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미츠나리

 

'''오봉행'''
'''사법 담당'''
'''행정 담당'''
'''토목 담당'''
'''재정 담당'''
'''종교 담당'''
아사노 나가마사
'''이시다 미츠나리'''
마시타 나가모리
나츠카 마사이에
마에다 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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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두개골로 복원한 얼굴. 나가하마시 이시다쵸의 이시다 회관에 전시되어있다.
石田三成(いしだ みつなり)
(1560년 ~ 1600년 음력 10월 1일, 양력 11월 6일)
1. 개요
2. 문관 미츠나리
2.1. 오시 성 전투에서 드러난 무능한 군재
2.2. 문치파의 선봉에 서다
2.3. 임진왜란의 참혹한 실패
3. 이에야스에 저항을 시도하다
5. 최후
6. 총평
7. 자손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기 영지이자 후처 요도도노의 출신지인 오우미 지방하급무사 출신이다. 그 영리한 재능으로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의 최측근이 되었지만, 히데요시 사후 유력 다이묘간 내분이 발생하자 미츠나리는 반(反)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을 결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양 세력은 싸웠으나, 세력 열세와 같은 편의 배반이 겹쳐 패했고, 결국 히데요시 사후 2년 뒤인 41세의 나이에 사형을 당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연 에도 막부 시기에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언제나 평가절하 당하고 악역 취급. 최근에는 재평가의 움직임이 있다.
직책은 지부쇼유(治部小輔)로, 이시다 지부쇼유 미츠나리, 줄여서 이시다 지부라고도 한다. 그래서 간양록 같은 조선 측 사료에서는 '석전치부소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곤 한다. 아명은 사키치(佐吉).

2. 문관 미츠나리


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을 통일한 후에는 행정업무가 중시되었기 때문에 크게 중용되었다. 실제로 산술에 엄청난 재주가 있어, 임진왜란에 동원되는 물자를 며칠 만에 다 처리했다고 한다. 중앙의 행정업무에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영지를 잘 통치하여 백성들에게 크게 인심을 얻었다. 그 중에는 흉년이 일어난 해에는 연공(해마다 바치는 공물)을 면제해준 일도 있었다고.
당시 일본에서는 몇 안 되는 유학을 공부한 학자였으며, 명과의 강화 협정에 나서기도 하였다.
유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왠지 선비 같은 기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시 '무사란 자고로 주군께 받은 것은 남김없이 모두 써버려야 하는 법이다. 이를 남기고자 하면 도둑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를 너무 써버려 을 지게 되면 이 또한 어리석은 멍청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미츠나리는 자신의 봉록 대부분을 가신들에게 주고 자기 자신은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고. 특히 시마 사콘을 영입하기 위해 자신의 총 봉록의 절반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 밖에 가문(家紋)은 '大一大万大吉(대일대만대길)'을 사용했다. 그 의미는 ''''한 사람이 만인을 위하고, 그 만인이 한 사람을 위한다면 세상엔 복이 온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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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 미츠나리의 가몬[2]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첫 만남은 이렇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오미국(近江国)(지금의 시가현 나가하마시)의 이시다촌이라는 마을에서 하급 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자랐다. 무사 계급이라고는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아시가루. 이 시절은 이미 조총의 발달로 전쟁에서는 총알받이가 되기 일쑤였다. 봉록이라고 해도 얼마 안 돼서 전쟁이 있으면 약탈로 전리품이나 챙기는 신세였다.
사키치(이시다 미츠나리)는 집에서 가까운 관음사라는 절에서 학문을 배우고 있었다.(사찰은 교육기관을 겸하고 있었다). 교통의 요지였던 키타 오미는 상업이 발달한 곳이어서 주판등의 산술 교육은 이때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편, 하시바 히데요시는 1574년 주군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아자이 나가마사의 영지였던 오미 국을 물려받고,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축성을 허락받고 인생 처음으로 성주가 되었다.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성주까지 오른 하시바 히데요시에게는 가신이라고 부를 만한 인재들이 부족했다.
히데요시가 오미국의 영지가 되고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매사냥을 하던 히데요시가 사키치가 있던 관음사로 찾아와서 를 청했다. 이때 차 대접을 한 사람이 사키치였다. 처음에는 큰 잔에 먹기 좋게 미지근하고 연한 차를 내왔다. 차를 단숨에 마신 히데요시는 한 잔을 더 청했고, 이번에는 처음 잔보다 조금 뜨겁고 진한 차를 절반만 채워서 내왔다. 히데요시가 한 잔을 더 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제대로 뜨겁고 진한 차를 작은 잔에 가지고 왔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목이 마를 것이라 여겨 첫 잔은 한 번에 마시기 좋게 미지근하게 타온 것. 이를 대접받은 히데요시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영특하다고 여겨 감탄하고, 그날로 코쇼(시중을 드는 시동)으로 거둬들었다. 이때 그의 나이 15살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세 잔의 차'''라는 훈훈한 일화가 있지만....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의 세 잔의 차 이벤트 적어도 18살 때는 아버지와 형과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기록은 있다. 당시에도 이 일화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다만 '이시다는 그런 행동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인간이고, 히데요시는 그런 행동을 충분히 좋아할 만한 사람이다'라는 뒷이야기는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로 그는 '삼현차의 사나이'라고 불리지만, 실제 의미는 그가 뛰어난 행정능력에 비해서 군략이 없음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더 많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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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현 나가하마역 앞에 있는 미츠나리와 히데요시의 첫 만남을 묘사한 동상
그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로, 어느 날 히데요시가 미츠나리를 불러 그동안의 공적을 포상하며 500석을 가증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미츠나리는 500석 대신에 하천 기슭에서 자라는 갈대를 백성들이 맘대로 베는데 그 갈대를 벨 권리를 준다면 1만 석에 달하는 군역을 부담하겠다고 했다. 히데요시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이를 수락하였고, 곧 미츠나리는 그 갈대를 베는 것에 대한 세금을 걷어 막대한 부를 얻었다. 갈대는 지붕이나 발을 엮는 데 쓰이는 필수품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번 돈으로 미츠나리는 화려한 옷을 입고 몇 백 명의 무사를 끌고 히데요시를 찾아와 히데요시를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돈을 버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그렇게 번 돈을 사욕이 아닌 멸사봉공의 모습으로 보여준 미츠나리를 히데요시는 매우 맘에 들어하였다.

2.1. 오시 성 전투에서 드러난 무능한 군재


이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군재는 형편없었는데 호조가 공략에서 잘 드러난다.
호조가 공략 당시 미츠나리는 오시 성(忍城)공략을 맡았는데, 오시의 성주인 나리타 우지나가(成田氏長)는 오다와라 수비를 위해 성을 비웠기 때문에 아들 나리타 나가치카, 딸인 카이히메(甲斐姫)가 겨우 500여 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다.[3][4] 이시다 미츠나리는 2만여 대군으로 몇 차례 공격을 가하나 군관민이 일체단결한 오시 성의 저항에 패퇴하였다.[5] 그래서 생각한게 히데요시가 빗츄 다카마츠성(備中高松城)을 공략했을 때 쓴 수공. 그러나 정작 수공을 벌였는데 물이 역류해 이시다군을 덮쳤고, 물이 빠지고 난 뒤엔 전장이 진흙탕이 돼버려 오히려 공격이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미츠나리는 소환되었고 오시 성은 오다와라 성이 함락된 이후 항복하였다(...).[6]
오시 성 전투는 미츠나리가 총대장으로서 참가한 최초의 전투임에도 보기 좋게 실패하여 이후로 '미츠나리 = 전투에는 젬병'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오시성의 수공은 미츠나리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재 오시 성은 사라지고 없지만[7] 현재 지형과 당시 지도를 보아도 수공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지형이라고 한다. 오시성 주변 지형은 평지인 데다 주변에 자연제방으로 사용할 만한 구릉 등의 지형이 없으며 오시 성은 저습지로 둘러싸여 있고 이시다 미츠나리가 제방을 쌓은 장소에 비해 다소 고지대에 있는 등, 도저히 수공을 펼칠 만한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8] 게다가 결정적으로 당시 쌓은 제방의 총 길이는 무려 28km. 아무리 다죠다이진(太政大臣)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지휘권을 일임받았다지만 일개 봉행(奉行)이 독단으로 실행할 만한 규모의 작전이 아니다.
미츠나리는 10만 명의 인력을 모집해서(기록에 의하면 4~5일 만에) 이 제방을 만들어 버린다. 엄청 높은 일당을 주고 인력을 모집했는데, 소문을 듣고 먼 지방에서, 심지어는 오시 성 안에서 농성중이었던 백성들까지 이 돈에 혹해서 공사에 참여해서 도왔다고 한다.[9]
수공을 시작한 시기에 미츠나리와 히데요시가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보면 미츠나리는 수공에 반대했고, 히데요시가 거듭 수공을 명령하였다. 히데요시가 저항하는 세력한테 자신의 힘과 재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더군다나 군사적 역량보다 행정업무에 더 밝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공을 시도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2.2. 문치파의 선봉에 서다


조직을 우선시하고 타협이 없어서, 임진왜란에서는 부교로 전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살펴서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일종의 감시역을 맡았는데, 같은 동료인 무장들의 실수도 솔직하게 다 보고해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같은 시동 출신이면서도 야전 무사들이었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무리와는 사이가 나빠, 세키가하라 전투 때 이들은 모두 동군에 붙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특히 악연이었는데, "문관 주제에 군무까지 아는 척 하는 놈"이라고 깠다고.
이들과 사이가 나빴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오와리 시절부터의 가신들인 칠본창 등은 오랜 고참인 자기들을 제치고 오우미 출신인 미츠나리 등이 권력을 차지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또 근본적으로 문치파와 무단파로 생각 자체가 달랐는데, 임진왜란 시에도 전투보다는 화평 쪽에 무게를 둔 행동 등 많은 부분에 있어서 대립되는 관계였다.
조직을 중시하는 미츠나리는 임진왜란도 전쟁이 길어지면 토요토미 세력에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유리한 단계에서 강화조약을 맺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에 동의하지 않은 것이 무단파의 가토 기요마사. 미츠나리의 방침에 반발해서 현장은 혼란 상태가 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미츠나리는 일본으로 귀국해서 기요마사가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보고, 분노한 히데요시는 기요마사를 일본으로 불러들여 칩거시킨다. 기요마사는 훗날 미츠나리를 죽이려고 할 만큼 사이가 나빠졌다.
결국 히데요시의 핵심 가신들은 오와리 당과 오우미 당으로 나뉘게 되었다. 미츠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충성심이 큰 데다가 내정 능력까지 뛰어나서 오와리 당의 견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오우미 당의 영수가 되어 버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이 둘로 나뉘어 버린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파와 무단파들이 대립한 이유를 경제적측면에서 분석한 글이 있는데, 결론은 돈 때문이었다라는 것. 일본 통일을 달성한 히데요시는 중앙집권화를 시도했고, 행정관인 미츠나리를 시켜 대대적인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했다. 당시 다이묘들의 인생의 목표는 땅을 갖는 것이라고 할 만큼 자신의 고쿠다카(石高)는 중요한 것이다. 미츠나리가 실시한 토지 정책은 기존의 숨겨져 있던 고쿠다카를 까발기고(즉,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에게 세금 더 갖다바쳐야 했고), 자신들의 영지에 히데요시 몫의 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다이묘들의 불만을 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전국 통일로 이제는 전쟁 할 일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전투 수행 능력을 높이 샀던 무인(군인)들보다는 내정(행정)과 관리를 잘하는 문인들의 세력으로 힘의 밸런스가 기울고 있었다.
야마토 국의 낭인으로 전국에 이름 높던 시마 사콘을 자기 봉록의 반으로 군사로써 임관시킨 일로 유명하다. 물론, 미츠나리의 봉록 반 정도가 아니라 이시다 미츠나리 그 자체의 모든 것조차 사콘의 몸값으로는 어림도 없었지만 미츠나리의 열의에 감동하여 사관했다. 또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을 가지고 있어, 사와야마 성과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에 과분한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미츠나리는 물욕이 없어서, 미츠나리가 거주했던 사와야마 성을 함락시키고 들어가보니 전리품으로 취할 만한 금품과 보물이 하나도 없고, 내부치장도 소박하고 검소했다고 전해진다.

2.3. 임진왜란의 참혹한 실패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과 선발대로서 참전했는데 주로 전투 지원 위주의 임무를 맡다가 평양성을 빼앗긴 이후 (평양성 전투) 벽제관에 숨어 있다가 명나라 군대를 요격했다(벽제관 전투). 당시 명나라 군대는 패잔병을 뒤쫓느라 여념이 없어서 다른 곳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신경쓰지 않고 있다가 반격을 당했다. 명나라 군대를 요격한 이후에는 행주산성으로 향했고, 거기서 완전히 발리고 왔다. [10]
당시 이시다 미츠나리는 그냥 덮어놓고 덤볐는데, 이거 완전 바보짓이었다. 당시 조선측에서 권율지휘관행주산성은 한강을 뒤에 둬서 배수진의 상태인데, 문제는 입구가 좁아서 대군이 한 번에 다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이다(호리병 같은 지형이다). 그러나 상대를 얕본 나머지, 지형에 맞는 전술을 내지 않고 결국 일본군은 보병 돌격, 그것도 3열 횡대의 보병 돌격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 상대가 조직적 무장을 갖추지 못한 의병이라면 모르겠으나 엄연히 전장에 적응한 조선의 정규군. 권율에게는 아주 훌륭한 먹잇감이 된 셈[11].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휘하는 일본군들은 말 그대로 '총알받이'가 되었다. 권율은 오직 그 비좁은 입구에만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으니 굉장히 편하게 전투를 했지만, 일본군들은 횡대로 줄을 선 상황이라 이건 조선군의 화력이 집중돼서 앞으로도 못 나가고 뒤에 줄 선 아군 병력 때문에 뒤로 빠지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병력을 이런 식으로 굴리니 패배는 당연했다. 전국시대를 살아남은 경험은 어디에 팔아먹고(...)
이시다 미츠나리는 숫적 우세로 조선군의 화력이 바닥나기를 바랐으나 상대는 조총 외에는 냉병기밖에 없던 전국시대 일본과 달리 신기전, 비격진천뢰, 각종 총통 등 각종 기상천외한 무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일본군은 계속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다[12].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조선군 진지에 불을 지르기 위해 불화살로 대응해보기도 하지만 조선군 진지 바로 뒤가 한강이다. 조선군은 목책에 물을 뿌려 불화살 공격도 무력화시켰다.
경기수사 이빈의 지원 부대가 화살을 잔뜩 갖고 도착하여 조선군의 기세가 살아나고, 그 뒤를 이어 전라도에서 올라온 조운선 수십 척이 나타나 일본군 진지 뒤로 상륙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안 그래도 행주산성의 견고한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있던 일본군들은 결국 일제 퇴각을 감행했다[13]. 이 와중에 우키타 히데이에승자총통에 맞아 땅바닥을 뒹굴며 사경을 헤멜 정도가 되었는데 왜병들이 들쳐 업고 도망쳐서 간신히 살았다. 이시다 미츠나리나 킷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 역시 모두 승자총통을 맞고 부상을 당했다.[14]
결국 3만 명을 끌고 2,000명을 상대하면서 행주산성을 함락시키지도 못한 채 경이적인 피해를 입었다. 변명이 가능한 호죠 가 오시 성 공략과는 달리 이것은 빼도박도 못할 참패였다. 게다가 조선에 투입된 일본군의 전체 숫자가 처음에는 16만이었지만 다수의 병력이 손실되어 1593년에는 이미 절반 가량으로 줄어든 상태였음을 고려한다면 집안이 가이에키(개역, 改易)되고 이시다 미츠나리 본인이 참수형효수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실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행주대첩에 참여해 똑같은 패배를 당한 다른 무장들의 면면을 보면 군사적으로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들이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책임은 병력을 축차투입한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있다 할 수 있는데, 이 인물 역시 벽제관에서는 명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바 있다. 즉, 이시다 미츠나리가 무능했다기보다는 대다수 일본군 무장들이 전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판단해 단기전으로 승부하려 했으나, '조선군의 방어에 완전히 막혔다'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행주산성의 실패는 확실히 심각하긴 했고 그의 군재에 의문을 주기엔 충분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휘관으로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고, 정유재란이 되자 주로 외교행정 쪽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하여 임진왜란은 끝나게 되었다.

3. 이에야스에 저항을 시도하다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두되기 시작하자 미츠나리는 반 이에야스 세력을 규합, 이에야스를 제거하고자 한다.[15] 이 당시에는 이에야스와 동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생존해 있어서,[16] 무게추는 도요토미 파[17]인 미츠나리 쪽이 유리했으나, 토시이에가 1599년 3월에 사망하면서 반전된다.
이때를 틈 타 가토 기요마사 등이 모의하여 자신을 암살하려 하자 이를 감지하고 탈출, 그렇게나 증오하는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혼비백산한 미츠나리가 홀홀단신 이에야스의 집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메이지 시대 이후에 쓰인 자료에 의한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정치적으로 거세당할 것을 각오해야 할 정도의 파격적인 행동이기도 했다.[18]
이에야스로서는 눈엣가시인 미츠나리가 제발로 굴러들어온 셈이었으나, 당장 미츠나리를 제거하기보다는 더 큰 이익(토요토미 파의 분열과 자신의 인망 쌓기)을 위하여 미츠나리와 무단파 인물들과의 화해를 중재한 뒤, 이시다 미츠나리를 안전하게 사와야마 성까지 배웅하게 된다. 실제 그를 배웅한 인물은, 이에야스의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서 보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전에 사타케 요시노부의 도움을 받아서 후시미성으로 도망, 무단파 무장들과 대치하던 와중에 이에야스의 중재를 받았다고도 한다.
어찌되었건, 이에야스의 도움을 받아서 무단파와 화해 아닌 화해를 한 것은 사실이나, 그 대가로 무단파의 요구인 오봉행에서 물러나는 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결국 토시이에의 사망에 이어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토요토미 세력의 유력인물인 미츠나리도 힘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만들었고, 이에야스는 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 미츠나리는 나오에 카네츠구를 통하여 우에스기 카게카츠과 밀약, 우에스기가에서 군사를 이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치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모리 데루모토를 맹주로 앉히고 이에야스 세력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이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4. 세키가하라 전투


이시다 미츠나리는 은밀히 친교를 맺고 있던 나오에 카네츠구, 사타케 요시노부등과 내통하여 세키가하라의 결전을 구상하였다. 이는 카네츠구가 이에야스를 도발하여 동쪽으로 끌어내면 우에스기 집안[19][20]이 아이즈에서 동군을 맡아 수비하고, 그 틈에 미츠나리는 서쪽의 군세를 모아 이에야스를 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이시다 미츠나리가 군사에 대한 문외한이라는 점을 방증했을 뿐이다.
자세한 전술은 동군 방향으로 산 꼭대기에서 학익진을 펼쳐 공략한다는 점인데 문제는 학익진의 한쪽 날개가 바로 다름 아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였다는 점이다. 코바야카와는 그의 34만 석 영지를 미츠나리의 간언으로 히데요시가 1/3인 12만 석으로 줄여버렸다는 악연이 있는데, 결국 코바야카와는 서군에게 전투가 기울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에 히데아키가 동군 측으로 넘어갔다. 결국 세키가하라에서 그의 실패는 궁극적으로 용인술의 실패였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서군 측에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상태라서, 비록 그의 군대가 수가 많고(1만5천) 강력하기는 하지만 이 때문에 주력으로 사용하긴 무리가 많았다.[21] 결국 이 우려대로 히데아키는 전투 도중 동군으로 돌아섰다.
정작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대는 그 학익진에 갇힌 형태가 아니라 그 학익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상태이며 학익진 안에는 칠본창의 군대만 주둔해 있을 뿐이고 그 상태에서 학익진을 한 것 자체가 손자병법의 병세편(兵勢篇)에 위배되는 짓이고 그 학익진의 한쪽 날개를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로 쓴 건 손자병법의 군형편(軍形篇)과 완벽하게 정반대로 행동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일단 어쨌거나 진형 자체는 서군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 포진이 일단 제대로 돌아갔더라면 사실 동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당장 진짜 이에야스의 본대격인 히데타다의 4만여 군사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우에다 성을 공략하느라고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세부 내용을 모르고 포진도만 본 프로이센 군사고문 멧켈 소령도 즉각 서군이 이길 수밖에 없는 포진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그러나 이미 전투 전에 이에야스는 서군 측 다이묘 상당수를 포섭한 후였다.
군략이 모자라면 권모술수라도 부렸어야 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접촉한 것과 같은 정치공작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없었다. 서군 쪽 가문들에게도 동군 쪽 가문들에게도 자신의 명분을 들고 포섭하고 지휘력을 인정받았어야 했는데 전혀 그런 모습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었다. 결국 모리 가문 같은 아군까지도 '미츠나리가 우리를 이용해서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고 의심해서 도쿠가와파인 킷카와의 진언 때문에 전투를 방기한다. 결국 이것은 서군의 상당수가 서군을 배반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자연 이런 상황을 서군이라고 모를 리 없었고,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내놓은 비책은 인망은커녕 널리 원수를 지고 혐오를 받는 이시다 미츠나리 대신 명문가로서 명망이 높은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의 이름을 바지사장으로 사용하는 것. 그래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비록 이시다 미츠나리가 전적으로 서군의 거병을 주관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군의 총사령관은 명목상 이시다 미츠나리가 아니라 모리 데루모토였으며, 모리를 무시하고 사령관처럼 행동한 것을 이유로 모리는 싸움에서 이탈하기로 결심하고, 모리의 사령관으로 참전한 모리 히데모토는 '''병사들에게 도시락을 먹여야 해서 안 된다'''는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싸움을 방기한다.[22]
아니나 다를까, 이에야스는 카네츠구의 도전장을 받고 심히 분노했다고는 하나, 이시다의 움직임과 자중지란을 유도하는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쳐들어오자 다테 마사무네에게 우에스기 가게카츠를 막게 한 것 외에는 먼저 군사를 움직임이 없이 사태를 관망하는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학익진을 전개할 것을 미리 간파하고 자신의 본진을 뒤로 빼고 7본창의 부대를 들어가게 하여 서군이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도 만약 서군이 잘 결집되어 학익진을 잘 실행시켰다면 7본창 부대는 깨지고 이에야스도 거기에 휩쓸려 깨졌을 테지만 이에야스는 이미 정치공작을 해 놓은 상태라 마음놓고 학익진에 들어갔다.
군사회의에서 무시했다는 이유로 시마즈 요시히로가 삐진 데다[23][24] 쵸소카베 가문은 별로 싸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맹주 격인 모리 가문은 아예 가문 내 여론이 완전히 둘로 갈라진 상태인데다 총대장인 모리 테루모토는 그냥 오사카 성에 처박혔다... 그의 사촌이자 양자인 모리 히데모토가 대신 모리군을 이끌었는데 이 인간은 그 유명한 도시락 먹어야 해서 전투 못 하겠다고 드립친 인간이다. 덕분에 모리 히데모토와 함께 진을 친 안코쿠지 에케이, 다치바나 무네시게, 쵸소카베 모리치카군은 전투 내내 구경만 해야 했다.
동군에서 서로 선봉을 서겠다고 다투는 사이에 어영부영 전투가 개시되고,[25] 오전은 서군 측에서 선봉인 우키다 군이 매우 분전하였지만[26] 시마즈 군의 엄호를 받지 못해 결국 중과부적으로 퇴각했다.
서군 쪽에서는 시마 사콘이 기마 돌격을 하며 동군의 구로다 군을 마구 짓밟았는데, 시마 사콘이 저격을 당하는 바람에 일시후퇴했다. 동군 쪽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최측근이자 당시 일본 최고의 맹장인 혼다 타다카츠가 기마 돌격을 하며 서군의 우키타 히데이에 군을 마구 짓밟았는데 그만 혼다 타다카츠의 말이 머리에 총을 맞고 전사하여 혼다 타다카츠는 낙마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다시 말을 빌려 타고서 분전하였다.
미츠나리는 밀려드는 동군들에 맞서 방어전을 비교적 잘 수행했다. 이것도 미츠나리 본인의 기량이 아니라 가신들의 노력 덕택이었다. 시마 사콘의 저격으로 1진이 무너지고, 동군의 대부분이 미츠나리만 베면 끝난다고 생각해서(공훈도 노리고) 쇄도했던 시점에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다나카 요시마사는 역궤멸을 당했을 지경. 지휘를 하던 도쿠가와가 불안해서 전장의 앞쪽으로 나아가 시야를 막는 장수가 있으면 칼을 휘두를 정도로 초조해했다.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역공의 주력이 되어야 할 코바야카와나 모리가 배신하면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낮에는 고니시 군이 싸우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퇴각,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매우 분전하며 동군 군단들을 모두 끌어들였지만 결국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시작으로 그동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서군의 군소 무장들, 와키자카 야스하루,[27] 쿠치키 모토츠나 등이 차례차례 배신하는 통에 포위되어 전멸되었다. 그러나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군사적 식견이 대단했던 것은, 이 와중에도 단 몇백 명의 병력[28]만으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1만 5천 병력을 산으로 밀어붙였다는 점이다. 본격적으로 코바야카와 군이 내려오자 중과부적으로 전사.[29]
오후에는 이시다 군 직속 부대만 남아, 시마 사콘이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다가 전사(부상을 입고 살아남았다는 설도 있음), 가모 사토이에의 부대도 전멸했다. 여담으로 이때 미츠나리의 가신인 오바타 노부요가 포로로 잡혔는데,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미츠나리가 어디에 있는지 추궁했으나 주군을 배신할 수 없다며 대답을 거부한다. 그런 그의 충성에 탄복한 이에야스가 풀어주나 직후, 할복했다고 한다.

5. 최후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자 미츠나리는 재기하고자 거성인 사와야마 성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가는 도중에 옛 친구인 다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에게 붙잡혀 이에야스의 진영으로 끌려왔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의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츠나리의 비참한 모습을 로쿠조가와라[30]의 성문 앞에 세워두고 모두가 구경하게 했다고 한다. 동군의 제장들이 지나가며 모두 비웃고 욕을 하고 을 뱉거나 심지어는 육모방망이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지만 미츠나리는 끝까지 의연했다고 한다. 그 뒤 사형이 결정되어 처형되었다.
처형되기 직전에 목이 말라 간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으나 '물은 없지만, 홍시는 있다. 대신 이걸 먹어라.'라며 때마침 가을이라 잘 익은 홍시를 건네자 몸에 해롭다며 먹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진 간수가 '곧 죽을 놈이 몸을 아껴서 뭐하겠소?'라며 비웃자, 미츠나리는 '''"큰 뜻을 품은 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아끼는 법이다"'''[31]라고 한 뒤 처형되었다.[32]
1600년 10월 1일.(양력 11월 6일) 이때 공식적으로 처형된 다이묘는 3명. 다만 이후 영지 몰수 및 할복, 평민 강등 등으로 쫓겨나거나 살해가 거의 확실시되는 죽음을 맞은 다이묘는 굉장히 많으며, 대규모로 양산된 로닌들이 이후 오사카 성 전투에서 도요토미가의 편에 섰고, 여기서 살아남은 자들이 시마바라의 난을 비롯 이후 막부 기간 내내 벌어지는 민란에 가담하여 막부의 골칫거리가 된다.[33] 이시다 미츠나리는 모든 화의 근원이라 처형을 면치 못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 신자였는데 할복을 권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유를, 자살을 금하는 교리상의 이유로 끝내 거절하여 처형당했으며[34] 안코쿠지 에케이는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인데 '''모리 데루모토에게 경고하는 의미'''에서 본보기로 참수했다.[35][36]

6. 총평


''' 행정참모로써 뛰어났지만 군사 지도자로선 부족한 인물'''
강한 충성심과 행정 능력이 뛰어난 정치가로서 '''도요토미 가문 최후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좋고 싫음을 너무 노골적으로 내색하는 성격 탓에 적을 양산하였고, 결국 주가(主家)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상대방은 일부러 미츠나리의 취향을 맞추려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도리어 호통이나 면박을 듣기도 했으며[37] 이런 이시다 미츠나리의 성격 탓에 그 인망은 바닥 수준으로 떨어져서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자신이 직접 거병하질 못해 모리 테루모토에게 도움받아야만 했다.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미츠나리는 도요토미에 충성을 다 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농민 출신인 데다가 단기간에 많은 다이묘를 휘하에 두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장 중점에 두었어야 할 것은 각 다이묘들을 효율 있게 통제할 방편과 함께 가신들의 분열을 막고 통합을 꾀하는 한편, 도요토미家를 향한 확고한 충성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미츠나리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부분에서 실패하여 '''도요토미家가 멸망으로 향하는 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일례로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내인 가라샤를 인질로 잡아 가라샤를 자살하게 한 일이나 무단파인 시즈가타케의 칠본창과의 갈등,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난을 세키가하라 전투로 키운 일 등이다. 가라샤의 일로 유력한 다이묘였던 호소카와는 이를 갈며 동군에 참여했고 임진왜란 시기부터 이미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비롯해 유력한 다이묘들이 세키가하라 전투 때 죄다 동군에 붙은 점은 이시다 미츠나리 본인의 부덕과 인망 없음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아주 뼈아프다. 게다가 막상 시마즈 요시히로가 돕겠다고 나서도 병력이 1500명밖에 안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마즈 요시히로를 박대하고 사사건건 부딪혔고 히데요시 생전부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박대했는데도 히데아키가 서군 입장에서 미츠나리를 계속 따르리라고 판단한 것도 패착이었다.
‘좋고 싫음을 표가 나도록 확실히 하는 성격’은 적을 많이 만들고 말았지만, 반대로 미츠나리의 솔직한 성품에 끌린 인물도 많았으며 미츠나리는 자신의 편에 선 사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잘 대했기에 수하 가신들 대부분이 목숨을 바친 것도 특징이다. 최초의 영지 500석을 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영지를 주고서 영입한 와타나베 신노죠는 히데요시가 2만 석을 줄 테니 자신의 가신이 되라 하자 '10만 석을 주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던 정도의 인물이었고 후에 4만 석의 영주가 되었을 때는 절반인 2만 석을 주고서 시마 사콘을 자신의 가신으로 만들었다. 이때 히데요시는 '어떻게 사콘 정도나 되는 인물을 영입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주군과 가신의 봉록이 같은 예가 어디에 있는가'라며 놀랐는데도 나중에 따로 사콘을 불러 '미츠나리를 잘 부탁하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미츠나리 휘하로 참가하였던 무장들의 대다수가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가하였는데 오오타니 요시츠구, 사타케 요시노부, 사나다 마사유키 등등의 인물들은 인정과 우정 때문에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에 서려고 승리보다는 패배가 확실한데도 서군에 가담했고 전장에서 살아남고 이에야스에게 용서받은 남자들조차 도요토미家를 지켜야 한다는 미츠나리의 유지를 성실히 지켜 이후 오사카 성 전투에 가담했다가 전사하는 길을 택했다. 특히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등을 돌리지 않는 쪽으로 설득을 시도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의지가 워낙 단호하였기에 오오타니 요시츠구도 같이 서군에 가담한 것이다. 결국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일생의 친구로서 미츠나리를 이롭게 하려고 목숨을 바친 것과도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싫어한 자에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움받았고 좋아한 자에게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줄 정도로 사랑받았던 남자. 같은 서군 다이묘끼리의 자질 비교를 하더라도 이시다 미츠나리는 고니시 유키나가에 비해서도 한참이나 함량 미달이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적장인 송상현에게서조차 배울 것이 있다며 융숭하게 장례를 치뤄줬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있어서 한 번 적은 영원한 적일 뿐이였다. 하지만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로서는 색다른 성격에 색다르게 살아간 남자다. 실제로 오사카 성 전투에서 수많은 다이묘가 도요토미家를 지키려고 모든 걸 버렸을 만큼 도요토미家에 심정으로나마 충성하던 사람이 많고 미츠나리에 대해서도 좋게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츠나리가 적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오시 성 전투의 전후 사정을 다룬 분석이 진행되면서 오시 성 졸전의 책임이 미츠나리가 아닌 히데요시에게 있다는 점이 밝혀져 미츠나리가 재평가되었고 그 덕분에 '졸장'이라는 기존 평가가 어느 정도 불식되었다. 그렇지만 역시 군재는 없다는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문제는 일본 사람들이 전쟁사로서의 일본 전국시대를 인지하는 정도가 낮아서 일본 전국시대에서 보인 이시다 미츠나리의 낮은 지휘력을 잘 모른다는 것. 오시 성 전투 - 행주 대첩 - 세키가하라 전투 등 대규모 전투 3 번에서 미츠나리는 들인 노력에 비해 얻은 결과가 불만족스러운 전술을 고집하고 아군의 전력을 불리한 상황에 억지로 쏟아붓거나[38] 전력상 유리한 전투에서 엄청난 배신자와 이탈자를 내는 등 아군을 전혀 통솔하지 못했으며 이런 거듭된 졸전에서 볼 때 미츠나리의 將才는 명백하게 평균 이하로 볼 수 있다. 다만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세가 매우 높아 서군에서는 다이묘들이 갈팡질팡한 게 있어서 지휘하기 많이 어려웠다. 실제로 고쿠다카 최강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으니 전국 다이묘 중 병력을 가장 많이 동원하는 다이묘였다. 어찌어찌해서 쪽수만 간신히 맞춘 것만으로도 이시다 미츠나리로서는 대성공인 셈이다.
물론 행주산성에서의 참패엔 미츠나리의 지휘에도 문제가 있었으니만큼 군재가 뛰어나다고 보긴 어렵지만 임진왜란을 다룬다는 웬만한 일본 사극에도 나오지 않는 흑역사라 그런지 최근의 재평가 과정에선 은근슬쩍 빠져 있긴 하다.

7. 자손


슬하에 3남 3녀가 있었다고 한다.
장남인 이시다 시게이에(石田重家)는 세키가하라 전쟁 때 원래 오오타니 군에 지원하려 했으나 도요토미 측에서 이시다한테 인질을 요구해 전쟁 동안 오사카 성에 유처되었다. 세키가하라가 끝난 후 그후 이에야스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쿄토 쥬쇼인이라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절에서 불교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 중 제자인 소신니(祖心尼, 본명은 오나)에게 조카인 오카 키치에몬(岡吉右衛門)을 사위로 소개해줬다. 104세까지 살았고 이때 일본은 도쿠가와 츠나요시 치세시절이있다.
차남인 이시다 시게나리(石田重成)는 어린 시절 히데요리의 시동으로 일했다. 세키가하라가에서 서군이 패했을때 츠가루 다메노부(津軽信建)가 보호해 주었다. 다메노부는 원래 난부 가의 신하였다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는데 이 반란으로 아버지 이시카와 다카노부를 잃은 난부 노부나오는 다메노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이 와중에 오다와라 합전이 일어나게 되고 히데요시는 동북쪽 다이묘들에게 참전하라고 명령, 다메노부와 노부나오 두사람은 모두 참전하였다. 이 때 노부나오가 다메노부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토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츠나리가 중재하여 다메노부는 다이묘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일로 미츠나리에게 큰 은혜를 입은 다메노부는 세키가하라 합전 때 서군에 속했던 아들 노부다케에게 미츠나리의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미츠나리 일족은 히로사키 번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시게나리는 스기야마 하치베에(杉山八兵衛)로 개명하였고 여동생 다츠히메가 다메노부의 며느리가 되어 그연으로 히로사키번의 중신이 된다. 현재 스기야마 당주는 15대로 현재까지 이어져있다. 그의 후손 중 한명인 시라카와 토루(白川亨)는 미츠나리에 대해 주로 연구한 역사학자로 미츠나리와 코다이인은 사이가 좋았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3남인 이시다 사치키 또는 하치로는 세키가하라 합전 중 그를 보호해준 가신이 서군의 배신으로 죽고, 이에야스가 목숨을 살려줬다. 맏형처럼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장녀와 차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장녀는 이사다 가신인 야마다 하야토노소(山田隼人正)에게 시집갔다. 야마다 하야토노소의 고모는 이에야스의 측실 차아노 츠보네(茶阿局)로 세키가하라 후 야마다 하야토노소가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忠輝)의 가신으로 사관하고, 여동생 다츠히메의 도움으로 에도에서 여생을 보냈다.
차녀는 가모 가신인 오카 시게마사(岡重政)에게 시집갔다. 시게마사가 이에야스의 3녀 후리히메(振姬)와의 갈등으로 할북 처분을 받은 뒤 차녀는 오카 가를 떠나고 오바마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둘의 유일한 자식인 오카 키치에몬(岡吉右衛門)은 가모 가신인 마치노 유키카스(町野幸和)가 보호해주고 그와 소신니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키치에몬의 딸 오후리노 가타(お振の方, 미츠나리에게는 증손녀)는 카스가노 츠보네의 조카[39]이기도 해서, 이 연줄로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측실이 됐다. 불행이도 오후리는 이에미츠의 첫째아이 치요히메(千代姫)를 낳은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40] 그 뒤 치요히메는 고산케 오와리 번 2대 당주 도쿠가와 미츠토모(徳川光友)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미츠나리한테는 아니지만) 이에미츠의 혈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건 치요히메 뿐이며 천황에도 이어져 있다.
3녀 이시다 다츠히메(辰姫)는 네네의 양녀가 되고 후에 다메노부의 아들이자 2대 번주였던 츠가루 노부히라(津軽信牧)에게 시집가서 훗날 3대 번주가 되는 맏아들 츠가루 노부요시(津軽信義)를 낳았다. 정실이였지만 노부히라가 이에야스의 양녀를 정실로 들어 밀려나 33세 나이로 사망했다. 단 츠가루의 가독은 다츠히메의 아들인 노부요시가 물려받는다.

8. 창작물에서


시바 료타로가 상당히 좋아하는 듯한 인물. 그의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주인공이다. '시크한 성격, 불의와 부정을 못참는 결벽한 미츠나리'는 거의 그가 만들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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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이시다 미츠나리의 출신지인 시가현에서 제작한 관광 PR 영상. 쌍팔년도식의 쌈마이 연출이 압권으로 이시다 미츠나리의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샴푸 광고부터 이미지 개성 광고, 보험 광고 패러디, 놀이공원 광고 패러디, 말장난, 후크송(2번 연속), 날씨 광고까지....
트위터 봇까지 존재한다. 2017년 만우절에는 전국무쌍 가상 역사 스토리 스크린샷을 들고 와 '''토쿠가와가는 멸망하고 미츠나리의 염원이 이루어졌습니다'''라는 개드립을 쳤다.
그외 창작물은 이시다 미츠나리/기타 창작물 참고.

[1] 삼총사의 총사대가 칼을 모으고 외치는 구호 "Tous pour un, un pour tous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와 비슷한 의미다. 공교롭게도 북한의 주체사상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One for all, All for one (인민 대중 = 수령)"[2] 최하단의 吉자와 万자의 위치가 서로 바뀌기도 한다.[3] 원래 오시성이 거느리고 있는 병력의 수는 1000명이었으나, 오다와라 성 공방전에 성주 우지나가가 주군과 가신의 약조에 따라 절반인 500명을 데리고 출정했기 때문에 오시성을 수비하던 병력은 500명이 전부였다.[4] 일설에는 가신, 농민 포함 3천여 명이 있었다고 추정함.[5] 미츠나리의 무능도 한몫 했지만, 오시 성은 다른 성들과는 달리 큰 호수&늪 지대 위에 마치 ‘떠있는 듯이’ 성이 세워져 있어 공세자 입장에선 오사카 전투처럼 호수를 다 메우지 않는 이상 공격로가 각 성문으로 이어지는 몇 개의 둑길 외엔 전무 하다시피해, 작은 촌성임에도 의외로 철벽같은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유명한 '''우에스기 겐신'''도 1574년에 오시 성을 포위했지만 조그만 성인데도 손가락만 빨다 철퇴했다고 한다. 군재가 형편없던 이시다 미츠나리에겐...[6] 이 오시 성 전투는 '노보우의 성'이란 제목으로 소설화되었으며, 2012년 11월 일본에서 영화로 개봉되었고(2011년에 촬영이 완료되었고 당해 9월에 개봉 예정이었으나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장면을 수정했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야망 PS판에 군웅패권 모드로도 존재한다.[7] 메이지 시대에 폐성(廢城)되어 현재는 혼마루와 정문 등만 남았고, 혼마루에는 향토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8] 외부링크에 있는 당시 평면도와 향토박물관의 복원모형만 보아도 육상전을 시도할 게 아니라 수상전을 시도해야 할 것으로 보일 정도다. 오죽하면 당시 오시 성은 '(물 위에) 떠 있는 성(浮き城)'이라고 불렸다고 한다.[9] 10만명 X 5일 X 10만원 으로 계산하면 '''500억 원'''이다. 이중 1/10 만 사용했다고 해도 50억원에 이르는 거금이다.[10] 공교롭게도 원균도 자침하거나 잃은 배 수가 170~200척인데 비해, 전과는 겨우 18척 격침 정도다. 즉 자신이 10척을 잃을 때 왜군의 1척을 부순 것이다.[11] 거기다 정규군답게 여러 화약무기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돌격시켰다는 점에서 미츠나리의 군사적인 능력이 의심되는 정황이다.[12] 거기다 일본수군을 많이 격침시킨 이순신이 손수 천자총통을 권율에게 써보라고 선물해주었고 대변으로 염초를 만들 수 있다는 조언을 해준 것 덕분에 조선육군도 상당히 강화되었다.[13] 또 다른 말로는 일본군이 이 조운선을 이순신 휘하의 조선수군인 줄 착각했고 자신들의 후방에 내릴려고 하자 지원병인 줄 알고 겁먹었다고 한다.[14] 킷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가 여기에서 전사했다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향방이 달라졌다고 한다. [15] 반대로 이에야스 또한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쁜 무단파 인물들을 규합한다.[16] 히데요시 정권하에서 이에야스의 무게는 압도적으로, 고쿠다카 255만 석으로 휘하 다이묘들 뿐만 아니라 고쿠다카 222만석을 보유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보다도 영지가 넓었고 2, 3위인 고쿠다카 120.5만 석의 모리와 고쿠다카 120만 석의 우에스기를 합친 것보다도 컸다! 더군다나 군사력으로 따지면 더 심한 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사력이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다이묘들을 합친 것과 대등'''했으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된 이유라는 게 전투에서 패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완전히 쳐발라버리고 있는 상황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어리석은 아들인 오다 노부카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신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쪽으로 붙었기 때문이였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통성을 잃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타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지 싸움에서 패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에다가 도요토미 직계 영주들 쪽과 관계가 깊어 영향력 측면에서 이에야스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17] 정확히 말하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인 요도기미 파.[18] 일본의 역사학자 카사야 카즈히코는 2000년에 '도요토미 일곱장수의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사건 - 역사인식 형성의 메카니즘과 그 함정'이란 칼럼에서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도망간 것은 근거없는 속설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칼럼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저택이 아니라 후시미 성으로 도망쳐 농성했으나 이후 이에야스의 중개로 인해 부교 자리에서 물러나 은거와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19]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우에스기가는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원래 영지인 에치고에서 아이즈 120만 석의 영주로 영지 이전한 상황.[20] 물론 세키가하라 전투 때문에 후에 우에스기가는 또다시 요네자와로 영지 이전했는데 고쿠다카는 30만 석으로 아주 왕창 깎여버렸다.[21] 사실 이는 애매했던 히데아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전투에서 약간 떨어진 반대편 날개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이기는 편을 들고 싶었던 것.[22] 여기서 '재상(히데모토의 관위를 중국식으로 표기하면 재상이 된다)님의 빈 도시락'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긴다. 어이없는 핑계를 일컫는 말.[23] 단, 시마즈 요시히로는 본래 동군에 가담하려 상경한 상황이라 전투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결국 이런 이유도 서군의 조직력이 엉망인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가 됐다.[24] 시마즈 요시히로가 주장한 야습을 시마 사콘이 우리 병력이 더 크다며 반대했는데 사실 이건 시마즈가 잘못된 아이디어를 낸 게 맞다. 하지만 이시다는 시마즈에게 면박을 줬다고 전해지니, 완전한 자폭.[25] 본래 선봉은 후쿠시마 마사노리였으나 이이 나오마사가 멋대로 돌격하며 전투가 시작된다.[26] 미츠나리의 대포 5문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27] 사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원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으로 참전하려고 했었다.자세한 건 항목 참고[28] 600명으로 추정된다(!!)[29] 정확히는 휘하 부하에게 목을 베어달라고 했다.[30] 이 장소는 현재의 쿄토 외곽인데 일본 전국에서 참수집행 장소로서 매우 유명했다.[31] 해석이 분분한 말이지만 큰 뜻을 품었으면 최후에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된다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32] 일본어 위키: 三成が処刑直前に喉が乾いたので警護の者に水を所望した際、「水は無いが、柿がある。代わりにそれを食せ」と言われたのに対し、三成は「柿は痰の毒であるのでいらない」と答えた。これを聞いた警護の者は「もうすぐに首を切られる者が、今から毒断ちをして何になる」と笑ったが、三成は「大志を持つ者は、最期の瞬間まで命を惜しむものだ」と言い、泰然としていたという[33] 원래 일본의 전국 시대의 암묵적 규칙에 의하면 명목상이든 실질적이든 간에 패배한 세력의 총사령관은 할복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즉 모리 데루모토도 참수당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 데루모토에게 비록 영지를 거의 몰수에 가까운 대폭 삭감을 단행하였으나 목숨은 살려줬고, 시마즈 요시히로의 경우도 처음부터 적극 가담하지 않은 점, 그리고 가문을 이끌고 나선 게 아니라 직속 병력만 데리고 참전한 점 등을 고려해 일선에서 물러나는 정도로 처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만은 도쿠가와 입장에서 죄질이 영 좋지 않아 참수된 것이다. 이외에도 정말 파격적인 것은 소 요시토시. '''패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형벌도 안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대신 소 요시토시는 1607년까지 7년 동안 조선을 상대로 임진왜란을 용서해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34] 할복과 사형(참수)에는 사후 엄청난 대접의 차이가 있다. 고니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천주교에서 자살은 금기 사항이며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스스로 죽지 않고 법의 형벌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참수당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후 천주교 탄압 과정에서 신자들 대부분이 순교했는데 이들 가운데 자결을 택한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았고 대부분 사형을 받아들였다.[35] 안코쿠지 에케이를 참수한 그 행동 자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모리 데루모토에게 다음에는 당신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는 경고였다.[36] 시마즈와 모리의 전후 외교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을 뿐더러, 결과적으로야 시마즈가 위협적인 활약을 했지만 시마즈는 겨우 1600명, 모리는 2만 명을 넘는 대군을 파견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시마즈가 서군에 붙은 것도, 원래 동군에 참가하려다 지각해서이다.[37] 예컨대 어떤 사람이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미인을 대접했다가 호통을 들은 일화나 이시다 미츠나리가 목이 마르다고 호소하는 것을 홍시를 건네며 목을 조금 축이라고 한 옥졸의 배려에 거절한 점 등.[38] 오시 성에서는(히데요시의 지시였다는 변호는 가능하지만) 아무리 봐도 수공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에서 엄청난 노동력을 들여 억지로 수공을 감행해 아군에 피해를 냈고 행주산성에서는 전술상으로 최악의 선택인 단순 축차투입을 감행해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다.[39] 카스가노 츠보네와 소신니는 5촌이다.[40] 출산 후 몸이 안좋아졌다고 하는데 출산했을 당시 나이가 최소 13세(현대 일본으로 12세)였을 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