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히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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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에도 막부의 제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남. 또한 아버지 이에야스처럼 태정대신 관위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은퇴 후 오고쇼 시절인 1626년에 받은 관위이다.
2. 초년기
이에야스의 애첩 오아이노카타가 낳은 아들. 아명은 나가마츠마루로, 오아이노카타 소생으로는 첫째다.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측실 소생에다 셋째 아들이었기에 처음에는 "그런 놈은 잉여인간이다"란 취급을 받은 안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히데타다가 태어나던 해 큰 형 마츠다이라 노부야스는 타케다 가문과 내통했다는 죄를 받아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할복했다. 얼마 안 가 바로 위의 형인 히데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 때문에 하시바 성을 받았고, 훗날 유키(結城)가로 입양되어 유키 히데야스가 되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거의 이에야스의 실질적인 장남으로서 후계자 수업을 받았으나 이 때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탓에 거의 반인질 상태로 살았으며, 이름 히데타다의 히데(秀)도 히데요시에게서 한 글자를 받은 것이다.[2] 이에야스가 아사히히메와 정략 결혼을 한 후엔 아사히히메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서야 비로소 이에야스의 적장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595년 아자이 나가마사와 오이치의 딸인 오에요와 결혼했다.
3. 막부 성립기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가 죽고 이에야스가 두각을 나타내자 다소 몸이 자유로워졌지만 1600년,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와 천하를 둔 결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타다는 가문의 중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의 보좌를 받으며 3만 8천명의 군세를 이끌고 세키가하라로 진군하는 이에야스와 합류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데 길을 가던 도중 삽질을 한번 거하게 터뜨리고 마는데, 바로 진군 도중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었던 사나다 일족[3] 이 지키고 있는 우에다 성을 공격해버린 것. 우에다 성에는 불과 2천여 명의 병력이 있어서 전력차는 압도적으로 히데타다 군세가 우세했으나 마사유키의 지략과 격렬한 저항 때문에 공격은 크게 실패했고, 결국 이에야스가 결전을 치를 때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어찌나 아들에게 실망했는지 이에야스는 결국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아들의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4] 했다는 게 '''기존의 설'''이었다.
하지만 연구 결과 히데타다의 편지 등에서 보여지는 것은 히데타다가 아버지 이에야스로부터 받은 본래의 공격목표 명령은 시나노 제압, 즉 사나다 일족의 우에노 성을 공략하는 것뿐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다 갑자기 작전이 변경되어 카미카타로 합류하라는 명을 받고, 히데타다는 우에노 성 공격을 그만두고 서둘러 가야 했기 때문에, 세키가하라에 늦었다는 것이 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늦었다고 하지만, 아무도 세키가하라 전투가 그날 시작해서 한나절 만에 끝날 줄은 몰랐다.
사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의 동군이 약간 불리한 형세에 있었다.''' 포진도 미츠나리의 서군 진영이 우세했던 데다가 병력도 많았기에 이에야스로서는 히데타다의 합류를 기다렸던 것. 다만 서군의 경우는 동군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 명에게 지휘권이 집중된 것과는 달리 이시다 미츠나리, 모리 테루모토,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 지휘권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던 탓에 단결이 잘 안되었던 면도 있었고, 이를 이용한 이에야스의 모략이 먹혀들어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어쨌든 군사적으로 시원찮다는 것을 드러냈지만 이미 이에야스의 후계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1603년 에도 막부가 성립한 후 2년 뒤인 1605년, 아버지 이에야스에게 쇼군을 계승받았다. 쇼군직을 2년만에 물려준 이유는 이에야스가 늙어서 언제 급사할지 모르니[5] , 쇼군직을 세습함으로써 도쿠가와 집안이 쇼군가임을 만천하에 분명히 할 의도였다.
비록 세키가하라에서의 지각 때문에 실망을 많이 한 이에야스였지만 히데타다가 개인적으로는 무난한 성품이었고 '그래도 이놈이 수성(守成)은 잘하겠지.'라는 생각에서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1607년에는 선조에 의해 첫 조선 통신사가 찾아와 국교 재개를 알리기도 했다. 이후 통신사는 오사카 전투 조금 뒤인 1617년과 이에미츠가 쇼군에 오른 이듬해인 1624년에 또 일본을 방문했다.
1609년 시마즈 타다츠네가 류큐 왕국을 정복하고 잡아온 쇼네이 왕에게 알현받았다. 이는 타다츠네가 끌고온 것이다.
1612년에는 규슈의 번주 아리마 하루노부가 기독교인 막부 인사와 내통해 영지를 확장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1614년에는 천주교를 금지하는 금교령을 포교하고 선교사를 추방했다. 이는 훗날 시마바라의 난의 원인을 제공한다.
1615년에는 오사카 전투에서 승리해서, 토요토미 세력을 압살하고 도쿠가와 세력의 일본 지배를 확실시했다. 같은 해 일국일성령과 무가제법도 등으로 다이묘들을 견제하고, 쇼군의 권력을 강화했다.
4. 쇼군
비록 쇼군이 된 히데타다였지만 아버지 이에야스는 오고쇼(大御所)라는 직함을 만들었고 슨푸 성에 웅거하며 히데타다의 머리 위에서 또다른 실권을 행사했다. 과연 전국시대라는 난세를 헤쳐나온 '너구리'에 걸맞는 행동. 그랬기에 실질적인 권력은 치세 초기에는 가지지 못했다.[6] 그러나 재임 10년이 되어가는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1615년 경부터는 슬슬 히데타다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는 이에야스의 관료 집단이 히데타다 측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는데, 단적인 예로 오사카 성에 웅거한 도요토미 일족에 대한 공격 방침에 대한 대립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느긋하게 압박할 것을 주문했지만 히데타다는 속전속결을 주장했고, 결국 히데타다의 방침대로 전쟁은 빨리 진행[7] 되어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막부를 완전히 안정시켰고[8] 그 이듬해인 1616년에 이에야스가 죽자 진정한 막부의 실권자로 군림했다.
자신이 친정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막부와 쇼군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천황가문에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천황 가문과의 결속을 강화했고 본거지인 에도를 개발했으며 쇄국 정책을 펼쳐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으며 외국 선박의 기항 항구를 제한했다. 또한 히데타다 대에 많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도요토미 측에 있다가 막부의 신하가 된 다이묘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대표적인 희생타가 후쿠시마 마사노리. 숙청한 이들의 영지를 도쿠가와 일족에게 분배하여 권력을 강화, 도쿠가와가의 분가를 만들었다.[9]
영국인 가신 윌리엄 애덤스를 통해 영국과 교역했으며[10] 영국왕 제임스 1세에게 일본식 갑옷을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1623년 쇼군직을 아들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물려주고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오고쇼가 되어 이에미츠 위에서 실권을 휘둘렀다. 아버지가 슨푸 성에서 권력을 행사한 것처럼 본인은 옛날 호죠 가문의 영지였던 오다와라 성에 웅거하며 권력을 휘두를 생각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에도 성의 별채에서 기거하며 정무를 보았다.[11] 그렇게 살면서 막부의 안정에 진력하다가 1632년 정월에 사망했다. 향년 53세.
5. 평가와 인물됨
야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에야스나 역시 무용으로 이름이 높은 형 노부야스나 히데야스에 비하면 전국시대 스타일의 인물은 전혀 아니었고, 세키가하라나 오사카에서의 행보를 보면 군사적으로는 무능한 인물이었다.[12] 도쿠가와 막부측에서 편찬한 책에서도 히데타다의 무용을 낮게 평가하고 있을 정도. 그러나 이에야스에게서 정치적 수완은 잘 이어받아서 창업된 막부를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히데타다의 치세는 아들 이에미츠 대에서 막부의 전성기로 발전한다.[13] 쉽게 말하자면 전형적인 정치가형 인물. 어떻게 보면 도쿠가와가 '이놈이 수성은 잘 하겠지' 라는 생각이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무난한' 성품이었는데 다만 괄괄한 아내 오에요에게는 기를 펴지 못한 공처가였다고 전한다. 오에요의 어머니 즉 장모인 오이치도 성깔 있는 여인이었고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 정말 히데타다를 휘어잡고 다녔다고 한다. 이 때문에 히데타다가 아버지 이에야스처럼 호색 행위를 하지 못했고 한 때 후계구도에서 오에요가 차남 쿠니마츠를 미는 것에 별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미녀를 들여보냈는데 다음 날 이 두 미녀가 아무 일도 안 당하고 나왔다는 일화도 있는 것을 보면 사실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던 것 같다.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는데 시녀 오시즈와의 사이에서 아이즈 번의 초대 번주 호시나 마사유키가 태어났다. 하지만 오에요의 눈치가 보였는지 히데타다는 마사유키를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고, 마사유키는 어머니 오시즈와 함께 도피생활을 하다가 타케다 신겐의 딸이자 아나야마 노부타다의 정실인 켄쇼인(見性院)에게 맡겨진 뒤 옛 타케다 가 가신이었던 호시나 마사미츠의 양자가 된다. 히데타다는 오에요가 사망한 후에야 마사유키를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이복형 도쿠가와 이에미츠에 의해 발탁되어[14] 막부의 중신으로 능력을 발휘하였고 이후 가모(浦生)가가 아이즈에서 쫓겨난 이후 아이즈 번주가 되었다. 마사유키의 자식대에서 도쿠가와의 구성인 마츠다이라 성을 쓸 수 있었다.
히데타다의 등장 시기는 조선의 선조(1567~1608), 광해군(1608~1623)의 치세와 일치하며 은거 후에도 실권을 휘두른 시기까지 합치면 인조(1623~1649) 치세 초반과도 겹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원수충(源秀忠: 미나모토노 히데타다)'이라고 적혀 있으며 임진왜란으로 끊긴 국교가 회복된 것이 바로 히데타다 치세. 물론 이때 쇼군이었지만 실권은 이에야스에게 있었다.
6. 가족 관계
도쿠가와 히데타다/가족관계 참고. 딸이 천황의 중궁으로 들어가고 손녀가 천황으로 즉위하는 등 일본 천황 가문과 친인척이 되었다.
7. 창작물에서
이 시대를 다룬 시대극 등 다른 창작물에서 이에야스, 이에미츠와 함께 자주 만날 수 있다. 다만 창작물 내용마다 매우 다양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이 특징. 군사적으로는 무능했던 면이라거나, 워낙 일본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걸물인 이에야스의 후계자라는 점 때문인지 부친에 비해 우둔한 이미지나 심지어 악역으로 나올 경우 찌질한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막번 체제를 굳건히 한 '수성의 명군' 이미지를 강화해 제법 노회한 정치가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7.1. 시대극
NHK의 대하사극인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서는 약간 모자란 듯한 인물로 나온다. 그냥 개인의 능력은 평범한 수준이고 딱 잘난거 하나 없는 뚱뚱한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 맨날 이에야스에게 구박받고 살고, 가신과 다이묘들도 뒤에서는 수근거리는 타입. 다만 이에야스의 임종을 홀로 지킬 때 이에야스 앞에서 북을 치는 장면은 제법 짠한 장면이고, 조선통신사를 접견하거나 막부 체제를 위해 정무를 처리하는 등 막부의 수장으로 성장해가는 모습도 묘사되고 있다. 다만 엄연히 마지막화 전화까지도 등장하는 드라마의 또다른 주인공이고, 이 드라마 자체가 도쿠가와 삼대 인물의 성격을 특징적으로 잡고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완성된 인물인 아버지와 반대로 성장형 주인공. 배우는 니시다 토시유키로 이 드라마 전작인 또다른 NHK 사극 <8대 쇼군 요시무네>에서 도쿠가와 요시무네 역을 맡은 적이 있다. 해당 배우가 공명의 갈림길과 TV 도쿄 신춘시대극 <카게무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이에야스 역으로 출연하는데 두 드라마 공통적으로 히데타다에게 바보, 얼간이라고 하는 모습이 나온다. 훌륭한 배우개그(...)[15]
TV 도쿄 신춘시대극 <카게무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주인공 카게무샤 세라다 지로사부로를 괴롭히는 악역으로 나온다. 아버지가 죽은 것을 알고 카게무샤를 없애고 빨리 실권을 잡고싶어하나, 진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도쿠가와 세력은 다이묘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가신들의 말에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주인공을 괴롭힌다. 여기서도 아내 오고우에게 기를 못핀다는 말이 나온다. 이에야스 빙의한 카게무샤가 면전에서 대놓고 얼간이라고 말한다.
사나다마루에도 등장한다. 배우는 호시노 겐. 정치에 유능하나 군략 등에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여줘 이에야스에게 맨날 혼나기 바쁜 모습으로 나온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에야스도 지쳤는지 히데타다를 혼내는 대신에 혼다 마사노부에게 바톤을 넘기지만 그 혼다 마사노부마저도 한 숨 쉬게 만들 정도로 재능이 없다시피 하다. 사실 군략뿐 아니라 무예에도 약한 편인지라 이데우라가 암살하러 왔을때에는 노부유키 뒤에 숨어서 덜덜 떨기만 했고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오노 하루후사가 들이 닥쳤을 때에는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하지만 노부시게가 이에야스의 목을 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 막아선다.
7.2. 만화, 애니메이션
사무라이 디퍼 쿄우에도 '''주연급으로''' 등장한다. 적호(베니토라)의 정체가 바로 도쿠가와 히데타다. 실제로는 무예와는 동떨어진 스타일이었는데도 이렇게 각색된 것은 참 이례적. 그것도 보통 실력도 아니고 12신장 중 한명을 사살하고 오요성의 수장을 꺾을 만큼 대단한 실력자다.
하라 테츠오의 카게무샤 이에야스와 사콘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정말 악역. 아버지(실제로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한 카게무샤 세라다 지로사부로)와 대립하면서 권력을 노리는 권모술수형의 인물로 나타난다.
코야마 유우의 만화 '아즈미'(영화 '소녀검객 아즈미' 시리즈의 원작)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과 모멸감, 권력욕 때문에 야규 무네노리와 함께 온갖 음험한 공작을 꾸미는 그야말로 '''악의 축''' 수준.
7.3.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전통적으로 정치에 치우친 문관형 능력치로 나타나며 전투 쪽 능력치는 거의 좌절급. 아무래도 우에다 성에서의 패착이 크게 작용한 모양이다. 그나마 늦게 등장하는 편이라 게임을 오래 진행하거나 후반기 시나리오로 진행해야 볼 수 있다.
태합입지전 5에서도 문관형 능력치다. 마지막 시나리오인 태평의 장에서만 등장. 통솔이 63에 무력은 28로 절망적으로 낮지만, 나머지 능력치는 70~80대이고, 내정쪽 기능은 거의 3레벨이라 나쁘지 않은 편.
전국무쌍 시리즈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전국무쌍) 참조.
[1] 160cm는 위패의 키이고 157.6cm하고 혈액형 O형은 유골 조사의 키하고 혈액형인데 유골 조사인 157.6cm가 신빙성이 높다.[2] 히데타다의 히데(秀)는 히데요시(秀吉)에게서 받았고, 타다(忠)는 조부인 히로타다(廣忠 : 이에야스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다[3] 그 유명한 사나다 마사유키와 사나다 노부시게가 있었다.[4] 오지 않는 히데타다를 두고 “차라리 그녀석이 지금 내 옆에 있었더라면 내가 저런 꼴은 안 봐도 됐을 텐데.”이라고 했다고.[5] 쇼군에 즉위할 때 이에야스는 이미 60이 넘었고,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이었다.[6] 일부 매체에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하나, 사실 이에야스가 굳이 쇼군을 2년만 하고 오고쇼라는 직책을 만들어 앉은데는 이유가 있었다. 쇼군에 즉위할 당시 도쿠가와는 이미 60이 넘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고령이었고 따라서 언제 급사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이에야스가 아들을 후계자로 공언하지 않은 채 급사하면 아들이 쿠데타의 희생양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따라서 아들에게 미리 쇼군이라는 직위를 쥐어주면서 후계자를 공고히 해 아들의 안전을 챙겨주고, 도쿠가와 가문이 쇼군이라는 것을 명백히 한다는 큰그림을 그린 것이었다.[7] 그렇다고는 해도 오사카 성을 공격하기 오고쇼(이에야스)와 쇼군(히데타다) 중 어느 쪽이 선진을 맡는다는지의 논쟁이 있었는데, 히데타다가 완강히 주장하여 공격의 선진은 그가 맡았다. 그러나 막상 공격이 시작된 후 도요토미 진영의 강한 저항으로 결국 격전 중 이에야스가 선진을 맡게 되었다. 히데타다로써는 세키가하라의 명예회복을 꾀했던 것이지만 이루지 못한 셈.[8] 이 때의 연호인 '겐나(元和)'를 따서 일본에서는 이 이후로 메이지 유신 때까지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로 '원화언무(元和偃武)'라고 한다.[9] 이에야스 직계 혈통이 끊어진 후 분가 중 한 곳에서 쇼군이 나온다. 대표적인 인물이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10] 다만, 윌리엄 애덤스(영국)와 얀 요스텐(네덜란드)을 처음 등용한 것은 이에야스이다.(1600년)[11] 이때 본인이 한 것이 로쥬와 상의를 거쳐서 천황 권한 축소와 무가제법도 제정이다.[12] 그렇지만 나폴레옹도 존경했던 18세기 군사 영웅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도 28세에 치른 첫 전투에서 도망쳤다. 히데타다는 첫 전투에서 22세였고, 위에서 다뤘듯이 명령도 상황이 애매해서 애매하게 내려온 상태였으니 애매한 결과를 낼 수 밖에 없었다. 두번째이자 마지막 전투에서는 기껏 선진을 맡았으나 결국 이에야스가 직접 나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때는 이에야스도 본진이 찔려서 할복을 각오했다. 겪은 전투 두개에서 모두 낮은 성과를 냈으니 군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겠지만 상황적 요소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13] 도쿠가와 막부 초기 3대 쇼군에 대한 평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이에야스는 모두 스스로 결정했다.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에 미치지 못했지만 반은 스스로 결정했다. 이에미츠는 모두 중신에게 위임했다.'[14] 이에미츠는 친동생은 죽였지만 이복동생은 중용했다. 어머니가 첫째인 자신은 거리를 두고 둘째인 동생만 아끼며 쇼군 자리도 둘째에게 주자고 해서 위협을 느꼈기 때문. 반대로 이복동생은 눈치밥 먹으며 세력이 없어서 두려워할 것도 없고.[15]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마지막화 끝나기 직전에 쇼군자리 물려줄 때와 이에야스 임종때 나오는데, 다이묘들 모인 자리에서 2대 쇼군 취임을 이에야스가 알릴 때 히데타다가 버벅거리자 얼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