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포우 6세

 




<colcolor=#000000> '''통가의 국왕'''
Tupou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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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호에이투 우누아키오통가 투쿠아호
(ʻAhoʻeitu ʻUnuakiʻotonga Tukuʻaho)
'''대관식'''
2015년 7월 4일
'''재위 기간'''
2012년 3월 18일 ~ 현재
'''출생일'''
1959년 7월 12일 (현재 64세)
'''출생지'''
통가 누쿠알로파 통가왕궁
'''아버지'''
투포우 4세
'''어머니'''
할라에발루 마타아호 아호메에
'''배우자'''
나나시파우우 투쿠아호(1982년 결혼)
'''자녀'''
라투푸이페카 공주(1982년생)
투루포토 울루칼라라 왕세자(1985년생)
아타 왕자(1988년생)
'''형제자매'''
투포우 5세
누나 살로테 공주
형 파타헤이 왕자
통가의 국왕. 이름은 아호에이투 우누아키오통가 투쿠아호(ʻAhoʻeitu ʻUnuakiʻotonga Tukuʻaho)이다.
1. 생애
2. 치세 기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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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959년 통가 왕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투포우 4세였고, 어머니는 통가 제국[1]의 마지막 군주의 외고손녀였던 할라에발루였다. 3남 1녀 중 막내였다.
영국의 레이 스쿨에서 공부하였고,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1980년까지 수학했다. 통가로 돌아와 1982년 통가 해군에 입대하였다. 1988년에 미 해군 전투학교를 수료하였고 1990년부터 1995년까지 퍼시픽급 초계정의 정장으로 근무했다. 해외파병이 잦은 통가군의 특성 탓에 평화유지군으로 부건빌 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90년대에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에서 국방 관련 연구와 본드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엔 통가 정부로 자리를 옮겨 국방장관과 외교장관을 지냈다. 전임자는 형이었다. 그후 2000년에 12대 총리가 되었다.[2] 2006년에 갑자기 사임하였는데 원인으로는 2005년부터 통가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가 잦아져 왕실 사람이 정부 자리를 맡는 일을 줄인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 총리였던 펠레티 세벨레는 왕실이나 33개의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첫 평민 총리였다.[3]
장남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나라에서 3남이 왕위를 이어 받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이어 받게 되었다.
48년생이었던 형 시아오시는 2006년에 아버지가 죽자 왕위를 이어 받아 투포우 5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신장에 생긴 종양 등으로 2012년에 홍콩에서 사망했다. 투포우 5세는 즉위 전에 사업 등을 해서 왕위에 즉위하던 당시에 이해충돌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통가에 민주주의를 전파한 묘한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한국일보의 관련기사 시아오시는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사생아로 딸을 하나 두었다. 통가는 여성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살로테 투포우 3세 여왕의 전례도 있고), 사생아라서 제외된 것이다.
51년생인 누나 살로테는 통가의 외교관이자 귀족[4] 투이타 추장과 결혼하였다.[5] 슬하에는 딸이 4명이 있다.
53년생인 형 파타헤이 왕자는 평민과 결혼하면서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다. 평민이라고 해도 타히티의 족장의 딸이었지만 통가에선 인정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뒤에 사모아의 대추장 말리에토아 타누마필리의 딸 알라일레울라와 결혼하였고 딸 하나를 두었다. 2004년에 파타헤이 왕자는 아버지 투포우 4세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런 이유로 2012년에 형 투포우 5세가 죽자 아호에이투는 왕위를 계승했다. 대관식은 2015년에 통가 최대의 교회인 프리 웨슬리언 교회에서 치렀고 1만5천명이 참여했다. 통가의 인구가 10만 정도임을 생각하면 15%가 참여한 셈이다.

2. 치세 기간


국왕 본인이 왕자이던 시절에 민주화 운동가들의 운동으로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던 것으로 현지에선 보고 있는데 당연하게도 집권기에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맞이하고 있다. 재임 전인 2008년과 2010년 통가 총선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형이던 투포우 5세의 재임 당시인 2008년 총선 결과를 보면 민주화를 요구하던 인권민주운동(HRDM)이 총 30석 중에 4석을 얻었는데 귀족연합이 지명하는 의원수가 9석, 왕이 지명하는 인원이 12석으로 도저히 민주화 운동가들이 자력으로 집권당이 될 수가 없는 구조였다. 선거로 얻을 수 있는 의석이 9석에 불과하고 21석이 지명직이었으니 유신정우회보다 더 심각했다.
2010년 선거에선 상황이 좀 나아져서 의석수가 26석으로 줄어드는 대신에 선거구가 17개로 늘어나고 귀족이 지명할 수 있는 의석이 9개로 줄어들었다. 이 선거로 귀족인 시알레통고 투이바카노가 총리로 취임했으나, 민주화 운동가들이 세운 프렌들리제도민주당이 12석으로 의석을 대거 늘렸다. 이 12석이 전부 지역구에서 나온 것이었다. 프렌들리제도민주당의 대표인 아킬리시 포히바는 통가타푸 1구에 출마하여 62.5%의 득표율을 기록할 정도였다. 당시 헌법 개정으로 총리를 의원들이 간선제로 뽑게 되었는데 아킬리시 포히바는 정확히 자기 당 숫자만큼인 12표를 받아 귀족인 투이바카노에게 패했다. 포히바는 귀족 내각에서 보건부장관을 지냈지만 곧 사임하였고 귀족들이 무소속으로 의회 활동을 하는 탓에 야당은 아니지만, 사실상의 야당 지도자가 되었다.
2012년에 투포우 6세가 즉위했다.
2013년에는 프렌들리제도민주당을 중심으로 국회의원 중에 총리를 국민이 바로 뽑을 수 있게 선거법을 개정하려고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2014년 선거에선 프렌들리제도민주당이 9석, 무소속이 8석으로 지역구 17석이 결정됐고 귀족 지명 9석이 뽑혔다. 무소속 귀족이나 무소속 지역구 의원에서 지지표가 나왔는지 포히바가 총리로 취임했다.
2017년에는 전직 총리이자 귀족이자 국회의장인 투이바카노가 의회 해산을 요청함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었다. 관련기사 관련기사2 총선이 치러져 프렌들리제도민주당이 지역구 17석 중 14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일궜다. 해산 사유에 투이바카노 의장은 총리인 포히바가 왕실의 권력을 제한하려고 한다고 걸었는데, 왕은 2019년에 개최하기로 한 퍼시픽 게임을 취소한 걸 문제삼았다. 2017년 11월 16일에 치뤄진 선거 결과는 통가 민심은 민주주주의자를 지지하는 모양이다. 26석 중 14석으로 무소속이나 귀족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포히바 총리가 연임했다. 관련글 포히바 총리는 이 선거로 6선 의원이 되어 통가의 최다선 의원이 되었다.
이대로 분위기가 계속 된다면 투포우 6세의 치하에서 통가는 입헌군주제 민주주의로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
2018년에 사이클론으로 통가 의회의사당이 붕괴되었다. 관련글 2019년 9월 12일 포히바 총리가 폐렴으로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치료중 별세했다. 10월 8일 무소속 투이오네토아 내각이 들어섰다.

3. 여담


1982년에 바에아 남작의 딸인 나나시파우와 결혼하였다. 나나시파우는 54년생으로 왕보다 5살 연상이다. 부부는 딸과 아들 둘을 차례로 낳았고, 맏아들이자 둘째인 투로포토가 2013년과 2014년, 2018년에 아들 1명과 딸 2명을 낳으면서 손주 3명을 얻게 되었다.
[1] 950년대부터 1865년까지 존재했던 남태평양의 국가이다. 제국이란 이름이 붙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냥 힘이 센 왕국일 뿐이지 제국이라 할만큼 통치력이 있던 나라는 아닌 것으로 본다. 강역 자체는 남태평양의 넓은 바다 때문에 웬만한 제국보다 크긴 했다. 다 바다라서 그렇지.[2] 왕세자가 총리를 하는 게 군주제가 익숙하지 않고, 그나마 입헌군주제가 익숙한 한국인들에겐 무척 이상하겠지만 전제적인 왕조 국가에선 흔한 일이다.[3] 2018년 기준으로 15대 총리인 민주화 운동가 출신인 아킬리시 포히바까지 15명의 총리는 전원이 남성이었고 2명의 평민을 제외하면 전원이 왕족이거나 귀족이었다.[4] 통가는 여러 지역 추장을 귀족으로 임명했다.[5] 통가는 이미 19세기부터 남자 우선 장자상속제를 택해 여자도 왕위 승계가 가능하다. 영어 위키백과를 보면 살로테는 왕위 계승서열 7위로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