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마사즈미

 



本多正純
1565~1637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자 혼다 마사노부의 장남. 아버지에 못지않은 지략을 지니고 있었으며 바쿠후에서 실질적으로 최고위급의 막신.
에이로쿠 8년(1565 년), 혼다 마사노부의 적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마사노부는 미카와 잇코 봉기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반역하고 그로 인해 미카와에서 쫓겨나 야마토의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의지하고 있었지만 마사즈미는 오쿠보 타다요 밑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호되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밑으로 복귀하자 함께 복귀해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지모에 능했기 때문에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고 중용되어 게이쵸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를 따라 본선에도 참가했다. 전후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이시다 미츠나리의 신병을 맡았다.
1605년, 이에야스가 단 2년만에 쇼군에서 사퇴하고 히데타다가 등극하자 그동안 신임하고 있던 마사노부를 바쿠후의 가신으로 히데타다에게 딸려준 대신 자신은 마사즈미를 가신으로 거느리게 됨으로써 이로 인해 마사즈미의 권세는 웬만한 다이묘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드높았다. 실제 이에야스는 마사즈미에 대한 신임이 대단해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여자를 마사즈미의 부인으로 주었는데 이 당시에는 이것이 가신에게는 신임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했다.
겐나(元和) 2년(1616년), 이에야스와 마사노부가 연달아 사망한 후에는, 에도로 전임해 제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측근이 되어, 토시요리(年寄, 후의 로우쥬)에까지 손꼽힌다. 그러나 선대부터의 숙로였던 일을 들어 권세를 자랑해, 이윽고 히데타다나 히데타다의 측근으로부터 원망을 받게 된다. 또, 이에야스와 마사노부가 죽은 후, 2만석을 가증받아 5만 3000석의 다이묘가 된다.
겐나 5년(1619년) 10월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개역 후, 죽은 이에야스의 유언이라고 하며 시모츠케 오야마번 5만 3000석에서 우츠노미야번 15만 5000석으로 가증을 받았다. 이것으로 인해, 주변으로부터 더욱 원망을 사게된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으로 역시 교활하고 병적으로 권력욕이 있다는 평을 받던 아버지 혼다 마사노부는 평생 2만석을 유지하고 더 이상의 영지를 얻는것을 일부러 마다했으며 일설에는 3만석 이상 받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까지 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주변의 시기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낮추는 작전이었건만 마사즈미는 욕심은 아버지 보다 컷지만 지모는 이에 미치지 못해 화를 부르고 만다. 끝없이 세력을 불려나가려고 하는 욕심쟁이를 꺼리고 경계하는 것은 동료 가신들 만이 아닌 주군도 이에 포함된다는 것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겐나 8년(1622) 8월, 데와(出羽) 야마가타(山形) 모가미(最上)씨의 가이에키의 집행을 맡은 마사즈미가 현지에 파견차 가던 도중, 철포를 비밀리에 주조했다든지, 우츠노미야성 혼마루의 이시가키(石垣)를 무단으로 수리했다든지, 히데타다 암살을 계획했다는 우츠노미야 천정사건(宇都宮城釣天井事件)[1] 등 11개조의 죄상을 히데타다로부터 문책 받아 영지가 몰수되었다. 다만 선대로부터의 공적이 고려되어 데와 유리군(由利郡)에 5만 5천석이 주어졌다. 마사즈미는 자신이 결백하다고 여겨 이를 거부했는데, 오히려 쇼군의 분노를 사게 되어 혼다 가는 가이에키 되었고 마사즈미 자신은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에게 신병이 맡겨져 데와의 요코테(横手)로 유배되었다. 후에 버리는 셈 치고 막부가 1천 석을 준다.
결국 칸레이 14년(1637) 3월 10일, 혼다 마사즈미는 유배지인 요코테에서 죽었다. 향년 73세.
같은 성씨를 가진 혼다 타다카츠는 먼 아저씨뻘 당숙이다. 타다카츠는 마사노부와 관계가 좋지않아 같은 가문으로 인정하진 않았지만.
일설에 따르면 마사즈미의 실각의 배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장녀 카메히메가 있다고도 한다. 마사즈미가 카메히메의 딸이 시집간 오오쿠보 가를 실각시킨데다 카메히메가 시집간 오쿠다이라 가까지 위협해 그녀의 원한을 샀고, 카메히메가 배후에서 여러 일을 조작해 마사즈미를 실각시켰다는 설이다.
[1] 욕실에 움직이는 천장을 설치해 히데타다를 압살하려고 공작했다는 의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