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1. 개요
漢陽
서울특별시의 옛 이름. 한강(漢)의 북쪽(陽)을 의미하는 지명.
2. 역사
이곳의 지명이 처음 '''한양'''으로 정해진 것은 신라 경덕왕 때이다. 현 서울특별시 한강 이북 지역은 원래 백제의 북한성(北漢城)이었는데 고구려 장수왕이 점령하면서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 하였다. 그러다 신라의 진흥왕이 고구려로부터 현 경기도 지역을 빼앗으면서 신주(新州)를 설치했고 곧 한산주로 이름이 바뀐다. 그때 고구려의 북한산군을 신라에서도 이어서 쓰다가 757년 경덕왕 때 한화정책에 따라 한주 '한양군(漢陽郡)'으로 개칭하였다.
양(陽)은 강의 북쪽 지역, 산의 남쪽[1] 지역에 붙이는 접미사로 한양은 한강의 북쪽을 의미한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지명을 지을 때, 주역의 음양오행을 기준으로 (북반구에서) 산의 북쪽은 그늘이 지므로 음(陰)이라 하고, 산의 남쪽은 해가 잘들기 때문에 양(陽)이라 하였다. 반대로 강(江)의 경우에는 북쪽이 양(陽), 남쪽을 음(陰)으로 칭했는데, 이는 여름 장마로 강이 자주 범람하는 중국 황하지역의 특성 상 강 양쪽에 높은 제방을 쌓았기 때문에 북쪽 제방에는 햇볓이 잘 들고, 남쪽 제방에는 그늘이 지기 때문이다.[2][3]
이 명칭은 이후 고려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으며, 지금의 경기도 북부권 상당지역(지금의 고양, 의정부, 양주, 구리, 남양주)과 함께 양주(楊州)라는 이름으로 느슨하게 통합되기도 했다. 문종(고려)이 양주를 남경(南京)으로 고쳐 승급시켰고, 숙종이 남경 별궁을 건설했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며 경(京)은 천자국의 제도라며 폐지되었고, 충렬왕 때 한양부가 되었다.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왕조가 창업하며 개성에서 천도하면서부터는 공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가 되었지만 보통은 이전부터 계속 불린대로 한양으로 불린 듯하다. 물론 서울이라는 이름도 공식적 표기가 아닌 입말상으로는 함께 쓰였다.[4]
유의할 것은 조선시대의 '서울'과 '한양/한성'은 동일한 지역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그 말 자체의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은 원래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였고, 한양/한성은 그 지역 자체의 지명(고유명사)이었던 것에서 훗날 일반명사였던 서울이 지역 자체의 이름이었던 한양/한성을 대신해 지명으로서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이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한양이라는 이름은 사용됐지만 그 당시 한양은 수도가 아니었으므로 서울은 아니었다. 즉, 고려 왕조가 계속 존속됐거나 조선 왕조가 건국 직후 한양부로 천도하지 않고 계속 개경(현 개성특급시)을 수도로 삼았다면, 지금의 서울은 '한양'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고 대신 개성이 서울이 됐을 것이다.
남연군 묘를 도굴한 서양인으로 잘 알려진 E,J.오페르트의 책인 <금단의 나라 조선>에서는 조선인들에게 한양에 대해 물었을 때, 조선인들이 한양이라는 명칭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서야 "아하~ 서울!"이라고 말했다고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볼때 적어도 구한말에는 한양이라는 말보다는 서울이라는 말이 조선인들에게 더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京城府)'''[6] 으로 개칭되었다. 8.15 광복 후에 서울특별시로 바뀌면서 주변의 경기도 지역(광주[7] , 양주[8] , 고양[9] , 김포[10] , 시흥[11] , 부천[12] 등..)을 왕창 흡수하여 거대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1963년 서울 대확장 이전의 서울특별시는 남쪽에 영등포를 붙여놓은 한양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1963년 서울 대확장과 강남 대개발로 강 남쪽의 비중이 커져버려서 더 이상 서울특별시 = (한강 북쪽이란 의미인) 한양으로 보기에 애매해졌다. 물론 서울특별시의 전신이 한양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서울은 한자어가 아니라서 따로 한자 표기가 정해진 게 없었기 때문에 중국 및 중화권에서는 20세기 이후에도 서울을 계속 한성(漢城, 한청)이라고 불렀다. 덕분에 서울대학교와 한양대학교와 한성대학교가 중국인들에게 혼동되기도 했다. 최근 서울의 음차표기로 '셔우얼(首爾, 으뜸가는 도시란 의미라고)'이라는 이름을 새로 만들어 중화권에 홍보하고 있다. 아무래도 서울이라는 발음과 근접하기도 하고, 지명이기 때문에 한국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양은 조선의 정치적 중심지로, 한양 성벽으로 둘러싸인 사대문과 사소문, 내부에는 여러 궁궐과 종묘가 갖추어져 있으며 양반관료 계층이 모여 살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주요 건물들을 허문 일[13] 과 6.25 전쟁으로 인한 화재, 목조 건물의 한계, 경제개발시기의 도심 재개발로 과거 한양의 모습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복원된 한양도성과 사대문,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 북촌과 서촌의 한옥마을 등에서 구한말과 조선 후기의 한양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구한말 1899년,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가 덕수궁 주변의 지금의 정동 언덕에 있던 미국공사관에서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그린 작품인 서울풍경이 남아있다.
3. 방어
한양은 한양도성 성벽을 갖추고 있기는 한데, 인구와 병력에 비해 성벽이 너무 길고 지형도 평탄해서 막상 농성전에는 그리 적합하지는 않았다.[14] 사대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숭례문 문서 참조.) 유교적 정치 관념을 반영시킨 도성이라는 의전적 의미가 강하며, 성곽은 한성부의 행정적 경계에 해당한다. 정확히 말하면 성저십리라고, 한양 성곽 바깥 10리 지역까지는 한성부의 관할지역이었다. 성저십리는 민락, 벌목, 매장 등이 금지된 도시(농업)산업배후지역이고, 한양성 안이 거주 및 생활지역이다.[15] 한양의 외성, 즉 서울 성곽은 로마 제국의 성벽과 마찬가지로 방어적인 성격보다는 행정적, 상징적 의미가 강했다.[16] 한양도성 항목에서 나왔듯이 성곽의 규모도 거대한데다가 10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를 끼고 농성전을 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어서 서울 성곽을 사이로 공성전이 벌어진 적도 없고 그런 시도도 없었다. 심지어 이괄의 난에서도 시가전이 아닌 무악재의 야전이 벌어졌다.
서울 성곽이 방어수단으로서 제 구실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는데, 바로 앞의 이괄의 난. 무악재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한 이괄군이 급히 도성으로 철수하려 하자 '''도성의 백성들이 서대문을 잠가버리고 못 들어오게 막았다'''(...) 사실 이괄도 남대문을 통해서 다시 입성하기는 했다. 하지만 방어능력 제로인 성의 비무장 민간인들을 상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하릴없이 남대문까지 우회하고, 게다가 관군이 추격해왔기에 보복조치조차 못한 채 털레털레 도망간데서 이괄군의 비참함을 잘 알 수 있다.
한양성벽이 표시된 관광지도 ▶
어차피 난공불락의 철옹성은 없다는 점에서 더 현명한 방어정책일 수도 있다. 고구려만 해도 2번이나 수도가 털린 이후에 천도하면서 계획적인 축성으로 행정성과 방어성을 통합하여 더 견고한 평양성을 구축했지만 '''단 한번의 한타로''' 인해 결국 나라가 멸망했으며, 고려의 경우도 개경성을 수도 없이 개축하며 방어에 치중했지만 개경(현 개성특급시)은 허구한 날 외적에게 털렸다.
4. 여담
조선 건국 이후 정종이 왕자의 난 때 혈육들과 공신들의 피를 너무 많이 보았다는 이유로 도읍을 잠시 개경으로 옮겼는데, 태종 집권 이후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지만 개경과 무악(신촌)신도시를 주장하던 신하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전기의 관료층은 거의 대부분 구 고려의 관료층이다. 자신들의 기반인 개성을 버리고 신도시로 옮겨가는게 달가울 리가 없는 것. 게다가 천문과 풍수를 맡아보던 서운관 관리들도 거의 만장일치로(!) 개경을 밀었다. 위의 이유도 있을 뿐더러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도 아닌 도선 대사가 점지해준 길지인 개경을 두고 풍수지리 따위 쌩까고 만든 도시인 한양으로 천거하는 게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한양이 수도가 되면, 자신들의 입지도 조금씩 줄어들 게 뻔하다.
무악을 민 것은 태종의 최측근이었던 하륜. 하륜은 무악 신도시의 열성 지지파였다. 이유는 이미 이전에도 주장한 적이 있어서 관철시켜야 자기 입지가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17]
하지만 강력한 왕권 정치를 지향한데다가 엄연히 유학자인 태종은 당연히 못마땅했다. 실록을 보면 개성을 뜨고 싶어하는 태종과 부소명당(송악)이 최고라는 서운관 관리들 사이의 입씨름이 지겨울 지경. 결국 태종은 "내가 종묘에 들어가서 '''엽전을 던져 볼 테니''' 그 결정에 따르라"라는 말과 함께 사촌 형님 완산부원군 이천우를 시켜 엽전을 던져 점을 치게 한다. 결과는 길(吉) 2 대 흉(凶) 1로 결과가 나와서 다시 한양으로 천도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인 실화다.#[18][19]
한성부 관아가 중부, 서부, 남부, 동부별로 건물이 따로 분포했었다. 마치 서울지역 검찰청이 서울중앙지검, 서울남부지검, 서울동부지검, 서울북부지검 이런 식으로 나뉘어진 것과 비슷. 한성부 중부 관아는 지금의 KT 광화문지사+주한미국대사관 건물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 외의 한성부 관아 중에서 서부관아, 동부관아, 남부관아 역시 현재는 모두 소실되었다.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역사적 지명이 되었지만,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방 소도시나 시골 노인들은 '서울'을 '한양/한성'이라 일컫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수도로서 한성의 역사가 500년 남짓인데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은 무려 1500명이었다고 한다. 1년에 3명씩 교체가 된 것. 주진형[20] 前 한화증권 사장은 고위직을 짦은 임기로 돌려먹는 한국사회의 구태가 이미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사실 한성판윤 가지고 놀랄 것도 없이 삼도수군통제사 같은 건 3일만에 바뀌기도 한다. 이것도 다 경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1] 북회귀선 이북의 북반구에서는 해가 항상 남동쪽에서 떠서 남쪽을 지나 남서쪽으로 지므로, 산의 남쪽은 거의 항상 양지이고 북쪽은 거의 항상 음지가 된다.[2] 다른 예로 중국 진(秦)나라의 수도 함양도 위수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충북 단양(丹陽)의 경우도 남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이고, 경남 함양(咸陽)도 남강의 북쪽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훈허(渾河)의 옛 이름 심수(瀋水) 북쪽의 심양도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낙양도 황하의 지류 낙수(洛水)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반대쪽은 음(陰)이라 하는데, 중국의 회음과 한국 산청군의 옛 이름인 산음(山陰)이 대표적인 사례다.[3] 중국에도 한양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1926년까지는 한양현이라는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한 현재의 후베이성 우한시 한양구에 해당한다. 지도로 보면 양쯔강 북쪽에 있어서 한양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듯 하나 한수(漢水)이북에 있다하여 한양이라고 한다. 그런데 명나라 때 물길이 바뀌어 현재는 한수(또는 한강) 남쪽에 있고, 한양의 초입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커우는 한양의 초입이 아닌 강 반대 쪽에 존재하게 된다. 이후로 한커우는 상하이 다음으로 잘 사는 도시가 되었고 한양은 한커우에 합병되는 결과를 가져온다.[4] 1668년의 하멜표류기에 "조선사람들은 수도를 sior(서울)이라 부른다"고 나온다.[5] 허나 영상에 나온 모습을 보면 절대 1900년이 아니다, 일단 전봇대에 붙혀저있는 은단 광고가 증거중 하나인데 은단은 1905년에 처음 출시되었고,일본 국외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시점은 1907년이다.게다가 남대문의 성벽이 헐려져있는데 한양도성이 헐리기 시작한 시점도 1907년 이후이므로 최소한 1907년 이후의 모습이다.[6] 경성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에도 흔히 쓰였다. 다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로서 쓰였지 공식 명칭은 아니었다. 즉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반명사로서의 경성은 일제의 잔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경성이라 하면 북경의 별칭이다. 하지만 아예 기존 명칭을 없애고 고유명사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일제의 잔재가 맞다고 볼 수 있다.[7] 강남구, 잠실동·신천동을 제외한 송파구, 강동구[8]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송파구 잠실동·신천동[9] 사실 조선시대 고양과 지금 고양은 영역의 차이가 크게 없다. 현대 노원구와 도봉구, 중랑구를 제외한 한강 북쪽 지역은 원래부터 한성부의 영역이었는데 1914년 일제가 사대문 바깥 지역을 전부 고양에 편입시켰기 때문. 때문에 흡수라기보다는 재편입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오히려 고양 북한동과 효자동 일대는 원래 한양의 일부였으나 1914년 일제가 고양에 편입한 후 그것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10] 강서구, 양천구. 정확히는 구 양천군 일대이다. 경기도 양천군이 1914년 경기도 김포군에 흡수되었으나, 1963년 서울 대확장 때 옛 양천군의 영역만 서울에 편입된 것. 이것 때문에 1939년 당시 김포 땅에 지어졌던 김포국제공항이 지금 주소가 서울특별시로 되어 있는 것이다. [11] 안양천 동쪽 지역에서 서초구까지, 이 중 서초구와 동작구 노량진동·본동·흑석동·동작동·사당동, 관악구 남현동은 1914년 이전까지는 과천 땅이었다.[12] 구로구 중 안양천 서쪽 지역[13] 의정부 건물과 돈의문, 한양도성 등[14] 한성 성벽에서 그나마 지형이 험한 곳은 북악북쪽의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 정도이다. 나머지는 남산을 제외하면 사실상 완전한 평지였다. 이런 이유를 들어 숙종은 북한산성을 포함해 경기도 일대에 산성을 여기저기 만들고 청나라에는 외적방어용이라고 강변한다. 실상은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제외하곤 반란대비용이었을거란 견해도 있다.[15] 물론 후기에는 인구가 늘고, 제한이 느슨해지면서 민락들이 생기기 시작한다.[16] 이와는 반대로 로마제국 후기에 건설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순수한 의미의 '방어'용이었다. 이때는 로마 시 외곽 전체를 시벽(市壁)처럼 둘러싸는 형태였다.[17] 정작 태종조차도 무악에는 반대했다. 앞서 서술했듯 태종은 한양으로 옮기려 했기 때문.[18] 태종 8권, 4년(1404 갑신/명 영락(永樂) 2년) 10월 6일(갑술) 1번째기사.[19] 생각해 보면 엄청난 나비효과였다. 뭐 역사에서 나비효과가 아닌 일이 거의 없지만 이 때 수도가 개성으로 정해졌다면 남한은 최전방에 수도를 두거나 다른 곳으로 천도했을 것이고, 그 후보 중 서울도 있었겠지만 다른 곳이 수도가 될 확률도 높았을 것이다. 아예 한 나라의 수도가 정해진 것부터 커다란 나비효과였을테니 말이다.[20] 現 열린민주당 소속 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