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체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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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식 이름인 파체스쿠로 더 잘 알려진 루도우푸 바테츠쿠는 폴란드인의 피가 흘렀다.
데뷔는 고향 쿠리치바의 파울리스트라 이탈리아에서 했고, 나시오날과 보타포구에서 사랑받는 스타 플레이어였다. 1933년에 나시오날에 입단하자마자 도밍구스 다 기아와 함께 파체스쿠의 커리어 사상 첫 우승을 맛보았으며, 연속 우승 후에 브라질로 돌아갔다.
새로운 무대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의 보타포구. 보타포구는 당시 주 리그에서 카르발류 레이치 등을 앞세워 4연속 우승을 하던 강팀이었지만 파체스쿠는 1935년에 한 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그 이후에는 은퇴할 때까지 주로 보타포구에서 활약하였다.
1930년부터 1942년까지 대표팀에서 다소 오래 활약했으며, 그 기간 동안 34경기에 출전 11골을 기록하였다. 그 동안에 2번의 월드컵에 참가하였으며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주로 교체 멤버로 활약하였다.
코파 아메리카에도 1937년과 1942년, 두 번의 참가 기록이 있다. 국제 대회에서는 193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였는데, 4골을 넣어 루이지뉴와 함께 브라질 팀 내 최다 득점자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팀은 아르헨티나와의 최종전 끝에 준우승에 그쳤다.
30년대 중반 브라질 축구계에서 가장 완성된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라는 평가가 있다. 드리블과 골 결정력이 뛰어나 좋은 공격수로 활약했다.
1. 생애
1.1. 클럽
브라질 식 이름인 파체스쿠로 더 잘 알려진 루도우푸 바테츠쿠는 폴란드인의 피가 흘렀다.
데뷔는 고향 쿠리치바의 파울리스트라 이탈리아에서 했고, 나시오날과 보타포구에서 사랑받는 스타 플레이어였다. 1933년에 나시오날에 입단하자마자 도밍구스 다 기아와 함께 파체스쿠의 커리어 사상 첫 우승을 맛보았으며, 연속 우승 후에 브라질로 돌아갔다.
새로운 무대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의 보타포구. 보타포구는 당시 주 리그에서 카르발류 레이치 등을 앞세워 4연속 우승을 하던 강팀이었지만 파체스쿠는 1935년에 한 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그 이후에는 은퇴할 때까지 주로 보타포구에서 활약하였다.
1.2. 국가대표팀
1930년부터 1942년까지 대표팀에서 다소 오래 활약했으며, 그 기간 동안 34경기에 출전 11골을 기록하였다. 그 동안에 2번의 월드컵에 참가하였으며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주로 교체 멤버로 활약하였다.
코파 아메리카에도 1937년과 1942년, 두 번의 참가 기록이 있다. 국제 대회에서는 193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였는데, 4골을 넣어 루이지뉴와 함께 브라질 팀 내 최다 득점자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팀은 아르헨티나와의 최종전 끝에 준우승에 그쳤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30년대 중반 브라질 축구계에서 가장 완성된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라는 평가가 있다. 드리블과 골 결정력이 뛰어나 좋은 공격수로 활약했다.
3. 여담[5]
- 1941년, 파체스쿠가 아직 보타포구 소속일 때 친선경기에서 클루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의 유니폼을 입고 참가한 적이 있다.
4. 수상
4.1. 클럽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2회: 1933, 1934(나시오날)
- 히우지자네이루 주 리그 우승 2회: 1935(보타포구 FR), 1941(플루미넨시 FC)
- 히우지자네이루 주 리그 준우승 1회: 1942(보타포구 FR)
4.2. 국가대표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포르투갈어 위키백과 파체스쿠 항목, 갤러리 풋볼[3] 출처[4] 출처: 포르투갈어 위키백과 파체스쿠 항목, 갤러리 풋볼[5]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