수 없었다.[11] 이는 전두환이 허화평 비서실 보좌관과 허삼수 사정수석비서관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이후 전두환이 청와대 경호실의 위상을 높여 허화평과 허삼수를 압박하는 목적으로 장세동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주었다.[12]
장세동은 청와대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할 시절 대통령 경호가 단순히 신변을 보호하는 업무를 넘어 대통령의 심기까지 편안케 해야 한다는 이른바 '심기 경호'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대통령의 마음이 편안해야 국정도 잘 되니 심기까지도 경호해야 한다"는 뜻으로 장세동이 만든 신조어다. 실제로 장세동은 전두환이 산책하다 돌부리에라도 걸리면 심기가 불편해질 수 있다며 도로 평탄화 작업을 지시하고 그것도 성에 안 차 산책로에 쌓인 새똥까지 녹여낼 수 있는 약품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했다. 전두환이 찾으면 5분 이내로 갈 수 있게 항상 대기했으며 호출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머리 손질을 하고 전두환이 쓰는 것과 똑같은 향수를 뿌리며 윗옷 양 호주머니에는 지도와 메모용 수첩을 반드시 지참해서 갔다고 한다.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로 전두환의 심기를 편안하게 해서 경호 업무 수행 중 전두환이 물어볼 때 즉시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지나칠 수준의 그의 행동은 다 대통령의 심기를 고려한 행동이었다.*사회"장세동이 전두환에게 과잉충성..." '조사중'인 채로 25년 간 오리무중
1982년 전두환 경호를 위해 악천후임에도 무리한 출격 명령으로 특전사 47명, 공군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명 봉황새 작전을 강행한 지시자로 알려져 있다.[13]전두환 경호하러 가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특전사 53명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대통령경호실장으로서 책임을 져야함에도 불구하고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함께 유임되어 직책을 계속 수행했던 것을 본다면 전두환은 단순히 세력 견제용으로 장세동을 불러들인 차원을 넘어서서 권력 다툼이 난무한 청와대 내부에서 장세동을 매우 신임하고 심적으로도 의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임도 신임이지만 사건 자체도 장세동에게 책임을 묻기에는 조금 곤란한 측면이 있었으며 노신영 역시 비슷한 이유로 유임되었다. 1984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민주화 요구가 거세진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에 임명되었다. 전임 국가안전기획부장인 노신영이 온건한 성격이였던지라 민주화 요구로 반정부 여론이 거세진 당시의 시국에 맞지 않아서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노신영을 국무총리로 영전시켰고 경호실장이던 장세동을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영전시켜[14] 서로를 견제하게 하였다.[15] 그리하여 정권 후반기에 노태우, 노신영 등과 함께 후계자로 주목받았으며 당시 검찰과 사법 기관까지 벌벌 떨게 만들던 국가안전기획부의 위상을 생각하면 사실상 정권의 가장 신뢰를 받는 인사였다. 그가 국가안전기획부를 맡았을 때 일으킨 사건만 여러 건인데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평화의 댐 사건,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야당 국회의원 빼오기 같은 공작에는 꼭 그의 그림자가 있었다. 요약하자면 장세동 본인과 국가안전기획부라는 조직 모두에게 리즈 시절로 이 시기 장세동은 정권의 힘을 등에 업고 초법적인 권세를 휘두르며 "남산의 대통령"으로 불렸다. 이후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국가안전기획부는 온갖 비난을 받았으며 6월 민주 항쟁의 물결 속에 물러났다.
전두환의 심복으로 찍혔기 때문에 같은 신군부 출신인 노태우가 집권한 후에는 전혀 권력을 얻지 못하고 청문회에 불려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하나회 내에서 전두환 파벌과 노태우 파벌이 경쟁하게 되었고 전두환계인 박희도, 최세창 등이 줄줄이 정리되는 상황 속에서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낸 장세동은 눈엣가시라고 봐도 무방했다. 장세동은 청문회에서는 비교적 당당한 모습으로 일관하여[16] '의리의 사나이', '의리의 돌쇠'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노태우의 심복이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바로 미국으로 도망갔던 것과 대비되어 전두환이 인복은 많았다고 비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전두환이 현재까지 건재한 이유는 전두환의 리더십이 매우 뛰어났고 그에 감화된 측근들이 버텨 주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설이 있는데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으로 1993년 장세동이 전두환을 대신해서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갔고 출소한 뒤 바로 전두환을 찾아가 인사하며 '각하! 휴가 다녀왔습니다!'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장세동을 크게 치하하며 장세동에게 수십 억원을 줬다고 한다.[17] 여러번 5공 세력을 규합하여 정계에 진입하려고 했으나 음험한 이미지가 굳어져서 할 수 없었으며 전두환이 나들이라도 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 소위 "역사 바로 세우기" 때 전두환과 함께 구속되어 12.12 군사반란 가담 혐의로 3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과의 합의를 통해 사면시켰고 1998년 최종적으로 복권되었지만 군인연금은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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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는데 수많은 정치인들이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당적을 옮기는 등 철새 행각을 벌이며 의리와 소신이 사라지고 배신과 변절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자신과 같은 의리있는 사나이가 나서야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다는 명분이었는데 어차피 본인은 전두환에게 충성한 거지 국민에게 충성한건 아니니 전두환도 지원을 안 해주게 된다. 이로써 득표율이 처참할 듯하자 투표일 하루 전날 후보를 사퇴하였다. 전두환의 말로는 출마 전까지 극구 반대했으나 기어코 출마를 해버리자 "세동이도 나이 먹으니 내 말을 안 듣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군소 후보 토론회에서 사회당 김영규 후보에게 위의 말로 극딜을 당했는데 김영규 후보는 "쿠데타의 주역과 악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토론회 전부터 밝혀 끝내 장세동 후보와 토론회 이후에도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 이는 '과거 청산'을 공약으로 내세운 사회당의 정책이 있기 때문이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초구 을 후보로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하였다.“지난 79년 오늘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오늘 그 정권의 하수인과 같이 자리한 것이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다.
3. 여담
- 2013년 11월 '취재파일 K'에서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으로 인해 장세동 씨에게 청구된 구상금 6억여 원이 아직 납부되지 않았다는 신문기사가 보도되었다.#
- 2014년 6월 13일 장세동 등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장성 10명이 국방부를 상대로 군인연금 지급 거부 취소 소송을 제기했으나 원고 패소 판결했으며 위헌법률심판제청 또한 기각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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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홍학표가 캐스팅되었는데 외모상 싱크로율이 높아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5공 청문회 영상을 보면 목소리까지도 복붙 수준이다. 드라마 초기에 출연한 김재규 역의 김형일은 외모만 흡사했지 목소리가 정반대였던 걸 감안[18] 하면 장세동은 가히 도플갱어 직전 수준이었던 셈으로 제5공화국이 제작되던 당시에 자신의 역할을 맡은 홍학표에게 연기를 두고 훈수를 두었다고 한다. 제1화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덕화)을 만나 '경호실장이 이렇게 설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불만을 나타내는데 정작 그도 전두환 집권 후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본다면 묘하다. 다만 이승만 때 곽영주나 박정희 때 차지철과는 달리 경호실장 시절에는 대놓고 설치는 스타일은 아니기는 했으며 경호실장 시절에는 허화평-허삼수, 노신영 등이 권력을 서로 견제하는 구도였기 때문. 드라마에서도 경호실장 시절의 장세동은 정치적인 사안보다는 군부 자체 문제나 허화평-허삼수 견제 등에 전두환에게 조언하는 모습으로 주로 나온다. 물론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되고부터는 야권 분열 등 정치 공작이나 서울 물폭탄,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등 각종 공안 이슈를 조작하고 실행하는 간교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극 중 전두환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선배인 노태우나 정호용 등에게는 거의 무시하는 태도로만 대한다.
- 영화 퍼펙트 게임(2011)에서는 장세동을 모티브로 한 듯한 어떤 높으신 분이 선동열과 최동원의 선발 맞대결을 영호남 갈등을 부추기는 이벤트로 써먹기 위해 분주히 움직히는 장면이 여럿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 5공 정권은 광주 학살의 멍에 때문에 어떻게든 지역 감정을 잠재워보려 노력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공부 하나도 안 한 작가의 헛소리.
- 영화 1987에서는 배우 문성근이 캐스팅되었는데[19] 본인의 정치 성향인 친노와는 정반대 배역인게 특징. 홍학표가 분한 장세동과 같이 빼다 박은 수준의 연기는 아니였지만 배우인지라 친근한 아저씨 같은 말투 속에서도 살벌함이 묻어나는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오히려 홍학표의 장세동처럼 싱크로율을 높이기보다 배우 본인의 자연스럽고 능청스런 연기를 통해 상당히 입체적이고 이중적인 인물로 그려내었다.[20]
5. 소속 정당
[1]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2] 도양읍·도덕면 일대에 인동 장씨가 많이 산다. 장성민 전 국회의원은 도덕면 가야리 출신이며, 가수 거미의 어머니 장숙정은 도양읍 봉암리 녹동마을 출신이다.[3] 남산(南山)파 18대손 '''세(世)''' 재(在) 항렬. 인동 장씨 33세.[4] 함께 쿠데타에 가담한 김진영이 지휘했던 33경비단과 함께 現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의 전신.[5] 족보명은 장지홍(張志鴻), 자는 형국(亨局). 인동장씨대동보 15권 남산파 1451쪽 참조.[6] 참판공파 28세 한임회(韓壬會)의 차녀이다.[7] 직계 선조 묘소 위치; 14대조 걸(杰), 13대조 현윤(顯允), 7대조 수기(壽起) : 도양읍 용정리 남암마을 / 12대조 흥일(興一) : 도양읍 관리 탑동 / 11대조 수(鐩), 10대조 만태(萬泰), 8대조 지청(趾淸), 고조부 석록(錫錄) : 도양읍 용정리 상유마을 / 9대조 대한(大漢) : 도양읍 용정리 잠두마을 / 6대조 윤흥(胤興), 5대조 순추(順樞) : 도양읍 봉암리 / 증조부 일원(日遠), 조부 채상(彩相), 부친 지홍(志鴻) : 도양읍 용정리 장계산.# / 출처는 1998년 간행된 인동장씨대동보 1권 남산파 21쪽, 277쪽, 3권 805쪽, 15권 1451쪽.[8] 영남 출신, 우수한 성적, 군부 독재 옹호 성향 등[9] 실제로 하나회 멤버 중 호남 출신으로 유명한 인물로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의 고명승도 있었다.[10] 장세동은 단순히 하나회 연줄로만 덕을 보았다기보다는 과거 베트남전 참전 등에서 군인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기에 그런 마음이 더욱 컸던 것도 사실이다.[11]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전두환이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내 마음이 외로워서 그랬다며 장세동에게 미안하게 되었다고 달래기도 한다.[12] 허화평과 허삼수는 당시 예편한 민간인이었지만 예편 최종 계급은 장세동과 같은 준장이었기 때문이다.[13] 정확히는 707특임대원 47명과 공군 6명이 사망했다.[14]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과 경호실장은 지금과는 달리 각각 부총리급, 장관급이였다.[15] 이 때 노태우의 손아래 사촌처남이자 당시 대통령비서실 법률비서관 겸 정무비서관이던 박철언을 자신의 특별보좌관으로 데리고 갔다.[16] "본인의 지시, 책임"이라 말하는 장면도 많았다고 함[17] 이 일화는 썰전에서도 소개되었는데 장세동이 받은 돈이 18억원이라는 것을 알자 김구라가 한 말이 '할 만하네 돌쇠!'[18] 외모도 얼굴만 비슷했지 김형일은 180cm가 넘는 풍채가 좋은 편인 반면 실제 김재규는 170cm도 안되는 왜소한 인물이었다. 목소리도 김형일은 중후한 남성적인 목소리인데 반해 실제 김재규의 목소리는 약간 높은 편이다.[19] 극 중에는 장씨 성만 나오고 이름은 후반에 1번 나오나 1987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장세동이다.[20] 극 중에서 박처원 대공수사처장을 맡았던 김윤석은 싱크로율을 높이면서 공산주의자의 손에 가족을 잃었다는 설정을 더하여 훌륭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었다.[21] 3당 합당에 참여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