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발
1. 개요
擺撥. 공문을 전달하기 위한 역참 체계.
2. 내용
조선 선조 30년에 도입된 제도로 기존의 봉수제 및 역로제도를 대체 보완하기 위해 등장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봉수제가 사실상 마비되고 국가 행정이 고도화되면서 더 빠른 속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도입된 것. 중국 명나라의 파발 제도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인조의 장인이었던 한준겸이 최초 제안했다. 과거에는 오늘날과 같은 네트워크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국가 통치 차원에서 공문서를 전달하기 위한 체계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주요 교통 거점마다 역참을 설치하였고 파발마를 관리하도록 하여 파발꾼이 문서를 전달할 때 말을 갈아타며 최고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중요한 정보가 신속히 전파되는 게 가능했다. 암행어사의 마패에 새긴 말의 역시 수 역참에서 징발할 수 있는 말과 관계가 깊다.이러한 것은 '기발'이라고 하고, 보발이라고 해서 사람이 걸어서 이동하는 것도 있었다. 굳이 기존의 역로만을 이용하지는 않았으며 지름길 등 최단거리로 이동하는 것을 추구했다. 이 파발길은 차츰 일반 백성과 상인들도 이용하기 시작했고 길이 닦이면서 준 국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서울특별시 은평구의 구파발에 그 명칭의 흔적이 남아있다.[1] 해당 지자체에서는 아예 지역축제로 파발제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기반은 완전히 다르나 정부의 전자문서관리시스템이 이 체계의 후손이라 볼 수 있다.
1583년, 선조 16년부터 관련 법령이 정비되어 보발과 기발로 분리되어 운영되었는데 북발, 남발, 서발로 구분되어 있었다.
- 북발: 서울에서 강원을 거쳐 경흥에 이르는 코스
- 남발: 서울에서 충청을 지내 동래로 이르는 코스
- 서발: 서울에서 황해를 거쳐 의주에 이르는 코스
선조 대에 시작된 파발은 인조-효종을 거치면서 완벽히 체제를 갖추는데 기발의 경우 말을 활용하기는 했으나 밤에는 못움직였던 반면, 보발은 밤에도 진행이 가능해서 의외로 둘의 정보전달력 차이는 빠르면 1일, 늦어도 2일 밖에 차이가 안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