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4월 참변
1. 개요
연해주에서 일본군이 한국인을 상대로 한 대량 학살
2. 배경
일본은 시베리아 연해주의 항일 세력이 너무나 거슬렸다. 자신들의 식민 권력을 위협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군이 무너지기 전만 해도 일본군은 시베리아에서 한인들을 적극 학살하지는 않았다. 복합적인 국제 문제 때문에 꺼려했다. [1] 다만 백군을 통해 간접으로 통제를 시도할뿐이다. 하지만 백군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연해주의 항일 세력이 거슬렸다.
1919년 7월부터 일본 육군 수뇌부는 조선과 러시아, 중국 국경 지역에 있는 항일 운동가들을 대량 검거하려고 하였다. 일본 해군의 사이토 마코토(재등실 齋藤實)는 이것을 지지했다.[2] 그러다 1919년 8월 12일, 이 사이토 마코토는 3대 조선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사이토 마코토는 부산을 거쳐서 서울(경성)로 갔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 때 사이토 쪽으로 수류탄 하나가 날라와서 터졌다. 사이토는 이 때 겨우 살았다.[3] 수류탄을 던진 사람은 강우규[4] 선생이다. 강우규 선생은 노인 동맹 단원이다. 그리고 그 노인 동맹 단원이 바로 블라디보스톡에 근거를 둔 단체였다.
사이토 마코토는 9월 28일에 시노다 지사쿠를 만났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했던 시베리아 내전 문서의 그 시노다 지사쿠다. 지사쿠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막 돌아와서 평안남도 도지사로 승진한 상태였는데, 사이토가 지사쿠와 만난 다음 날, 사이토 총독은 하라 타카시 일본 총리에게 촉구했다. 러시아 극동 지역과 만주를 철저히 통제해달라는 촉구였다. 이런 전보는 곧바로 도쿄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날라갔다. 파병 온 헌병대는 조선에서 인원을 보충받았다. 1919년 10월 말부터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5] 일본은 연해주의 한인들을 더욱 직접 통제할 계획을 준비했다.
그러다 백군 진영이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연해주의 항일 운동가들은 더더욱 적극으로 항일 운동을 하였다. 연해주 각지에서 한인들은 빨치산 부대를 더욱 적극으로 후원해줬다. 중국 만주 지역 한인 독립 운동 단체들은 연해주로 무기 수집대를 보냈다. 만주 지역에서 온 수집대는 연해주 마을을 돌면서 무기를 수집했다. [6]
3월 14˙15˙16일 3일 간 블라디보스톡에서 노병회 대표자 선거를 하였다. 공산당 후보 중 김만겸과 박모이세이가 선출됐고 시내에서 광고판으로 알려졌다. 미국 적십자사는 3월 13일 아침 신한촌 소학교 생도와 간호부, 빈민들에게 의복 등 7백점을 기증했다. 또한 친일파 한인과 일본 밀정들은 살해를 당하거나 피습을 당하거나 행방불명됐다. 일본 상품 불매 운동도 전개됐다. 이 운동에 한인, 러시아인, 중국인이 함께 했다. [7]
일본 제국은 연해주의 항일 세력에게 더더욱 위협을 느꼈다. 다음 일본 측 문건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8]「시베리아에서의 정치적 변화의 결과로서, 볼셰비키적 요소의 강화는 반일적인 조선인들을 고무하였다. 그들 중 상당수가 지금 전보다 훨씬 더 쉽게 무기를 가지고 러시아로부터 지안다오 지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으로의 무력 침공이 있을 것이라 소문이 떠돌았던 지난 10월 경보다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은 연해주에서 항일 진영을 파괴할 준비를 했다.
그러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이 일어난다.
3. 습격과 4월 연해주 참변
1920년 3월, 일본 제국 사령부는 연해주의 혁명 수비대에게 전면 공세할 준비를 했고, 이것을 군인들에게 비밀리에 명령했다. 항일 조선인들 제거 계획도 이 때 포함됐다. 시노다 지사쿠의 후임자 이며 조선 총독부 관리인인 야먀자키 마사오가 이 계획을 세우는데 앞장섰다.[9] 그래놓고는 3월 31일엔 시베리아 일본군을 철병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군은 이미 철병을 선언한 상태였다. 1920년 1월 20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미군을 철병할 것이라 선언했고, 같은 해 4월 1일 러시아 주둔 미군 사령관 윌리엄 그레이브스(William Graves) 사령과 병사 2,300여명은 블라디보스톡을 떠났다. 일제 군사령관은 4월 2일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정부에게 경고했다. 한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연해주 정부에게는 "일본군의 주둔에 필요한 제반의 사항 즉, 숙영·급양·운수·통신 등에 관하여 지장을 주지 말 것"을 요구했다.
연해주 정부는 일본군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 4월 5일에 조약문에 도장을 찍기로 했다. 붉은 군대는 각 부대에 경계 태세를 해제하라고 지시했다. 4월 4일은 지휘관들 다수가 주말 휴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같은 날인 4월 4일 밤, 일본 제국군은 붉은 군대를 습격하고 군인들을 무장 해제 시키고 체포했다. 일제군의 습격은 4월 8일까지 계속 됐다.[10]
한창걸은 이 때를 이렇게 증언한다.
일본 제국군의 습격으로 기존 항일 세력은 파괴되고 무너졌다. 일제군은 연해주를 장악하고는 투옥된 백군 세력을 석방하고 무장 해제된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체포했다. 군인 중 러시아 사람은 백군 진영에게 넘겼다. 4월 9일, 라조, 루츠키, 시비르체프, 안드레예프 같은 사람들이 일제군에게 체포됐다. 5월 말에 일제군은 라조 일행을 백군 부대에 보냈다. 백군들은 이 일행들을 무라비요프 - 아무르스카역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 일행을 살아있는 채로 기관차 화실에 던져 불태워죽였다.[12]「1920년 4월 2일 나는 12시간 내에 한인 부대를 무장 해제시키라는 연대 정치 전권 위원 레베데프 동무의 비밀 명령을 받았다. 나는 그에게로 가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는 "이것은 외교적 고려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는 아직 아무에게도 발사하지 않은 장총을 가지고 살아 있고,만일 그들이 나와 일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내가 떠나겠다"고 제안했다. 레베데프 동무는 나에게 "이것은 단지 완전한 사업을 위한 위장일 뿐이며, 대대는 일본인이 보는 곳에서 무장 해제를 하고, 다른 날 무장 해제당한 빨치산을 무장시키기 위해 500정의 장총이 수찬으로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야 나는 동의하고 레베데프 동무에게서 ‘한창걸의 명령으로 수찬으로 장총 500정을 선적한다’는 명령 서류를 가져왔으며, 몇몇 동무와 상의하여 일본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무장 해제해야만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대대로 갔다. 이와 동시에 은밀히 무장 병력을 타이가로 보냈다. 남은 이들은 무장 해제했다.
4월 4일 저녁 10시 무장 해제한 빨치산들을 수찬으로 데려다 줄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열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러시아 빨치산의 정찰병이 도착하여 "일본군이 다가오고 있으니 즉시 숨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로마노프까로 향해 갔다. 로마노프까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격과 포격이 우리를 향해 시작되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예전 빨치산들이 도망쳐 와서 "일본군이 수비대를 포위하여 많은 이들을 죽이고 생포했다"고 알려왔다. 그때 우리는, 한인 빨치산 부대의 무장 해제는 러시아군의 무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본 통수부의 책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찬군 니꼴라예프까 마을에서 우리는 쉬꼬또보에서 타이가로 떠났던 우리의 무장 부대를 만났다. 여기서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사람은 많고 장총은 적었다. 우리는 가장 전투적인 동무들을 선발하여 그들로 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조만간 다시 소집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해산하여 집으로 갔다. 조직된 부대는 다시 니꼴라예프까 마을에 주둔했으며 전투는 하지 않았다」[11]
한인들은 일제군이 학살했다.
4. 한인 학살
일제군은 연해주의 한인 마을들에 무차별로 총을 쏘며 들어왔다. 붉은 군대 측 군인들은 일제군에게 무장 해제를 당했다. 한인 마을들에 쳐 들어온 일제군은 마을을 수색하고 파괴했고, 일제군은 한인들을 구타하고 학살하고 건물을 태워버렸다.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선 약 300명이 살해됐다.[13]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한 러시아 측 문건에는 그 현장을 이렇게 증언한다.
동아공산 창간호에선 러시아어 신문 『끄라스노예즈나야』를 인용하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한인촌은 블라디보스톡 변두리에 있었는데 엄청난 강도와 폭력을 체험했다. 야만적인 일본군들은 한인들을 마을에서 쫓아가면서 소총으로 때렸다. 포로들은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고 반죽음의 상태였다. 블라디보스톡은 끔직한 곳이 되었다. 포로들이 피투성인 채 찢어진 한복을 정리하지 못 하고 간신히 일본군을 따라갔다. 모든 지하실, 감옥들은 포로들로 꽉 찼다. 그날 살인범들이 몇 명의 한인을 죽였는지 짐작하기조차 힘들다.」[14]
한 신문은 당시 현장을 이렇게 증언한다.「지나간 사월에 해삼항에 있는 일본 군대에셔 러시아 사관들을 청하야 조약을 체결하자고 빙자하고 다수히 모인 뒤에 일본 군사로 하여금 병영을 둘러싸고 사격을 가해 다수 러시아 군인을 살해하고, 그 중에 도망하여 생명을 구한 자외에는 사망을 면한 자 없으니 그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와 같은 참상을 당하였다. 이러하기를 그날밤이 새도록 얼마나 포악하게 행하였던지 그 이튿날 아침에 큰 마당과 큰 거리에 주검이 산과 같으며, 육축도 많이 쓰러졌고, 집도 온전한 집이 하나도 없으니 그 참혹한 광경을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신한촌에는 한민 학교를 벤진을 부어 불지르고 한인계에 유지자와 청년을 다수 붙들어 갔으며, 일인 앞으로 정탐하는 한인은 기회를 만나듯 이 부도덕한 야만 행동을 하는 일본 놈을 도와 부모와 동생이 다 붙들려 가고 고독이 있는 어린 여자를 불러다가 여러 가지 형벌 노문료를 받았으며 그 항내에 보물과 상선 수십척까지 탈취하였다고.」[15]
파르페노프(A.S.Parfenov)가 증언을 따르면, 일본군은 한인들을 묶어서 녹쓴 철도에 매단 뒤에 블라디보스톡 근처에 있는 우리쓰만 바다에 던져 죽여버렸다. [17]「1920년 4월 4일에 일본군벌은 소위 연합군이 시비리에서 철퇴함을 불구하고 오히려 강도적 행위로 해항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였다.……무고한 평민까지 학살·총화·강탈 등 잔포한 행동들은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한다. 더욱 고려 사람에게는 이 틈을 타서 여지없이 박멸하려는 흉악으로 해항에서 수백 명을 체포하며 학교를 불질음으로 연추·수청·소왕영·하바롭쓰크에서 40여 명을 모다 일본 군벌의 총칼에 맞아 죽었다.」[16]
한 사람은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불태워졌던 건물을 이렇게 증언한다.
이인섭 선생은 이렇게 증언한다.「희랍 교당을 지나 한민학교 운동장에 다다라 치어다보니 굉장하던 그 집은 간 곳이 없고 다만 검은 재와 거츨한 굴뚝 4개 - 5개만 남았을 뿐이다. 10년간 나의 몸을 용납하고 나의 마음을 위로하든 사랑하고 정다운 집을 이렇게 보는 나의 눈에는 뜨거운 눈믈이 비빨과 같이 쏘다지고 나의 가삼에는 분하여 불길처럼 니러난다. 그 익일 일본이 발행하는 포조일보의 호의가 나돈다. 대형 사령관의 포고라는 문제 아래에 “지난 4일 11시(저녁)경에 로군이 우리 제1 병참 사령부를 사격하므로 우리는 그리말라고 버텼으나 종래 듣지 아니하므로 부득이 정당 방위책을 썼노라” 하였으며, 또 그 신문 잡보란에 “한민 학교를 불질음은 하등병들의 한 행위요, 사령관의 명령이 안임으로 그 군인을 엄중하게 벌하리라” 하였다.」[18]
최재형 선생 기념비에서는 당시 현장을 이렇게 증언한다.「1920년 4월 5일이었다. 이 날은 원동에서 국민 전쟁(러시아 내전)이 시작된 지 만 2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또는 왜적들이 강화 조약에 서명하겠노라고 약속한 날이었다. 그래서 우리 당국에서는 놈들이 배신하고 반란을 하리라고 생각지 아니하고 안전 상태에 처하여 있었다.
아침 9시 30분에 왜병들은 대포·기관포로 도시를 향하여 사격을 시작하여 전 시가는 불에 타기 시작하였고, 노인이나 여자나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집에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왜군들 총창에 맞아 쓰러졌다.
감옥에 갇히었던 흰파(백위파) 반역자들은 모두 석방되어서 전 시가는 혼란 상태에 처하였다. 해삼[Владивосток(블라디보스토크)]·소황령[소왕령, Ворошилов(보로쉴로프)]·스바스크·이만·하바로프스크 도시들에 거주하던 조선 남자들은 전부 왜놈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차고 넘었다.
해삼(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민학교는 불에 타서 재무지로 변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수십 명 조선 빨치산들이 있었다. 체포되었던 조선인 애국지사들이나 놈들이 빨치산이라고, 공산주의자라고, 반일 운동자라고 의심하는 인사들은 모두 비밀리에서 잔인무도하게 학살을 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한 평생을 직업적으로 조선을 해방하기 위하여 분투 공작하던 직업적 혁명 열사들인 최재형·엄주필·김이직 선진들이 계신 것이다. 그리하여 왜병들은 연해주에서 1922년 10월까지 소비에트 주권에 반항하여 만행을 계속하여 무수한 혁명자를 계속 학살하였다. 그래서 4월 5일은 언제든지 잊을 수 없는 날로 기억에 남아있다.」[19]
일제군의 살육은 신한촌까지 뻗쳤다. 신한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들인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같은 선생들한테까지 뻗쳤다.「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 - 60세 노인,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 군 자치 단체 의원. 1920년 일본군들의 극동 지역에 대한 기습 과정에서 많은 러시아인 주민들이 죽음을 당했다. 농민들 중의 많은 이들이 폭행과 야만적인 행위의 희생자가 되었다. 특히 러시아 국적의 한인들이 고통을 당했다. 일본군들은 한인들의 볼쉐비즘에 혐의를 두고, 한인들을 어두운 장소에 몰아넣고는 손을 묶은 후에 새벽에 학살을 자행했다. 노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도 일본군들에 의해 그렇게 총살을 당했다. (『1917년 - 1921년 시기에 사망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사 기념비』, 국립 출판사, 모스크바, 1925년.)」[20]
최재형 선생은 1860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났다. 1869년엔 아버지를 따나 러시아로 이주했다.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기반을 잡고 러시아에서 성공했다. 1906년엔 러시아에서 한인 의병 부대가 조직됐다. 최재형은 이 부대에서 최고 지도자로 활동했다. 안중근 장군을 지원했던 사람도 최재형 선생이다. 안중근 장군은 최재형 선생 집에서 사격 연습을 했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러 가던 안중근에게 여비를 지원해주기도 하였다.[21]
1918년 10월 말, 한인 사회당 간부인 이동휘, 김립, 이인섭은 하바로브스크에서 몸을 피해와서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 동쪽인 한인 농촌에서 회합을 하였다. 당시 홍범도는 솔밭관 최의관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홍범도를 지도자로 해서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 계획을 추친하기위해 한인 사회 지도자인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같은 선생 분들에게 몰래 찾아가서 자금 지원을 요청해서 그 선생들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의 건재약군 덕창국 주임인 김이직은 솥밭관 군대에 식료, 의복, 신발뿐만 아니라 무기까지 공급하였다. 이런 적극 지원은 일제군의 첩보에 걸렸다.[22]
최재형 선생은 몸을 피할 수 있었으나 피해지 않았다. 자기가 사라지면 가족들이 고통당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결국 그대로 집에서 일제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선생들도 일제군에게 끌려갔다.
이문숙웨라는 엄주필 선생이 끌려가던 현장을 이렇게 기억한다.
선생들은 일제군에게 고문을 당한 뒤 총살을 당했다.「그의 의딸 이문숙웨라(지금 알마 - 아타에 있는)의 회상에 의하면 엄주필 동지가 체포되던 사변은 이러하였다. 1920년 4월 5일 아침에 금방 날이 밝게 되자 천만 뜻밖에 원세훈이라는 사람이 와서 우리 집 유리창 문을 뚝뚝 두드리면서 “형님 전쟁이 났으니 속히 피신하시오.”하고서 그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자 왜놈 헌병 7명 ~ 8명이 집안에 달려들었다 방금 변소에 갔다 들어오는 엄주필을 결박하고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모집한 돈을 어디에 두었으며, 선포문을 어디 두었는가?”고 문초하면서 온 집안을 모조리 수색하였으나 아무런 증거물도 얻어 보지 못하였다.」[23]
최재형 선생 관련자들은 최재형 선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 가족은 1918년 겨울에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로 이사를 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 군 자치 단체(군참사회, Уездная Земская Управа)에서 근무하고 계셨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아버지께서는 읍 집행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었고, 그로 인해서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 군 자치 단체의 주요 인물로 선출이 된 것이었다. 1920년 4월 4일 아침에 아버지께서는 여느 때와 같이 군 자치 단체 사무실로 출근을 하셨다. 그날 오후 요새(성) 내에서는 전투가 벌어졌고, 저녁 무렵에는 더 격화되었으며, 포격 소리까지 수반되었다. 아버지와 형 최 파벨(2남, Цой Павел Петрович/П.П.Цой)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4일 저녁과 5일 새벽에 가족들 모두가 큰 걱정을 했다. 우리 모두는 어스름 무렵에 식탁에 모였고, 손위 형제들은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인들의 습성을 알고 있는 아버지께서는 가족의 안위를 염려하시며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와 손위 여자 형제들은 아버지께 즉시 몸을 피하시도록 설득을 했지만 아버지께서는 따르지 않으셨다. 그는 “내가 피하고 나면 일본인들은 어머니와 너희들 모두를 체포해 갈 것이다. 그리고 식구들 모두를 고문하고 때리고, 내가 있는 곳을 밀고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고, 적지 않게 살았고, 죽어도 된다. 하지만 너희들은 아직 살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 편이 더 낫다”라고 말했다.
우리 어린 형제들은 잠이 들었고, 손위 여자 형제들과 두 분 부모님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아버지께서는 마당으로 나가셨고, 곧바로 일본군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집 주변의 이웃 여인도 이 모습을 목격했는데, 그녀는 일본인들이 아버지를 체포해 간다고 소리를 지르며 우리 집 쪽으로 달려 들어왔다. 여자 형제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에 이미 아버지께서는 계시지 않으셨다. 일본인들은 아버지를 자동차에 실어 체포해 갔다. 사건은 1920년 4월 5일에 발생했는데, 일본인들은 이튿날인 4월 6일에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를 가혹한 고문 후에 총살시켰다. 이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일본인들은 초기에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와 여자 형제들은 아버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운명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헌병 관리국을 출입했었다.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조사가 끝이 나면 아버지와의 만남을 제공해주겠다"고 답변해주었다. 하지만 이후에 갑자기 자신들에게는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가 없고, 처음부터 없었다고 뜻밖의 말을 했다. 괴로운 나날이 몇 달 지나고,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인들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일본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헌병들과의 그러한 괴로운 대화는 아버지의 운명에 대한 다양한 소문과 함께 반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후 1920년 말이 되어서야 일본 당국은, 아버지에 대한 재판이 열렸었고, 아버지께서는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며, 형은 집행되었다고 알렸다. 아버지의 시신을 내어 달라는 우리의 요구에 일본인들은 거절했다. 그런데 1922년 여름에 일본 헌병대는 어머니를 호출했으며, 어머니께 아버지께서 매장된 장소를 보여주겠다고 말을 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새디즘(sadism, 가학성 음란증)과 간교함을 경험했던 어머니(최 엘레나 페트로브나)(ЦойЕлена Петровна/Е.П.Цой)께서는 헌병대의 제의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다른 타인의 유해를 보여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도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매장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24]
「혁명이 시작되며
1917년 혁명이 시작되는 무렵에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는 얀치헤 읍 집행 위원회 위원장이었다. 1918년에 일본 간섭군들이 슬라뱐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 자신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다. 일본 당국과의 조우를 피해서 그는 가족들을 데리러 갈 수가 없었고, 그래서 엄마가 직접 아이들을 데리고 약간의 옷가지들과 잠자리, 그리고 귀중품이 든 작은 함을 챙겨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갔다. 모든 재산과 도서들은 집에 남겨진 상태였다. 남겨진 물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지금까지 응접실 책장 속에 있는 금테두리가 입혀진 아름다운 서적들과 창고에 있던 많은 책 상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오랫동안 아빠는 부록과 함께 잡지 『니바』를 주문해서 읽으셨고, 그래서 항상 잡지와 함께 책들이 배달이 되었다. 우리 형제들은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상자들을 열고 집으로 책을 가져가 읽었다. 당시에는 슬라뱐카 마을에 라디오나 TV, 키노(영화), 클럽, 극장 등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책을 많이 읽었다. 엄마는 “또 책을 붙들고 앉아 있다”며 질책하시곤 했다. 물론 우리 가정은 대가족이었고, 어린 아이들도 있었기에 엄마는 큰 딸들의 도움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슬라뱐카에서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로 이사를 했다. 이때 아빠는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 군 자치 단체(군참사회, Уездная Земская Управа) 부의장으로 활동하셨다. 우리는 아빠의 옛 친구들이 큰 도시로 떠나면서 남겨 둔 집에서 살았다. 아빠의 옛 친구들은 중국 하얼빈이나 기타 도시들로 들어갔다. 하지만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것도 잠시였다. 집에는 5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가장 어린 아이가 6세였다. 일본군들은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로 진군해오기 시작했다. 1920년 4월 4일 아침에 아빠와 오빠 파벨(2남, Цой Павел Петрович/П.П.Цой)은 우리와 작별을 나누고 떠났다. 그들은 일본군들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남은 우리 가족 모두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나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
1920년 4월 5일이 시작되며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빠와 파벨은 일본 간섭군들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집을 떠나 있었다. 4월 4일 저녁에 아빠는 집에 돌아오셨는데, 우리 모두는 놀랐고, 아빠를 걱정했다. 거리에는 이미 어둠이 내렸다. 저녁 식사 후에 아빠는 엄마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를 불러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면 일본인들이 엄마와 너희 모두를 체포해 갈 것이고, 때리고 고문을 하면서 나를 내어 달라고 요구할 거야. 나는 이미 늙었고, 살아갈 날이 조금 남았기에 죽어도 좋단다. 하지만 너희들은 더 살아가야 하고, 일을 해야 하잖니. 차라리 나 혼자 죽는 편이 더 낫단다.” 우리 모두는 울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그와 작별을 나누었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마도 아빠는 잠을 이루지 못하셨을 것이다. 아직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그는 우리 방의 창 덧문을 열고 계셨다. 그 바람에 나는 누운 채로 잠에서 깨었다. 약 5분쯤 지난 후에 우리 방 쪽으로 문이 열렸고, 그 때 총을 든 일본군이 나타났다. 우리는 무슨 일인지를 알아채고 옷을 걸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는 밖의 현관 계단 쪽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빠의 뒷모습과 뒤로 묶인 아빠의 손을 볼 수 있었다. 이는 1920년 4월 5일 아침에 있었던 사건이다.
우리는 이 끔찍한 경험을 했다. 잡지에서 죽은 자를 보기라도 하는 경우에는 나는 울기 시작했고,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거나 졸도를 한 적도 있었다. 일본놈(япошка)들이 아빠를 고문하고 죽였다는 생각은 평생 동안 나의 가슴을 찢어놓고 있다. 나의 신경은 약해졌고, 신경성으로 평생 고생하며 지내고 있다. 하지만 살아야 했다. 아빠는 홀로 우리 가정의 부양자이셨고, 엄마는 8명의 아이들이 있는 대가족을 돌보고, 항상 있는 아빠의 손님들을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좋은 주부였고 음식을 잘 만들었으며 바느질(뜨개질)을 아주 잘 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에 나는 엄마와 같이 살며 맏이 역할을 했는데, 아래로 4명의 동생들을 돌보았다. 우리는 먹어야 했고 배워야 했으며, 우리는 먹을거리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25]
김병화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극동 지역에서는 1920년 4월참변 동안에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에서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4월 5일 이른 아침에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집에서 나와 마침 아이들 방의 창문의 덧문을 열었을 때, 소총을 맨 일본 군인이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옷을 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일본 군인들이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손을 뒤로 묶은 채 체포해 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다. 우리는 굽고, 그리고 운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그의 등을 보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26]
선생들이 처형된 뒤 김마리아는 헌병들에게 찾아가서 시체를 내놓으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헌병들은 발뺌을 하다가 끝내 시체를 내어주지 않았다.「중앙 아시아에서 유명한 콜호즈 지도자이자 ‘북극성 콜호즈’ 대표였고, 사회주의 이중 노력 영웅이었던 김병화(Ким Пен Хва)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20년 4월에 일본 원정군 부대들은 배신적으로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시를 기습 점령했다. 이 무렵에 시내에는 이준(중)집(Ли Дюн Дип) 지휘 하에 있는 한인 부대를 위한 탄약이 보관되어 있었다. 마침 이 탄약들은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에게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는 체포되어 일본군들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블라디보스토크와 그 밖의 지역에서 자행된 1920년 4월 4일 - 5일에 일본군들의 유혈 학살 만행으로 많은 한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 중에는 한인 민족 해방 운동 및 혁명 운동의 노투사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일본 간섭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엠.이. 구벨만(М.И.Губельман),『소비에트 극동 해방을 위한 투쟁』, 모스크바, 1958년).」[27]
선생들의 시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김마리아 회상에 의하면 김이직 동지가 왜병들에게 희생되자 그는 왜놈의 헌병대를 찾아가서 자기 오빠 죽은 시체를 내어달라고 강경히 요구하였다. 헌병대장 놈은 시체를 못 내어준다고 거절하였다. 그 후에는 자기 혼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수다한 조선 여자들을 동원하여 가지고서 헌병대에 매일 가서 질문하고 강경히 시체들을 내어 놓으라고 강요하였다.
왜놈 헌병 놈은 할 수 없으니 시체는 이미 불에 태웠으니 재가 된 해골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은 들은 김마리야는 그러면 화장한 곳을 알려달라고 강요하며 여러 날을 계속하여 헌병대에 가서 종일토록 항의하였다.
왜 헌병 놈은 야만적 행동을 하지 말고서 빨리들 물러가라고 호통하자, 김마리아는 항의하기를 일본은 소위 문명 국가라고 당신이 매일 말하면서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조선 사람들을 학살하니 당신도 만일 일본 애국자이라면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학살을 당하여야 된다고 하며 함성을 치며 대어들자 수다한 놈들이 달려들어 조선 여자들을 밖으로 밀어내었다.
그 이튿날 다시 헌병대로 가니 어제까지 있던 왜 헌병 대장 놈은 없고 다른 놈이 나타났는데 자기는 처음으로 왔으므로 이전에 진행된 사변들은 알지 못하노라고 하여, 이전 있던 헌병 놈은 어디로 가고 없어진 것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28]
일제군은 파괴와 학살을 벌인 뒤 연해주를 장악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주둔한 지역에서 모든 한인 민족주의 조직과 사회주의 조직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미리 짜둔 계획에 따라 친일 단체들을 세우고 직접 통제했다.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은 참모장인 우에하라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리고 일제군은 그 뒤 2년 반 동안 연해주 남부에 주둔했다. 일제군은 1922년 10월 25일이 되어서야 블라디보스톡을 떠났다.[29]
연해주에서의 학살이 끝난 이후 간도에서도 간도 참변이 발생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5. 참고 문헌
1차 사료
- 독립기념관 한국 운동 정보 시스템 (http://search.i815.or.kr/main.do)
-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http://db.history.go.kr/)
-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 엔.아. 부쩨닌 저, 엔.데. 부쩨닌 저, 알틴벡 쿠르만바예프 번역, 러시아 내전에서의 한인들의 참전, 역사 문화 연구 24, 2006년
- 반병률, 「4월 참변 당시 희생된 한인 애국 지사들 -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역사 문화 연구 제26집, 2007년
- 박환, 최재형 시베리아 한인 민족 운동의 대부, 역사 공간, 2008, 101쪽 ~ 128쪽
- 김영범(金榮範), 제26권 의열 투쟁 Ⅰ - 1920년대, 2009년 30쪽 ~ 32쪽
- 반병률,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4월 참변과 한인 학살」, 충남대학교 충청 문화 연구소, 『제노사이드와 한국근대』, 2009년
- 반병률 潘炳律, 제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 지역 항일 무장 투쟁, 2009년
-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 박환, 러시아 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 민속원, 2013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55176&cid=51289&categoryId=51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