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 이씨

 


'''연안 이씨(延安 李氏)'''
'''관향'''
황해도 연안군
'''시조'''
이무(李茂)
'''중시조'''
이현려, 이습홍, 이송, 이지, 이해, 이분양, 이방, 이득량, 이백연, 이계연
'''집성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경기도 양주군 진잠면 금곡리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모산리
경기도 김포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운중동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뇌조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
경기도 여주시 가남면 정단리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문현리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갈말읍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소정리
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 백양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 상장리, 괴곡리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덕련리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덕암리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죽교리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산정리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대사리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오목리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 동호리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성기리
경상남도 진주시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금산리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 사리리, 효령면 중구리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상원리, 상거리, 부항면 사등리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송곡리
경상북도 안동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부안면 검산리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상대리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 봉래리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총리, 원진리, 송정리
강원도 통천군 고저읍 미평리
강원도 회양군 안풍면 안미리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서면 전포리, 광정리, 청교면 묵송리, 토성면
황해남도 연안군
황해북도 금천군 서북면
황해북도 수안군 도소면 옥검리
황해북도 중화군 해안면
황해북도 서흥군
평안남도 룡강군 지운면 양원리
평안남도 성천군
평안남도 평원군
평안남도 덕천시 잠상면
함경남도 안변군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면 사수리, 광덕면 장천리
'''인구'''
164,036명(2015년)
'''링크'''
연안 이씨 홈페이지
1. 유래
2. 조선시대 벌열가문
3. 분파
3.1. 연안 이씨 분적 본관 일람
4. 논란
4.1. 시조 이무가 신당서의 이무인가
4.1.1. 부정 의견
4.1.2. 긍정 의견
4.1.3. 재반론
4.1.4. 결론
4.1.5. 양측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항
4.2. 이덕화가 연안 이씨?
4.3. 수안부원군 이수산이 연안 이씨?
5. 항렬
6. 실존인물
6.1. 신라
6.2. 고려
6.3. 조선
6.4. 일제 강점기
6.5. 현대
6.6. 기타(위인 및 유명인의 가족)
7. 기타
7.1. 연안 이씨 문화재
7.2. 창작물에서
8. 인구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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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래


시조 이무(李茂)는 본래 당나라 출신[2]으로 당고종(高宗)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660년 대총관 소정방의 부장(副將)으로 백제를 평정해 시염성(鼓鹽城)[3]에 식읍 1000호를 받고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다. 문무왕이 높은 벼슬을 제의했지만 이무가 극구 사양하므로 국빈으로 예우했다. 나당동맹 와해 때 소정방이 신라도 공격하려 하자 반대했다. 백제 여인과 혼인하고 신라에 귀화했다고 한다. 고려 전기에는 농서 이씨라는 별칭이 있었으며[4] 중기 부터는 염주, 오원 이씨라고 불렸다.
높은 벼슬을 한 인물이 많다보니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파를 따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예: 연안 이씨 관동파 - 동촌 이씨) 그러나 현대에는 연안 이씨로 다시 돌아간 듯하다.

2. 조선시대 벌열가문


조선시대 후기 노론을 대표하는 명문가.[5][6]
사실상 세도 다음으로 정국을 좌지우지한 가문들 중 하나이다.[8]
조선조에 최고 권력가를 상징하는 종묘배향공신을 무려 2명[9]이나 배출했다. 이밖에 기로소에 들어간 인원만 21명[10], 관력으로는 9명[11]정승, 정1품은 24명, 7명의 대제학청백리 7명, 부원군 5명, 공신 10명, 판서 54명, 봉군 33명[12], 시호 53명, 호당 10명, 장신 4명, 암행어사 17명 등 문과 급제자 총 255명[13]을 배출하고 무과 급제자는 86명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왕실과 인척이 아니면서도 조선 시대를 통틀어 늘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청백리 7명을 배출하는 등 권세를 부리거나 남용하지 않은 깨끗함으로도 명망이 높았다. 또 무엇보다 조선 후기의 청요직인 규장각 직각을 14명을 배출하고[14], 비변사 당상관 17명을 배출하는 등[15] 한 때 비변사의 무려 13%가 연안 이씨였다. 이를 보아 세도 정치 때 조차 중앙에서 버텨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과 급제자 출신 순위로도 전체 8위로 이씨로는 840명의 전주 이씨 다음이다.[16]
연성부원군 이석형은 세종 때 장원급제해 성종 때까지 무려 6대를 섬겼고, 세조의 총애를 받은 훈구파로서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치평요람을 편찬한 대학자였다. 현손인 월사 이정구가 좌의정을, 6세손 이귀가 1등 정사공신 작위를 받았다.
월사 이정구는 신흠(申欽),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중기 4대 문장가다. 월정 윤근수의 문인으로 선조 때 대제학을 거쳐 인조좌의정이었다. 아들 백주 이명한도 인조 때 이조판서. 대제학으로 맏아들 청호 이일상이 효종 때 대제학에 올라 조선 첫 3대 연속 문형(文衡)을 배출했다.
1761년 평양원유사건으로 사도세자가 탄핵을 당하게 되자 사도세자를 지키려던 영의정 진암 이천보, 우의정 민백상, 좌의정 이후가 한달 간격으로 음독자결했다. 이천보, 이후 모두 연리로, 정조 입장에선 연안 이씨에 빚을 진 셈이었다. 후일 노론이 다시 여당이 됐을 때 연안 이씨는 빛을 발했다. 홍재전서 일득록편에 따르면 연안 이씨를 삼한갑족이라고 칭했으며, 정조가 항상 월사의 문집을 베개 옆에 놓고 봤다고 전해진다.
6대 문과급제 집안이 1집, 4대 문과급제 집안이 2집, 3대 문과급제 집안이 12집, 4형제 문과급제 집안이 1집, 3형제 문과급제 집안이 3집이 있다. 그리고 월사가문은 호당에 든 사람이 5명인데 이 호당 기록은 3대 대제학 가문중에 제일 많이 배출하였다. 또 기로소는 70세 이상에 종2품 이상인 문과 관료만 들어갈 수 있어 입소 조건이 까다로워 역대 700명 정도밖에 없는데 배출가문 2위로 21명을 배출하였다.
연안 이씨 소속 인물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많은 고관대작의 수에만 있지 않다. 연안 이씨는 구한말과 일제 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더욱이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양란과 정묘호란 가릴 것 없이 외교관, 혹은 사신으로서 원군을 불러오거나 기타 자국의 유리한 결정을 하는데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들이 포진했다. 재밌는 점은 조상의 영향을 받았는지 집현전 학사 이석형의 후손들이라 굵직한 국문학자들이 후손 중에 눈에 띈다.

3. 분파


고려시대를 기점으로 10개파가 생겼다.
'''- 소부감판사공파(小府監判事公派) 이현려(李賢呂)'''
'''-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이습홍(李襲洪)'''
'''-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이송(李松)'''
'''-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이지(李漬)'''
'''-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이해(李核)'''
'''- 이부시랑공파(吏府侍郞公派) 이분양(李汾陽)'''
'''-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이방(李昉)'''
'''-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이득량(李得良)'''
'''-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이백연(李伯衍)'''
'''-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 이계연(李季衍)'''
이를 중시조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문헌이 전해지지 않아 이들 계파는 시조와의 세계는 물론 각 파조들 간의 세대관계도 모른다.
'''족보에 등재된 분파명과는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여기 등재되어 있는 파들을 제외하고도 수 백개가 넘는 지파들이 존재하니 본인의 파가 등재되어 있지 않다고 실망하지 말고 연안 이씨 홈페이지에 방문해서 질문을 하면 자신의 파에 관련된 자세한 답변을 들을 수도 있으니 참고하자.'''
◎태자첨사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파 + 15세)[17]
수재공파 秀才公派(근수 根粹; 9세),
승지공파 承旨公派(인충 仁忠; 10세)
판관공파 判官公派(인휴 仁畦; 10세),
진위공파 振威公派(오 塢; 11세)
경주공파 慶州公派(전 㙉; 11세),
삼척공파 三陟公派(말 [土+末]; 11세)
내의정공파 內醫正公派(하손 夏孫; 11세),
이천공파 伊川公派(세안 世安; 12세)
소윤공파 少尹公派(온량 溫良; 12세),
별좌공파 別坐公派(번수 蕃壽; 12세)
재령공파 載寧公派(대승 大升; 12세),
사평공파 詞平公派(공승 公升; 12세)
별제공파 別提公派(관 寬; 13세),
금성공파 金城公派(엽 曄; 13세)
현령공파 縣令公派(언성 彦性; 13세),
전주공파 全州公派(언경 彦憬; 13세)
장령공파 掌令公派(언침 彦忱; 13세),
진사공파 進士公派(언핍 彦愊; 13세)
참봉공파 參奉公派(언각 彦覺; 13세),
석흥군파 碩興君派(척 愓; 15세)
만오당파 晩悟堂派(돈정 惇亭; 16세),
야계공파 冶溪公派(익태 益泰; 17세).
◎ 소부감판사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파 + 16세)[18]
저헌공파 樗軒公派(석형 石亨; 9세),
농계공파 聾溪公派(명장 命長; 11세)
호군공파 護軍公派(복장 福長; 11세),
대호군공파 大護軍公派(효장 孝長; 11세)
첨정공파 僉正公派(경장 敬長; 11세),
월사공파 月沙公派(정구 廷龜; 13세)
군수공파 郡守公派(정현 廷顯; 13세),
목사공파 牧使公派(정호 廷虎; 13세)
의정공파 議政公派(정화 廷華; 13세),
문천공파 文川公派(정수 廷秀; 13세)
좌랑공파 佐郞公派(선민 先民; 14세),
쌍계공파 雙溪公派(번민 蕃民; 14세)
판관공파 判官公派(관민 寬民; 14세),
좌랑공파 佐郞公派(제민 悌民; 14세)
호군공파 護軍公派(충민 忠民; 14세),
서민공파 恕民公派(서민 恕民; 14세)
진사공파 進士公派(주 澍; 14세),
윤공파 淪公派(윤 淪; 14세)
응립공파 應立公派(응립 應立; 14세),
응현공파 應賢公派(응현 應賢; 14세)
흥무공파 興茂公派(흥무 興茂; 14세),
흥창공파 興昌公派(흥창 興昌; 14세)
장수공파 長水公派(빈 贇; 14세),
세마공파 洗馬公派(지 贄; 14세)
참봉공파 參奉公派(현 賢; 14세),
지평공파 持平公派(보 寶; 14세)
통덕랑공파 通德郞公派(갱 賡; 14세),
충정공파 忠定公派(귀 貴; 14세)
직장공파 直長公派(경한 景漢; 14세),
수한공파 守漢公派(수한 守漢; 14세)
주부공파 主簿公派(신 愼; 14세),
참군공파 參軍公派(뢰 賚; 14세)
찰방공파 察訪公派(빈 賓; 14세),
교관공파 敎官公派(괴 ?; 14세)
교위공파 校慰公派(신 賮; 14세),
동지공파 同知公派(천 蕆; 14세)
언우공파 彦佑公派(언우 彦佑; 14세),
언종공파 彦宗公派(언종 彦宗; 14세)
사직공파 司直公派(경흥 景興; 14세),
교관공파 敎官公派(복흥 復興; 14세)
장사랑공파 將仕郞公派(중흥 中興; 14세),
현공파 鉉公派(현 鉉; 14세)
종공파 鍾公派(종 鍾; 14세),
연공파 鍊公派(연 鍊; 14세)
용공파 鏞公派(용 鏞; 14세),
전공파 銓公派(전 銓; 14세)
참봉공파 參奉公派(노 櫓; 14세),
성제공파 城齊公派(추 樞; 14세)
추담공파 秋潭公派(남 楠; 14세),
감찰공파 監察公派(즙 楫; 14세)
별제공파 別提公派(장 檣; 14세),
봉사공파 奉事公派(제 梯; 14세)
사복시정 란파 司僕寺正 欄派(란 欄; 14세),
승지공파 承旨公派(영 木+英; 14세)
사복시정 화파 司僕寺正 樺派(화 樺; 14세),
사복시정 준한파 司僕寺正 俊漢派(준한 俊漢; 14세)
익한공파 翼漢公派(익한 翼漢; 14세),
창한공파 昌漢公派(창한 昌漢; 14세)
경한공파 經漢公派(경한 經漢; 14세),
계정공파 繼鄭公派(계정 繼鄭; 14세)
인춘공파 仁春公派(인춘 仁春; 14세),
별좌공 봉춘공파 別坐公 逢春公派(봉춘 逢春; 14세)
덕희공파 德禧公派(덕희 德禧; 14세),
덕록공파 德祿公派(덕록 德祿; 14세)
덕량공파 德良公派(덕량 德良; 14세),
진충공파 盡忠公派(진충 盡忠; 14세)
택룡공파 澤龍公派(택룡 澤龍; 14세),
사립공파 士立公派(사립 士立; 14세)
천립공파 天立公派(천립 天立; 14세),
주부공파 主簿公派(시민 時敏:15세)
사우당공파 四友堂公派(시담 時聃; 15세) ,
죽창공파 竹窓公派(시직 時稷; 15세)
시겸공파 時謙公派(시겸 時謙; 15세),
시성공파 時省公派(시성 時省; 15세)
시회공파 時晦公派(시회 時晦; 15세),
승사랑공파 承仕郞公派(광현 光玹; 15세).[A][19]
부정공파 副正公派(종미 宗美:7세)[A]
생원공파 生員公派(흥림 興林:8세)[A][20]
감찰공파 監察公派(덕림 德林:8세)[A]
전서공파 典書公派(제경 齊卿:8세)[A]
평장사공파 平章事公派(안군 顔君:2세)[A][21]
◎ 통례문부사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대 + 18세)
소윤공파 少尹公派(척/즐 隲; 3세),
남대공파 南臺公派(남대 南臺; 4세),
정랑공파 正郞公派(보민 補民; 5세),
현감공파 縣監公派(숭경 崇經; 6세),
충간공파 忠簡公派(숭원 崇元; 6세),
승정공파 承政公派(숭윤 崇允; 6세),
직강공파 直講公派(숙황 淑璜; 6세),
현감공파 縣監公派(숙형 淑珩; 6세),
감찰공파 監察公派(숙규 淑珪; 6세),
정양공파 靖襄公派(숙기 淑琦; 6세),
문장공파 文莊公派(숙감 淑瑊; 6세).
◎ 대장군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대 + 18세)[22]
좌시랑공파 左侍郞公派(인후 仁后; 4세)[23],
공량공파 恭良公派(수산 壽山; 5세)[24],
찬성공파 贊成公派(질 晊; 8세).[25]
위의 파들은 모두 현재까지 이어져오나, 아래의 파들은 현재 확인이 되지 않고 있는 파들이다.
◎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26]
◎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27]
◎ 이부시랑공파(吏部侍郞公派)
◎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3.1. 연안 이씨 분적 본관 일람


  • 안산 이씨 경기계[28]: 연안 이씨에서 분적하였는데 시조 이인수(李仁守)는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이습홍(李襲洪)의 9세손 이근수(李根粹)의 아들로 조선조에서 별시위(別寺衛)를 지냈다고 한다. 안산 이씨의 세보에 의하면 이근수가 맹인 지화(池和)의 모함으로 창원(昌原)에 유배되었다가 그의 형 이근건(李根建)의 아들 이인문(李仁文)의 상소로 해배된 뒤 이천(伊川)으로 이거하였다. 그 뒤 아들 이인수가 다시 안산으로 옮겨 정착하면서 분적, 본관을 안산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연안 이씨 세계에는 이근수의 후대를 수재공파(秀才公派)로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부만 분적한 것으로 짐작된다. 문과 급제자로는 정조 19년에 병과 24위로 급제한 이학연이 있고, 무과 급제자는 총 19명이다.
  • 해주 이씨: 해주 이씨 시조는 이녕으로 훈련원첨정을 지낸 이중련의 장남이다. 예빈시별제를 지내고 후에 가선대부 공조참판 해성군에 증직되었다. 이녕이 해주로 유배를 당한 후 후손들이 해주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에 이녕을 시조로 해주를 본관으로 하여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에서 분적하여 세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무과 급제자는 총 27명이며 알려진 인물로는 조선 후기 화가로 <강산무진도>, <송하담수도> 등을 그린 이인문[29]이 해주 이씨이다. 인구 수는 2000년 기준으로 2,064명[30][31]

4. 논란



4.1. 시조 이무가 신당서의 이무인가



4.1.1. 부정 의견


1887년 연안 이씨 운초 이정균이 지은 역사픽션 <흥무왕연의>에 등장하는 시조 이무가 신당서에 등장하는 농서 이씨(황제 집안) 이무가 맞는가 하는 문제이다. 신당서 열전 제 4권에 나오는 이무가 동명이인이 아닐까 하고 김동협이 문제를 제기했다. #
연안 이씨 시조에 대한 기록이 당대 중국 측 기록으로는 없고 현재 중국에서 알고 있는 이무 역시 회남왕이 아닌 대한민국의 명가 연안 이씨의 시조라는 점 및 백제 정벌을 했다는 연안 이씨 족보의 주장을 그대로 실었을 뿐이다.
이에 대해 부사공파 문중 22세손 이성영은 혹여 가필이거나 정확치 않은 내용으로 시조를 오히려 욕되게 할 수 있으니 판단을 조심하자는 글을 썼다. # 이무가 연안백이 되었다가 연안후로 가봉이 된 후 국빈으로 대접 받았다고 하는데 연안이란 지명은 고려 충선왕 때인 14세기이므로 혹여 연안후가 됐다 하더라도 중국 어딘가의 연안이 아닐까란 가설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시조의 이름이 첫 등장하는 것은 현종 때 동국만성보가 처음이며 영조 때 문헌비고와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만성시조편임을 지적한다. 물론 전문가의 주장은 아니기 때문에 고종 때 창작인 흥무왕연의를 김유신 장군의 흥무왕실기로 오해한 점은 눈에 띈다.
나당 연합군의 지휘부 명단이 대총관 소정방, 부대총관 김인문(무열왕의 세자), 좌효위장군 유백영, 우무위장군 풍사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으로 중랑장 이무의 이름은 없으나 최소한 시조가 당나라에서 백제로 건너온 것이 맞다면 소정방이 웅진도독부 등을 설치할 때 남기고 간 1만 병사 중 장교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4.1.2. 긍정 의견


원정시 농서 이씨 황족을 한 명 파견한 게 아닌가. 단순한 장교가 제후의 직위를 받는가.
회남왕 이무가 맞다는 전제 하에 측천무후가 이무의 부친 이원례를 죽여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귀화하지 않았을까.
또한 문무왕이 공을 인정해 시염성(鼓鹽城)에 식읍을 내렸고, 이에 후손들은 본관을 시염으로 하였다. 시염성(鼓鹽城)은 현재의 황해도 연안 부근이며, 중국과는 무관한 지명으로 보는 것이 옳다.
또한 1000호의 식읍은 우리나라 역사상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만호후 수준의 제후였다. 당시의 식읍은 고려시대와 달리 전적인 권한이 있었을 걸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나 이무는 신라왕의 아랫사람은 아니며, 봉건시대 군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1.3. 재반론


  • 원정시 농서 이씨 황족을 한 명 파견한 게 아닌가.
    • -> 신당서를 보니 회남왕 이무가 백제에 간 기록이 없다.
  • 장교가 제후의 직위를 받는가.
    • -> 공훈에 따라서 받는 건 가능. 그러나 연안 이씨 족보와 효령사 장군당에 실려있는 전승 외에는 딱히 알려져 있는 것이 없음. & 이무 혹은 김유신 관련 정보가 안 보이는 실정.
  • 측천무후와 이원례의 알력
    • -> 연안 이씨 족보에서 조차 이원례에 대한 얘기는 안보인다. 시조가 당서의 이무가 맞다는 전제 하에서만 필요한 추측일 뿐.
  • 중국 측 회남왕 이무에 대한 평가는 그럼? (바이두 사전 옮김)
    • 李茂(约643-676年)唐高祖李渊孙,徐康王李元礼长子,封淮南王。性格酷薄,行为恶劣。
      • -> 이무(643-676) 당고조 이연의 손자. 서강왕 이원례의 장남. 회남왕에 봉해졌음. 성격은 모질고 박정하며 행동이 악하고 졸렬했다.
    • 父亲李元礼卧病在床时,元礼宠姬赵氏貌美,李茂逼迫欲夺之。李元礼叱责李茂,李茂愤恨,屏斥李元礼的侍卫,断绝了父亲的药膳。说:“既得五十年为王,更何烦服药?”李元礼最终饿死,李茂后袭封父爵。上元年间,此事泄露,李茂被流放振州而死。
      • -> 아버지 이원례가 와병해 병상에 있었을 때, 원례의 첩실 조씨의 용모가 아름다워 이무가 취하려 했다. 원례가 그것을 알고 꾸짖자 이무는 아버지의 약과 밥을 끊었다. '왕이 된지 50년이 넘었는데 왜 약을 먹는가?' 이원례는 결국 굶어죽었다. 이무는 아비의 봉작을 이었으나 이 사실이 발각돼 振州로 추방돼 죽는다.

4.1.4. 결론


회남왕 이무는 백제로 온 사실이 없고 패륜으로 중국에서도 최남단 하이난 섬 싼야시까지 유배를 가서 죽는다. 즉 회남왕 이무는 한반도에 자손을 남길 수도 없고 집안의 명예와 역사에 누가 될 인물을 다시는 잘못 주장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경북 군위 장군당에 대해 문무왕, 김유신, 회남왕 이무가 모여...이런 내용의 2011년 경북일보의 기사가 있는데 일회성 기사야 그렇다 쳐도 혹시 장군당 사적 설명 등 회남왕 운운하는 정보가 있다면 서둘러 정정시켜야 할 것이다.

4.1.5. 양측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항


  • 이무의 실존 여부
-> 인정. 천 년 이상 족보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 씨족이 뭉치고 싸우고 조선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었음.
  • 연안 이씨의 조선과 대한민국에 대한 높은 기여도
-> 고려, 조선 시대 수십의 공신 뿐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훈자 수로도 씨족 최상위 티어에 있음. 건국포장까지 하면 더 많음.

4.2. 이덕화가 연안 이씨?


이덕화 본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위키백과 프로필에는 전주 이씨 회안대군파로 알려졌는데, 채널A도시어부에서 연안 이씨라고 밝힌 바 있다. 검색해보면 꽤 많은 매체에서 이덕화와 부친 이예춘연안 이씨로 소개하는 점도 그런데 확인이 필요하다.

4.3. 수안부원군 이수산이 연안 이씨?


우선 공량공 이수산은 시호는 공량이며 1352년 조일신의 난 때 살해당할 뻔 했지만 숨어서 죽음을 면했고 첨의평리, 행성낭중 등을 역임하다가 기철 등이 숙청되어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나 풀려난 후 수춘군에 봉해진 다음 찬성사와 판삼사사를 지냈고 추성익대좌명공신과 추숭보절익대좌리공신에 봉해졌다. 이수산의 본적은 수안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 보서에 이인계의 아들로 그의 형제인 수창, 수장과 함께 그는 물론 그의 후대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에 연안 이씨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근대 지리학자 이지호는 수안사람으로서 관향이 '연안'인데, 이 사람이 공량공의 21세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1980년대 연안 이씨 공량공파[32] 족보 서문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 족보 서문에 기록되기를 본인의 선대는 분명한 연안임에도 불구하고, 각 종 사적과 보서에는 수안으로 관향이 기록되어 있어 조상에 대한 죄를 짓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수산이 수안부원군에 봉군이 내려지면서 아들 지밀직사사 이념과 함께 수안에 정착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본인의 선대가 '연안'에서 '수안'으로 분적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다른 여타 가문의 특성을 살펴보아도 분관한 가문은 봉군에 의하여 분관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수안부원군이라는 기록은 고려사에서 처음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사라는 기록이 1400년대 중반 즈음에 작성하여 수안부원군을 근거로 '수안군'사람으로 칭했을 것으로 보인다. 족보는 국립중앙도서관 6층 고전운영실에서 그 내용을 확인하였다. 비록 1980년 대 족보 서문이지만 1800년대 강난형이 작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수안 이씨 족보에는 이수산과 아들 이념이 나와 있지 않으므로''' 만약 당시의 고문서가 있다면 이 내용이 증명이 되는 것이니 연안 이씨로 봐야 한다.
이 항목을 만드는데 사용한 자료들의 출처이다. 링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5. 항렬


'''왼 쪽이 시조 기준, 오른 쪽이 중시조 기준이다.'''
태자첨사공파 시조세대 = 중조세대 + 15세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이습홍(李襲洪)'''
41세
26세
의(義○), 상(尙○)[재]
42세
27세
희(○熙), 범(○範)[재]
43세
28세
용(庸○)
44세
29세
택(○澤), 신(○新)
45세
30세
정(廷○), 성(聖○)
46세
31세
규(○揆)
47세
32세
교(敎○)
48세
33세
숙(○肅)
49세
34세
연(演○)
50세
35세
경(○卿)
51세
36세
진(振○)
52세
37세
면(○冕)
53세
38세
남(南○)
54세
39세
동(○東)
55세
40세
재(載○)
56세
41세
유(○猷)
소부감판사공파 평장사공파는 파계 확인이 늦어 8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족보에 기록되었으므로 항렬을 각기 다르게 쓰는 집이 많다.
소부감판사공파 시조세대 = 중조세대 + 16세
'''소부감판사공파(小府監判事公派) 이현려(李賢呂)'''
'''전서공파, 부정공파'''
40세
24세
승(○承), 人변
41세
25세
영(○榮), 병(秉○)
42세
26세
훈(○勳), 火변
43세
27세
규(○圭), 배(○培)
44세
28세
겸(○兼)
45세
29세
능(○能)
46세
30세
동(○東), 근(○根)
47세
31세
용(○容)
'''문천공파, 의정공파'''
40세
24세
人변(외자)
41세
25세
병(秉○)
42세
26세
火변(외자), 희(○熙)
43세
27세
배(○培)
44세
28세
金변(외자), 종(鍾○)
45세
29세
우(○雨)
46세
30세
동(○東), 근(○根)
47세
31세
용(○容)
'''월사공파'''
40세
24세
승(○承)
41세
25세
영(○榮)
42세
26세
훈(○勳)
43세
27세
규(○圭)
44세
28세
중(○重)
45세
29세
제(○濟)
46세
30세
동(○東), 근(○根)
47세
31세
용(○容)
통례문부사공파 시조세대 = 중조세대 + 18세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이지(李漬)'''
'''정랑공파, 진강공파'''
36세
18세
교(○敎)
37세
19세
용(○庸)
38세
20세
균(○均)
39세
21세
현(鉉○)
40세
22세
영(○永)
41세
23세
화(○和)
42세
24세
응(應○)
43세
25세
원(○遠)
44세
26세
선(○善)
45세
27세
순(○淳)
'''충간공파'''
36세
18세
교(○敎), 림(○林), 규(○奎)
37세
19세
성(○性), 희(○熺)
38세
20세
균(○均)
'''정양공파'''
36세
18세
교(○敎), 병(秉○)
37세
19세
성(○性), 환(○煥)
38세
20세
준(埈○), 균(○均)
'''문장공파'''
36세
18세
병(炳○)
37세
19세
희(喜○)
38세
20세
진(○鎭)
39세
21세
호(浩○)
40세
22세
식(○植)
41세
23세
광(光○)
42세
24세
규(○奎)
대장군공파 항렬은 좌시랑공파, 공량공파, 찬성공파(순서 상관 없음)의 항렬을 적어 놓은 것임. 대장군공파도 평장사공파와 같이 파계 확인이 늦어 항렬을 각기 다르게 쓰는 집이 많다.
대장군공파 시조세대 = 중조세대 + 18세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이송(李松)'''
35세
17세
현(賢○)
득(○得)
의(宜○)
36세
18세
증(○曾)
택(澤○)
민(敏○)
37세
19세
주(○疇)
섭(○燮)
정(禎○)
38세
20세
동(○東)
재(在○)
언(彦○), 중(○重)
39세
21세
렬(○烈)
갑(○甲)
선(善○)
40세
22세
규(○奎)

주(○周)
41세
23세


헌(憲○)
42세
24세


제(○濟 )

6. 실존인물



6.1. 신라


  • 이무 - 연안 이씨 시조. 당고종 때 중랑장을 지내다 660년 태종무열왕 7년에 소정방의 부장으로 신라에 와서 백제를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또 나당동맹 와해 때 소정방신라도 공격하려 하자 이무가 반대하는 등 공이 커 시염성에 식읍을 받고 백작에 봉해졌으나 문무왕김유신이 식읍을 1000호로 올리고 후작에 봉해야 한다고 청하니 문무왕이 윤허하였으며 높은 벼슬을 제의하였으나 이무가 극구 사양하니 국빈으로 예우하였다고 전승에 나와있다. 또한 경북 군위의 효령사(장군당)는 김유신과 소정방 그리고 대사마 좌위 중랑장(大司馬 左衛 中郞將) 이무를 기린 곳이며 야사에 3사람이 장군봉에 올라 "이제 삼국 통합이 되었으니 안심하고 살아라" 라고 주민에게 말했다고 전한다. 정초, 상원과 단오에 제례가 있다. 소부감판사공파에선 연안 이씨 시조 이무의 시호가 고려명신도첩과 부록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문청공이라 전한다.

6.2. 고려


계보가 삼별초의 난 때 실전되었다고 전한다. 이에 현재는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각 파의 중시조의 세계를 고증할 수 없어 중시조의 선대의 인물을 신분 정도만 간단히 유추하고, 정확히는 파악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실제로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태자첨사, 판도평의사사, 진현관대제학, 경연춘추관사, 병부상서 등을 지낸 김의공의 처가 연안 이씨라고 전하는데 부인 연안 이씨의 아버지는 도감판서를 지낸 승중(承中)이며, 조부는 제학을 지낸 충건(忠健), 증조부는 소감을 지낸 유인(裕仁)이다. 여기서 김의공의 처 연안 이씨는 1117년생이므로 증조인 이유인은 대략 1000년대 중반시기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유인은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 이현려 보다 선대의 인물로 역시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또 고려 성종이 “쇠로 말하면 좋은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사람이다.(鐵中錚錚)”라고 표현한 고려 현종 13년에 졸한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주국(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을 지낸 이주헌의 증손이자 선종 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소보를 지낸 이공저도 본관이 연안(농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생년이 고려 문종 6년임을 보아 각 파 중시조의 선대의 인물로 추측되나 역시 확실히 고증할 방도가 없다.
  • 이안군 - 顔君.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 이현려의 아들이자 고려 명종 때 중서문하성 평장사를 지냈다.
  • 이경무 - 조부는 태차첨사로서 상약국 봉어를 지낸 학옹 이습홍이다. 아버지 이극영은 판태의감사를 지냈으며, 본인은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지냈다.
  • 이분희 - 汾禧. 고려 충렬왕 때 사람으로 대장군 이송(松)의 아들이다. 왕을 호종해 위사공신에 올랐다. 이 때의 공으로 지복주사였던 연안을 석주로 승격시켰다. 또한 원나라 공주를 맞아들이기도 했다. 추밀원 부사, 지주사, 지밀직사사를 지내다 김방경을 무고한 죄로 가산이 적몰되고 바다에 던져졌다한다. 또한 고려사 이분희전에는 그의 기록과 함께 그의 본관인 염주 이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 이분성 - 이분희의 동생. 휘는 습. 원종의 총애를 받아 상서도성의 우승에 올랐고 충렬왕 때 지신사를 지냈다. 성격이 곧고 깨끗하여, 정령(政令)이 시행될 때 백성들에게 불이익이 있게 되면 간쟁을 하였고, 내관들의 청탁을 모두 거절하여서 내관들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과 후궁 사이의 딸과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이습 역시 김방경을 모함했다는 죄로 39세의 나이로 죽었다. 또한 고려사 이분희전에 따라 생년이 밝혀졌다.
  • 이효신 - 종2품 봉익대부 판도판서
  • 아자첩목아 - 이효신의 장남. 원나라로 귀화했다. 후에 원나라에서 연안군으로 봉해졌다.
  • 이엄[미확인] - 지밀직사사를 지낸 문신이자 연안군. 1등공신에 올라 수성양절보리공신에 책록되었다. 충혜왕 때 밀직부사가 되었다. 1339년 충숙왕이 죽은 뒤 충혜왕에게 강간을 당한 경화공주(慶華公主)가 창피하여 원나라로 가기 위하여 말을 구하려 하였다. 이 때 충혜왕이 이엄(李儼)과 윤계종(尹繼宗) 등에게 명하여 마시(馬市)를 금하여 공주가 말을 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충혜왕이 이엄과 윤계종에게 마시(馬市)를 금하게 하여 말을 팔지 못하게 한 점으로 보아 충혜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엄은 1340년 충혜왕이 원나라 형부(刑部)에 구금될 때 폐신으로서 이몽가(李蒙哥) 등과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342년 조적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이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책봉되었다. 동생인 지신사 이운도 원나라 중서성에 충혜왕의 잘못을 항소했다.
  • 이권[미확인] - 판삼사사를 지낸 문신이자 연성군, 오원부원군.[33]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거쳐 1350년(충정왕 2)에 경상·전라도도지휘사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였고, 이듬해에는 만호 인당(印瑭)과 함께 서강(西江)에서 왜구를 막았다. 1352년에 조일신의 난이 일어나자 조일신을 위협하여 어보를 꺼내 스스로 우정승에 제수하고, 정천기를 좌정승으로 이권을 판삼사사로 나영걸을 판밀직사사 등으로 삼았다. 그러나 1352년(공민왕 1) 9월에 조일신(趙日新)에 난이 실패하자 정천기와 조일신 등은 주살되고 이권은 일당으로 몰려 옥에 갇혔다가, 그해 10월에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1354년에 원나라의 요청으로 고우(高郵)의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기 위하여 서경의 수군 300여 명을 이끌고 연경(燕京)으로 갔으나, 남쪽에 있는 적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진 탓에 힘껏 싸우다가 최원(崔源)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해에 오원부원군(五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 이인계 - 이인후의 형제이며 대장군공파 이송의 손자 이병의 아들이다. 이인계의 아들이 현재 본관이 논란인 판삼사사 공량공 이수산으로 기록 되어있다.[34] 또한 이인계의 장남이자 이수산의 형제 이수창은 판도정랑공파 중시조 이백연과 영광군사공파 중시조 이계연의 아버지이다.
  • 이인후 - 1279년 생으로 고려 때 문하좌시랑을 지냈으며 감찰시승을 지낸 이병의 삼남이다. 경기도 고양시 일대에 이인후를 파시조로 하는 대장군공파 좌시랑공파의 집성촌이 있다. 연안 이씨에서 분적한 해주 이씨 시조 해신군 이녕이 이 곳 출신이라 전해진다. 또한 궁원록에는 이인후가 이분양의 아들이자 감찰시승을 지낸 이병의 삼남으로 기록 되어있다.
  • 이종실 - 종2품 봉익대부. 이효신의 손자이며 종3품 중현대부 사복시정 이광의 아들이다.
  • 이종무 - 자덕대부 공조전서, 증 좌찬성
  • 이종미 - 종3품 중현대부. 서운관부정을 지냈다.
  • 이척 - 우왕 6년 병과 3위, 조부가 통례문부사공파 중시조 이지이며 아버지가 공조전서 문창공 이계손이다.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며 고려 정승, 문하시중 이제현의 차녀이다. 관직은 삼사좌사를 지냈으며 통례문부사공파 소윤공파 파조이다.
  • 이제경 - 공조전서. 소부감판사공파 전서공파 파조이다.
  • 이정공 - 고려 무반 최고위 실무직인 상호군을 지냈으며 전공판서 이원발의 아버지이다.
  • 이원발 - 상호군 이정공의 아들로 호는 은봉(隱峯), 부인은 성천 김씨이다. 고려 공민왕 때 전공판서를 지냈는데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가서 종적을 감추었다. 이 때 평소에 덕과 의리를 같이 하던 친한 원천석이 그의 집에 와서 5~6일 정도 유숙도 하였다.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 태조가 원천석과 함께 상신으로 불렀으나 여러 부름에도 움직이지 않고 최후에 우의정에 제배하였으나 불사이군 충절을 지키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뒷날 이귀령이 공을 세운 것이 많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으로 증직이 내려졌다. 묘는 원래 고산현[35] 소주치에 있었으나 후에 용인 구수동 해자원으로 옮겼다.

6.3. 조선


  • 이귀령 - 자는 수지, 호는 계은, 시호는 강호다. 전공판서 이원발의 아들이며 고려 말에 판선공시사 등을 지냈다. 동생인 이귀령과 함께 태조와 친분이 있었다고 하며, 태조가 즉위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었고 판승녕부사를 지내다 태종 때 검교우의정, 검교좌의정을 지냈는데 얼마 뒤에 좌의정까지 올랐다. 94세 나이로 졸하였다.
  • 이귀산 - 자는 흥서이며 호는 괴은. 봉익대부 전공판서 이원발의 아들이며 좌의정 이귀령의 동생이다. 도호부사 이속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호조판서와 제조등을 지냈다. 정경부인 고령 김씨 사이에서 이속을 낳았으며 장인은 충혜왕 복위 즉위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서해도관찰사, 문하평리, 예부상서,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으며, 경순왕의 11세손인 의성군 김석의 장손인 고령 김씨 시조 익대공신 고양부원군 김남득이다. 이귀산은 만년에 용인 구수동으로 물러나 두 그루의 괴목을 심고 스스로 괴은(槐隱)이라 하고, 삿갓을 쓰고 밭을 갈며 강가에서 낚시하며 보냈다고 전해진다.
  • 이속 - 호조판서 이귀산의 아들이며, 간택 제도를 만들게 한 일등공신이다. 태종의 혼담을 거절했다가 노비로 전락되었다.
  • 이숙기 - 1등 적개공신, 2등 원종공신, 4등 좌리공신. 평양판관 등을 지내다가 1467년 이시애의 난 때 강순(康純) 휘하로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올랐다. 세조 실록에 이시애의 난에서 반란군을 이숙기와 남이가 살상한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많다고 나와있다. 이 공으로 종 2품 가정대부로 이조참판이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후에 자헌대부로 승진하고 호조판서, 형조판서에 올랐다.
  • 이숭원 - 3등 좌리공신. 이백겸의 손자이며, 참판 이보정의 아들이다. 훈구파의 핵심인물로서 세조 때 대사헌까지 지냈다. 후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85년 우참찬이 되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좌참찬이 되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1489년에 다시 형조판서를 지낸 뒤 1491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중종 때는 청백리에 녹선되고, 1648년(인조 26) 지례의 도동사(道東祠)에 제향되었다. 또한 성종 즉위의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올랐으며 종2품 가선대부,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간공이다. 그의 후손들은 경북 김천에서 대대로 세거했고 독립운동가 여럿을 배출했다.
  • 이석형 - 4등 좌리공신. 연성부원군. 연원군 이숭원과 같이 대표적인 훈구파였으며, 세종 때 생원시, 진사시, 식년문을 27세의 나이로 1년에 세번 장원하였다. 1년에 삼장원 한 일은 과거 제도를 실사한 이래 없었던 일이다. 사간원정언에 제수되고, 이듬 해 집현전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학사로 재임하면서 집현전의 응교, 직전, 직제학을 두루 역임하였다. 세조 때 한글로 논어 구결을 만들기도 했으며 대학연의 등 유교 경전을 정리했다. 전라도 황해도 관찰사도 지냈으며 조선의 호패법을 정착시킨 사람이다. 세조 때 나라 녹을 먹는 몸이었지만 사육신을 기리는 글을 지었다가 죽을 뻔 했으나 세조가 눈감아줬다고 한다. 부인 연일 정씨가 정몽주의 증손녀라고 한다. 그의 후손 중에 정승만 8명, 부원군이 3명, 3대 연속 대제학을 포함해 총 6명의 대제학이 나왔으며 판서만 37명이다.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 1,2등을 싹쓸이한 이귀, 이시백, 이시방 부자도 그의 후손이며, 정조가 늘 저서를 끼고 살았다는 월사 이정구도 그의 후손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후손 중엔 역적이나 탐관오리가 없이 깨끗 청빈하기까지 했다.
  • 이곤 -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정국공신 4등에 녹훈되고 연성군으로 봉해졌으나, 1519년 조광조 등 사림파의 주장에 의해 부당하게 책봉되었다는 이유로 공신 위호가 삭제되었다가 기묘사화 후에 복적 되었다. 이후에 이곤이 여주목사•철원부사 등을 지낼 때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했는데 정부에서 검시하고 수사한 결과 노비에 의해 독살되었음이 밝혀졌다.
  • 이언침 - 사림의 인물이다. 이속의 손자인 이인충의 증손으로 153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인종 때 장령으로 있다가 사임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순창군수로 나갔다. 그러나 1547년에 장미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자 우울하게 지내다 죽었다. 그 후 1570년에 직첩을 환수받았다.
  • 이국주 - 1등 적개공신 이숙기의 손자로 이천현감을 지냈다. 나이가 들어 상처했는데, 아들 우민이 홀몸이 된 자신에게 오히려 비인 박씨를 소개하고 계모에게도 효를 다했다고 한다. 이국주는 계처 박씨에게서 호민을 얻는데 호민은 대제학, 좌찬성을 지내고 집안을 빛낸다.
  • 이호민 - 2등 호성공신이자 연릉부원군. 홍문관 예문관 모두 대제학을 지낸 대학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명나라로 건너가 원군을 요청한 덕에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왜란을 끝낼 수 있었다. 선조가 양위를 하려 할 때 광해군이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죽을 뻔 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도 광해군을 밀었다. 그러나 북인들의 독재와 영창대군 살해에 반대하다 귀양갔다. 인조반정 후 복권된다. 시호는 문희공.
  • 이정구 -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를 이르는 말인 월상계택의 '월'이 그를 일컫는 말이다. 월사집을 남겼고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냈다. 많은 명문과 그림을 남겼으며 해동명신록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경기도 가평에 묘소가 있다. 이귀의 아버지 이정화와 육촌형제간이지만 이귀보다 7살 아래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중국어에 능하여서 어전통관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을 접대할 때 조선 조정을 대표하며 중요한 외교적 활약을 했으며, 양호 사건과 정응태 무고 사태에 조선 조정이 휘말려서 명나라에게 곤혹을 치르게 생겼을 때 이정구가 명 조정에 상신한 주문으로 겨우 혐의를 벗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명나라 사람들이 조선 국왕의 충간의담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는 평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전한다고 한다. 여담으로 쌀밥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정구가 1599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재상의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그의 집에 가니 마침 재상은 공무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에 이정구가 돌아가려 하자 그대로 보내면 실례가 된다고 생각한 집안 사람이 그를 붙잡아 주찬을 대접하였는데, 이정구는 이를 먹고도 식사 전이라며 돌아가려고 했다. 이대로는 대접이 변변찮았다는 것이 될까 싶어 집안 사람은 다시 그를 붙잡고 떡이며 과일이며 여러 차례 음식을 내왔지만, 이정구는 그걸 다 먹고 그때마다 식사 전이라며 돌아가려고 했고, 결국 오전 내내 음식을 먹고도 이정구는 식사 전이라며 숙소로 돌아갔다. 나중에 집에 돌아온 재상이 이 일을 알고, 조선 사람은 쌀밥을 먹지 않으면 굶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미리 집안 사람에게 말해두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 이유길 - 어린 나이에 명량해전에 출전해 이순신 밑에서 전공을 세우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일어날 때 우영장으로서 명나라 원군으로 갔다 만주에서 전사했다. 그가 오랑캐에게 포위될 때 피로 3월 4일 죽었다라고 삼베에 적어 말에 매어 보냈다. 주인잃은 말이 만주에서 1000km를 사흘 만에 달려 그의 고향집에 와서 슬피울고 절명했다고 한다. 말을 묻은 곳이 파주 의마총이다. 현재 파주시 지정 유적이다. 영조대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됐다.
  • 이경엄 - 조선 중기의 문학가. 연천군. 본은 연안, 자는 자릉(子陵), 호는 현기(玄磯)이다. 연릉부원군 이호민의 아들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후 기로소에 들어갔고 연천군에 봉해졌다. 사후에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문집으로는 '과정습유(過庭拾遺)'를 남겼다. 시조 15수와 가사#s-1.2 사천귀전가(斜川歸田歌)가 전한다.
  • 이홍로 - 연성군 이곤의 증손으로 157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3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는 영의정 기자헌의 누이로 행주 기씨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서 왕을 호종하다 도망 등 여러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후에 다시 함경도종사관, 충주목사 등을 지냈으나 재차 탄핵되어 강계와 제주도 등으로 귀양갔다. 제주도에서 해배된 후 풀려나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1608년 유영경소북의 일파로 몰려 다시 제주에 유배되었고 사사 당하였다. 1612년에 유영경과 김대래와 함께 부관참시 되었다. 또한 광해군에게 역신으로 낙인되는 바람에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데 아들 이승원, 이승형은 유영경의 아들 유열과 함께 연좌되어 처형되고 남은 아들 이승업 마저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다행히 이승업에겐 아들 두 명이 있었고 그 중 이여주는 이승원에게 입양된 뒤 안악군수를 지내 세대를 이어갔다. 이홍로는 1623년 인조반정 후에 신원되어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 이귀 - 1등 정사공신. 서인의 영수이다. 남한산성을 높게 올렸고, 호패법을 재정비해 군역 대상자를 확실히 했으며, 만주족에 대한 각종 국방력 강화에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이미지와 다르게 지천 최명길과 함께 주화파였다. 후일 사계 김장생과 함께 인헌왕후의 상에 기년을 주장하다가 파직됐었으나 정묘호란 때의 비상시국을 조선이 잘 넘길 수 있도록 온힘을 다했다. 또 1600년대 초에 간행된 한국의 병서로, 당시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이귀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고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한 한국의 방어전략을 담은 이충정공 비어방략을 기록했는데 이 문서는 총 3권이며,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UC) 버클리의 리치먼드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이명한 - 삼등현령 이계의 손자이자 좌의정 이정구의 아들이다. 광해군 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6년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경연시독관에 제수되었다. 사가독서를 했으며,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로 모시고 가서 이식(李植)과 함께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이어 응교·사간에 승진한 뒤 이조참의로 승진했다. 다시 사가독서를 허락받고 호당에 들어갔고 승문원부제조가 되었다. 도승지 등을 거쳐 1641년 한성부우윤·대사헌이 되었고, 홍문관·예문관의 양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3년 이경여, 신익성 등과 함께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기도 했다. 이듬 해 세자이사가 되어 심양에 가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왔다.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 20권이 있다. 서산에 일모하니 또한 이명한의 작품이며 남구만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동창곡이 사실 이명한이 지은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약천집』에 당시 유행했던 한글 시조 정몽주의 단심가, 이항복의 철령숙운가와 함께 동창곡이 나와 있는데 이명한의 시조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1642년 진사시에 아들 이만상이 시험을 봤는데, 당시 부친인 이명한이 시험관으로 있었다. 모든 사람이 이만상이 1등을 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시사를 관장하던 부친은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아들 이만상을 2등에 두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아들 이만상은 부친의 병에 마음을 졸이며 간호를 하다 몸이 상하여 3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 이시백 - 조선 고전소설 박씨전의 주요 인물이며,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1등 정사공신 이귀의 아들로 본인도 2등 정사공신에 올랐다. 시호는 충익이다. 병자호란 때 화살을 맞으면서도 남한산성을 지켰다. 아버지에 이어 2대에 이은 충정이었다. 김육대동법을 지지하였으며 서인의 영수로서 예송논쟁을 이끌었고 영의정을 지냈다. 여담으로 인조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시백은 이경여와 함께 반대하며 소현세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결국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술자리를 만들어 이시백을 불러 "병판은 주량이 얼마나 되오?"라고 물은 뒤 이시백이 "신은 술을 잘 못하고, 병이 있어 더욱이 못합다"라고 답하자 인조가 "그 병은 남한산성을 지키다 생긴 병"이라 말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조는 다시 이시백의 자녀가 몇 명인지 묻고, "왜 과거를 보지 않느냐? 나라에 충성하려면 무과라도 좋다. 나는 그대의 부친의 공을 잊지 못한다. 자식들이 과거를 보기를 바란다."고 부탁하였다. 이에 이시백은 감동하여 "아버지가 눈감기 전에는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읍하여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인조는 자리를 같이한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이시백에게 술을 따르게 하며 “내가 이분을 팔다리처럼 여기니 너도 뒷날 이분을 높게 대접하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 이시방 - 판의금부사, 호조판서를 지냈다. 제주 목사를 역임하고 있을 때 광해군이 죽자 소복으로 친히 염습하여 사변을 잘 처리하기도 했다. 그가 저술한 서봉일기에도 광해군 사후 처리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시방은 훈구공신 집안 출신이면서도 사림 출신 정승 김육을 따르며 형 이시백과 함께 대동법을 떠받쳤다. 영의정에 추증.
  • 이일상 - 17세 소년 등과한 천재. 문과급제를 하고도 너무 어려 임관을 못하고 몇 년간 책만 봤다. 병자호란 당시까지도 아직 새파랬는데 청나라에 대해 주전론만 주장하다가 전남 영암으로 귀양갔다. 이후로도 파직됐다가 복직됐다가 관직 생활이 평탄치 못했지만 결국 비변사 당상과 대제학,예조판서를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 동촌 이씨 8상 중 첫째다.
  • 이씨 부인 - 여류시인. 부사 신순일의 부인이며 이정현(李廷顯)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글짓기를 좋아했으며 시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주역과 이백의 글을 필사했으며 유집이 한 권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씨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향거즉사가 있으며 〈실제(失題)〉 한 편이 전하는데 비오는 날 자신의 아름다웠던 청춘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 이광정 - 2등 호종공신이며 연평부원군.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예조판서, 개성유수, 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을 맞이하는 역할을 했으며 명나라 사신으로도 다녀왔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해 강화도로 갔다가 병환으로 죽었다. 인현왕후의 진외증조부이기도 하다.
  • 이관징 - 숙종 대 남인. 숙종의 신임을 받아 대사헌 · 이조판서 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두루 관직을 거쳤으며 청렴한 관리로 이름났다. 그러나 1694년 갑술옥사 때에 삭출되었다가 이듬해 직첩이 환급되었다.
  • 이석관 - 자는 대유, 호는 삼금당. 전남 영암 출신으로 이조참의 이숙함의 후손이며, 연리 중 유일하게 택리지에 나오는 이조판서을 지낸 뒤 청백리에 녹선되고, 광국공신 2등 연양군에 추봉된 청련 이후백의 현손이다. 숙종 12년에 무과 병과 1위로 급제하여 연리 인물 중 유일하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 이천보 - 영조 대 영의정, 노론의 영수이다. 증조부는 비변사 당상을 지낸 이일상이고,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외손자로 인경왕후의 조카이다. 또 판서 이문원의 아버지이자 좌의정 이존수의 조부이다. 가마나 말이 아니라 검은 소를 타고다녀 까막소 대감이란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사위는 풍양인 우의정 조경이다.
  • 이후 - 좌의정으로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으며, 이듬해 세자의 평양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을 비롯하여 유언비어가 심한 데 대한 왕의 추궁을 받자, 그에 책임을 느낀 나머지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과 음독자살하였다. 시호는 정익(定翼)이다. 노론의 영수였다.
  • 이민보 - 노론의 인물로 자는 백눌(伯訥), 호는 상와(常窩)·풍서(豐墅),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음보로 군수가 되고 장악원정, 동부승지,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그 후 정조 15년에 공조판서가 되어 장악원제조를 겸했으며, 그후 형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796년 노인직(老人職)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 위계에 올라 돈령부판사가 되었는데, 음보로 보국숭록대부에 오른 것은 영의정 황희의 아들 황수신 이후 처음이었다. 판서 이조원(李肇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이정보 - 대제학 이일상의 증손으로 경종 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영조 8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병조좌랑, 정언 등을 지내다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를 상소했다가 면책을 받고 사직했다. 1737년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교리가 되고 이조좌랑, 교서관교리, 이조정랑, 응교, 형조참의,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엔 수원부사가 되어 부성을 쌓고 목장을 설치해 전마를 기르고 군비를 충실히 하였으며, 1742년엔 승지로 전임하여 부제학, 대사성, 대사간,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후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상벌을 공평히 하고 비용을 절감해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한성좌윤,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비변사제조 등을 지냈으며, 1750년에 도승지로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2년 뒤 동지경연사, 성천부사를 거쳐 이듬해 좌부빈객이 되고, 1754년에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관, 형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에 우참찬,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등을 역임하고, 1756년에 공조판서로 홍문관·예문관의 제학과 지경연사·좌빈객을 겸하였다. 1758년엔 이조판서로 지춘추관사, 판돈녕부사를 겸하고 이어 좌참찬, 세손의 사부가 되었으며 1761년엔 이조판서로 수어사를 겸하였다. 1762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763년 예조판서, 대제학, 지성균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에 승진하였다. 성품이 엄정하고 강직하여 상소를 하다 여러 번 파직되었다.
  • 이문원 - 본래 이문원은 이천보의 먼 친척인 이공보의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는 이천보에게 입양되었다. 176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서(蔭敍)로 휘령전(徽寧殿)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뒤에 관직이 호조좌랑에 이른 후 1771년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와 승정원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여주목사, 선혜청 제조, 공조 ·이조·형조·병조·예조의 판서, 함경도관찰사,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병판을 지낼 때 인척인 오재순이 이판에 오르자 한 집안에서 양전을 겸할 수 없다먀 사직했다. 1788년(정조 12)엔 이조판서로 재직 중 홍봉한(洪鳳漢)과 가까운 한덕후(韓德厚)를 사헌부에 천거한 일로 비난을 받자 빈청에서 조복을 벗어던지고 물러나 숙천에 3개월간 유배되는 등 소소한 처벌들을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92년에는 채제공(蔡濟恭)을 격렬히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향리로 쫓겨난 일도 있었다. 외에도 지경연사,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문원은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관련한 장난 괴수 이문원이라는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으니 재미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 이성원 - 병조판서,경상도•평안도관찰사,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좌의정 재직 중 다리는 사치일 뿐 일종의 폐단이니 다리를 금해야 한다고 했다. 1789년에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파견 되었다가 돌아와서 죽었다.
  • 이조원(李祖源) - 이진보의 아들로 1735년에 태어나 1806년에 죽었다. 1790년에 경상도관찰사 지냈으며 이 때 일족인 이문원(李文源)이 황해도감사, 이시수(李時秀)가 함경감사로 재직 중이므로 연안 이씨 일문이 삼번(三潘)을 맡을 수 없다 하여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못하였다. 한성부좌윤으로 재직중이던 1791년 동지부사로 연경에 다녀와 대사성을 역임한 뒤 대사헌에 올랐지만 곧 체직되었고, 도승지를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1796년에 예조판서로 서용되었고, 그 뒤 형조·병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공조판서로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의정부우참찬·형조판서·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순조 이후 노론시파로 활약하다가 1805년(순조 5) 김대비 계인 김달순과 함께 안동 김씨의 김좌근에 맞서다가 방귀전리 당했다.
  • 이조원(李肇源) - 이민보의 아들로 1758년에 태어나 1832년에 죽었다. 앞에 서술되어 있는 동시대에 같은 집안 사람인 동명이인이 존재하므로 구분을 잘 해야한다. 1820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하정사로 청에 파견되었다. 이 후 우빈객·예문관제학·병조판서·좌빈객·호조판서·이조판서·공조판서 등 현직을 두루 지냈다. 그러나 1827년 승지 이해청과 사간원과 사헌부가 1814년 순조의 병환이 위독했을 때 김기서·김기후 등과 반역을 도모했다고 탄핵하자, 봉조하로서 무고라고 소를 올렸지만 결국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 참시당하였다. 풍양 조씨계의 인물로 안동 김씨계와 맞서다가 끝내 희생당한 것이다. 후에 헌종 1년에 대왕대비의 명으로 신원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전각에 뛰어났다고 한다.
  • 이존수 - 이천보의 손자로 1819년 대사헌·이조판서, 이듬해 공조판서, 1821년 예조판서·호조판서, 1823년 예문관제학·판의금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26년 함경감사 때에 조적의 고르지 못함을 바로잡는 오조변통책(五條變通策)을 강구하였다. 이듬해엔 우의정이 되어 수령 고과의 법을 엄하게 하고 족징(族徵)의 폐단을 근절할 것을 주장하였다. 1829년에 좌의정이 되어 포삼을 잠월하는 폐단을 막고, 망화정(望華亭)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관속을 빙자해 도매하므로 이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좌의정 재직 중에 죽었는데 명문가 출신으로 벼슬길이 순탄했으며, 왕에게 직언하며 아첨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했으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 이명식 - 영조 때 문과에 급제했다.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공조판서·이조판서·형조판서·비변사당상·의정부좌참찬·개성부유수·병조판서·의정부우참찬·예조판서, 가례도감의 제조, 판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1788년에 평안도관찰사 재직 당시 환곡과 그 발매의 폐단을 아뢰었다. 김종수와 정존겸 등과 함께 척신당을 비판하는 청명당의 중심세력으로 연리에 별로 없는 노론 벽파이다.[36] 그가 사망하자 정조가 애도하였으나 1801년 지평 심보영(沈普永)과 윤우렬(尹羽烈) 등의 상소에 따라 추삭되고 1805년에는 아들인 이면응(李冕膺)까지 탄핵을 받았다. 그 후 복관되어 1820년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이가우 - 헌종부터 철종까지 13년 동안 한성판윤을 10회나 지내면서 조선 최다 한성판윤 역임자가 되었다. 이에 이가우를 ‘판윤대감’이라 불렸지만 그의 재임기간을 통산하면 1년 3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이후 철종 대에 판의금부사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 이약우 - 좌의정 이성원의 손자로 순조 10년에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1835년에 대사헌이 되고, 그 뒤 이조, 병조, 형조, 공조, 호조의 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841년에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48년 형조판서에 이어 좌참찬으로 삼조보감찬집당상을 겸하고, 이어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청녕군에 봉해지고 공조, 이조의 판서,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헌종이 죽자 왕의 시장제술관이 되고, 예조, 공조, 형조의 판서가 되었다. 이 후 지중추부사 겸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약우는 순조, 헌종, 철종의 권우를 입었고, 아래로 사류의 추앙을 받아 청요직을 두루 편력하였다. 또한 문장에 뛰어나 헌종의 시장을 쓰고, 이약우의 상소문은 명문으로 유명하였으며, 문사는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러 경외감을 느끼게 하였다. 외에도 역학과 산수에도 정통했다.
  • 이도재 - 1848년 생으로 호는 심재, 운정이며 시호는 문정이다. 1882년 증광문과 급제생으로 이완용, 서재필 등과 동기다. 이듬해인 1883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했다.[37] 문무를 겸전해 갑신정변 때 진압군으로 참여한 그는 동학농민운동 때 전라도 감사로 나가 전봉준을 체포했다. 대한제국의 부장(副將)으로서 군부대신에 임명된 후 학부대신, 외부대신, 내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철도원총재, 법부대신, 고등재판소재판장, 궁내부특진관, 의정부찬정, 귀족원경, 장례원경•시종원경 등을 역임하였다. 1906년 8월에 그 동안의 공적으로 태극장(太極章)을 서훈받았으며,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강제로 고종을 폐위하려 하자 반대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총리대신 이완용의 모함으로 박영효 등과 나문정죄 당했다. 1909년 타계했다. 197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이조연 - 자는 경집, 호는 완서, 시호는 충정이다. 서얼 출신이자 온건개화파의 중심 인물로 1880년에 사헌부감찰로서 개항 후 처음으로 파견되는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듬해 다시 수신사 조병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2년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해 고선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영선사 김윤식을 따라 톈진에 간 유학생과 공장들의 실정을 조사하였다. 임오군란 때에 흥선대원군이 조선에 진입한 청나라 군에 의하여 청나라에 끌려가자 통리기무아문주사로 조영하의 종사관이 되어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 수금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청나라의 제도를 본떠 군제개혁이 단행되자 친군영좌감독이 되고, 이어 참의교섭통상사무, 기계국총판, 혜상공국총판, 이조참의, 함경북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1884년에는 협판군국사무 겸 기계국총판을 지냈다. 그는 온건개화파였지만 친청정치행적으로 개화당으로부터 수구당이라고 지목을 받았고 1884년 갑신정변 때 우정국사건이 벌어지자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했던 이조연이 국가대사가 벌어짐을 눈치채고 궐내로 들어가려던 중 민태호, 한규직, 윤태준 등과 같이 개화당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6.4. 일제 강점기


  • 이현섭 - 1844년생. 우국지사로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곡기를 끊고 순국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이동녕 - 1869년 생. 초대 임시정부 주석, 제3·5·9·10·13·14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과 제 1대·12대·15대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천안 사람으로 신민회를 조직하고 간도, 연해주, 만주를 누비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승만이 개판치고 떠난 임시정부를 맡아 뒷수습을 해냈다. 김구 선생과 함께 민족 진영을 정치력으로 단결시켰다. 1940년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역만리 중국 쓰촨에서 타계했다. 또한 김구 선생의 멘토이자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동녕 선생의 유언으로 임시정부 3당이 1개의 당으로 합당되었다. 한국 국회의 뿌리인 임시의정원장으로서 현재 여의도 국회 로비에 그의 흉상이 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으나 최고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올려야한다는 움직임이 있다. 또한 이동녕 선생의 이름을 따서 도산안창호급 잠수함 3번함 이동녕함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 이장녕 - 1881년 생으로 독립군이었다. 김좌진북로군정서 출신이다. 청산리 전투 이후 대한독립군 참모총장에 올랐으나 자유시 참변으로 연해주에서 중국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1932년에 일본이 사주한 마적떼에게 당해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자신도 살해당했다. 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이숭녕 - 1908년 생 서울 출신으로 호는 심악.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예과 및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굴지의 국어학자로서 음운체계의 과학적 정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근대 언어학으로써 근세 국어, 중세 문법 연구 등 국어를 연대기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원래 법대생이었으나 우리말뿌리를 찾자는 생각으로 어문학을 전공했다. 영어, 불어, 독일어,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등 6개 언어를 할 줄 알았다. 경성제대 시절부터 교수를 해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50년 6.25가 일어나자 정훈장교(소령)로 참전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매일같이 실천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한 그는 대한민국 문화포장, 국민훈장 동백, 모란장에 이르기까지 국가 훈장이 4개에 달하는 슈퍼맨이었다. 팔순에 이르기까지 공부를 쉬지 않았던 그는 1989년 뇌경색으로 지병을 얻어 94년 타계했다.
  • 이병기 - 1891년 생으로 국어학자. 조선어연구회 회원으로 옥고를 치렀다. 휘문고에서 교편을 잡고 연희전문 강사를 거쳐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됐다. 국문학 시조 연구에 매진하다 68년 타계했다. 또한 그의 시조를 노래로 가곡한 이 있다. 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이설 - 1850년 생으로 독립운동가이며 충남 홍성 사람. 병인양요, 강화도조약 당시 젊은 우국지사였던 그는 끊임없이 외세 격퇴를 주장했다. 일제 강점이 시작되자 낙향했다. 특히 일제가 벌인 을미사변 직후 의병을 조직했으나 실패하고 옥고를 치렀다. 1906년 병환으로 사망.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이원순 - 1890년 생으로 독립운동가이며 서울 출생이다. 보성전문을 나와 1925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승만을 도와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주도했다. 대조선독립단의 회장으로 3.1운동의 진상을 미 정부에 전달한 바 있다. 그러나 헛짓거리를 거듭하는 이승만과 결별해 광복 직후 귀국도 못했고 정부 여권도 없었지만, 스톡홀름으로 날아가 대한민국의 IOC 가입을 도왔다. 야당 정치인 신익희와 친했으며 후일 김구 기념 사업회에 후원하기도 했다. 54년 한국증권주식회사, 1958년 한국해광개발주식회사 등을 차려 사업가로서 길을 걸었다. 197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1988년 이미 99세였던 그는 서울올림픽에 남다른 감회를 인터뷰한 적도 있다. 1993년 10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이수흥 - 1905년 생으로 독립운동가. 경기도 이천 사람으로 조선의 학자. 이황(李滉), 이재(李縡)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칠부화(四七附話)》를 저술한 이식[38]의 직계 후손이며 유생 이일형의 외아들이다.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훈련을 받았다. 만주로 가 대한육군 주 만주참의부를 조직했다. 1926년 순종 기일에 맞춰 기획된 6.10 만세운동 때 동소문 파출소를 습격하고 수원으로 피신했다. 이천에서 식산회사 주재소 등을 파괴하는 등 작전을 펼치나 부친 장사를 치르러 귀향했다가 일제에 검거된다. 1929년 불과 25세의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이명균 - 1863년 생으로 독립운동가. 경북 김천 출신으로 성종 때 청백리 이숭원의 14세 손. 호는 일괴. 1919년 3.1 운동 때 경북 만세 운동을 조직하다 옥고를 치른다. 파리 강화 회의에 파리 장서를 보낼 때 같이 서명하고 유림단 대표로 활동하다 집행 유예 처분을 받는다. 1920년 문경에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결성하고 군자금 조달 임무를 수행했다. 자비를 털어 무려 10만원을 임시 정부에 보냈다. 임시정부 후원의용단장 겸 재무총장이 된다. 1923년 군자금 모금을 하다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탈골, 자상, 화상 때문에 5월 2일 순국한다. 동작동 현충원에 묻혀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이경균 - 1850년 생으로 독립운동가. 경북 김천 출신. 파리 강화 회의에 파리 장서를 보낼 때 서명했다. 김천 대표로 독립 청원서를 보냈다. 2010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명균의 육촌이다.
  • 이석균 - 1855년 생으로 독립운동가. 경북 김천 출신. 이명균의 사촌으로 옆집에 살았다. 이경균과는 육촌이다. 1881년 영남 유생들이 정부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척사 운동을 벌일 때 공사원으로 참여했다. 1919년 만세 운동 때 파리 강화 회의 때 독립청원서에 서명했다. 1919년 4월 체포돼 고문을 받고 노구에 후유증을 얻는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1927년 사망한다. 1995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 이순탁 - 1897년 생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효정(曉亭)이며 경기도 출신이다. 1922년에 일본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23년엔 연희전문학교 상학과과장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연희전문학교 봉직 만 10년에 안식일 휴가(1년)로 세계각국을 시찰하였다. 이후 1933년의 이른바 연전상과사건으로 3년의 옥고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엔 미군정부 입법회의위원, 1946년 연희대학교 초대 상경대학장, 1948년 대한민국정부기획처 초대 처장, 1949년 대한금융조합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납북되었다. 논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조직에 관한 일고찰」, 「노동운동과 소작운동」, 「조선인의 결혼연령 추이」 등이 있다.
  • 이항녕 - 1915년 생으로 충남 아산 출신. 일제시대 판 고위 관료 채용 시험인 고등문관시험 출신이며 경성제국대학 법학과 출신이다. 하동, 창녕군수 등을 지냈으며 적극적인 친일 행위는 없었으나 광복 후 자신의 행적에 대해 계속 반성하고 참회한 양심가였다. 문교부 차관,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법학과 교수 등을 거쳐 홍익대학교 총장까지 지냈다.

6.5. 현대


  • 이중재 - 1898년 생으로 이승만 행정부에서 제5대 재무부 장관('54년)과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54년)을 지냈다. 자유당 기획위원으로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성전기 사장도 지냈다. 재무부 장관 취임시 재무부 관할 아래 있던 은행 감독권을 한국은행으로 환원시키고 은행법 개혁에 나섰다. 은행법 시행령, 금융기관 감독규정, 인가사항 취급규정 등을 정비시켜 아직 걸음마 단계이던 대한민국 금융시장을 안정시켰다. 재무부가 가지던 은행 귀속주를 시중에 불하하는 데 잡음없이 처리하고 뒤로 빠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후임 장관 송인상을 시켜 3.15 부정선거 자금을 마련시킨다. 5.16 직후 이중재는 자유당 부정의 연대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가지만 곧 사면된다. 1925년 생 6선 국회의원 이중재는 동명이인으로 광주 이씨다.
  • 이구영 - 이구영은 제천에서 갑부이자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월사 이정귀의 후손이다. 이구영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의 제자였으며, 일제 당시인 1943년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구영은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연암 박지원 등 실학사상을 강의하였다. 1950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갔다가 1958년 7월 부산에서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접선에 실패하여 9월에 체포되었는데, 그를 체포한 경찰은 일제강점기에 그를 고문했던 형사였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후 석방됐는데 22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신영복, 심지연 등에게 한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출소한 후에 이문학회를 창립, 후진에게 한학을 가르치고 호서의병사적과 의병운동사적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 이상수 - 1925년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 1949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학사, 1956년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이학석사, 1959년 같은 대학 이학박사다. 레이저 분야를 한국 최초로 개척하였으며 1968년 하버드대학교 초빙 연구원, 국제 원자력 기구 한국 대표등을 지냈다 한국과학원 초대 원장, 6대 원장, 한국광학회 초대 회장, 한국물리학회 회장, 원자력청 청장등을 지냈다. 한국광학회를 통해 미국광학회에 전달한 기금으로 '이상수 어워드'가 제정됐다. 자국의 광학과 광산업에 공헌한 사람을 선발해 한국광학회와 미국광학회가 공동으로 격년 시상한다. 석사 108명 박사 48명을 길러낸 그는 2010년 타계했다. 2019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에 선정됐다.
  • 이연 - 우리나라 민영 탄광 가운데 생산 규모가 가장 컸던 동원 탄좌의 회장으로 이병기 선생과 같이 익산 출신이다. 아들은 전원산업 회장인 이전배다.
  • 이정림 - 이정림은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졸업한 뒤 개성상인으로서 수련을 쌓았다. 1933년에 고무신 도매상을 시작하여 경기, 황해 지방 등에 대리점을 경영하였다. 후에 천일고무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고 이합상회를 개업하였다. 1949년엔 이합상회를 개풍상사라 이름을 바꾸고 정식무역회사를 창립하여 무역에 종사했다. 후 1953년엔 호양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55년엔 대한탄광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듬 해에는 대한양공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국산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였다. 59년엔 국내 최초의 민간출자 은행인 서울은행을 창립하였다. 후에 65년엔 공영화학공업주식회사, 67년에 박용학 등과 함께 대한선박주식회사 설립, 1970년에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외에도 3•1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경제재건촉진위원회를 발족하고 한국경제인연합회 2대 회장과 해운대의 날에서 대통령표창, 국무총리표창, 석탄산업훈장 등을 받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 이도영 - 청주 출신으로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 수료하였다. 1950년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충청북도 청원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대한국민당 홍순옥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1956년에 홍익대학교를 인수하고 홍익공예고등전문학교, 홍익국민학교, 홍익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1970년엔 성암국민학교와 성북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71년엔 수도공과대학도 인수하였다. 같은 해 홍익대학교를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키고 충청일보사 사장, 청주문화방송 사장, 남한흥산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외에도 이도영은 1962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63년 한국생산성본부 부회장, 대한광업협회 부회장, 1964년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1965년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 등을 각각 역임하였다. 1970년에 대한체육회장상(체육진흥공로), 같은 해 대통령표창(수출진흥공로), 1972년 문교부장관상 등을 받았다. 여담으로 현재 홍익대학교 이사장은 이도영의 육촌 동생인 이면영이다.
  • 이이화 - 1937년 생 대구 출신의 재야 사학자로 민중사관적 입장을 지녔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전문가로 서원대 석좌교수이며 경술국치 100년 공동행동위원회 상임공동대표이다. 2020년에 타계했다.
  • 이민화 - 경상북도 군위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전기 및 전자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전선 연구원, KAIST 교수 겸 창조경제연구회(KCERN) 이사장,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이었으며 1985년 의료기기업체인 메디슨을 설립한 1세대 벤처기업인이다. 초음파진단기 기술을 연구하여 국내 최초 초음파진단기를 개발했으며 다른 카이스트 출신 전문가 7명과 함께 벤처기업을 설립하였다. 한국 벤처업계의 대부로 꼽히는 인물이다.
  • 이석희 - 이동녕 선생 손자로 전 대우자동차 회장과 대우그룹 부회장이다.
  • 이봉녕 - 1924년 완주군 초포면[39] 송전리[40]에서 태어났다. 이봉녕 회장의 선대는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41]에서 살았으나 증조부가 초포면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거했다. 이봉녕 회장은 익산시에 공장을 세워 쌍방울의 전신인 쌍녕섬유공사를 만들었고 이 회사가 커져 쌍방울그룹이 되었다. 쌍방울그룹의 초대 회장이기도 하다.
  • 이의철 - 이봉녕 회장 아들. 쌍방울그룹의 2대 회장이자 쌍방울 레이더스의 구단주였다.
  • 이웅희 - 문화공보부 장관.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80년에 대통령 공보수석에 임명돼 MBC 사장,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등을 역임하고 제 13, 14, 15대 3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 재경위원장까지 지냈다. 장남으로 주러시아대사관대사 이석배씨가 있다.
  • 이일규 - 특 1급 호텔인 베스트 웨스턴 프리미어 서울가든호텔의 대표자이다. 서울 가든호텔은 1979년에 개관하여 관광호텔업, 부동산 임대업, 소매업, 외식사업, 유희시설사업 및 부대사업 등을 하며 지하 2층 지상 15층 규모에 372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 또한 레스토랑, 20평에서 194평에 이르는 연회장, 동시통역 시설을 갖춘 회의장, 비즈니스 센터, 웨딩홀, 피트니스 센터 등이 있다. 또한 서울 가든호텔은 베스트웨스트 브랜드 중 처음으로 특 1급 호텔로 승격된 호텔이기도 하다. 가족으로는 서울 가든호텔의 전 회장인 이정구 회장이 아버지이고, 슬하에 가든호텔 사장 이교상씨가 있다. 또한 아버지는 태자첨사공파 30세 정(廷)자 돌림, 이일규 회장은 31세 규(揆)자 돌림, 아들은 32세 교(敎)자 돌림으로 추측된다.
  • 이철배 - 대웅제약 전 명예 회장이며 경영인이다.
  • 이돈희 - 제 42대 교육부 장관
  • 이규상 - 1936년 생. 동래구청장을 관선 1회, 민선 2회 역임했다.
  • 이재후 - 전 홍대 총장 이항녕 교수의 아들로 김앤장의 시니어 파트너다. 네임 파트너인 김영무, 장수길과 공동 경영을 하고 있다.
  • 이치호 - 1939년 경북 의성 출신으로 판사 출신 정치인. 민정당 출신의 보수 정치인으로 3선(11,12,13대). 법사위 위원장도 지냈다. 2000년 16대 출마를 끝으로 정계 은퇴.
  • 이의익 - 1940년 경북 안동 출신 공무원 출신 정치인으로 기재부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15대 국회의원.
  • 이성윤 -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이다. 본관은 연안이다.
  • 이성희 - 제 24대 농협중앙회 중앙회장이며 최초의 수도권 단위조합 출신인 회장이다.
  • 이지영 - EBSi 뉴탐스런 생활과 윤리 강의에서 연안 이씨임을 밝힌 적이 있다. 이지영은 정말 자수성가의 끝판왕이다. 어렸을 때 집안이 매우 어려웠다고 하며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자 더욱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에 자신은 가난에서 극복하기 위해 더욱 더 공부에 매진하였는데 학창시절에 3시간씩 자며 공부하고, 졸릴 때는 포크로 허벅지를 찌르며 공부를 지속했다. 또한 커피를 씹어먹다가 위에 구멍이 나서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 갔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 끝에 결국 사교육 없이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에 입학하게 된다. 후에 EBSi 강사가 되어 생활과 윤리가 선택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수강생이 250만명 이상으로 사회탐구 온라인, 오프라인 수강생 순위 1위로 수강생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현강생 1등급 비율로 매우 높은 편이다. 또한 영향력도 매우 커 인터넷 강의 시장에 프리 패스 제도를 도입할 때 주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강사 한 명이 스카이에듀의 주가가 오르내리는 모습을 최초로 보여줬다. 2020년 12월 28일에 구독자 14만명 기념으로 QnA 라이브를 찍었는데[42] 거기서 그녀는 자신의 통장 잔고를 보여달라는 구독자의 질문에 직접 국민은행 앱을 켜서 계좌에 있는 잔고를 일부 공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는 통장에만 돈을 두고 있지 않고 부동산도 갖고 있고 빌딩도 갖고 있고 주식도 갖고 있다. 또한 이 계좌에만 돈이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을 덧붙였다. 공개된 계좌에는 약 130억원의 금액이 찍혀 있었는데 2014년 이후 연봉이 100억 아래로 내려온 적이 없다라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에 몇몇 네티즌들은 종부세를 많이 내지 않느냐는 질문을 남기자 실제로 세금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번 돈에서 기부를 꾸준히 해오고 있어 평생 기부한 금액이 50억원 이상이라고 전했다. 더불어 슈퍼카를 좋아해서 유튜브 라이브에서 차가 10대 이상이라고 밝혔는데, 차 종류로는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S, 람보르기니 우라칸, 페라리 458, 맥라렌 650S, 포르쉐 911 등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차가 총 몇 대 인지 모른다는 발언을 하여 또 다시 놀라움을 자아냈다. 결국 이 실시간 방송으로 인해 모든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달성했다.
  • 이상훈(1972) - SBS 출신 개그맨. 잘생겼지만 느끼한 캐릭터인 리마리오(웃찾사)로 '미끌어지듯이' 등 유행어를 히트시켜 CF, 영화 드라마 출연 등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 이승훈(1960) - 전 복싱 IBF 주니어페더급 세계챔피언(1987년)
  • 이재영 - 제19대 국회의원이다. 현재 국민의힘 강동구 을 당협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국민의힘 대외협력위원장이다. 또한 자유한국당 청년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조지타운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버지는 이기승이며 어머니는 제13대 국회의원 도영심이다.
  • 이하늘 - DJ DOC의 리더. 71년생 경북 대구 출신으로 본명은 이근배. 94년 데뷔로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가요계를 휩쓸었다. 동생 이현배도 가수로 45RPM 그룹 소속이다.
  • 이장우 - 수상한 삼형제, 웃어라 동해야의 주연으로 86년 생의 미남 인기 탤런트. 나 혼자 산다 등의 예능에도 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바른 이미지의 미남으로 효심도 지극하다. 아버지는 예비역 장성(준장)으로 1939년 생에 경북 문경 출신이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군인 아버지를 따라 전주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다. 중 3때부터 단역으로 연기자 생활을 했다고.
  • 이연희 - 해남군에서 태어나 성남시에서 자랐다. 170이 넘는 큰 키와 날씬한 몸매로 유명하며, 2001년 SM 청소년 베스트 선발대회서 대상으로 입상하며 연예계에 모습을 보였다. 또한 타고난 모태미녀로 학창 시절에도 미인으로 유명했기에 연예인들의 골칫덩어리인 성형수술 논란 의혹이 없다. 한 때 소녀시대 멤버들과 연습생 시절을 함께 했으나 SM엔터테인먼트에선 소녀시대가 요구하는 최고난도의 댄스와 정확한 군무의 춤을 따라갈 실력이 부족한 것을 느끼고 이연희를 배우로 전향하여 배우로 본격적인 연예계 활동을 시작하게 했다. 그러나 부족한 연기력으로 논란이 있어 몇 차례 복귀를 반복한 후 2017년 재복귀 후 연기력이 향상되어 연기력 부족 논란이 잠잠해졌다. 대표적인 수상 경력으로는 2009년에 여자 신인상, 여자 인기상, 베스트 커플상(송상현) 부문으로 MBC 연기대상을 받았다.
  • 이청아 - 데뷔작은 2002년 개봉한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부지영 감독의 단편 영화 눈물이다. 2004년에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 여주인공으로 강동원, 조한선과 함께 출연하는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여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현재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특유의 분위기와 얼굴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KBS1 천상의 컬렉션에서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중의 삼척공파 29대손임을 밝힌 적이 있다.
  • 그레이 - 예명 GRAY로 활동하는 힙합 뮤지션으로 본명은 이성화. 국내 굴지의 힙합 레이블 AOMG 소속으로 히트곡 수십 개를 직접 쓴 인기 프로듀서 겸 R&B 가수다. 다작을 하면서도 스타일을 잃지 않는 능력으로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잘생긴 외모와 패션 센스로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 이하마 - 팔로워 2천명의 트위치 스트리머. LOL, 어몽어스, 마인크래프트 등 게임 컨텐츠를 주로 하고 있다.


6.6. 기타(위인 및 유명인의 가족)


  • 신덕왕후 아버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적장자, 신덕왕후의 친오빠이면서 고려 대에 삼사우사, 삼중대광첨의정승 등을 지낸 재령 강씨의 시조 안릉부원군 안정공 강득룡의 부인이 바로 이엄의 여식이다. 즉 강득룡의 처가 연안군 이엄의 딸인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 중종정권을 집권한 예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낸 남곤의 처가 정경부인 이씨인데 정경부인 이씨는 연안 이씨이다. 정경부인 이씨의 아버지는 숙천부사를 지낸 이세웅인데 여기서 이세웅이 바로 영광군사공파 중시조 이계연의 증손자이다. 즉 정경부인 이씨는 현존하지 않는 파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남곤과 정경부인 이씨 사이에선 아들은 없고 딸만 3명이었다.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대표적 피난기로 꼽히는 쇄미록을 남긴 선비 오희문의 부인이 연안 이씨이다. 명재상으로 꼽히는 영의정 오윤겸의 어머니이며, 삼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또한 오희문 처 연안 이씨의 아버지는 이정수인데 이정수의 장인이 바로 성종의 서자 익양군이다. 이정수는 익양군의 차녀 이계환과 결혼하여 오희문의 처 연안 이씨를 낳은 것이다.
  • 인현왕후의 오빠 예조판서 민진후의 선처가 대제학 이명한의 아들 인천부사 이단상의 딸이며 후처는 현감 이덕로의 딸로 같은 연안 이씨이다. 특히 후처 소생 민익수가 바로 명성황후의 고조부가 된다.(...) 여담이지만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외할아버지도 연안 이씨인 연평부원군 해고 이광정이다.
  • 인경왕후의 숙모는 형조판서 이은상의 딸인데,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의 동생인 사씨남정기구운몽을 지은 양관 대제학 김만중의 처 정경부인 연안 이씨가 판서 이은상의 딸이기 때문이다. 또 인경왕후의 조카가 노론의 영수였던 이천보이기도 한데 이천보의 어머니 광산 김씨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의 삼녀로 이천보의 어머니는 인경왕후의 여동생이 된다. 즉 인경왕후의 숙모도 연안 이씨, 조카도 연안 이씨라는 것이다. 인현왕후의 새언니도 연안 이씨인데 숙종의 정비였던 3명 중 2명이 연리의 인척이었던 것이다.
  • 채제공의 어머니 정경부인 이씨는 연안 이씨이다. 정경부인 이씨는 18세의 나이 때 혼서와 택일단자까지 받은 상태에서 결혼하려고 하던 남편이 혼례를 치르기 직전에 급사하여 과부가 될 뻔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경부인 이씨는 당시 예조판서에게 용기있게 사정하여 당시에 흔하지 않게 왕명[43]으로 재혼을 허락받았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 풍양조씨의 세도를 확립한 조만영의 아들인 이조•예조 판서를 지낸 조병구의 처가 정부인 연안 이씨이다. 조병구는 안동 김씨와 세력 다툼을 벌이는데 앞장섰으며, 삼촌인 조인영이 영의정에 오르자 합세하여 정치 세력을 키운 세도 정치의 중심 인물이다.
  • 개화파의 시조이자 평안도 관찰사를 지낼 당시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자 거부하며 이현익을 시켜 식량을 주어 돌아가게 시켰으나 오히려 이현익을 침임자로 오해하여 이현익을 붙잡고, 무장하여 도발하자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운[44] 우의정 박규수의 처 정경부인 이씨도 연안 이씨이다.
  • 철인왕후의 모친이자[45] 안동 김씨 세도가 김문근의 본처 연양부부인 이씨는 효간공 이용수의 딸이자 연안 이씨이다.
  • 동학 농민 혁명의 지도자 김개남의 첫번째 부인은 연안 이씨이다.[46] 여담으로 김개남은 관군과의 싸움에서 결국 패한 후 서울로 압송되는데 도중에 전라 감사 이도재가 김개남의 부하들에 의해 김개남이 도망갈 수도 있다며 재판을 거치지 않고 전주 초록 바위에서 목을 베게 하여 김개남을 죽게 만든다. 여기서 김개남의 목을 베게 한 전라 감사 이도재도 연안 이씨다.
  •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은 주시경 선생의 어머니가 연안 이씨이다.
  •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장군의 어머니가 연안 이씨이다.

7. 기타


  • 연안 이씨 관동파를 동촌 이씨라고도 하는데 조선 후기에 접어 들며 폭발적으로 성장한 관동파를 일컫는다. 8상이라 불리는 이일상, 가상, 만상, 단상, 은상, 홍상, 유상, 익상 대였다. 천재 이일상이 17살에 소년 등과하고 문형이 돼 조선 최초 3대 연속 대제학이 되었고 이정구 이후 3세의 모두가 문과급제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것도 당상관들로 문한(文翰)에서도 막중해 명망을 얻었다.
  • 이석형이 생원, 진사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때 세종이 생원, 진사에 급제한 자들을 사은하기 위해 축제를 열었는데 광화문 앞에서 이석형이 오지 않자 세종이 옆에 있던 관리에게 이석형이 왜 오지 않냐고 묻자 관리가 생원시에 합격한 자들은 왼쪽 문, 진사시에 합격한 자들은 오른쪽 문으로 와야 하는데 이석형은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니 그를 앞에 세우고 서로들 자기네 쪽으로 데리고 가려고 다투어서 날이 저물도록 들어오지 못했던 사정을 알자 세종이 몹시 기뻐하며 가운데 문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 90년대 초 대종회가 MBC로부터 일요일 아침에 방영 되는 명가(名家) 성씨 소개 자료를 요청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프로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폐지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하였다.
  • 연안 이씨 인물들은 개인차는 있겠지만 성격이 모가 나거나 과격하지 않고 사치를 부리기 보다 글 잘하고 술, 미식 등 문화를 향유할 줄 아는 멋쟁이들이 많았다. 충효는 물론 형제들끼리 우애가 좋기로도 소문이 자자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수하는 편이다.[47]
  • 경북 김천의 독립 운동가 이명균의 종손인 이진특 씨는 2004년 영남일보와 인터뷰에서, 일괴 선생(이명균)의 대만 해도 토지만 12만 평이 넘는 김천의 손꼽히는 부호였던 그의 집안이 독립운동과 군자금을 대느라 가산을 모두 쓰고 후손들은 정말 어렵게 산다고 말했다. 이후 후손들은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면서, 집성촌에만 30명이 넘는 이진특 씨 항렬 중 대학 다닌 사람이 한 명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진특 씨는 공무원 출신으로 정년퇴직 후 일괴 선생의 기념 사적지를 관리하며 살고 있다.

7.1. 연안 이씨 문화재


  •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효령사(장군당)에는 개국공 태대각간 흥무대왕 김유신과 신구도대총관 소정방 및 대사마 좌위 중랑장 신라 연안후 이무를 모신 사당인데, 백제 정벌에 이어 고구려 까지 평정해 드디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해준 고마움을 기리기 위하여 사공중상의 상소로 공양왕 2년에 창건 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엽부터 이 곳 주민들이 옛 일을 추모하기 위하여 효령사에 매년 3월 3일에 향사를 지내다가 1900년대 중반부터 김해김씨와 연안이씨 양문중의 주관으로 넘어가 정초, 상원과 단오날에 향사를 지낸다.
  • 고려사 열전 36권에 이분희전이 실려있어 그의 정보는 물론 주변 사람들의 정보까지 나와있어 연안 이씨의 고려 대의 선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 보물 제651호는 익산 현동사에 있던 이숭원의 조부에서 손자까지 내린 교지 18매, 공신녹권 1건, 공신회맹문 6책이다. 이것은 이숭원 가계의 연혁과 내력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의 서지학을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로 였으나 현재는 공신녹권과 공신회맹문이 도난당한 상태다.
  • 비지정문회재인 익산 현동사 연안 이씨 종중 고문서도 1998년 9월 18일에 이숭원의 공신녹권, 공신회맹록과 함께 도난당했다.
  • 보물 제1992호는 원종공신, 적개공신에 녹훈된 이숙기가 좌리공신에 녹훈되자 성종이 내린 공신록권으로 당시 공신 교서의 형태적 특징, 서체, 제작 방식, 장정 형태를 온전히 확인할 수 있다. 원문의 상태가 양호하며 성종을 추대한 정치 세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 현재 육군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이도재 예복은 국가등록문화재 제 553호로 1897~1907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제국의 예복으로 상의, 하의, 예모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의의 길이는 74.5cm, 소매의 길이는 55.8cm, 하의의 길이는 103cm이다. 이 예복은 운정 이도재(李道宰, 1848~1909)가 입었던 것으로 대한제국의 예복이라는 상징적인 가치 뿐만이 아니라 보존 상태, 디자인, 색상 등 보존 상태가 뛰어나 보존 가치가 더욱 높다.
  • 소부감판사공파의 중시조인 이현려[48],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지낸 이효신, 자덕대부 공조전서 이종무의 유묵이 전해진다.
  • 전북 익산에 연안 이씨 종중문적 박물관이 있는데 조선 전기 문신 충간공 이숭원의 조부에서 손자까지 내린 교지 18매를 비롯해 자체 소장유물 200여점과 전국의 연안이씨 문중에서 기증한 300여점의 유물 등 총 500여점에 이르는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 곳에선 고문서와 초상 등 각종 연안 이씨에 관한 사료들을 볼 수 있다.
  • 경기도 유형 문화재 133호는 월사집 목판인데 이 목판은 월사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그가 별세한 1년 후인 1636년에 공주에서 문인 최유해 등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고, 1688년에 손자 이익상이 원집과 부록 68권을 경상도 감영에서 간행하였다. 그리고 1720년에 증손자 이희조가 별집 7권을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원집(原集)·부록(附錄)·연보(年譜)·별집(別集)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화재를 통해 월사 이정구의 사상을 배울 수 있다.
  • 경북 군위의 효령사(장군당)는 고려 말엽 김유신과 소정방 그리고 대사마 좌중랑장(大司馬 左中郞將) 이무를 기린 곳으로, 야사에 3사람이 장군봉에 올라 "이제 삼국 통합이 되었으니 안심하고 살아라" 라고 주민에게 말했다고 전한다. 현재는 김해 김씨와 연안 이씨의 주관으로 넘어가 양 문중에서 정초, 상원과 단오에 제례를 지낸다.
  •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에 송오 이진 선생과 남계 이보 선생을 모시는 서원이 있는데 이를 송호서원이라 한다. 송호서원은 1798년 정자를 지어 창건하였으며 철종 때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이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오늘날 복원되었다. 현재의 서원 건물은 총 5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지역에서 세거해 온 연안 이씨 문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 경상북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 있는 금호사는 연안 이씨 사당으로 매해 음력 10월 둘째 일요일에 제사를 지낸다. 1810년 연안이씨 문중에서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인 판소부감공(判小府監公) 이현려의 15세손 금호공 이수생을 향사하기 위해 세웠다. 그 후 1860년에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금산리로 옮겼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제사를 금하다가 1945년 다시 향사를 시작하였으며 1994년 2월 도로확장으로 지금의 자리인 동면 가산리로 이전하였다.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동호리에 연안 이씨 고택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고택은 조선시대에 건축된 고택으로 1884년 참봉 이준학 선생이 차남인 영은 이현석 선생에게 분재해 준 집이다. 도문화재자료 제122호인 동호리 이씨 고가의[49] 아래쪽으로 담장을 공유하고 있으며, 2005년 3월 31일 도문화재자료 제371호로 지정되었다.
  • 조선 전기 집현전 학사인 이석형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 171호)가 소위 쌍유혈로 조선에 손꼽는 명당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의 4대 후손부터 정승 고관이 줄줄이 나왔다. 묘는 용인시 모현면에 있다. 이 근처에는 연안 이씨 비각공원이 있는데 정몽주 선생묘 성역화 사업에 맞추어 조성한 것으로 정몽주 묘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 있다. 공원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 중앙에 공원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다. 공원 안에는 이석형을 비롯한 연안이씨 선조들의 신도비·비각·행적비들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여담으로 이석형의 선대의 묘는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면 주음리에 위치하고 있다.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인 명주(名酒) 호산춘이 익산시 여산면 연안 이씨 종가의 것이다. 가람 이병기의 25대 조부이자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 이현려(1136-1216년)가 고려 의종 때 소부감판사 겸 지다방사로 있으면서 빚었던 술이라 전해진다. 대대로 문화를 선도했던 연안 이씨 가문의 이 술은 고려 시대 궁중에서 마시던 술로 ‘임금님 술’이란 별칭도 있다고. 이름에 ‘춘’자는 중국의 고급 술을 춘주라 칭한 것이 유래다. 다른 예로는 약산춘, 산사춘 등이 있다.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20호인 노현리 민가는 문의면 노현리에 거주하던 연안 이씨인 괴정 이현승 참봉이 살던 가옥이었다. 현재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에 있는 문의문화재단지 내에 있다.[50]
  • 충청남도의 명주 계룡백일주는 본래 궁중술로 인조가 1등 정사공신 이귀의 공을 치하해 양조비법을 하사한 것이다. 이귀의 부인 인동 장씨를 통해 내려온 이 술의 현재 기능보유자는 지복남으로 이귀의 14세 손 며느리다. 술을 빚는 방법은 문헌에 남기지 않고 집안 비법으로 내려왔다. 소량 제조해 제사상에만 올리기 때문에 충남 공주의 종가에서도 맛 본 사람이 많지 않다고. 현재는 브랜드로 만들어 판매를 하고 있다.
  • 청주시 향토문화재 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연안이씨 열녀비는 현재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에 있는데, 이는 신긍호(申兢浩)의 부인 연안 이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열녀신긍호처유인연안이씨지비'라 음각되어 있다.
  • 청주시 향토문화재 43호로 지정되어 있는 사당인 이강영당은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에 있다. 상술한 이광정(李光庭)과 그의 현손 이만원(李萬元)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한 사당이다.
  • 부여군 향토문화재 102호로 지정되어 있는 구룡 연안이씨 정려는 선비인 김재훈의 부인 연안 이씨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으로 충남 부여군 구룡면 죽교리에 있다.
  • 완주군에 있는 신교리 유도양처 연안이씨 정려는 완주군 소양면에 있고, 유도양의 부인 연안 이씨의 효심을 기리기 위한 비각이다. 유도양의 부인 연안 이씨는 시어머니가 병환에 걸리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간호를 하였으며, 그래도 위독해지자 단지주혈[51]까지 하였다고 한다. 출처

7.2. 창작물에서


  • 김주영의 장편소설 《춘향전》에서는 이몽룡의 본관이 연안으로 나온다.
  • 조선 작가 미상의 소설 《박씨전》에서도 주인공 박씨 남편으로 인조반정 공신 영의정 이시백이 나온다.
  • 임영태의 장편소설 《호생관 최북》에서도 연안 이씨가 나온다.
  • 소설가 김동인이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젊은 그들》의 여주인공 이인화는 연안 이씨이다.[52] 이 작품은 1955년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최은희가 이인화 역을 맡았다.근거자료

8. 인구 분포


2000년 인구 기준으로 작성된 문서임을 밝힌다.
순번
지역
인구수
1
서울
36,637명
2
부산
7,426명
3
대구
7,186명
4
인천
9,506명
5
광주
1,409명
6
대전
6,690명
7
울산
1,813명
8
경기도
33,218명
9
강원도
3,143명
10
충청북도
6,413명
11
충청남도
6,773명
12
전라북도
10,003명
13
전라남도
2,661명
14
경상북도
7,004명
15
경상남도
5,037명
16
제주
518명
17
누락
3명
18
전국
145,440명

[1] 무소왕 이고는 아들 여러명이 있었다. 그 중 이번과 이흠이 있는데 여기서 당황실은 이흠의 계통이고 연안 이씨는 이번의 계통이다.[2] 가끔 연안 이씨 시조 이무가 당서(唐書)에 나오는 회남왕 이무라고 하는데 회남왕 이무는 성격이 괴팍해 부왕인 서왕(徐王) 이원례(李元禮)로부터 쫓겨났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당서의 회남왕 이무는 신라 파병 기록이 없다. 즉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종중에서는 고요노자의 후예인 당황실과 같은 뿌리인 태조(서량) 아들 이번의 계통이라고 전한다.[1] 어찌 됐든 종중에서는 연리의 선대가 당황실과 같은 뿌리인 탁발씨 계통인 농서 사람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연안 이씨의 도시조는 노자가 되는 것이며, 비조는 고요 또는 탁발부의 수령인 탁발씨가 된다.[3] 지금의 황해도 연안[4] 현존하는 농(롱)서 이씨는 성주 이씨에서 분파된 성씨이다.[5] 높은 고관들이 노론계 연안 이씨였던 것이지 물론 소론남인 연안 이씨도 있었다. 대표적인 남인 계열이 태자첨사공파 계열의 이조판서 근곡 이관징 계열이다. 그는 예송 정국에서 남인 학설을 지지했으며, 그의 아들 예조참판 근암 이옥은 환국 정국에서 송시열의 극형을 주장했다. 이들의 후손은 경상도 상주 지역으로 낙향했으며 그 종녀가 영남 남인의 정신적 지주인 이언적 종가의 종부로 출가했다. 소론 계열은 대제학 이명한의 증손자이자 기로소에 입사했던 판서 이철보, 길보의 아버지인 이정신 계열이다. 이정신은 이종성, 조태억 등 소론계 인사들과 교류하였으며 경종 대에 병조참판, 경기도•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이후 소론으로서 노론을 탄핵시키는데 앞장 섰다. 그러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좌의정 이복원의 아들이자 이정신 증손 영의정 이시수는 소론의 마지막 영수였다.[6] 조선시대에 너무 번성해서 그런지 고려시대에는 세력이 크지 않았던 가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당대 연안 이씨는 재상지종은 아니었지만 당대에 유력했던 권문세가무신정권 이후와 원나라의 간섭기 이후 판삼사사 오원부원군 이권, 연안군 이엄, 원나라에서 연안군으로 봉해진 아자첩목아, 무신으로 정권을 잡아 지밀직사사에 오른 위사공신 이분희와 원종의 총애를 받은 그의 동생 이분성을 배출하는 등 당대에 세력이 컸던 가문이었다.[7] 태종의 외척 경계에 박살이 나긴 했지만 이건 건국 초의 얘기이다.[8] 다른 가문들로는 송시열의 본관인 은진 송씨, 여흥 민씨[7], 그리고 유래 깊은 경주 김씨경주 이씨, 경주 최씨 등이 있다.[9] 인조실 배향 이귀, 순조실 배향 이시수[10] 판서 이철보가 동생 이길보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간 데 이어 아들 좌의정 이복원과 손자 영의정 이시수가 기로소에 들어가는 조선 최초의 삼세 입사가 되었다.[11] 정승 명단: 이시백, 천보, 시수(영의정), 이정구, 후, 복원, 성원, 존수, 귀령(좌의정)[12] 이귀의 일가가 10대 봉군으로 이어졌다.[13]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기준으로 하였다.[14] 그 중 규장각 첫 번째 제학이 좌의정 이복원이며, 정조가 규장각 각신중에서 공로가 많은 4명의 각신을 지명하여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그 중 2명이 연안 이씨로 판서를 지낸 이시원, 이조원 형제이다.[15] 이 수는 세도가문으로 유명한 풍양 조씨와 같은 수이다.[16] 혈연적으로 전혀 관계 없는 남양 홍씨 당홍계와 토홍계를 구분하여 문과 급제자 순위를 본다면 연안 이씨는 전체 7위가 된다.[17] 청백리를 다수 배출한 파이다. 그러나 금성공파나 진위공파 등 일부의 파들은 후손이 나타나고 있지 않는 상태다.[18] 판사공파는 분파의 수가 약 70여개로 그 수가 굉장히 많은데, 이들 중 5개의 파를 제외하면 전부 저헌 이석형으로부터 시작된 저헌(문강)공파에 속한다. 즉 판사공파의 거의 대부분은 저헌공파이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 5개 파는 전서공파, 부정공파, 평장사공파, 생원공파, 감찰공파 [A] A B C D E F 저헌공파가 아닌 파이다.[19] 저헌공파의 지파가 아닌 평장사공파에서 분파한 지파이다.[20] 집성촌이 개성특별시 개풍구역이다. 흥림은 태학생원이었는데 고려가 멸망하자 부조현 진봉산 대사암 일대에서 낙향하였다. 흥림이 낙향한 부조현은 태조가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경덕궁에서 친히 과거를 열었으나 이들은 아무도 응시하지 않고 경덕궁 앞의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이에 그 고개를 부조현(不朝峴)이라 하였고, 부조현 북쪽에 관을 걸어놓고 넘어갔다 하여 이를 괘관현(掛冠峴)이라 불렀다고 한다.[21] 개성평양, 평안도 중화군 등에 주로 거주한다. 저헌공파 계열이 아닌 평장사공파 계열로는 참판공파(평장사공파 계열), 원언공파, 평양외성파, 승사랑공파, 무공랑공파, 인향공파, 인과공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많은 파들 중 2000년대 초반에 진행한 평장사공파 계열의 족보 수록은 원언공파와 승공랑공파만이 수록되어 있다. 그 외의 파들의 인물은 1900년대 초반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22] 조선조에 제일 번성한 파가 소부감판사공파라면 고려 때 제일 번성한 파는 대장군공파이다. 또한 집성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장군공파의 집성촌의 대부분이 이북이여서 남한에 있는 대장군공파의 후손들은 한국 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다. 파계 확인이 늦은 것도 이 때문일 수도 있다. 비슷한 예로는 소부감판사공파중의 평장사공파가 비슷한 예인데 평장사공파도 집성촌이 평양에 위치하고 있어서 남한에 있는 평장사공파의 후손들은 북에서 내려온 후손들이 많으며 대장군공파와 같이 파계 확인이 늦었다.[23]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이 집성촌이다.[24] 황해북도 수안군 도소면 옥검리가 집성촌이다.[25] 집성촌은 함경남도 정평군 점원면 사수리 일대가 집성촌이다. 찬성은 이질의 호인데 마을 명칭이 찬성공파가 세거하면서 생겼다고 한다.[26] 현존해올 가능성이 있다. 영광군사공파라 주장하는 사람과 대화해본 종원이 있다(!). 당사자 주장으로는 따로 족보까지 발행해왔다는데... 족보 앞면을 복사해 보내달라는 말에 응했으나, 결국 생각을 바꾼건지 보내지 않고 잠적했다한다. 추정컨대 집안에서 반대한 것같다고. 관심있는 사람은 연리사이트에서 본문검색어 '추원도'로 검색해볼 것. 연안이씨 추원도와 관련된 문서. 그런데 추원도를 열람해보면, 경주 이씨의 평리성암공파하고 겹치는 부분이 있다. 추원보와 평리성암공파보를 대조해보면 헌납공(獻納公) 이규(李樛)에 관한 기록이 중복되어 나와 있다.[27] 현존하지 않는 파들중 그나마 가장 최근까지 존재했던 파로, 적어도 1900년대 초반까지는 남계 후손이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후손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28] 안산 이씨는 경기계와 철산계로 나뉘는데 경기계가 연안 이씨에서 분적한 것이고 철산계는 이희적(李希勣)을 입향조로 하는 본관이다. 즉, 서로 다른 성씨이다.[29]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해주.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 ·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벼슬은 현감을 지냈다. 산수, 인물 · 영모 · 포도 등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하여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명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특히 산수화에서는 남종화와 북종화의 화법을 혼합하여 특유의 산수화풍을 이룩했다.[30] 덕수 이씨의 위인 한 사람인 율곡 이이의 맏형인 죽곡(竹谷) 이선(李璿)이 해주 이씨로 분적하였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에서 분적한 것이다.[31] 해주 이씨가 가끔 자신이 어렸을 때 연안 이씨로 자주 들어와서 자신이 연안 이씨로 알고 있는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해주 이씨의 정보가 많이 없다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32] 아직까지 연안 이씨 홈페이지 질문란에 공량공파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의 대부분은 선대가 북한에서 내려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재] A B 재령공파와 재령공파에서 분적한 지파에서만 사용하는 항렬이다.[미확인] A B 그러나 이권은 현재 연안 이씨 4대파(판사공파, 부사공파, 첨사공파, 대장군공파)의 족보에선 확인되지 않는다. 즉 미확인 6개파 중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소부감판사공파 중 과거에는 6세손 이광부터 확인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후에 2세손인 이영군과 평장사공파 파조 이안군이 확인이 되었던 것처럼 연성군, 오원부원군 이권과 연안군 이엄 또한 전해내려 오지 않는 파에 속한 인물이 아니라 현존하는 4개파 중의 인물일 수도 있다.[33] 오원은 현재 연안군의 별칭이다.[34] 이수산의 자세한 내용은 이 곳을 참고하기 바란다.[35] 지금의 완주군 고산면[36] 연안 이씨 노론 계열의 인물들은 대부분 시파인데 벽파의 인물을 굳이 뽑자면 노론 벽파 명문가 청풍 김씨인 좌의정 김약로의 처부인 대제학 이일상의 아들 전라도 관찰사 이해조 계열과 청명당을 구성한 이명식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끔 대제학 이만수가 벽파라고 하는데 이만수는 소론 이정신의 계열로 절대 벽파가 아니라 소론이다.[37]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는 어사암이 이때 유래되었다. 어사암은 1894년에 기장현에 있는 해창에서 양곡을 가득 실은 조운선이 부산포로 가다 이곳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데 흉년으로 굶주리던 어촌 주민들은 잠수질하여 바다 밑에 흩어져 있던 곡식을 건져서 먹는다. 그러나 이 일이 현감에게 알려지며 주민들은 모두 절도 혐의로 기장 관아에 구금되고, 마을 집집을 수색하여 곡식을 모두 거둬 갔으며, 옥에 갇힌 주민은 가혹 행위로 죽기까지 했다. 이 일이 고종의 귀까지 들리자 이도재를 어사로 파견하여 볏섬 도난 사건과 고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다. 어사가 온다는 소식을 접한 어촌 주민들은 기장 관기 월매로 하여금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고, 관아에서 가혹 행위로 도난 물량이 많은 것처럼 허위로 꾸며 주민들의 재산을 수탈하려 했다고 말하게 했다. 이에 월매는 어사가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매 바위를 찾을 때 월매도 동행하여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어사는 흥에 겨워 ‘천공경무물(天空更無物) 해활난위시(海闊難爲詩) 환구구만리(環球九萬里) 일위가항지(一葦可航之)’(하늘은 비어서 다시 형상하기 어렵고, 바다는 넓어서 시를 짓기 어렵네. 세상 구만리에, 한 조각 갈대배로 항해해 갈 뿐이라네)라는 시를 매 바위에 새겨 넣어 결국 이도재의 현명한 선택으로 절도 죄가 성립되지 않아 주민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주민들은 1883년 생사단을 세워 비석에 시를 짓고, 이도재의 생일마다 축원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비석에 적은 시는 아직까지도 비석에 적혀 있어 당시 어민들이 이도재에게 느꼈던 무한한 고마움을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 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 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 이다.[38] 택당 이식과는 동명이인이다.[39] 지금은 완주군 용진읍과 삼례읍으로 각각 편입됐다.[40] 1919년 3월 17일 완주군 초포면 3.1 운동이 일어난 곳이다.[41] 태자첨사공파중의 진사공파의 집성촌이다.[42] 해당 영상 링크[43] 당시 임금은 숙종이었다.[44] 이는 5년 뒤에 일어나는 신미양요의 주된 원인이다.[45] 철인왕후의 생모는 민무현의 딸 흥양부부인 민씨인데 본래 김문근은 초배로 효간공 이용수의 딸 연양부부인 이씨와 결혼하였으나 연양부부인 이씨가 후세 없이 26세의 나이로 일찍 죽자 흥양부부인 민씨와 재혼하여 철인왕후를 낳은 것이다. 즉 연양부부인 이씨는 철인왕후 친모가 아니다.[46] 근거자료[47] 막말이 아니라 정말 장수하는 편이다. 조선조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환갑잔치할 확률은 20%이며 조선 왕의 평균 수명은 46.1세였으며 서민들의 평균 수명은 35세 혹은 그 이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연안 이씨 인물들은 대부분 장수했는데 고려 인종 대에 태어난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인 이현려도 희종 2년 까지 살아 81세에 사망했고 조선초 좌의정 이귀령은 무려 94세 때 사망했다. 외에도 많은 인물이 대부분이 7~80대까지 살았으며 조선 시대 70대를 넘긴 종2품 당상관들만 들어 갈 수 있는 기로소에 들어간 인물이 가문 중 2위로 21명을 기록하여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48] 이현려는 현재 영정도 전해진다. 이곳으로 가면 영정을 볼 수 있다.[49] 마찬가지로 동호리 이씨 고가도 연안 이씨의 고택이다. 동호 이지유의 손자 이진악이 조부의 호를 따서 고택을 지은 것이다. 또한 동호리 지명 자체가 이지유의 호에서 유래된 것이다.[50] 참고문헌[51]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드리는 행위[52] 출처:동아일보 젊은 그들 10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