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걸

 


[image]
성명
한창걸(韓昌傑)
이명
한창걸( 韓昌杰), 한그레고리 에리세예비치, 그레고리한
생몰
1892년 ~ 1938년 2월 9일
출생지
러시아 연해주
사망지
러시아 하바롭스크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창걸은 1892년생이며 연해주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5년경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독일군과의 전쟁에 투입되었고, 군사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했다. 1918년 2월 제대한 그는 니콜라예프카 마을에서 한국인 최초의 농민 소비에트를 출범했다. 1918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로 진군하자, 한창걸은 한인 80여 명을 모아 빨치산부대를 창설한 뒤 적군과 연합하여 백위군,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1919년 4월 일본군과 백군이 진격해 오면서 희생자를 내고 퇴각했다. 그 해 11월 무기 지원 약속을 받고 백군 내부의 반란에 참가한 한창걸은 체포돼 일본군한테 넘겨져 고문에 시달렸다. 이듬해 1월 빨치산부대의 블라디보스토크 진격으로 구출된 그는 파르티잔스크로 돌아와 부대를 재건하고 전투를 재개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연해주 각지를 기습해 최재형 등 한인 지도자들을 포함해 한인과 러시아인 5천명을 살해하는 연해주 4월 참변을 단행했다. 이에 한창걸은 연해주를 떠돌며 일본군에 맞섰고, 1921년 1월 만주에서 연해주로 이동한 독립군이 주축이 된 임시군사위원회 군정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는 강국모(姜國模)가 이끄는 혈성단과 연합한 뒤 1920년 8월 일본군 장교 출신인 김경천을 사령관으로 추대해 800명 규모의 부대와 사관학교를 만들었다.
이후 한창걸은 1922년 9월에 조직된 연해주 한인 빨치산 부대 혁명군사소비에트의 위원으로 발탁되었고, 일본군을 연해주에서 몰아내기 위한 일련의 전투들에서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러시아 내전이 끝날 무렵엔 한인 빨치산 연합조직인 고려혁명군정청 위원에 선임되었다. 전쟁 종결 후, 그는 부대를 해산시키고 '붉은 별'이라는 협동농장을 출범시켰으며, 1930년대엔 하바롭스크 인근의 바로비잔 유대인 자치주 내무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9월 7일 러시아 유태인자치구 내무인민위원부 보안국에 반혁명 인사로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받고 1938년 2월 9일 하바롭스크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1958년 7월 7일 러시아 극동군관구 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한창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19년 1월 16일 권용우 우즈베키스탄 대사는 한창걸의 종손이자 또다른 독립유공자인 한성걸의 손자인 한 블라디슬라브에게 한창걸에게 추서되었던 건국훈장을 전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