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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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잉글랜드
제임스 2세
(James II of England)
스코틀랜드
제임스 7세
(James VII of Scotland)
'''출생 '''
1633년 10월 14일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
'''사망'''
1701년 9월 16일 (67세)
프랑스 왕국 생제르맹앙레이 성
'''재위'''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의 왕
1685년 2월 6일 ~ 1688년 12월 11일
'''배우자'''
앤 하이드 (1660년 결혼 / 1671년 사망)
모데나의 메리 (1673년 결혼)
'''자녀'''
메리 2세, 앤 여왕, 제임스, 루이자, 헨리에타, 제임스, 헨리
'''아버지'''
찰스 1세
'''어머니'''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
'''형제'''
찰스 제임스, 찰스 2세, 메리, 엘리자베스, 앤, 캐서린, 헨리, 헨리에타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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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성격
3. 행적
3.1. 즉위 전
3.2. 즉위 후
4. 평가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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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2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다. 스코틀랜드 왕으로서는 '제임스 7세'가 된다. 전 왕인 찰스 2세의 동생이었다. 가톨릭 옹호와 상비군 육성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명예혁명으로 축출되었다.

2. 성격


부왕 찰스 1세처럼, 제임스 2세는 사실은 상당히 우직하고, 어떻게 보면 순진하기까지 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충성심이 강하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이들에게는 역시 매우 우호적으로 대했다. 그는 형에게 대단히 헌신적인 아우였으며, 찰스 2세가 살아있는 동안 형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다했다. 엄격한 원칙주의자였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의외로 관대한 면모가 많았다. 용감하고 정직한 성품에, 유능한 군사전문가였으며 도덕 관념도 확고했다. 또한 아버지 찰스 1세와 마찬가지로 사생활이 깨끗했다. 동시에 대단히 근면성실했으며, 업무 능력도 준수했다. 하지만 부왕이 그러했듯이 당시 잉글랜드의 왕위는 이런 자질만으로는 지킬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국왕으로서 최대의 불행이었다.
그도 부왕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과 그 반대자들이 품은 적대감의 크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분명히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고, 합법적으로 일을 추진하는데 뭐가 문제지?" 하는 식이었다. 그런면에서 타고난 정치가였고, 필요에 따라 양심도, 원칙도 굽힐 수 있었던 형과는 많이 달랐다. 그의 우직함과 순진할 정도의 정직한 성품은 '''개인으로서는 분명 존경받고 훌륭한 자질이 될 수 있었지만, 정치가로서는 두고두고 발목을 잡게 되는 요소였다.'''

3. 행적



3.1. 즉위 전


찰스 1세의 둘째 아들이자, 찰스 2세의 동생. 젊은 시절에는 찰스 1세의 처형과 함께 형 찰스 2세, 어머니 앙리에타 마리와 함께 유럽 대륙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의외의 사실로, 사실 제임스 2세는 중세 잉글랜드 전사 군주들의 계보를 잇는 군인 출신의 왕이었다. 왕으로서의 짧은 치세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군인으로 보냈으며, 그의 인생 최대의 업적들도 대부분 이때 만들어냈다. 그는 20대에 당대의 명장 튀렌 원수의 막하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고, 제임스는 여기서 기병으로 튀렌의 극찬을 받을만큼 맹활약했다.
왕정복고 이후엔 로열 네이비의 수장인 해군 최고 사령관(Lord High Admiral)이 되었으며
(1) 성공적으로 기금을 끌어모아서 조선소와 선창을 유지하고, 이를 운영하기 위해 매우 효율적인 관료조직을 만들어냈다. 인원 확충 또한 동시에 추진했다.
(2) 특히 왕국의 상류층인 귀족 자제들과 차상위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젠트리 층을 적극 해군 장교로 유입시켰다. 실전경험과 기술이 풍부한 옛 공화정 시절의 장교들도 그대로 자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상당히 엄격한 규율을 도입해서 모든 것이 예외없이 계급에 따라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제임스는 이들을 장교로 임명하고 능력에 따라 출세도 보장해주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의 중산 계층에게 로열 네이비는 돈 뜯어가는 원수가 아니라,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되었다.
(3)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에서 전공을 쌓았으며 북아메리카의 네덜란드 식민지 뉴암스테르담을 무혈점령했다. 당시 그의 작위는 요크 공작이었기 때문에, 이곳의 이름은 이후 '뉴욕'이 된다. 우리가 아는 근대 로열 네이비의 상당부분은 제임스 2세의 작품이었다는 사실, 그가 영국 해군사에 있어서 훌륭한 제독의 반열에 오를만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최근의 연구에서야 비로소 재조명 되기 시작했다.
또 제임스 2세는 성실하고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나라를 잘 다스리고 신민들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강한 지도자였다. 1666년 런던 대화재 당시 그는 솔선수범하여 책임자로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조직을 설립하고 효율적으로 화재를 진압했으며 유언비어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손수 물동이를 들고 진두지휘하면서 진화작업을 거드는 등 모범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모습을 보여 런던의 흉흉한 민심을 잠재우는 데 공헌했다. 당대의 기록만해도 "요크 공작 전하께서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진화작업에 매진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라는 기록이 남았을정도. 이런 점만 놓고 봤을 때 제임스 2세가 후세에 폄하된 것 마냥 무작정 전제정을 부활시키려 한 폭군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후 찰스 2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1] 제임스 2세는 형 찰스 2세가 승하하자 형제 승계의 방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 계승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찰스 2세 항목으로.

3.2. 즉위 후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버지 찰스 1세와 마찬가지로 소통능력과 유연성의 문제였다.
물론 아버지 찰스 1세보다는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하고 설득하긴 했으나 자신의 신념을 굽히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국왕의 의무는 신민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고 법을 준수하면 되는 것, 그리고 신민의 의무는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소통은 쌍방향이라기보단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형 찰스 2세 전 국왕이 살아생전 펼쳐오던 입헌정치들을 중단하고 청교도 혁명에서 패한 아버지처럼 전제정치를 펼쳤다는 인식과는 달리 실상 찰스 2세부터 왕권은 강화되고 있던 추세였고, 그 역시 특별히 잉글랜드의 법을 넘어선 통치를 하진 않았다. 사실 부왕 찰스 1세가 죽은 것도 소통보다는 돈과 종교 문제였음을 감안한다면 한창 발전하고 있는 잉글랜드 경제를 등에 업고 있는 제임스 2세는 부왕보다 안정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본인의 행정가적인 기질덕에 잉글랜드는 안정적으로 국정이 운영되고 있었다.
제임스 2세가 안고 있던 또 다른 문제는 종교문제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톨릭 신도였기 때문에 가톨릭의 재합법화를 원했다. 전통적인 시각에선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왕국의 복원을 추진하며 신민들을 억압한 폭군 취급이었다. 그러나 실상 그는 가톨릭 사제들과의 편지에서도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삼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억압적인 국교화보단 '''가톨릭 역시 합법적으로 잉글랜드 땅에서 존속되기를 원했다.''' 오히려 그는 동시기 루이 14세의 억압적인 낭트칙령 폐지와 위그노 탄압을 비판하며 ''''개종은 진심으로 해야지 강제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입장을 줄곧 내세웠다. 즉 그가 진정으로 내세운 종교 정책은 가톨릭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모든 종파를 위한 종교적인 관용이었던 것이다.''' 그가 자기 직권으로 밀어붙인것도 관료직과 장교직을 가톨릭 교도들에게 개방한 정도였다. 폭력적인 방식도 아니었다. 제임스는 설득과 논리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잉글랜드는 대륙 신학에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이 숫자에 비해 강한 영향력을 가졌었고, 국교회 내부 강경파[2], 대부분의 국교회 신하들은[3] 잉글랜드가 가진 정체성, 가톨릭 군주국과의 기존 외교 정책이 돌아서는 데 극렬 반발했다.[4]
하지만 제임스 2세는 슬하에 자식이라곤 딸인 메리, 자매뿐인데다가 그 딸들은 모두 개신교를 믿었고 개신교 국가로 시집갔으며, 그녀의 남편들인 제임스 2세의 사위들도 모두 개신교 신도였기 때문에 신하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제임스 2세가 50세가 넘은 늘그막에 덜컥 아들 제임스를 본 것이다!! 국교회 교도들이 가톨릭 왕조가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은 당연지사. 당시 잉글랜드 의원들은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적 입문을 법적으로 막은 신교도들이었으므로 제임스 2세 입장에서도 이들을 필연적으로 경계해야 했다. 그럼 이들을 찍어누르기 위해 제임스 2세가 뭘 했느냐? '''섬나라 잉글랜드에 상비 육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에 청교도가 주류인 휘그파(現 자유당) 뿐만 아니라 제임스 2세의 왕위계승을 옹호했던 왕당파인 토리파(現 보수당)까지 격렬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5]
결국 개신교 의원 7명이 제임스 2세의 맏딸 메리와 그 남편인 '오라녜의 빌렘(윌리엄 3세)'에게 제임스를 축출할 것을 요청했고, 1688년에 윌리엄은 그의 군대를 잉글랜드로 보낸다. 이것이 바로 명예혁명.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늦둥이를 안고 싱글벙글하던 제임스 2세는 혁명의 기세에 밀려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복위를 노리고 1689년 3월 아일랜드에 상륙하였지만, 패하고 다시 도주했다. 그렇게 제임스 2세는 재기하지 못한 채 결국 프랑스에서 여생을 마쳤다. 프랑스로 망명하기 전 비탄에 빠진 제임스 2세는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식들마저 저를 버렸나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제임스 3세)는 이복 누이들인 메리와 앤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1701년에 왕위를 요구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코바이트이다. 제임스가 1766년 사망하고 난 후에는 그의 아들 찰스(찰스 3세)가 1788년 사망할 때까지 왕위를 요구했다. 찰스 사망 후에는 그의 딸 올버니 공작 샬럿이 있었지만, 그는 사생아였기에 뒤를 잇지 못했다. 찰스의 동생 헨리가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 제임스와 형 찰스와는 달리 왕위 요구를 하지 않았고 1788년 찰스가 사망한 후 교황청에서도 헨리를 영국의 합법적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고 ‘요크의 추기경 공작’으로 명명하였다. 헨리는 성직자로 일생을 교황령에서 보냈으며 1807년 선종할 때까지 교회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추기경에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4. 평가


제임스 2세는 후세에 윤색된 이미지와는 달리 폭군이나 악인이 아니었다. 그의 통치는 분명 아버지 찰스 1세처럼 전제적인 면도 몇몇은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권위주의적인 면이 다분히 있고 엄격한 규율가였지만 참회하는 죄인들에게 관대했고 자신의 백성들에게 선의를 가지고 통치를 하려고 했던 통치자였다. 실제로 그가 적극적으로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면 지지자들이 적지 않았기에 윌리엄 3세나 메리 2세에게 다시 왕위를 빼앗을 가능성조차 있었지만 그는 가족들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그 가족들에게 배신당했기에 모든 기력을 잃고 포기해버렸다는 것이 현대 역사가들의 견해이다.
그는 종교문제에 있어서 흔히 알려져 있듯이 '교황주의적 폭군'도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종교적인 관용을 원했고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관용'을 공식 정치석상의 의제로 올린 첫번째 군주였다. 정작 윌리엄 3세의 관련법은 제임스 2세의 관용법안보다 크게 후퇴한 것이었다.
현대 역사계에서 그는 '''정치적 기술이 부족하고 종교적인 믿음을 이성과 설득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긴 어리석은 왕'''이라는 평가와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계몽군주'''라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사실 둘 다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는 폭군이 아니었고 능력이 있었으며 그의 종교 관용 정책은 인간보편적인 관점에서 대단히 훌륭한 목표를 지향했으며 군인으로서 잉글랜드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스킬이 많이 부족했고 소통이나 인간관계에 결점이 있었으며 그의 몰락이 여기서 기인했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상비군 양성은 그의 결정적인 실책이라고 평가되는데 상비군 양성의 진위여부를 의심할 필요는 있다. 정말 상비군을 양성하려면 편제 및 장교가 정리되어야 하는데, 그렇기는 커녕 아예 규모조차도 불분명하다. 공포에 떤 신교도들 사이의 일종의 낭설일 가능성도 충분하단 소리이다. 저항을 안한거야 내전 벌였다간 루이 14세같은 자에게 개입 빌미를 주니 안한거라 쳐도, 상비군의 구체적인 규모까지도 불분명하다면... 일종의 낭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소문이 없었다면 의회가 단결해서 추대하고 할 일은 없었을 테니.

5. 기타


  • 위에 언급된 것처럼 요크공작 시절에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에 관여해서 지금도 그와 관련된 일화가 많이 있다. 뉴욕의 어원으로도 유명하고, 식민지 토지를 하사하는 과정에서 델라웨어 주월경지로 만든 실수도 있다.

[1] 아들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닌데 모두 서자들이여서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그래도 이들의 가계는 현재까지 가계가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클로드 드 빌라르 장군과 함께 알만사 전투의 승리에 기여한 제임스 드 피츠제임스 장군 겸 제 1대 베릭 공작, 제 1대 피츠제임스 공작(루이 14세에게서 받음). 참고로 이 장군의 현재 후손이 스페인의 알바 공작가다. 찰스 2세의 서자들 중 장자인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은 제임스 2세에게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처형 되었다.[2] 성공회라는 명칭부터 이시기엔 존재하지 않으며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산물인 잉글랜드 국교회 즉 잉글랜드의 기존 가톨릭 교구가 국교회가 된 것에 불과하고 이 내부에 가톨릭 전통을 옹호하는 전통주의자 대륙식 칼뱅주의를 꿈꾸는 청교도들과 숫자상 대부분인 그냥 국교도들이 혼재했다. 국교회 외부의 가톨릭 교도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이미 헨리 8세 시절 정치적으로 의미를 상실했으며 엘리자베스 1세 시절 몰락했다. 그럼에도 국교회 내부의 가톨릭 용인파나 외부의 가톨릭 신도들이 구분되지 않고 가톨릭으로 서술되는 면도 있다.[3] 국교회 내부의 대부분은 제임스 2세의 종교정책을 정치로 이해했다. 이들 대부분은 교리나 종교개혁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 청교도들은 이미 왕정복고 이후 영향력을 다수 잃었다.[4] 일단 신교도 국가로 불린 잉글랜드에서 왜 가톨릭 교도가 추방도 안 당하고 당당하게 활동이 가능했는지 생각해보자. 이들은 16세기 17세기식 종교전쟁을 생각한 게 아니라 잉글랜드 고유의 정체성를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5] 섬나라 잉글랜드에서 육군은 그리 필요성이 높지 않은 병종이니 의회에서 과연 그 육군으로 누굴 때려잡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