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clearfix]
1. 개요
1934년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2번째 FIFA 월드컵. 1934년 5월 27일부터 6월 10일까지 8개 도시에서 개최되었다. 사상 처음으로 반도국가에서 개최되었다.
이 월드컵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처음으로 지역 예선이 열렸다는 것이다. 지역예선에는 32개의 팀이 참가하여 16개의 팀이 본선에 진출하였고, 대회의 방식은 조별 리그 없이 녹아웃 토너먼트로 우승팀을 가렸다. 녹아웃 토너먼트제였기 때문에 같은 라운드의 경기는 모두 같은 시간에 열렸다. 처음으로 3, 4위전도 열렸으며 이탈리아가 결승전에서 연장 혈투 끝에 체코슬로바키아를 2대1로 제압하고 유럽 국가 중 첫 월드컵 챔피언이 되었다.
2. 개최지 선정
1932년에 이탈리아는 스웨덴과의 유치 경쟁에서 승리하여 제2회 대회의 개최권을 따냈다. 원래 FIFA는 이탈리아가 월드컵을 개최하면 파시스트의 나팔을 불어제낄게 안 봐도 블루레이라서 별로 개최권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스웨덴이 대공황의 여파로 GG를 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에게 개최권을 넘겼다. 이탈리아는 결정이 떨어지자마자 급히 350만 리라의 예산을 편성하여 개최 준비를 했다.
3. 지역예선
지역예선에선 이런 일들이 있었다.
- 디펜딩 챔피언인 우루과이가 불참했다. 우루과이의 불참 사유는 전 대회를 개최할 때 유럽팀들이 대거 불참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것 때문에 이 대회는 전 대회 우승국이 출전하지 않은 유일한 대회로 남아 있다.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 영국 홈네이션 팀들도 출전을 거부했다. 쪼렙들과 노는 것보다 자기네 FA컵이 더 수준이 높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지만 정작 잉글랜드 등은 우루과이를 상대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잉글랜드는 우루과이와 1953년에야 첫 시합을 가졌고 1954년 월드컵에 출전한 잉글랜드는 8강에서 우루과이에게 떡실신 당했고 2014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에서 우루과이를 만나 또 녹다운 당했다. 우루과이는 16강에 진출했지만 잉글랜드는 조 꼴찌로 집에 갔다.
- 이탈리아는 개최국 프리미엄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고 우리도 예선부터 뛰고 싶다고 FIFA를 졸랐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졌는지 FIFA가 그 요청을 수락해서 개최국이 자동 출전권을 포기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결국 이탈리아는 밀라노에서 열린 지역예선에서 그리스를 4:0으로 완파했고 그리스가 2차전을 포기하면서 본선에 나갔다. 개최국이 지역예선을 치른 것은 이 사례와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의 사례, 2022년 카타르의 사례 총 세 가지가 있다. 다만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카타르의 경우는 해당 대륙의 월드컵 예선이 각각 아프리카 네이션스컵과 아시안컵 예선을 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참고적으로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나이지리아에게 덜미를 잡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 지역예선 최종전을 앞두고 있던 미국과 멕시코는 일정이 많이 늦어진 관계로 아예 개최지인 이탈리아로 건너가 지역예선 최종전을 치렀다. 미국이 승리하여 본선에 나갔고 이 경기는 앞서 열린 이탈리아 vs 그리스전과 함께 월드컵 사상 개최국에서 열린 유이한 지역예선 경기가 되었다.
4. 대회 엠블럼·마스코트·공인구
포스터의 구성은 간단했다. 앞에 파란 옷을 입은 선수는 개최국인 이탈리아의 선수를 형상화한 것이고[1] 뒤에는 출전국들의 국기가 쭉 나열되어 있는 것이다.
마스코트와 공인구는 이번에도 없다.
5. 경기장
월드컵이 열린 도시와 구장은 다음과 같다. (수도 로마를 제외하면 가나다순)
- 로마 / 스타디오 나치오날레 PNF[2]
- 나폴리 / 스타디오 조르조 아스카렐리[3]
- 밀라노 / 스타디오 산 시로[4]
- 볼로냐 / 스타디오 리토리알레
- 제노바 /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
- 토리노 / 스타디오 베니토 무솔리니
- 트리에스테 / 스타디오 리토리오
- 피렌체 / 스타디오 조반니 베르타
6. 파시스트 독재와 막장 진행
'''이 대회는 정치와 파시즘으로 얼룩진 역사상 최악의 대회였다.''' 말 그대로 베니토 무솔리니컵이라 불릴 정도로 월드컵 역사상 막장성으로는 선두에 서는 대회이다. 가장 큰 원인은 2년 후의 베를린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시즘을 선전하고자 용을 쓴 대회로 악명이 높은 탓이다. 이와 비견될 정도로 막장성을 자랑했던 대회는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정도. 무솔리니가 경기를 앞두고 경기에 배정된 심판들을 따로 만나는 등[5] 지금으로 치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이상하게도 이 대회 이후 월드컵은 올림픽과 함께 양대 세계적 스포츠대회이자 세계 최고의 단일종목 선수권대회로 위상이 굳건하다. 이 대회의 막장성만 두고 보면 월드컵 자체가 폐지되어도 할말 없는 수준의 대회였다. 특히 겨우 2번째 대회라서 더더욱.
-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우승 못하면 사형이라는 엄포를 놓았다.[6]
-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에게 루이스 몬티, 엔리케 구아이타, 라이문도 오르시 등 당시 이탈리아에서 뛰던 선수들을 뭉텅이로 빼앗기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이탈리아에게 주전급 선수들을 뺏긴 아르헨티나는 빈껍데기만 남은 팀으로 전락했고 결국 첫 경기에서 스웨덴에게 2:3으로 패배하며 일찌감치 광탈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우승하자 무솔리니는 저 3명의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특별히 귀하게 대우해줬는데 최고급 승용차와 저택을 하사하고 무솔리니가 죽을 때까지 매년 거액의 연금을 지급했다.[7]
-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이탈리아는 판정을 등에 업고 격투기 수준의 플레이를 일삼았고 스페인 주전 대다수가 부상을 입는다.[8] 그럼에도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고 결국 주심 르네 메르세[9] 가 재경기에서 스페인의 완벽한 2골을 오프사이드로 취소시키는 등 온갖 편파 판정 끝에야 이탈리아는 간신히 1:0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메르세는 영구 중립국 스위스인이라 치열한 국제 정세에 휘둘리지 않고 공정한 판정을 내릴 것이란 기대를 받았지만 그는 전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후 메르세는 이 일에 책임을 물려 스위스 축구협회로부터 정직 처분을 받는다.
- 오스트리아와의 4강전에서는 이탈리아 수비수 루이스 몬티는 오스트리아의 에이스 마티아스 신델라에게 무수한 반칙을 저질렀지만 심판의 휘슬은 울리지 않았고 이 경기 역시 이탈리아의 1:0 신승으로 끝난다.
-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결승전 역시 무솔리니가 직접 관람하였다. 이 경기 역시 주심 이반 에클린드[10] 에 의해 이탈리아의 PK성 반칙따윈 휙휙 넘어가는 등 도저히 체코슬로바키아가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연장전에서 터진 안젤로 스키아비오의 결승골로 이탈리아가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 전 대회에서는 중계를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이번 대회에선 라디오 중계에 신경을 써서 9개국에 15개의 채널로 전파를 쏘았다. 물론 중간중간 착실하게 파시즘을 선전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 무솔리니는 국가 전체의 정신적 통합 및 파시즘 선전을 위해 1934년 월드컵을 철저히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배고픔에 굶주린 이탈리아 국민들의 불만과 광기를 축구장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 무솔리니는 관중들로 하여금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라는 응원구호를 외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대회 진행중 이탈리아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 그냥 죽어라! 등으로 바뀌었다.
- 결승전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를 요약하자면
>이탈리아 서포터들 :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
>체코슬로바키아가 선제골을 넣자 무솔리니의 표정이 굳어짐.
>이탈리아가 동점골을 만들 때까지 "죽어라"고만 외치는 이탈리아 서포터들.
>이탈리아가 동점골을 넣자 다시 환호하며 역전골이 나올때까지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고만 외치는 이탈리아 서포터들.
>이탈리아가 역전골을 넣자 환호하며 "비바 두체!", "비바 이탈리아!",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를 외치며 경기가 종료될때까지 이 세가지 말만 외치는 이탈리아 서포터들.
...로 요약할 수 있겠다. 여러모로 당시 이탈리아에 있어서 만악의 근원이 아닐 수 없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선제골을 넣자 무솔리니의 표정이 굳어짐.
>이탈리아가 동점골을 만들 때까지 "죽어라"고만 외치는 이탈리아 서포터들.
>이탈리아가 동점골을 넣자 다시 환호하며 역전골이 나올때까지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고만 외치는 이탈리아 서포터들.
>이탈리아가 역전골을 넣자 환호하며 "비바 두체!", "비바 이탈리아!",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를 외치며 경기가 종료될때까지 이 세가지 말만 외치는 이탈리아 서포터들.
...로 요약할 수 있겠다. 여러모로 당시 이탈리아에 있어서 만악의 근원이 아닐 수 없다.
- 독일은 애초에 이 월드컵을 이탈리아와 나눠먹기로 협의가 끝난 상황이었으나 4강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패하면서 3위에 머물고 말았다.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증명하기는커녕 하등한 슬라브족에게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돌프 히틀러는 선수들을 감옥으로 보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4년 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땅 일부를 점령하고 영국과 프랑스에게 더이상 침략전쟁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1년 뒤......
- 그리고 이탈리아는 여기서 지은 죄의 값을 두고두고 치르게 된다. 16년 후에 스웨덴에게 지고 20년 후에는 개최국 스위스에게 2번이나 지고 24년 후에는 월드컵에 처음으로 진출도 못했다. 28년 후에는 개최국 칠레한테 지고 32년 후에는 북한한테도 졌으며 68년 후에는 남한한테도 져서 떨어졌다. 76년 후에는 무솔리니가 그토록 싫어했던 동구권 중 월드컵에 처음 올라온 슬로바키아한테도 졌으며 80년 후에는 중앙 아메리카의 코스타리카와 80년전 자기들 때문에 안 올라온 우루과이한테 깨지고 84년 후에는 스웨덴한테 또 깨져서 아예 러시아에도 가질 못했다.
- 가끔, 사람들이 이 월드컵과 다음 월드컵을 몽땅 묶어서 무솔리니가 짜고친 월드컵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의 두번째 우승은 실력으로 우승한 것이 맞다. 애초에 월드컵을 짜고 치려면 개최국이 짜고 쳐야 하는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즉, 정말로 짤려면 월드컵에 부정을 저지를 팀은 프랑스라는 소리. 당연히 프랑스는 전 대회에서 이탈리아가 스페인을 상대로 했던 부정의 승리가 아닌 개최국의 버프를 받고도 정정당당히 8강에서 졌다.
6.1. 그래도...
'''비록 파시스트로 얼룩진 대회였지만''' 앞으로의 월드컵을 위한 몇 가지 진보적 발걸음도 있었다.
'''먼저 이 월드컵부터 참가국을 결정하기 위한 지역예선이 실시되었고''' 2002년까지 이어진 디펜딩 챔피언 자동 차기 대회 진출 이라는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지난 대회에서 자기가 종합 순위 3위를 했다고 하는 미국과 유고슬라비아가 아다코다 싸웠기 때문에 확실한 순위를 가리기 위해서 '''이번 대회부터 3/4위 결정전이 실시되었다.'''
또한 이번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나라 전체에 분포된 8개의 구장을 쓰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것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7. 대회 진행
7.1. 1라운드
왼쪽에 있는 진하게 표시된 국가는 8강 진출국.
7.2. 8강
왼쪽에 있는 진하게 표시된 국가는 4강 진출국.
7.3. 4강
왼쪽에 있는 진하게 표시된 국가는 결승 진출국.
8. 출전선수 명단
9. 기록실
- 최초 득점 - 에르네스토 벨리스(아르헨티나), vs 스웨덴, 전반 4분(1라운드)
- 최초 퇴장 - 마르코슈 임레(헝가리), vs 오스트리아, 후반 18분(8강)
- 최초 페널티 킥 - 호세 이라라고리(스페인). vs 브라질, 전반 18분(1라운드)
- 최초 멀티골 - 안젤로 스키아비오(이탈리아). vs 미국, 전반 18분&전반 29분(1라운드)
- 해트트릭
- 최다 득점 경기&최다 득점차 경기 - 이탈리아 7 vs 1 미국(1라운드)
- 최초 역전승 - 체코슬로바키아 2 vs 1 루마니아(1라운드)
- 자책골 - 없음
- 무득점팀 - 없음
10. 결과
- 재경기 승패 결과는 순위에 반영하지 않는다.45페이지 참조
10.1. 수상
'''MVP'''
1위 - '''주세페 메아차(이탈리아)'''[12]
[image]
2위 - 리카르도 사모라(스페인)
3위 - 올드르지흐 네예들리(체코슬로바키아)
'''득점왕'''
1위(5골) - '''올드르지흐 네예들리(체코슬로바키아)'''[13]
[image]
2위(4골) - 에드문트 코넨(독일), 안젤로 스키아비오(이탈리아)
3위(3골) - 라이문도 오르시(이탈리아), 레오폴트 킬홀츠(스위스)
10.2. 베스트11
11. 뒷 이야기
- 베니토 무솔리니가 대회를 파시즘의 선전도구로 활용한 탓에 1934년 월드컵은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대회라는 평을 받는다.
- 이탈리아의 또 다른 문제는 지역감정이었다.[14] 남북부간의 선수들끼리는 물론이고 같은 북부라도 유벤투스와 인터 밀란의 라이벌 의식이 심했다. 이 때문에 세리에에서도 지역 감정으로 인한 싸움도 많이 나오는 등 축구계에서도 서로 화합이 아닌 쌈박질이나 했었던 게 유럽의 대부분의 프로 축구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장이자 주전 골키퍼였던 잔피에로 콤비(유벤투스)와 최고 스타플레이어 주세페 메아차(인터 밀란)가 서로 내기[15] 를 통해 친해진 관계로 두 팀간의 라이벌 의식은 끈끈한 팀플레이로 바뀌게 되었다. 처음에 메아차를 은근히 깔보던 콤비가 메아차를 인정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파시스트처럼 들릴 말일 수도 있지만 월드컵이라는 스포츠를 통해서 지역 감정이 심한 국민들을 하나로 단결시켜 지역감정을 조금이라도 없애려 했었다.는 것은 당시의 이탈리아의 축구 문화를 조금이라도 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수 있다. 비슷하게 2년 후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히틀러가 한 "운동답고 기사다운 시합은 사람의 최고의 자질을 깨웁니다. 그것은 이해와 존중 안에서 전투원(선수)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단합시킵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의 정신 안에서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것을 돕습니다. 그것이 올림픽 성화가 죽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라는 연설을 한 것도 이 월드컵에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역시 지역감정이 꽤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스포츠의 단결성을 국가와 민족이 아닌 독재자 개인, 일개 정치정당의 포퓰리즘 수단으로 악용시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된다.
- 미국에 패하여 본의 아니게 로마의 휴일을 찍게 된 멕시코. 하지만 이후 멕시코는 1980년까지 미국에게 단 한 차례도 승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전적은 24전 21승 3무. 이 정도면 공한증 뺨친다. 참고로 이 당시의 미국은 영국 선수들을 많이 수혈해서 당대 최강 급은 아니더라도 오늘날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정도와 비슷한 축구강국이었으며 지난 대회에서도 끝없는 승승장구 끝에 4강에서 극강의 아르헨티나가 돌풍을 잠재운 나름 강팀이었다.
- 브라질이 유럽에서 열린 1934년 대회와 1938년 대회에 모두 참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커피 무역선이었다. 브라질 선수들은 커피 수출을 위해 유럽으로 향하는 선박에 몸을 실은 뒤 현지에서 커피를 팔아 경비를 조달함으로써 근근이 대표팀을 꾸려나갔다. 이러한 1930년대 개근에 힘입어 브라질은 아직까지도 유일무이한 월드컵 개근국가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16]
- 이탈리아가 이 대회에서 5경기 동안 3골만을 허용하며 세운 최소 실점 우승 기록은 1998년 프랑스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무려 64년간 이어졌다. 물론 떳떳한 기록은 아니었지만...
- 이 대회를 우승한 이탈리아는 그걸로는 성이 안 찼는지 뜬금없이 축구의 종주국을 박살내러 간답시고 배에 몸을 싣고 런던으로 갔다. 이에 잉글랜드는 무솔리니의 공갈에 못 이겨 평가전을 치러줬는데 이 경기는 '하이버리의 전투'라 불릴 정도로 그 90분의 경기시간 내내 거친 몸싸움으로 도배된 경기였다. 그리고 루이스 몬티는 테드 드레이크와 충돌 후 오른발이 부러져 병원에 실려 갔고 경기 결과는 잉글랜드의 3대2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루이스 몬티의 전성기는 그걸로 끝!
- 이후 이탈리아는 56년 뒤 다시 월드컵을 개최하게 됐다.
[1] 유니폼의 문장은 사보이 왕가의 문장이다.[2] PNF는 Partito Nazionale Fascista(국가 파시스트 당)의 약자이다. 1953년까지 사용했고 1957년 철거.[3] 2차 대전 중에 폭격을 맞고 파괴되었다.[4]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산 시로가 맞다. 1926년 개장[5] 만나서 매수를 했는지 협박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6] 이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역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때 아르헨티나 선수들에게 우승 못하면 총살이라는 협박을 했다.[7] 다만 저 3명 중 구아이타는 나중에 야반도주로 인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탈리아에 입국 금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8] 그중 한명이 이날 이탈리아의 무수한 슈팅을 막아내면서 무승부를 이끈 리카르도 사모라 골키퍼였다.[9] 16강 미국 vs 이탈리아 전의 주심도 맡았다.[10] 이탈리아 vs 오스트리아 전의 주심을 맡았다.[11] 5경기는 1경기의 재경기[12] 인터 밀란의 역대 최고 레전드이자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레전드 중 한 명. 골키퍼를 제끼는 트릭을 축구 역사상 최초로 선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당시에도 이것은 큰 흥미거리였다고 한다.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53경기 출전 33득점으로 '''아직도 역대 득점 순위 2위'''. 그리고 밀라노에 위치한 5성급 축구 경기장에 그의 이름이 헌정되어 있다.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이 바로 그의 이름이다.[13] 2006년 11월 이전까지의 기록에는 올드르지흐 네예들리(체코슬로바키아), 에드문트 코넨(독일), 안젤로 스키아비오(이탈리아). 이렇게 총 3명이 4득점으로 공동 1위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FIFA 측의 자료 검토 결과 네예들리의 1득점이 누락된 것으로 판명, 네예들리의 단독 1위로 기록이 수정됐다.[14] 이탈리아 통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때는 아직 이탈리아가 통일된지 고작 60여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15] 메아차가 자신의 전매특허 기술인 골키퍼 제끼기가 잔피에로 콤비에게도 통하는지 내기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16] 브라질은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침체된 1930년 내내 국제대회 때마다 이랬다. 1932년 LA 올림픽 때도 커피를 잔뜩 싣고 와서 '이거 팔아서 참가비용 쓸께요'하다가 거부당해서 재정적 곤란을 겪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