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마사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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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가몬, 후쿠시마 택사(福島沢瀉, 후쿠시마 오모다카)
福島正則 (ふくしま まさのり)
1561년 ~ 1624년 8월 26일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필두'''.[1]
1. 소개
일본 전국시대 무장. 오와리(지금의 아이치현 서부)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이치마츠(市松)였다.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모로, 어릴 적부터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히데요시의 저택에 살면서 무술을 익히면서 무사 수업을 했다고 한다. 창을 잘 다루었고, 용맹함으로 이름을 날렸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공을 세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공을 세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제 5진의 지휘관을 맡아 충청도와 경상북도 일대를 공격하였으며, 그 공으로 오와리국의 영주가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에서 의병장 권응수와의 영천성 전투에서 패해 권응수의 의병 부대들에게 영천성을 빼앗기기도 했었고, 조선군, 명나라군과의 대규모 전투에 참전한 전적이 별로 없어 가토 기요마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하였던 다른 칠본창 계열 일본군 장수들과 달리 한국 대중들에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그리 유명하지 않다. 이 때문인지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도도 다카토라, 소 요시토시등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던 다른 일본군 적장들은 국내의 임진왜란 사극 드라마/영화 작품들에서도 자주 나오는데 이 사람은 잘 나오지 않는다. 물론 2015년 징비록이나 2016년 임진왜란 1592처럼 그간 출연한 적이 없었던 우키타 히데이에나 가메이 고레노리,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조연이나 단역으로나마 출연하였던 것처럼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국내 임란 사극에서 출연할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은 뒤 벌어진 토요토미 가의 가신들 사이의 대립은 깊어졌고, 무단파였던 마사노리는 절친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1599년 3월 관료파의 리더 이시다 미츠나리의 저택을 습격하기도 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 때까지만 해도 야심을 감추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야 말로 어린 주군 토요토미 히데요리님을 지켜줄 것이라고 잘못 판단해서 동군 편에 섰다.[2] 결과 동군의 승리에 기여한 전공으로 히로시마의 49만 석의 영주로 영전하기는 했다.
영주로 있는 동안에는 히로시마 성을 증축하고, 상업을 번창하게하고, 히데요리가 있던 오사카와 히로시마를 잇는 길을 재정비해서, 결과 토요토미 가의 재정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어린 토요토미 히데요리를 받드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충신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야심을 드러내고, 1603년 정이대장군(쇼군)이 되었어도, 히데요시의 중신들에게 주군은 히데요리였다. 16살이 된 히데요리가 중병으로 쓰러졌을 때는 눈치보지 않고 병문안을 하러 달려갔다.
1611년 3월 28일 니조 성에서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첫 대면식에서는, 옆에서 보디가드 역을 한 가토 기요마사를 지원하기 위해, 1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오사카 성에서 대기, 무슨 일이 생기면 이에야스를 처단하려고 했다.
이런 행동들은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렸고, 오사카 전투 후에는 토요토미 가의 충신들은 몰락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1614년~ 1615년 오사카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모반을 일으킬거라는 견제를 받아서, 에도 성에서 칩거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마사노리가 할 수 있던 일이라고는 오사카 성내에 비축해뒀던 자신의 영지 소유의 쌀 8만석을 가져다 쓰는 것을 묵인했던 정도다. 한국에서는 쌀을 보냈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그 즉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추궁을 당하고 본인 목 날아가고 집안 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사노리 대신 아들이 착출되어서 오사카 전투에서 이에야스 편에 서서 참전해야 했다.
1619년 태풍으로 인해 히로시마성의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다. 당시 무가제법도에 의하면 이는 에도에 보고를 한 이후 허가가 떨어져야 성의 보수가 가능했으나 마사노리는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보수에 착수했다. 이미 이전에 1국1성령을 어긴 전적이 있었던 마사노리였기에 마찰을 피하지 못했고 직후의 에도로 볼모를 보내는 것을 거부한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히로시마번을 몰수당하게 된다.[3][4]
이후 마사노리는 시나노 가와나카섬[5] 의 소영주(4만 5천석)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막부는 시신 화장을 명분삼아, 실제로는 재기를 막기 위해 기존 영지를 몰수했다. 다만 개역은 하지 않고, 그 아들인 후쿠시마 마사토시를 중앙으로 불러들여 3,000석의 영지를 갖는 하타모토로 삼았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에도 막부 시대 고위 무사의 지위를 메이지 대까지 유지하였다.
그의 출세 및 몰락을 정리해 보자면-
1582년 야마자키 전투 - 500석
1583년 시즈가타케 싸움 - 5,000석(다른 칠본창 멤버는 각 3,000석)
1587년 히데요시 큐슈정벌 - 이요(伊予)11만석 다이묘
1595년 임진왜란 - 오와리 24만석 다이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 아키 및 빙고 49만 8,200석 다이묘(이후 51만 5,800석까지 증가)
1619년 히로시마성 무단수리 - 시나노 4만5천석 감봉
1620년 아들 타다카츠 사망, 2만5천석 막부에 헌납(2만석)
1624년 사망, 막부의 허락없이 시신을 화장한 죄로 나머지 2만석 몰수
아들 마사토시, 3,000석짜리 하타모토로 '''몰락'''[6]
내정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던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100% 무장.
하지만 다이묘 재직 직후 모든 영지를 측량하고, 현재 명품으로 꼽히는 히로시마의 빙고 돗자리 생산을 독려했다고 하니 내정에 완전히 젬병은 아니었던 듯 하다.
2. 그 외
성격은 인정이 많고 감정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할복하는 장소에 검시관으로 파견된 그는 히데츠구의 불우한 운명을 슬퍼하며 울기도 했고, 오오만도코로[7] 가 병에 걸렸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간호했다. 이후 오와리 키요스 성에서 24만석을 받게 되었을 때는 어릴 적 자신을 귀여워해준 비구니를 찾아가 먹을 것을 자주 가져다 주었으며 나중에 히로시마로 옮기게 되면서는 후임자로서 부임하는 오와리의 영주인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넷째 아들)의 가로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그 비구니를 돌봐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히로시마에 있을 때는 자신에게 잘못한 어느 측근을 굶겨죽이겠다며 성 구석에 가두고 식음을 전폐시키도록 명령했다. 며칠 후 마사노리가 그 측근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가보니 가두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사노리는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는지 찾아내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자 다도에서 시중을 드는 승려가, 자기가 먹을 것을 주었다며 자백하면서 그 측근이 예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어 은혜를 갚기 위해 그 측근이 거부하는데도 억지로 먹을 것을 주었으며, 자신이 그 벌을 대신 받겠다고 말했다. 이를 들은 마사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그 승려는 물론 가두었던 측근까지 용서했다고 한다.
게다가 평소에도 이렇게 난폭하게 행동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주폭이기도 했기 때문에 술에 취해서 큰 실수를 저지른 일화도 많다. 술김에 가신한테 할복하라고 했는데 진짜로 할복해버려서 다음 날 술이 깨자 누가 이런 짓을 했냐고 화를 냈고, 도노가 지시했다고 하자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구로다 가문과 다툰 후 구로다 측의 사자인 모리 타헤에가 와서 화해를 하게 되었는데, 화해하기로 한 날에도 술에 취해서 화해하러 온 모리 타헤에에게 술내기를 제안하며 시비를 걸었다가 술내기에 지는 바람에 가보, 아니 '''국보'''인 전설적 명창 니혼고를 빼앗기고 말았다.[8] 이 일화는 민요 구로다부시로 전해 내려온다.
공처가였다고 한다 ...라지만, 측실이었던 아내(쇼센인)은 남편이 바람피는 것을 알고 후쿠시마가 술에 취해 밤 늦게 집 대문 앞으로 왔을 때, 기다렸다가 나기나타를 휘두르자 급히 도망치고는 '내가 전장에서도 도망친 적이 없는데 마누라 앞에서는 도망치지 않을 수가 없더라'는 말을 남기게 됐다는걸 볼 때 공처가니 아니니 이전의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의 아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배다른 형 마츠다이라 야스모토의 딸 만텐히메와 결혼했다. 이후 후쿠시마가가 하타모토로 몰락하자 마사유키의 아들 다이도지 나오히데가 후쿠시마가를 재흥시키려 했으나 어머니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
그를 상징하는 물건은 바로 그가 애용했던 물소뿔투구. 본래 구로다 나가마사의 투구였으나 상술한 분쟁 후 화해사건 때 서로 화해의 증표로 교환했다고. 이때 마사노리가 나가마사에게 준 투구는 이치노타니 절벽을 형상화한 투구로 나가마사 항목에서 그가 쓰고 있는 그 크고 아름다운 투구다.
맹장처럼 묘사되지만 의외의 날카로운 정치적 혜안을 보여주기도 한 동료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정치적인 안목도 그다지 없는 순수한 맹장형이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쓸 성 공사를 명령받자 자존심이 상해서 공사장에서 '이런 사적인 일에까지 동원되다니 자존심이 상한다'라면서 대놓고 투덜댔는데, 그걸 보던 가토가 '불만이면 영지로 돌아가 전쟁준비를 해라'라고 냉정하게 잘라 버렸다고. 후쿠시마의 단순무지함[9] 과 가토의 냉철한 안목이 돋보이는 일화.[10]
3. 참고 자료
- 그 때 역사가 움직였다 その時歴史が動いた 「戦国の風雲児 法の世に散る 福島正則 広島改易事件」
4. 대중 매체에서
기본적으로 가토 기요마사와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으며,[11] 가토에 비해 좀 더 와일드하거나 무식해 보이는 이미지가 강하다. 시바타 카츠이에와 더불어 창작물에서 여성화가 좀처럼 되지 않는 유이한 센고쿠시대 장수이기도 하다. 하긴 둘다 너무 마초남 이미지가 강해서 그럴수도 있겠다.
4.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전형적인 맹장. 가토 기요마사에 비해서 약간 낮은 평가를 받는다. 거기에 도요토미 가는 족경가문인데 이 인간은 기마 특기를 가지고 있어서 미묘하다. 삼국지12에서 나왔는데 전법은 전공격강화이지만 전법이 지력에 영향을 받고있고 본인의 지력이 '''33'''이라서 조루포스가 있다.
창조에서는 가토와 더불어 히데요시의 무력 담당이 된다. 전법은 장시간 이동속도와 공격을 올려주는 '칠본창'. 가토가 칠본창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호랑이 사냥'이라는 좋은 고유 전법을 얻음에 비해 후쿠시마 본인은 칠본창 멤버들 공용의 전법을 쓴다. 그만큼 게임 내에서 위상도 가토가 높은 격이 아닌가 한다. 독립 세력으로 나오는건 세키가하라 시나리오 뿐. 그 외에서는 오로지 히데요시의 부하로 나온다. 가토가 군웅집결에서 따로 살림차려 나오는 것과는 대조적.
4.2. 전국무쌍 시리즈
후쿠시마 마사노리(전국무쌍) 참조.
4.3. 바사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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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보스들 중 1명으로 나오는데, 남미 출신을 연상케 하는 와일드한 모습으로 나온다.
가토 기요마사 대신 나오며, 그의 기체의 강화판을 타고 나온다.
4.4. 지휘봉의 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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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신장 180cm, 비주얼 연령 43세, 취미는 단련, 좋아하는 것은 단 것.
오랫동안 도요토미를 모셔왔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를 증오해 동군에 붙었다. 목표를 향해 무작정 돌진하는 성격 탓에 게임 내의 여러 인물로부터 '멧돼지'라 불린다. 도요토미의 천하를 위해 무(武)를 통해 진력해왔으나 천하가 안정되자 점차 미츠나리처럼 지(知)에 능한 자가 중용되고 자신은 푸대접을 받자 이것이 모두 미츠나리의 참소라 여기고 미츠나리를 미워하게 되었다. 있을 곳이 없어지는 것을 불안해 해 도쿠가와 측에서도 집요하리만큼 열심히 싸우고 있다.
4.5. 태합입지전
여기서도 전형적인 맹장. 가토 기요마사보다 전투쪽에선 확실히 앞서나 지모가 바닥인게 조금 걸린다. 시바타 카츠이에의 다운그레이드 버전 느낌. 내정쪽 기능은 아예 전멸인 것도 아쉬운 점.
[1] 국내에서는 임진왜란때 선봉대장의 이미지 때문에 가토 기요마사가 대단한 인물인양 비춰지지만 적어도 칠본창 내에서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처음 만들어 질 때부터 항상 리더였다. 임진왜란 때는 가토 기요마사가 2군 대장,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5군 대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는 수군장수로 참전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국에 돌아온 이들 젊은 과격파 장수들인 무단파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회유하는데, 리더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주 타켓으로 삼았다. 결국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설득에 성공하자 자동으로 기타 장수들을 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붙어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2] 이야에스가 에도 성에서 토요토미 가신들을 포섭하기 위해 쓴 120여통의 편지에서 10통의 편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한테였다. 하루에 3통을 보낸 적도 있다. 명분을 내세워서 꼬시고 영지를 주겠다고 꼬시고 하는 등 가장 신경을 쓴 상대였다.[3] 이는 에도 막부에서 히데요시의 손에 자란데다가 오사카 전쟁 당시와 그 이후의 행적이 친 도요토미였던 마사노리를 막부가 쳐낸 것. 그 때문에 가이에키를 당한 대다수의 다이묘들을 처벌했던 명분이 후사문제인 것에 비해 성의 무단보수가 공식적 처벌사유가 된 것이다. 같은 히데요시파 동료였던 가토 기요마사나 가토 요시아키라가 철저히 몸을 사려 그나마(?) 후대에 이르러 가이에키당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마사노리라는 남자의 경솔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4] 오사카 전쟁 이후 50만석 이상의 대영주가 가이에키당한 것은 총 5번이다. 히데타다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후쿠시마 마사노리, 모가미 요시아키의 아들인 모가미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가토 요시히로 그리고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차남 도쿠가와 다다나가[5] 신겐과 겐신이 자웅을 겨룬 주무대로 잘 알려져 있는 곳.[6] 그나마 가토 기요마사보다는 나은게, 가토 집안은 아예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막부 시절 무사 지위를 유지했는지조차 의문인 신세로 전락해 후손만 겨우 이어져 오는 반면 이쪽은 고위 무사인 하타모토로 남아 권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에도시대에 있어서 막부직속이면서 봉록이 천석 이상인 하타모토 집안은 다이묘와 동격으로 놀았으니 영향력도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7] 히데요시의 어머니이며 히데요시가 극진히 섬겼다고 한다. 마사노리에게는 할머니가 됨.[8] 몇 대 전의 쇼군들에게서 대대로 내려온 엄청난 이력을 가진 무기였고, 주군 히데요시에게 친히 하사받은 아주 귀중한 물건이었다. 그걸 주폭행위를 하다가 잃은 것.[9] 에도 막부 초기는 그야말로 무단통치가 행해지던 시절로, 도쿠가와 가문의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어떻게든 다이묘들의 트집을 잡아서 영지를 몰수하거나 가문을 단절시켜 버리는 등 대단히 폭력적이고 살벌한 시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놓고 불평을 한 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릴 구실거리를 주위에 흩뿌린 것이나 마찬가지다.[10] 어떻게 보면 가토가 마사노리를 곤경에 빠지게 하지 않기 위해 먼저 단속을 한 것일 수도 있다.[11] 위의 축성의 경우도 그렇고 임진왜란 때 가토의 2군이 함경도 쪽으로 진출할 때 마사노리의 5군은 후방을 맡아 2군을 지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