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1. 개요
2. 상세
2.1. 선정 기준
2.2. 극한 직업?
2.3. 제도의 몰락
3. 창작물의 암행어사
4. 나무위키에 등재된 암행어사 역임자
5. 관련 문서


1. 개요


  • 한자: 暗行御史
  • 정식 영어명: Royal Secret Agent(왕실 비밀 요원), Royal Agent(왕실 요원)[1] 혹은 Secret royal inspector. (왕실 직속 비밀 수사관)[2][3]
조선의 관직으로, 민심 시찰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여러 지방을 순행하면서 부패하거나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고을 수령이나 탐관오리들을 잡아내는 임무를 맡은 관직이다. 현대로 치면 대한민국 감사원(어사대와 비슷)에 있는 공직감찰본부, 그 중에서도 기동감찰을 맡는 특별조사국이나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예하 공직기강비서관과 반부패비서관이 지휘하는 특별감찰반 그리고 국무총리 보좌기관인 국무조정실의 공직복무관리관이 운영하는 공직기강조사팀 등이 있다.[4]
암행(暗行)이라는 말 그대로 정규 관직이 아니다. 원래 어사라는 관직 자체는 존재하지만 암행어사는 임시 관직이며, 조선에서 모델로 삼은 중국(명나라)의 제도에도 일반적인 어사는 있으나 암행어사는 없었다. 대신 이쪽은 훨씬 악질적인 동창, 서창 등의 비밀 감찰 기구가 존재했지만. 명나라보다 1,000년이나 전에 있었던 수나라에서는 수문제 시절에 암행어사 비슷한 비밀감찰반을 운용한 적이 있다. 수양제 집권 이후 비밀감찰반을 폐지했다(...)

2. 상세



2.1. 선정 기준


일반적으로 파견하는 어사는 지방에 변고가 있을 때 왕명으로 보내기 때문에 전부 알려지지만, 암행어사는 모두 비밀에 부쳐져서 은밀하게 시찰하기 때문에 며느리도 모른다. 당연히 아무나 뽑히는 게 아니고, 대개 당하관에 젊은 시종신(侍從臣)[5]들 중 대체로 왕이 평소에 눈여겨 보고 있던 충직한 신하들이 암행어사로 발탁된다고 한다.
암행어사라는 말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성종 10년이다.[6] 하지만 워낙 반발이 심해서 주로 시행되지는 못하다가, 본격적으로 틀이 잡히고 파견이 잦아지는 것은 인조 시기부터다.
암행어사는 왕이 직접 임명하며, 임명 시 업무 지침서인 '사목'과 숭례문을 나갈 때 뜯어보도록 하는 봉서 1장을 나무상자나 보따리 같은 데에 함께 담아서 준다. 숭례문을 나서 봉서(封書)[7]를 뜯어보면 "너는 이제부터 암행어사다. 어디 도의 어느 마을에 가서 수령과 관리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보고하라[8]" 같은 임무가 적힌 문서가 있었다. 여기에 신분증 겸 역마와 역졸을 이용할 수 있는 마패(馬牌), 지방 수령이 도량형을 속여서 백성을 착취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시체를 검사할 때에도 쓰이는 인 유척(鍮尺)등을 함께 받았으며, 이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파직되었다고 한다. 또한 봉서를 아무데서나 뜯었다가 적발되어도 파직되는데, 암행이라는 철칙을 어겼다는 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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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의 상징 하면 마패(馬牌)인데, 마패는 길 중간 중간에 있는 에서 을 빌려서 탈 수 있다는 증표이다.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숫자에 따라서 역에서 빌려 탈 수 있는 말의 수가 달라진다. 1마리 ~ 10마리가 새겨져 있었으며[9] 암행어사가 출도할 때에도 증표로 사용했다. 또한 병력으로 쓰인 역졸도 역의 관리인들인지라[10] 역과 밀접한 관계라 하겠다.
암행어사는 지방 관리가 부패해서 백성들이 도탄을 겪고 있다고 판단되면 '출도'(출두)를 통해 정체를 밝히고 관리를 왕명으로 처벌할 수 있었다. 보통 암행어사 하면 흔히 생각하는 게 출도인데, 왠지 보통 출도할 때는 마패를 번쩍 들고 "암행어사 출도야!" or "암행어사 출도요!" 를 외치고 육모 방망이를 장비한 역졸들이 관아로 몰려들어 관아 휘하의 관졸들과 이방, 사또 등을 포박하고 암행어사는 윗자리에 자리를 잡고 재판을 하는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다.

오후에 일제히 길을 떠나 그대로 황혼에 순안현[11]

관아 문 앞에 도달했다. 본관 수령 이문용은 마침 산사로 놀러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관속들은 그를 마중하려고 모두 관문 밖에 모여 있었다. 역졸들이 빠른 소리로 암행어사 출도를 한번 외치니 사람들이 무리지어 놀라 피하는 것이 마치 바람에 날려 우박이 흩어지듯 했다.(중략) 암행어사의 위엄과 서슬은 과연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참 있자 차차 모여들더니 병풍을 두르고 자리를 펴며 책상에 촛불을 밝혀 점차 위엄과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5월 13일자.[12]

물론 암행어사가 비리만 잡는 관직은 아니고, 애초에 완벽한 결정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일단 수령의 잘못이 밝혀지면 죄질에 따라서 관인을 빼앗고 봉고[13]한 다음에, 임시로 지역의 형벌을 심리하고 백성들 민원도 좀 들었다. 임무가 완전히 끝나면 수령의 행적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는데, 별단으로 민정과 효자, 열녀 등에 대한 미담도 적어서 효자문이나 열녀문이 건립되는 계기도 되었다. 봉고당한 수령은 보통 관할 감영에 끌려가 수감 뒤 왕명을 기다린다.

(전략) "나는 해주에 사는 사람으로 묏자리 송사를 벌이다 자산에 귀양 갔는데, 다행히 용서는 받았지만 돌아갈 길의 양식을 마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앞으로 함경도로 들어가 잘 아는 수령에게 구걸할 계획이며, 마침 붓과 먹을 얻었으므로 그것을 팔아서 여행 밑천으로 삼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한편으로는 믿어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의심도 하였다. 기생들 여럿이 앞에 앉아 있다가 쌍륙을 놀기에 내가 말을 놓아 주었다. 기생 하나가 살짝 웃으며 말하였다. "손님 손놀림이 꽤나 익숙하고 말씀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니, 결코 곤궁하여 구걸하러 다니는 분이 아닙니다."(후략)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4월 14일자.

아침에 비가 왔다. 오후에 업무 조사가 끝났으므로 공개 행차를 하며 성천으로 향했다. 밤에 유선관에 들어가 묵었다. 본관 수령은 서희순(徐熹淳)이 새로 부임했다. 기생들과 도장 관리를 맡은 자들이 서로들 가만가만 하는 말이 "어사또의 용모가 접때 구걸하러 관아에 들어왔던 길손과 흡사하다"라고 하여 웃음이 나왔다. 이날 50리를 갔다.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6월 19일자.

미국 CBS에서 방영한 예능 프로그램 언더커버 보스가 기업의 회장이 자신의 회사에 말단직원으로 위장해 회사를 살피는데 마치 암행어사 같다.

2.2. 극한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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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렛츠고 시간탐험대라는 예능에서 "조선 시대 암행어사의 생존율이 30% 미만"이라는 내용을 방영했는데, 이는 역사적 기록이나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소설이다.
이에 대한 비판점은 다음과 같다.
  • 첫째로 왕과 암행어사의 관계는 엄청 각별했다는 점이다. 암행어사는 오직 임금만이 간택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를 뽑을지 말지, 누구를 뽑을지, 어디로 보낼지도 모두 임금만의 권한이었다. 신하가 주제넘게 암행어사의 파견을 주청했다고 책망받거나 파직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즉, 수령이 암행어사를 죽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임금에 대한 도전, 즉 역모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박문수 조차도 영조와 독대를 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암행어사가 파견지에서 죽었다면, 가장 의심받게 되는 대상 1순위는 누구일까?[14] 수령 입장에서는 굳이 저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15]
  • 둘째로 암행어사로 간택된 이들은 대다수가 문관, 그것도 경험 있는 완숙한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흔히 암행어사 생존률 30% 미만설과 함께 세트로 묶여다니는 낭설이 바로 "암행어사는 죽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젊고 건강한 무인 출신을 뽑았다."라는 것인데, 실제로는 이와 정 반대로 암행어사들은 절대 다수가 노련한 문관 출신들이었다.[16] 영조실록에 따르면 삼사(三司)와 시종(侍從) 가운데 공정(公正)하고 강명한 자를 가려 보냄이 암행어사 선발의 원칙이었으며, 암행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수령을 지내 시무(時務)에 숙달된 자를 뽑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7] 왜냐하면 수령을 지내지 않은 자는 외방의 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암행어사는 일찍이 수령을 지내고 물정에 아주 익숙한 자로 뽑아서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실제로 연소하고 경험이 없는 어사의 경우 남 몰래 갔다가 남 몰래 돌아오는, 즉 한 번도 출도하지 않는 미숙함을 보여 처벌받은 사례가 있다.
실존 인물들을 예로 들자면 암행어사의 대명사인 박문수도 문관이었으며, 퇴계 이황, 만포 심환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도 모두 문인 출신이다. 특히 심환지의 경우 42살에야 급제하여 환갑이 다 된 58살 때(정조 11년, 1787년) 호서(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암행 일지인 <서수록>을 남긴 문관 출신 박내겸은 아예 나이 40살이 넘어서 암행어사로 임명되었으며,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존 모델인 성이성 또한 문관 출신이다. 즉 정말 암행어사의 생존율이 그토록 낮았다면, 튼튼하고 오래가는 무관 출신들을 파견하지 문관들을 파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18]
  • 셋째로 암행어사는 절대 혼자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암행어사는 반드시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활동했다. 물론 시대나 상황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박내겸 같은 경우에는 동행하는 무리가 무려 12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박내겸은 조를 짜서 따로 활동하고, 만나고를 반복 했다. <해서암행일기>를 저술한 박만정도 6명의 일행을 거느렸으며, 심지어 정조실록에서는 어사들이 어중이 떠중이들을 다수 데리고가서 정체가 들켜버리니까 정조가 이런 무리의 수행을 금지시킨 일도 있었다. 이런 점을 볼 때 어사가 산지나 험지에서 홀로 객사할 가능성은 굉장히 적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상단 등 여러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집단으로 위장하고 다녔다.
오히려 어사들은 각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외진 곳보다는 일부러 인파가 많은 곳을 선호했다. 물론 그 점이 어사 입장에서 더 편하기도 하고. 때문에 창작물에서 암행어사의 방자가 1명뿐이라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고, 실제로는 아무리 못해도 최하 3명 이상 데리고 다녔으며, 이들 중 일부는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인 장계를 배달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장계는 보통 문서가 아닌 특수 문서인지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창작물에서처럼 방자가 1명 뿐이라면 임금에게 올릴 보고서는 누가 갖다주게?
게다가 조선의 지리 특성상 어차피 혼자 활동도 못한다. 활동하면서 길을 한번도 걷지 않게 된다면 좋겠지만, 국토의 70%가 산지인 판국에 산길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 무리다. 특히 강원도·평안도·함경도라면 더더욱. 그리고 산에는 호랑이산적이 산다. 마패를 봤다고 그냥 보내줄 분들이 아니시다. 소수의 산적 정도라면 암행어사를 할 정도 짬밥이 있는 양반이면 교양 활쏘기 중급 정도는 될테니 맞서 싸우든지 도망치든지 할 수 있겠지만 호랑이를 만나게 된다든가, 산적이 무리지어 다닌다면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 넷째로 암행어사 제도는 최소 30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암행어사가 제도적으로 정착된 이후 파견된 횟수는, 기록에 의하면 348년 동안 총 613회라고 한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동시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정교한 관료제 국가로서,[19] 어떻게든 국가 인재의 뽕을 뽑아먹으려고 이리저리 굴리고 겸직까지 시키는 나라가 아니었던가.[20] 그런 국가에서 실무에 능하고 노련한 인재들을 생존률 30%도 되지않는 최악의 임무에 투입시켜 날려먹는다? 실제 실록을 보더라도 신하들이 "어사를 보낸 지 오래됐으니 이제 보낼 때가 되었습니다." 라고 주청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국가 인재의 손실이 막심하니 암행어사 제도를 폐지해야 합니다."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생존률이 30%는 커녕 70%라 할지라도 마땅히 제도가 폐지되었을 터인데, 그런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앞서 보았듯이 조정의 대신들마저 "어사는 정기적으로 보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3. 제도의 몰락


물론 암행어사 제도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며, 어사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사망자가 없던 것은 아니었고, 실록에 기록이 남아있기에 상세히 알 수 있는데

전라도 암행어사 홍양한(洪亮漢)이 태인현(泰仁縣)[21]

에 이르러 갑자기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중독(中毒)된 것이라고 의심했다.

영조실록 101권, 영조 39년 4월 9일 병신 4번째 기사 1763년 건륭(乾隆) 28년

평안 감사 김이교(金履喬)가 청북 암행어사 임준상(任俊常)이 강계부(江界府)에 이르러 갑자기 구토와 설사를 하다가 죽었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지금 평안 감사의 장계를 보니, 놀라움과 슬픔을 금하지 못하겠다. 평소 그 사람이 쓸 만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복명하기를 기다려 발탁해 쓰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참혹하고도 참혹하다. 소중하기로 말하면 이목(耳目)의 구실을 맡겼고, 공로로 말하면 사신이 들판과 늪 지대를 알리는 것보다 더했는데, 그 죽음 또한 국사 때문이었다. 별도로 돌보아주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고 청북 어사 임준상을 특별히 동부승지로 증직하고 널을 싣고 돌아오는 것과 장사를 치르는 절차에 대하여 각도로 하여금 특별히 돌보아 주게 하라. 그리고 그에게 아들이 있으면, 나이가 성년(成年)이 되지 않았더라도 복을 벗기를 기다려 채용하라고 해조(該曹)에 분부하라.” 했다.

순조실록 25권, 순조 22년 6월 26일 무진 1번째 기사 1822년 도광(道光) 2년

경상 감사(慶尙監司) 남일우(南一祐)가, ‘우도 어사(右道御史) 조병로(趙秉老)가 죽었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지금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은 평소에 쓸 만한 인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복명한 뒤에 크게 등용하려고 했는데, 이런 소식이 올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슬픈 일이다. 슬픈 일이다. 귀와 눈 같은 중요한 직책에서 3년 동안 애써 수고했으며 국가에 봉직하다가 죽었으니, 조정(朝廷)에서 우휼지전(優恤之典)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고 영남우도 암행어사(故嶺南右道暗行御史) 조병로에게 특별히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는 동시에, 원래의 치부(致賻) 외에 후하게 더 지급하라. 반구(返柩)와 귀장(歸葬) 등의 절차는 특별히 해도에 신칙하여 규례를 벗어나서 각별히 비호하며, 그의 아들은 나이에 구애받지 말고 상을 마친 뒤에 즉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했다.

고종실록 23권, 고종 23년 5월 17일 기유 1번째 기사 1886년 조선 개국(開國) 495년

정작 실록에 등장하는 임무 중 사망한 암행어사 기록은 이게 전부다.
각각 내용은
  • 영조실록 - 전라도 암행어사 홍양한 의문사. 독살로 추정된다는 내용.
  • 순조실록 - 청북(평안북도) 암행어사 임준상이 설사와 구토로 사망했다는 것을 전해 듣자, 그에 대해 보상할 것을 명하는 내용.
  • 고종실록 - 경상우도 암행어사 조병로의 사망을 전해 듣고, 그에 대해 보상할 것을 명하는 내용.
이다.
이 내용은 약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암행어사 제도사에서 극히 일부분이었고, 또 희귀한 사례였기 때문에 기록에 남을 수 있었다. 정말 암행어사의 생존률이 30% 미만이었다면 무려 3번씩이나 암행어사를 역임한 성이성[22]은 최대 2.7%의 극악한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전투종족이라는 말이 된다.
오히려 암행어사들은 무사히 임무를 완료하고 난 후에, 정치 보복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는 자신들이 암행어사 시절 파면한 관리들의 미움을 사[23] 훗날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다. 고종조에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던 이건창[24]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을 탄핵하고 여러 활동을 했는데, 애먼 선비를 장살했다는 이유로 결국 평안도벽동에서 1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추사나 다산처럼 벼슬길 포기하는 루트를 타지는 않았지만서도.[25] 어쨌거나 암행어사와 수령의 파워 게임에서 밀리면 어사가 깨갱이 된 경우도 많았다.
다만 저런 근거없는 낭설이나, 사망 사례들, 정치 보복 사례 등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일단 암행어사가 엄청나게 고생스러운 보직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가령 보고서를 써서 올려야 되는데, 너무 자주 쓴다, 너무 안 쓴다, 너무 악필이다, 문맥에 안 맞는다 등등 갖은 이유로 징계를 받기도 했으며[26], 활동비는 심각하게 낮아서 사실상 그 돈으로는 활동이 불가능한데, 다른 사람에게 식량 등을 조달하는 것을 전부 뇌물로 봤기 때문에(이것도 사실 마찬가지다), 그 상황을 견디다못해 부패한 지방관리와 오히려 결탁해버린 사례도 있었다.
좀 심한 경우는 인근 고을에 암행어사가 나타나면 주변 고을 수령이 미리 알아채고 성문을 닫고 농성하거나, 반대로 아예 관아를 비워버리거나, 군사를 풀어 어사를 잡아다가 협박하는 경우. 그리고 어사출두할 때 튀어나오는 병사들은 평소에는 역(驛)에서 일하는 역졸이나 다른 관청의 병사들인데, 여기서 병력차출하면 인근 고을 수령들의 귀에 들어가기 때문에 대응할 시간을 주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춘향전의 예를 들자면, 변학도가 사또로 있는 지방의 인근 지역인 익산 현감은 이몽룡의 암행어사 출두로 대응할 시간을 엄청 벌어놓은 셈이다.

(전략) 어떤 고개에 도달하여 말과 마부, 수행원을 먼저 보내고 나무 아래에서 홀로 쉬노라니, 추적하는 자가 다가왔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먼저 엉뚱한 일을 말하면서 내 모습을 살폈다. 나는 얼굴색에 조금도 변함이 없이 묻는 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암행어사가 다닌다는 이야기를 꺼내더니 또 가짜 어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남몰래 조사하러 다니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한 내 행동거지가 수상하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더니 민간에서 붉은 실(紅絲)이라고들 부르는 쇠줄을 허리춤에서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길손은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27]

이 지경에 이르러 재앙의 징조가 곧 머리에 닥치는 터라, 나도 대답없이 가슴에서 마패를 꺼내 보이며 말할 따름이었다. "너는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순간 그 사람은 얼굴색이 흙빛이 되어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면서 쳐다보더니 곧 자빠졌는데, 언덕을 따라 판자 위의 구슬처럼 몸이 굴러가다가 평평한 곳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나는 마패를 들어 다시 가슴 속에 넣은 후 밑으로 내려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위로했다. "너나 나나 모두 각자 나라일을 하는 사람이다.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되니 힘을 내서 일을 해 가자." 이어서 먼저 자리를 떠서 고개를 넘어갔다.(후략)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4월 22일자.

위 기록처럼 진짜 암행어사가 잠복한 포졸에게 가짜 암행어사로 오해받아 일어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고, 심지어 전라우도 무안 현감으로 부임한 성수묵이라는 관리는 주막에서 괴한들에게 살해당할 뻔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괴한들의 정체는 바로 2년 전 성수묵이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왔을 시절 곤장을 쳐서 죽인 부패한 아전들의 자식들이었던 것이기 때문.[28]
게다가 가짜 어사로 오인받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을의 사정이나 수령의 행적 등을 물으면 대번에 가짜 어사인지 진짜 어사인지 관심거리가 되곤 했다. 심지어 엄한 심마니가 가짜 어사로 오인받는 소동도 일어났다. 가짜 어사는 왕명을 위조한 것이니, 조선 시대 기준으로도 심신장애를 인정받을 수 있는 희귀한 경우[29]가 아닌 이상 당연히 사형당했다.
이렇게 보기와는 달리 애달픈 직책이다 보니, 암행어사에 임명되자 "제가 전하에게 뭐 잘못한게 있길래 저한테 이러십니까?"라고 끄적거려 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현실은 시궁창.
그 뒤 암행어사 제도는 고종 33년(1896년)에 나이 74세의 정2품 암행어사 장석룡의 보고서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암행어사의 마지막 기록이다. 비공식적 기록으로는 1899년 윤현섭을 충청남도 어사에 임명했다는 봉서가 존재한다. 봉서가 진품이라면 실질적으로는 윤현섭이 마지막 어사인 셈이다.
이 시기는 고종조차도 어사에 대해서 한탄했을 정도로, 어사 제도가 심하게 타락했던 시기였다. 또 겉으로는 진짜 암행어사인 척 하면서 실상은 관가랑 한통속인 쓰레기들도 몇년 전부터 꽤 있었다고 한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점차 강명함을 잃어가기 시작하자, 수백년동안 조선의 버팀목이 되어 준 어사 제도도 결국 그 기능을 다한 것이다.

3. 창작물의 암행어사


1981년에 배우 이정길이 나온 MBC 드라마 <암행어사>가 유명했다. 여기서 호위 무사로 상도가 나왔는데,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캐릭터였다. 만화 신암행어사에서 나온 산도는 바로 이 상도를 변형한 것이다.[30]
앞서 말한 암행어사가 온다니까 사또들이 대비하는 설정을 비틀어서, 1971년에 배우 최무룡이 주연한 <마패없는 어사>라는 작품도 나왔다. 암행어사를 연상케 하지만, 사실은 암행어사가 아닌 최무룡이 전염병으로 가족이 몰살돼 도적질을 하는 남자를 구해서 그를 하인으로 삼아 데리고 어느 탐관오리 고을에 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의 행색을 보고 어사 일행인 줄 알고 한바탕 촌극을 벌인다. 나중에 어사가 아닌 걸로 밝혀져서 곤욕을 치르[31]…다가 알고 보니 폐서인된 왕자인데, 이제 사면 복권되어서 한양으로 소환된다는 이야기.[32]
1992년 KBS2에서 방영한 <비가비>라는 사극이 있는데, 극본은 지상학과 영상작가모임 '윤회'가, 연출은 김재형과 박수동 PD가 공동으로 각각 맡았다. 암행어사가 마패와 노잣돈을 도둑맞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방영 기간 : 1992년 11월 13일 ~ 1993년 4월 23일) 위에 언급대로 마패를 잃어버리면 바로 파직이지만, 드라마 진행상 어사는 파직되지 않고, 일단 노잣돈이 없어서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밭일을 하다가 임시 신분증을 얻어 활동한다. 마패를 훔친 도둑과 그 일당들은 어사 행세를 하면서 어사 대신 탐관오리와 나쁜 양반들을 혼줄을 내주는데, 결국 마지막회에 진짜 어사 일행과 마주쳐서 잡혔다. 그래도 마패로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기에 방면되었다는 훈훈한 마무리로 끝난다. 극중 시대적 배경이 홍경래의 난 직후였는데 이 시기쯤이면 조선의 망조가 슬슬 보이던 때다. 암행어사 파견 정도가 그다지 해결책이 되지 못하던 시기.
1999년 KBS2에서 배우 안재모가 박문수 역을 했던 <어사출두>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극본은 정흥채안정훈이 어사를 돕는 충직한 방자로 나왔고, 송기윤과 금보라, 박경림, 김형자, 강성연, 우희진, 이시내, 이영자 등도 감초같은 연기를 선보였다. 특이하게 암행어사가 한 마을에 머물면서 일종의 경찰이나 보안관처럼 그 마을에 벌어지는 각종 부정부패를 뿌리뽑는 구조였고, 원조교제, 농협 비리, 주가조작 등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은유적으로 풍자하려 했다. 그러나 시청자 중엔 억지라는 비판이 있었고, 고정 출연진 중 이영자(춘몽각 주인 역)가 내용상 분위기가 안 맞자 6회를 끝으로 홧병으로 사망한다는 식으로 하차시켰다. 또 작가를 정경아로 바꿔가며 박문수가 여러 고을을 돌며 사건을 해결한다는 식으로 바꾸고자 했으나 이걸로도 반전시킬 순 없었다.
그 외에 2002년작 MBC 드라마 <어사 박문수>, 2021년작 KBS2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등이 있다.
춘향전의 영향인지 주로 수행원으로 방자를 하나 데리고 다닌다. 하지만 방자는 '고을 원님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하인'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이는 고증오류다. 춘향전에서도 이몽룡이 방자를 데리고 다닌 것은 도령이었을 때지, 어사가 된 뒤에는 함께 행동하지 않았다.[33]
피를 마시는 새에선 사자패주란 이름으로 패러디. 마패 대신 '사자패'를 드는데, 오등작 개념을 쓰는 피마새에서 신분이 백작 취급이다.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미토 고몬(水戶 黃門) 문서 참고.
전설의 고향에도 드라마 제목에 맞게 각종 암행어사 설화가 자주 나왔다. 이 작품에서 암행어사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귀신을 봐도 놀라지 않고 침착히 얘기를 들어주며,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원한을 대신 풀어주고 모든 일을 해결해주는 선한 조력자 역할이다. 주로 이민우와 박진성이 어사 역을 도맡았다.
영화 YMCA 야구단에선 주인공인 호창이 원래 과거시험으로 암행어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여주인공인 정림과 대화를 하는데, 이 때 정림이 '저의 외삼촌이신 이면상 님이 마지막 암행어사이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정림이 호창에게 마패를 선물하는데, 이게 후반부의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했다.
윤승운이 그렸던 조선 시대 배경의 명랑 만화에는 소년 시절에 급제하는 천재들이 몇 나오는데, 이들은 백이면 백 암행어사를 제수받는다. 즉 소년 어사가 되어 자신을 시중들던 하인을 종자로 데리고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슈퍼히어로나 탐정처럼 약자인 민초들의 억울한 사건을 해결하며, 가끔 출도도 한다. 고증오류이긴 하지만 만화적 재미를 위한 과장이라고 보아야 할 듯. 다만 윤승운 작가는 지금보다 자료 구하기 훨씬 어렵던 80년대 작품에서도 '암행어사 사망률 70%' 같은 뻥은 치지 않았다. 암행어사 일이 고달프고 위험하다는 묘사를 하면서도 정말 암행어사가 죽거나 실종되는 건 그 자체로 매우 희귀한 일이라는 묘사도 집어넣었다. 어떤 소년 암행어사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과거 호환을 당해 뼈만 남은 암행어사 유골을 찾아낸 뒤 시신을 수습하고 조정에 알려 신원을 파악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이 암행어사 실종 사건은 신임하던 젊은 신하가 실종된 사태에 국왕이 크게 놀라고 상심하여 1년 이상 실종자 찾으라고 신하들을 들볶은 대형 사건으로 묘사된다. 한편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맹꽁이 서당에도 암행어사가 가끔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대부분 청장년층이다. 등장하는 암행어사 중 한 명은 훈장의 과거 제자인 윤병구다. 맹꽁이 서당이 생기고 30년동안 과거 급제자가 안 나왔다고 하는데 설정 오류인 듯.
스메라기 나츠키의 작품으로 암행어사가 주인공인 단권 만화 <이조암행기>가 있다. 주인공이 너무 젊고 수행원이 적은 게 흠이지만 일본 만화치고는 조선에 대한 묘사가 괜찮은 편. 재야인재 천거라든가, 고응 수령을 파직하진 못해 사직을 권하는 등, 은근히 고증이 좋다. 심지어 애니메이션 츠바사 크로니클에서 암행어사 삼총사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CLAMP신 춘향전에서는 마패의 포지션을 태극팔괘가 그려진 마법 아이템이 대신한다.
신암행어사에서는 신 춘향전처럼 마법적 요소가 추가되어서 3마패 이상은 팬텀솔저라는 군대를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이 추가되었다. 2마패 이하는 그런 것 없이 실존했던 마패와 역할이 동일하다. 그리고 호위 무사 산도와 수행원 방자와 팀을 이루고 다니는 기본이다. 다만 주인공 문수는 정식 암행어사가 아니라 한동안 혼자 다녔다.
김삼의 작품 칠삭동이의 주인공 칠삭동이도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팔도를 모험하였다.
문피아 소설 '유물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는 조지서가 최초의 암행어사로 나온다. 당연히 실제로는 아니다.
소울 칼리버 6의 캐릭터인 황성경 또한 암행어사로 활동하는데, 단순한 암행어사라기 보단 부적을 사용한 도술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승인 원수현도 전직 암행어사.

4. 나무위키에 등재된 암행어사 역임자


  • 김만중: 현종 말엽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으며 보고서까지 올린 기록이 있다.
  • 김정희: 충청도 암행어사로 활동한 적이 있으며, 2011년 11월에 그가 친필로 쓴 암행어사 보고서가 발견되었다.
  • 박문수: 말이 필요 없는 암행어사의 대표적인 인물. 다만 암행어사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존재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 성이성: 춘향전의 남주인공인 이몽룡의 모델. 암행어사를 3번이나 역임했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 千人血)/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肴 萬姓膏)/촉루낙시민루낙(燭淚落時 民淚落)/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 怨聲高)"로 유명한 이몽룡의 시는 실제로는 이 사람이 호남 암행어사 수행 중에 지은 것이다.
  • 심환지: 충청도 암행어사. 58살에 임명되었는데, 암행 중에 보령 근처에서 70살이 다 된 정혁신을 발굴했고, 정조는 그를 초사(初仕) 벼슬, 즉 신입사원에 임명했다. # 실록의 기록. 3, 6째 문단에 주목할 것.
  • 이건창
  • 이시발
  • 이황: 중종 말년에 암행어사로 파견된 기록이 있다.
  • 정약용: 경기도 지역의 암행어사로 활동한 적이 있다. 이 때 그가 지은 한시 <적성촌에서>는 가렴주구로 인한 백성들의 참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조만영

5. 관련 문서



[1] 지금으로 치자면 국정원이나 FBI 같은 정보국 요원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을 듯. 어차피 Agent의 라틴어 어원이 '행하다'라는 뜻의 (한자의 다닐 행(行) 자와 모든 의미가 같다. '행동하다'의 뜻과 '가다'의 뜻이 다 있는 것까지) Agere에서 온만큼 의외로 적절한 번역인 셈이다.[2] 위키피디아에는 이렇게 되어있다.#[3]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의 영제와 소울 칼리버 6황성경 스토리모드에선 이 명칭을 사용한다. [4] 감사원의 경우 공개적으로 신분이 드러나 있기에 명행어사라고 보는게 정확하고 현대의 암행감찰은 대통령비서실과 국무조정실의 감사조직들이 수행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5] 나이가 조금 있는 신하들은 이미 인맥이 있기 때문에 뽑지 않았고, 아예 새파란 젊은이는 경험이 없어 혼자 판단해야 하는 암행어사같은 자리를 맡기기 어려우므로 실무경험은 있으나 아직 이름이 널려지지 않고 인맥이 넓지 않으며 비리의 우려가 없는 젊은 시종신들 중에서 선발했다. 그래서 평균 30대~40대 초반 나이에 암행어사로 나갔다.[6]성종실록》 권111 10년 11월 23일 갑진 2번째 기사. #[7] 봉서는 대개 한양 안에서 뜯는 것이 대부분. 엄격하게 따지자면 당시의 개념으로는 4대문 안이 한성이었고, 그 밖 10리까지는 성저십리라고 해서 한성부 관할의 한양으로 취급했으며, 그 밖을 경기도로 취급했다.[8] 이 직접 특정 지역을 찍어서 살펴보라는 봉서를 내렸다는 건 이미 해당 지역의 첩보가 사헌부 등을 통해 입수되어 왕에게 보고가 올라갔다는 의미다. 암행어사가 출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거나 처벌받은 이유가 이미 첩보가 다 들어왔는데 직접 가서 봤다는 어사가 그걸 못 잡았느냐는, 일종의 직무 태만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9] 10마리는 왕 전용, 영의정은 7마리까지, 암행어사는 보통 2마리 ~ 5마리 정도.[10] 이웃 고을의 정규군이나 포졸 따위를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면 이 지역에 암행어사가 왔다고 광고한 셈이니 출도까지 정보가 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중앙 정부 직속기관이라 지방 수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역참에서 역졸들을 동원하는 것.[11] 지금의 평양시 순안구역[12] 순안 현감 이문용은 박내겸에게 결국 봉고 조치를 당하고, 조정에 봉고 조치가 보고되자마자 관례대로 파직당했다. 여담이지만 주인의 파직으로 끈떨어진 신세가 된 이문용의 하녀가 서낭당에 가서 "내 밥줄을 끊은 암행어사에게 천벌을 내려주세요" 하고 빌었다는 이야기를 후에 박내겸이 듣고 씁쓸해하는 내용도 일기 뒤쪽에 나온다.[13] 관가의 창고 문을 닫고 수령을 직무정지시킴. 암행어사에게는 수령의 직무 정지 명령에 해당하는 봉고 권한만 있고, 파직 등의 처리는 어사에게서 보고를 받은 임금이 할 일이다.[14] 임금은 암행어사 누구누구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두 다 꿰고 있다. 임금이 직접 골라 어디로 가라고 지시했는데 임금이 모를 리가.[15] 이런 부분은 체제가 오히려 왕조국가에 가까운(...) 북한에 빗대서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다. 말하자면 김정은보위부 간부를 지방에 감시하라고 보내는 셈인데, 보위부 간부가 감시 지역에서 죽으면 김정은은 과연 누구를 조질까?[16] 무관도 이런 비슷한 일을 하는 직책인 선전관이 있긴 했다. 선전관도 왕명을 받아 민심이나 각지 형편을 시찰하는 업무를 맡는 경우가 있지만, 이쪽은 대놓고 행동했다. 또한 내관들도 왕명을 받아 바깥에 나가 지시받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어차피 어사라는 표현 자체가 왕명을 받아 행동하는 이를 뜻하다 보니, 암행이 아니어도 공식적으로 어사 호칭을 달고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17]영조실록》 권9 2년 5월 6일 정유 4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11023_002 [18] 물론 무관도 임명이 못 된다는 보장은 없다. 수령은 문관 뿐 아닌 무관에서도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이순신만 해도 정읍 현감을 지낸 바 있다. [19] 어느 정도냐면 지방 구석구석까지 수령을 파견했다. 비록 17세기에 들어서야 완성이 되었다지만 이미 15세기 중반, 세조 기간에 이 시도를 할 정도로 빨랐다.[20] 다만 이것은 최소 비용으로 대규모 관료제를 굴리려다 보니 나온 폐단이기도 하다. 당시 재정구조로는 무리할 정도로 큰 정부를 운영하다 보니,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아전은 사실상 무보수 세습직으로 묶어놓고, 중앙관리는 겸직으로 비용을 절감하려 한 것이다.[21] 오늘날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22] 앞서 서술했지만, 이분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존 모델이다.[23] 각기 서용보와 김우명.[24] 병인양요 당시 순절한 이시원의 손자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도들은 나라를 어지럽히니 마땅히 진압하되, 무고한 백성들까지 해를 입히는 탐관오리들은 더욱 엄중히 벌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서재필이 국내 입국했던 시절에 그의 무례함과 위선을 비판한 적이 있다.[25] 애시당초 이건창의 집안은 지금으로 따지면 국가유공자 급이었다.[26] 사실 이건 암행어사뿐 아니라 모든 조선 관료들이 겪은 고충이다.[27] 당시에 붉은 쇠줄은 관아에 소속된 정식 포졸만이 사용할 수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공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즉 요즘으로 치면 은팔찌(수갑)를 내밀며 "나 경찰이오"라고 말한 것과 동일하다.[28] 주모자는 효수되고 나머지 2명은 감형받아 노비로 전락. 성수묵 또한 당시의 책임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무안 현감에서 파직되었다. 《순조실록》 권32 31년 4월 5일 정해 2번째 기사. 참조.[29] 예를 들면 동네 지적장애인, 아니면 허깨비를 보는 명백한 조현병 환자 정도?[30] 그런데 막상 드라마 본편에서 상도는 큰 비중이 없고, 암행어사의 종(임현식 분)이 더 비중이 크다. 사실 상도 역의 배우가 전문 배우가 아닌 무술인을 섭외했기에 대사가 적다.[31] 결국 참수형을 당하게 되는데, 망나니막걸리 몇 번 뿜은 뒤에 칼로 목을 내리치기 직전에 저 멀리서 "멈추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32] 소매 사이로 보이는 장식용 술을 보고 그게 마패인 줄 알고 모두들 암행어사로 착각했는데… 그건 그냥 장식용일 뿐, 그것도 검도 아닌 웬 (대금으로 보이는) 피리였다.[33] 오히려 기밀이 누설될까 봐 이몽룡이 꾀를 써서 방자를 옥에 가두는 판본도 있다. 방자 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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