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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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특별시의 시장이다. 임기는 4년이며, 3선 연임 할 수있다.
2. 특수성
서울특별시의 인구 규모만큼이나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권한과 나라에 미치는 영향력도 매우 크며, 정치적 비중도 아주 크다.[3] '''다른 광역자치단체 수장들이 차관'''급으로 대우받는 데 비하여, '''서울특별시장은 유일하게 장관'''급으로 대우받는다.[4] 이는 조선시대에도 비슷했는데, 관찰사(지금의 도지사) 등은 참판(차관)급(종2품) 대우를 받았지만 한성부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은 판서(장관)급(정2품) 대우를 받았다.[5] 이 판윤이라는 직책은 행정, 사법, 치안을 모두 담당했기에 오늘날로 치면 서울특별시장, 서울고등법원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겸하는 사실상 무소불위의 자리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가 된 특성상 경성부윤이라고 불렸다.
2010년대 중반 이후 경기도 인구가 서울시를 추월하기는 했지만, 서울특별시장의 위상이나 특별 대우는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특별시장은 '수도의 시장'으로서 정치적 영향력 외에도 지방자치법 상 특례를 인정받아 지방자치법과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을 통해 일부 특례를 적용받지만, 경기도 지사는 다른 도지사와 같이 지방자치법만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다른 광역지자체의 경우 지방채 발행이나 자치사무의 감사를 행안부 장관이 하지만 서울시는 행안부 장관이 국무총리에게 보고해야 한다. 또한 국가공무원의 임용 및 징계 등은 해당 주무부처 장관에게 있으나 대통령령에 정하는 범위 내에서는 서울시장이 행사할 수 있다.[6]
다만 장관급의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명목상 서열까지 다른 광역자치단체장보다 높은 건 아니다. 전국시도지사협의회에서 서울시장이라고 특별히 권한이 더 크지도 않으며, 발언권도 똑같이 받는다.
서울시가 설립하고 운영 중인 서울시립대학교의 학교운영위원장을 당연직으로 맡고 있기도 하다. 이 운영위원장을 이사장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이는데, 서울시립대는 아직 법인화가 되지 않았으므로 이사장은 틀린 표기이다.
2.1. 가장 강력한 독이 든 성배
특이하게도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사람은 그걸 끝으로 아예 정치를 떠나거나, 아니면 정치생활은 연명하지만 상승세가 확 꺾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보이는데, 다음은 그 리스트이다. 위첨자 표시된 숫자(3 등)는 순위이며 표시가 없으면 2위이다. 여담으로 고건 시장 이후 서울시장들도 끝이 안 좋다.
다만, 위에서 거론된 사례들을 비교해 보면 각 낙선자의 사례간에 차이가 커서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고, 특이한 징크스라기보다는 그냥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직위 자체의 특수성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수도 있다. 일단 서울특별시장 자체가 선출직 공무원 중에서는 수도 + 인구 천만 명 도시의 특수성 때문에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정치적 위상이 높은 자리'''[10] 이고, 정치적으로도 대선을 비롯한 주요 선거마다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표밭으로 여겨지는 서울(수도권)의 지지를 얻어야 당선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비수도권 거주자는 서울시장이 누군지 알지만, 수도권 거주자는 충청도나 전라도, 강원도 쪽 도지사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정작 (민선) 서울시장을 거쳐 대통령에 이른 인물은 이명박 딱 한 명뿐인데, 이는 6공 이후 한국의 정치 제도 특징상 서울시장은 국내의 '''선출직 공무원 중에서는 사실상 2인자'''로서 소통령이라고까지 불릴 정도지만, 실제 업무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으로서 '''중앙 정계와는 한 발짝 떨어져 있다'''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으로 이르는 정치적 경력을 착착 밟아나가고 있는 유력 대권후보급 주요 정치인의 입장에서 보면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 서울시장에 도전하기보다 국회의원 + 장관 콤보로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더 매력적이고 안정적인 선택지로 여겨질 가능성도 충분히 높은 것.
실제로 역대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한 주요 정치인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성공적인 경력(대표적으로 국회의원 당선)을 이어가고 있는 도중 서울시장선거에 도전한 사례는 별로 많지 않고,[11] 일시적인 정치 활동 중단이나 낙선 등으로 인해 기존 경력이 중단된 상태에서 다시 정치 무대에 복귀하기 위한 토대로써 지방선거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역대 서울시장 중 가장 성공적인 정치적 경력(대통령)을 거친 이명박의 경우를 보더라도 15대 총선 당시의 불법 선거 운동으로 의원직을 상실 당할 위기에 쳐하자 자진 사퇴한 후 결국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가, 사면 복권된 후 서울시장 도전으로 정계 복귀를 시도한 뒤 성공한 케이스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사람은 그것을 끝으로 정치를 떠나거나, 정치 생활을 연명하더라도 상승세가 확 꺾이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울시장 자체가 선출직 공무원 중 사실상 2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서울시장에 도전했던 정치인이 정치적 상승세를 보이려면 대권주자급이 되어야 한다. 즉 서울시장 후보급에서 경력이 상승할 길 자체가 워낙 좁으니 그 좁은 길로 들어가지 못하면 상승세가 확 꺾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서울시장 후보급 경력의 정치인 정도면 이미 정치 경력 자체가 상당히 긴 원로급 정치인일 가능성이 높고, 나이 역시 적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선거에서 패배하면 재기와 재도전을 하지 못하고 정계 은퇴 수순을 밟게 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지방자치단체장인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정치인 중 국회의원 + 장관을 노리는 중앙 정계에서의 경력이 단절되어 지방선거를 통해 정계에 복귀하려는 이들의 비중이 상당하다는 점도 생각하면, 정계 복귀에 실패하면 정치적 은퇴 수순을 밟게 되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닌 셈.
뿐만 아니라 서울시장을 거친 이들은 어째 말년이 안 좋다. 이명박 전 시장의 경우 임기를 무사히 마쳤고 대통령까지 당선되었으나 여러 논란으로 인해 징역을 구형받아 수감 중이다. 오세훈 전 시장은 무상급식 주민 투표에 대해 책임지고 2기 임기 1년도 채 안 되었을 때 사퇴했으며, 박원순 전 시장은 여비서 성추행 사건으로 피소된 후 자살했다. 대선 출마를 위해 중도 사퇴를 한 1대 민선 시장 조순 전 시장을 제외하면 초선 기준으로는 모두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이명박, 고건 전 시장을 제외하면 재선까지 포함했을 때 임기를 무사히 마치지 못했다. 그리고 고건 전 시장을 제외하면 말년이 좋은 사람이 없다.
3. 법적 권한
'''제7조(대리 출석)''' ① 국무위원이 국무회의에 출석하지 못할 때에는 각 부의 차관(행정안전부의 재난안전관리사무에 관하여는 이를 담당하는 본부장을 포함한다)이 대리하여 출석한다.
② 대리 출석한 차관은 관계 의안에 관하여 발언할 수 있으나 표결에는 참가할 수 없다.
'''제8조(배석 등)''' ① 국무회의에는 대통령비서실장, 국가안보실장,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국무조정실장, 국가보훈처장, 인사혁신처장, 법제처장, 식품의약품안전처장,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금융위원회위원장, 과학기술혁신본부장, 통상교섭본부장 및 '''서울특별시장이 배석한다'''. 다만,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중요 직위에 있는 공무원을 배석하게 할 수 있다.
②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중앙행정기관인 청(廳)의 장으로 하여금 소관 사무와 관련하여 국무회의에 출석하여 발언하게 하거나 관계 전문가를 참석하게 하여 의견을 들을 수 있다.
4. 상세
임명직 시장 시절부터 현행 선출직 시장까지 '''국무회의'''에도 참석이 가능하며, 발언권은 있지만 의결권은 없다. 실제로 박원순 서울시장도 의결권이 없다는 것을 발언한 적이 있다. 관련 기사 국무회의에서 발언권과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무위원들은 모두 '''국무회의 부의장'''의 제청에 따라 '''국무회의 의장'''이 임명한 자들이고 그 외의 다른 배석 인원들은 모두 '''국무회의 의장'''이 직접 임명한 자들이다. 또한 모든 국무회의 안건들은 의장이나 부의장, 그리고 국무위원들에 의해서 제의되기 때문에 국무회의를 이끄는 주류에 반대 입장을 내는 참석자는 '''야당 소속 서울특별시장''' 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씩 반대 의견이 나오면 이런 이유에서다.
장면 내각 시절에는 '''민선''' 서울시장도 각의(현재의 국무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했다. 이때 민선 서울시장이 김상돈 한 명뿐이고 임기도 몇 달 못 갔다는게 함정이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지방자치제도가 폐지되고 난 관선제 시절에는 당연히 서울시장도 국무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했고, 1995년에 민선 서울시장이 들어오면서 다시 '''권리'''로 약화된 것이다. 그래도 초대 민선 시장인 조순 시장과 2대 민선 시장인 고건 시장은 다른 일정이 없는 한 화요일 정례 국무회의에 매주 참석했다. 이명박 서울시장 들어서면서 정무부시장을 대타로 보내는 등 조금씩 출석율이 떨어지다가 박원순 서울시장 들어서 정무부시장도 보내지 않아 '''국무회의 참석율이 10% 아래로 떨어지기에 이른다'''. 2018년 지금은 정말로 예산시즌 아니면 아예 서울시장이 청와대에 찾아가질 않는다.
- 사실 위의 국무회의 규정을 보면 알겠지만 서울특별시장이 배석한다이지 배석할 수 있다가 아니다. 즉 2018년 현재까지도 서울시장은 의무적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해야하는 존재이다. 조항을 보라. 아예 서울특별시장이 배석한다라고 명시까지 해놨지 않은가. 그간의 민선 서울시장들이 일부러 배째라로 안 나가는 거다. 서울시장한테 출석 의무를 달아놓은 규정은 2008년 2월 29일에 생겼다.[12]
여하간 정치적 위치와 상징성 때문에 서울특별시장은 사실상 차기 대권주자로 보내기에 딱 좋은 위치이어서 뭇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다. 정치에 관심 많은 전국의 시민들이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많은 관심을 쏟는 것도 다음 차기 대선후보를 점칠 수 있는 지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명 서울시장→대선후보→대통령 테크. 이 테크가 아니어도 전·현직 시장이 가지는 정치적 가치는 어마어마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전/현직 서울특별시장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정치계에선 당연한 일로 자리를 잡았다. 아래 주요 서울특별시장만 봐도 한국 정치사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윤보선, 이명박이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뒤에 대통령이 되었고, 허정은 과도정부 수반, 고건은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다. 부통령 중에서는 이기붕이 서울특별시장 출신이다. 박원순은 그의 태도로 인해 대권 도전하는 게 아니냐, 혹은 시민들이 그의 대권 도전을 바라는 상황까지 왔으나 그는 끝내 불출마 선언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전임시장(이원종)의 경질 이후, 후임 시장에 취임했던 우명규는 취임하자마자 첫 임무를 무겁게 시작했다. 그러나 성수대교 건설 당시 서울시 건설부시장으로 실무 총책임자였다는 게 밝혀져 근 열흘 만에 자진사퇴하고 최병렬이 시장으로 임명된다. 조순 또한 당선 이틀 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나면서, 전임 시장(최병렬)의 퇴임으로 인해 취임하자마자 사고 현장으로 가서 상황을 살피고 첫 임무를 무겁게 시작했다.
역대 최연소 서울시장은 경성부윤 취임 당시 39세였던 김형민 초대 시장이며 그 다음은 40세였던 김현옥 제14대 시장이다.
서울시장에게는 재임 기간 동안 거처할 수 있는 공관이 제공된다. 이를 서울시장 공관이라고 하며 별칭은 "시장공관"이라고 부른다. 위치는 혜화동에서 삼청동 공관촌 인근인 가회동 서울재동초등학교 인근으로 이전하였다. 기존의 공관은 한양도성 전시안내센터로 리모델링되었다.
참고로 민선 구청장(25곳) 출신은 아직 없는게 특징이다.
호남 출향민 비중이 높은 서울이지만 민선 서울시장 중 호남 출신은 아직까지는 고건 1명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송파구는 서울시장 선거의 판독기 역할을 했으며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승리를 예외 없이 모두 맞췄다. 이는 송파구의 인구가 많은 것도 있지만[14] 다른 지역에서 인구가 많이 유입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접점끝에 패배한 한명숙은 25개 지역구 가운데 17곳에서 승리하고도 오세훈에 패배했는데 오세훈이 승리한 지역 8곳 중 하나가 송파구였다. #
5. 주요 서울특별시장
- 김형민: 초대 시장. 시작은 경성부윤이었다가 서울특별자유시장으로 직함명이 바뀌었다. 후임자가 대통령까지 해서 워낙 유명해지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묻혔으나 우남시가 될 뻔한 현 서울시 지명을 지켜내었고 그 외 다수의 일제 잔재 지명을 바꾸는 데에 기여한 인물이다.
- 김현옥: 제14대 시장.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제12대 경상남도 부산시장에 임명되었으며 부산시를 직할시로 승격시키고자 부산과 중앙을 새벽 열차로 왕래하면서 직할시 승격 필요성을 역설한 끝에 중앙의 승인을 획득하여 직할시 승격에 성공하고[15] 첫 직할시장(대수로는 13대)이 되었다가 몇 년 뒤 이 자리로 이임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의 원조가 되는 인물로, 파리의 오스만 시장에 버금가는 서울 대개조 사업을 벌였다. 이는 비단 서울시장 시절뿐만 아니라 부산시장 재임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60년대 말 서울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판잣집을 철거하고 아파트를 짓는 개발 정책을 주도했고, 서울전차 폐선[16] 과 서울 지하철 기본 계획 수립도 이 사람이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아파트 문화를 연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너무 개발 정책에만 목을 맨 나머지 대형 참사를 일으키고 사임하였다. 나중에 내무장관으로 영전한다.
- 양택식: 제15대 시장. 두더지 시장이란 별명으로 유명하다. 이 사람 임기에 그 악명 높은 광주대단지사건이 터졌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의 공사를 총지휘했던 시장인데 하필이면 1호선 완공 당일 육영수 여사가 비명횡사하여 얼마 후에 사임하였다.
- 구자춘: 제16대 시장. 전임자가 만든 서울 지하철 계획을 자기 입맛에 맞게 적절하게 변형하여 지금의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울 지하철 3호선, 서울 지하철 4호선의 서울시내 구간을 만들어냈다. 특히 2호선 계획 당시 지도에 줄 그어서 30분 만에 순환선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나름 유명.[17] 별명은 황야의 무법자였다. 훗날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 박영수: 제18대 시장. 임기 중인 1982년 4월 서울 지하철 3호선 무악재 구간 공사장에서 붕괴 사고가 일어나 경질되었다.
- 염보현: 제20대 시장.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 출신이다. 재임 기간 서울 지하철 2, 3, 4호선을 완공했고, 한강종합개발을 추진했으며,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개장, 목동신시가지 건설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경희궁, 보라매, 종묘공원, 석촌호수 공원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기도 하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은 실질적으로 염보현의 공적이라 보는 사람이 많다. 부임 중에 이규동 대한노인회장 등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과 연루된 비리로 인해 1988년 구속되었다.
- 고건: 제22대(관선), 제31대(민선)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관선과 민선으로 2번 시장을 한 특이한 사례.[18] 임기 초부터 제일 중요한 시정 현안은 교통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교통관련 정책을 많이 펼쳤다. 2기 지하철과 동부간선도로를 개통시키고, 서울특별시 시내버스에 천연가스버스를 도입해 당시 심각했던 서울의 대기오염을 대폭 감소시키는데 기여했다. 뒷날 국무총리 재임 중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 박세직: 제23대 시장. 1990년 12월 임명되었으나 2달도 못 되어 수서 비리 사건으로 경질되었다.
- 최병렬: 제29대 시장. 마지막 관선 시장이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에서 퇴임 전날의 삼풍백화점, 즉 '사고에서 시작하여 사고로 끝난' 비운의 서울시장이다. '최틀러'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사고 현장에서 너무 기가 막혀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훗날 한나라당 대표가 되어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야당이 된 한나라당 후보로 고건에게 맞서 패배하였다.
- 조순: 제30대 시장. 최초이자 6공 이전의 유일한 민선 서울시장이었던 제11대 김상돈 전 시장(2공)의 뒤를 잇는 민선 서울시장인 동시에 6공 최초의 민선 서울시장이다. 안타깝게도 시장에 당선된지 2일 후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시장에 취임식도 대폭 축소하여 간소하게 치르고 바로 사고 현장부터 가서 상황을 살핌으로써 첫 임무를 무겁게 시작하였다.
- 이명박: 제32대 시장. 재임기간 동안 청계천 복원, 서울광장 개장, 서울 대중교통 체계 개선 등의 성과가 크게 부각되어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 오세훈: 제33~34대 시장.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민선 시장이다. 뚜렷한 행정 성과, 반듯한 이미지와 외모로,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 꼽혔지만 재선 때 승리 아닌 승리를 거두며[19] 불안불안하더니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패배로 사임하였다.
- 박원순: 제35~37대 시장. 위의 오세훈 전 시장의 사퇴로 열린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그 이후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1년 10월에 취임하여[20] 2014년 재선에 성공하였고 재선 임기 3년차에 들어서면서 조선 건국 이래 최장기간을 재임하는 서울의 책임자(한성판윤과 경성부윤 포함)였으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연속 3선에 성공한 서울시장이다. 그러나 2020년 7월 10일경 북악산 부근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자세한 것은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사망 사건 참고.
6. 명단
서울특별시장이 선출직으로 완전히 전환되기 전인 1995년 이전까지는 재임기간이 채 1년을 넘기지 못한 시장이 10명이나 있었다. 선출직 전환 이외에는 1998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 정부 시절 당시의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의 고건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된 걸 제외하면은, 야당 출신 인물이 내리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고 있다. 문민정부 시절의 조순, 참여정부 시절의 이명박, 오세훈(이상 한나라당)[21] , 보수정당 재집권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박원순이 여기에 해당된다.[22]
역대 시장의 사진과 주요 업적에 대해서는 서울시 홈페이지의 이 문서를 볼 것.
7. 역대 서울시장 선거 결과
8. 창작물에서의 서울시장
-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 강상구 (안내상 분)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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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원순 전 시장의 자살로 인한 보궐선거.[2] 권한대행인 행정1부시장은 선출직 공무원이 아닌 국가직 공무원으로서 당적을 보유할 수 없다.[3] 정치권의 별칭이 '''소통령'''(小統領)일 정도. #[4] 일반적으로 위상에 있어 정치적 권력이나 실권 측면은 그 이상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어찌 됐든 지방직이라, 국가직 위주의 국가의전서열 목록에는 없다. 서울시장이 국가의전서열에서 제외당한 것은 2005년 참여정부 때이다. 그 이전까지는 서울시장도 국가의전서열에 있었는데, 장관급 인사 중에서 제일 마지막 순번이었다.[5] 한성판윤 또는 그냥 판윤으로도 불렸으며, 조선초에는 한성부윤이 정식 명칭이었으므로 한성부윤 혹은 부윤으로도 불렸다.[6] 서울시의 행정부시장 2인과 기조실장의 경우 서울시장이 국무총리를 경유하여 대통령에게 임명안을 상신하여 대통령 명의 임명장을 받게 된다. 서울시 소속 공무원의 상훈 수여도 타 시·도의 경우 행안부 장관을 경유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시장이 대통령에게 다이렉트로 상신할 수 있다.[7] 現 더불어민주당 포용국가비전위원장. 그 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등포구 을 지역구에 출마, 당선되었다. 원내 복귀까지 무려 18년이 걸렸다![8] 이후 바른미래당과 새로운보수당을 거쳐 현재는 국민의힘 소속이다. [9] 다만 2021년 재보궐선거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며 서울시장 후보 지지율도 40%대로 다시 급상승하고 있다.[10] 국무총리 및 장관직은 임명직이니 선출직의 위상을 가질 수 없고, 국회의원의 경우 정수만 300석에 이르는 데 비해 서울특별시장은 단 1석뿐이다. 물론 다른 광역자치시도의 시장이나 도지사까지 합치면 열몇 자리가 되긴 하지만, 차관급인 타 광역지자체장에 비해 장관급인 서울시장의 위상이 명백히 높다.[11] 지자체장과 국회의원은 겸임이 불가능하므로 시장 선거에 도전하려면 의원직을 사퇴해야 한다. 즉, 국회의원 재직 중이라면 일단 의원 경력을 포기해야 지방선거에 도전할 수 있는 것.[12] 이렇게 대통령령 개정으로 서울시장에게 국무회의 출석 의무를 지우신 분은 바로 이명박.[13] 정무직 공무원은 기본적으로 선출직>임명직이며 서울시장은 선출직 공무원 중에서는 대통령 다음가는 위치. 총리는 대통령에 의중에 따라 얼굴마담격인 위치일수도 있고 책임총리로서 어느정도 실권을 발휘할 수도 있는 등 정부마다 다르지만 과거에는 실권이 있는 자리라기보단 방탄총리의 역할이 컸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꽤 위상이 커졌지만 결과적으로 임명과 해임 자체가 대통령 마음대로이기에 총리 자리 자체에 정치적 위상이 높다고 보긴 어렵다.[14] 인구가 춘천시, 강릉시, 속초시, 동해시를 합한 것보다 많고 중구보다 5배 많다.[15] 다만 당시에는 정식으로 '부산직할시'의 이름은 얻지 못하고 '경상남도'만 빠져서 시장 직함명 역시 1981년 부산직할시 정식 개칭 전까지는 그냥 '부산시장'이었던지라 근래에는 이 시기를 '(정부 직할) 부산시(장)'으로 표기한다.[16] 부산전차도 이때 동시에 폐선되었는데, 부산전차 폐선 계획을 최초로 수립한 사람 역시 김현옥 시장이었다. 다만 임기 내에는 실행하지 않고 후임 김대만 시장이 실행한 것.[17] 더 엄청난 것은 2호선 계획에서 영등포역 예정지 공사가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해서 신도림으로 위치가 바뀐 것을 빼면 난공사라 할 것이 없었다.[18] 비슷한 사례로 서울시장은 아니지만 관선 1번+ 민선 3번으로 4번 도지사를 했던 심대평 前 충남지사의 사례, 제25대 부산직할시장(관선)과 제31~32대 부산광역시장(민선)을 지낸 안상영 前 부산시장이 있다.[19] 본인부터가 여론조사 결과와는 다르게 매우 아슬아슬하게 이겼고 서울시의원 선거에서도 당이 크게 패배하며 팔다리가 잘렸다.[20] 이 때 박원순이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깨고 올라간 상대가 다름아닌 나경원이었다.[21] 단, 이명박은 국민의 정부 말기에 임기를 시작하여, 참여정부 후반기에 임기를 마쳤고, 오세훈은 2010년 재선 도전 당시에는 여당 신분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2] 박원순도 역시 2018년 3선 도전 했을때는 여당 신분으로 출마해 당선이 되었다.[23] 선거 당시 당적[24] 2년 78일. 해방 이후 초대 서울시장. '''서울'''(특별자유시)이라는 명칭을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초창기에는 '''한성'''부윤이었다... 이후 곧 '서울시장'으로 개칭되었다.[25] 172일[26] 69일[27] 1년 266일[28] 1년 27일[29] 4년 107일 [30] 1년 160일 [31] 1년 179일 [32] 323일 [33] 242일 [34] 장면 내각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민들의 선거로 서울시장을 선출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다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서울시장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통령 임명직으로 회귀했다.[35] 139일. 4.19 혁명으로 장면 내각정부가 들어서면서 선거를 통해 최초의 민선시장이 되었다. 날짜를 보면 예상되지만, 이듬해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임기를 반 년도 못 채우고 경질된다.[36] 2년 210일[37] 2년 104일[38] 4년 15일. 박정희 대통령의 오른팔이자 최측근으로 서울시장에 임명되어 불도저라는 별명답게 서울 대개조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나 그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39] 4년 139일. 임명직 시장 중 최장기간 재임. 그러나 육영수 저격 사건 직후 시장직에서 물러났다.[40] 4년 111일[41] 1년 254일[42] 1년 237일 [43] 1년 169일 [44] 4년 76일.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의 주역. 재임기간 지하철 2 3 4호선을 완공하였다.[45] 340일 [46] 2년 21일 [47] 53일 [48] 1년 127일[49] 244일[50] 7일. 당시 매우 유명했던 인권변호사 출신에 40대라는 젊은 나이로 참신한 이미지까지 갖추고 있어, 당시 최초의 민주세력 정부였던 김영삼 정권의 주요 인사로 내세울 만했다. 하지만 시장 취임 후 곧바로 서울근교에 위치한 수려한 본인 소유의 전원주택이 그린벨트를 무단 훼손해서 건축된 사실이 언론보도로 드러남으로써 1주일 만에 자진 사퇴하였다. 여담으로 김대중 정권 출범 후에는 보수세력으로 변신하였다. 역대 최단기간 재임[51] 1년 227일.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일어난 그날 오후 7시에 문책성으로 경질되었다. 후에 민선 충북도지사를 지냈다.[52] 11일. 경상북도지사를 하던 중에 이원종 시장의 경질로 급히 신임 시장에 임명되었지만 11일 만에 자진사퇴했다.[53] 239일 [54]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시장직 중도 사퇴. 2년 71일[55] 293일 [56] 4년 [57] 4년. 임기만료로 퇴임 직후 바로 대선에 뛰어들어 당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민선 서울특별시장 출신 첫 대통령. 임명직 서울시장 출신 대통령으로는 2대 시장인 윤보선이 있다.[58] 4년.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민선 시장[59] 1년 56일. 무상급식 전면확대 논란 당시 투표율이 33.3%에 못 미치자 사퇴했다. [60] 60일[61] 2년 247일.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야권의 단일후보였다. 보궐선거 당시 나경원 후보를 꺾었고 시장 취임 후 에 입당한다.[62] 4년 [63] 역대 최장기간 재임, 재임 중 자살사망[64] 박원순 시장의 자살로 인한 권한대행직 수행.[65] 직전 박원순 시장의 자살사망 사실이 10일 자정을 넘겨 확인되었기 때문에 실종 당일인 9일에는 임시로 직무대리를 맡았던 것. 주된 차이는 시장으로서 현직이 누구냐 정도로 직무대리는 결재권자는 현직 '시장'인데 임시로 현상유지의 범위내에서 대결하는 것이고 반면 권한대행은 권한대행자가 바로 최종결재권자가 되는 것인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