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환

 

1. 생애
2. 경력
2.1. 카라스키야는 강한 선수였나?
3. 의혹과 비판점
4. 기타


1. 생애


홍수환(洪秀煥, 1950년 5월 26일 ~ )은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유년기 시절을 잠깐 과천에서 지낸 적이 있다. 인천전문대학 무도과를 졸업했다.

2. 경력


1969년 5월 10일 프로복싱에 데뷔(vs 김상일. 4라운드 무승부)한 그는 1974년 7월 3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웨스트릿지 테니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상대로 15회 판정승을 거두고 챔피언으로 등극하며 한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경기 직후 전화로 어머니에게 외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말이 유명한데, 이에 어머니는 "김기수(한국 최초의 권투세계챔피언) 어머니가 그렇게 부럽더니만, 평생 소원을 풀었다."며 우스갯소리를 하셨다. 물론 "귀에 피는 안나냐, (홍수환이 피가 안난다고 하자,) (그럼) 됐어." 라는 자상한 말씀도 아끼지 않았다.
1974년 12월 28일 필리핀의 페르난도 카바넬라를 상대로 1차 방어전에 성공하지만 1975년 3월 14일, 미국에서 열린 2차방어전에서 멕시코의 알폰소 자모라에게 패해 타이틀을 상실한다. 제대로 훈련은 못한 탓도 있다고 하고 경기전에 꿀을 먹어 컨디션이 엉망이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2차 방어전 당시 엄청난 KO율을 자랑하는 자모라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4라운드 KO패. (이 때 홍수환은 현역 군인 신분이었는데, 방어전에 패배하고 귀국하자마자 영창에다 유격 훈련까지 받으며 고생했다. 오죽 고생을 했으면 패배한 직후 권투를 그만둘까 생각하다가 이 군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권투를 계속하는게 낫겠다'라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이것을 절치부심하여, 보유하던 목욕탕을 팔면서까지 전재산을 다 모아서 1976년 10월 16일, 한국에서 리턴매치를 벌이지만 이때도 TKO로 패한다. 먼저 다운을 빼았긴 했지만 후에 그로기 상태로 몰리게 되는데 이때 심판이 카운트를 세지 않고 바로 TKO를 선언, 이 때문에 홍수환의 형이 심판판정에 강한 불만을 제기하는 등 난장판이 벌어진다. (이 경기는 인터넷에 아무리 찾아도 찾을수 없다. 짤막하게 그로기 상태에서 TKO가 선언되는 장면만 남아있을뿐.)
1977년 11월 27일(현지시각 11월 26일 밤)에는 파나마 뉴파나마체육관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슈퍼밴텀급) 초대 타이틀 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3회 KO로 누르고 챔피언이 된다. 특히 홍수환은 당시 2회 4번 다운된 뒤 3회 KO승해 `4전5기' 신화를 이루었다. 영상 34초부터 경기 장면이 나온다. 한편 경기 이후 홍수환과 카라스키야는 오히려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홍수환이 도전 지구탐험대에 출연해 카라스키야를 만나러 건 적도 있고 2017년 11월 27일에는 카라스키야가 경기 40주년을 기념해 홍수환을 만나러 방한했다.# 카라스키야는 복싱을 그만둔 후 파나마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카라스키야와의 일전은 전국민적인 사건이었다. 드라마틱한 승부와 당시 최고의 인기스포츠였던 권투와 맞물려 4전5기의 신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또 아놀드 테일러를 꺾고 챔피언을 등극할 당시 등장했던 "대한국민 만세"를 다시 언급해 국민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해주었다. 한국프로복싱사상 가장 극적인 세계타이틀매치 승리로 기억되며 홍수환은 그야말로 극적인 승부의 대명사가 되었다. 어린애들까지도 4전5기의 모습을 따라할 정도.
이후 가사하라 유우를 상대로 1차 방어전에서 승리했으나, 1978년 5월 7일 한국 장충체육관에서 콜롬비아 선수인 리카르도 카르도나를 상대로 치른 2차 방어전에서 패배해 챔피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당시 버팅으로 인해 눈두덩이에 피가 났는데, 당시 협회와의 다툼으로 인해 제대로 된 조치를 받지 못하고 경기가 속행되었다고 한다. 12라운드까지 근성으로 버티다 결국 기권패. 피가 굳어 층이 생기고 그 위로 피가 흐를정도였다고 한다... 혹자는 20차방어까지 성공할 줄 알았지만 단명 챔피언에 그쳤다. 그러다가 결국 1980년 12월 19일 염동균과의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프로권투선수로서의 삶을 끝내게 된다. 참고로 경기 결과는 10라운드 무승부였다고 한다.
권투선수에서 은퇴한 뒤 1995년에는 권투해설위원을 맡기도 했으며, 이후로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며 자신의 권투선수 경험을 통한 삶의 한 모습을 다시 일깨우고 조명하는 강연 또는 인터뷰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해설위원 시절의 평가는 영 좋지가 않다. 즉 꼰대해설로 시청자들을 짜증나게 하였다. 자기자랑이 너무 심하고 선수를 꼬봉처럼 막대하고 배려보다는 지적과 비난이 주를 이루는 해설이다. 한국최초의 두체급 챔피언, 그것도 원정 경기에서 챔피언이 되었던 레전드 선수 였기에 기술적인 면에 대한 설명은 훌륭한 편이다. 그러나 해설자 입장이 아니라 권투원로나 선배 입장의 위치에서 나올만한 멘트를 많이 하다보니 이러한 평가가 나온다.

2.1. 카라스키야는 강한 선수였나?


결론적으로 말해 카라스키야는 1류 선수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선수다. 카라스키야가 홍수환과 만나기 직전까지 상대한 11전의 상대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11전 11승 11KO승을 거둔것만으로 강한 선수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다. 우선 데뷔전부터 5경기째까지의 대전상대들은 은퇴할때까지 통산 1승도 못거둔 허접선수인데다 나머지 선수들도 2명 정도를 제외하고 패가 승보다 많은 약체 선수들이었다. 이러한 전적을 두고 커리어를 쌓기 위해 시행착오를 줄인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지만 약체 선수들과 붙어서 좋은 전적을 나타내보이고 인기를 쌓는 것은 복싱계에서는 전형적인 꼼수나 편법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홍수환과의 패배 이후 세계챔피언에 두번이나 더 도전했지만 모두 TKO로 진것을 본다면 1류선수라고 하기에는 더더욱 무리다. 카라스키야가 정말 강한 선수였다면 홍수환과의 일전 이후의 세계타이틀매치에서 최소한 선전을 했어야 하지만 두경기 모두 속절없이 TKO로 졌다. 이후에 카라스키야는 더 이상 선수로서는 성공을 모색하기 어렵다 판단하여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카라스키야의 전적https://boxrec.com/en/proboxer/12737
체급에 관련하여 설명하자면 당시 카라스키야는 해당 체급 주니어 페더급의 챔피언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카라스키야와 홍수환의 체급은 새롭게 만들어진 주니어 페더급이다. 신설 체급이니 당연히 챔피언이 없었고 두선수는 챔피언을 뽑는 챔피언 결정전을 치룬 것이다. 당시 이 둘의 적정 체급이었던 밴텀급에는 극강의 강적들이 둘씩이나 있었다. 한명은 통산전적 33승 32KO승 5패의 알폰소 자모라, 또 한명은 통산전적 66승 63KO승 4패의 카를로스 사라테였다. 당시 파나마에서 유망주로 인기를 끌던 카라스키야가 이들과 경쟁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WBA 협회측에서 새롭게 주니어 페더급을 신설한 것. 애초에 카라스키야가 정말 "지옥에서 온 악마"로 불릴정도로 강한 선수였다면 밴텀급에서 이들과 경쟁했을 것이다.

3. 의혹과 비판점


허나 노력파였던 과거 리즈 시절과는 달리 복싱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지금은 한국 프로 복싱계를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트려 망쳐놓은 장본인이라는 의혹들과 비판점들이 있다.기사참조 물론 상세한 사실여부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이며, 이 단락에서 설명할 부분은 그동안 들려왔던 의혹을 우선 사실로 간주하고 서술한다.
그가 협회장으로 있을 당시에 복싱후유증으로 쓰러진 2008년 권투경기 후유증으로 사망한 최요삼 선수 , 2010년에 권투후유증으로 똑같이 사망한 배기석 선수에게 치료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도 보험 가입이 되지않는 권투선수들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복싱후유증때문에 치료비차원에서 "권투위원회"에 대전료중 일부를 항상 치료비로 적립해놓는다. 그러나, 최요삼 , 배기삼 선수에게는 치료비와 위로금이 나와야 했지만 받지못하여 사망했다고한다 권투하는 이들은 저 치료비가 어디로갔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비영리 사단법인인 권투위원회가 회원에게도 회계내용을 공개하지않고, 외부 회계감사도 받지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권투위원회가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간것이나 마찬가리가는 비판이 있는데, 사실상 보험회사에서 돈받아놓고 가입자가 암걸렸더니 암 치료비 지원 안해주는 거랑 다름이 없다.
하지만 2008년 최요삼, 2010년 배기석 사망 당시 회장은 김철기, 김주환이었고 홍수환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홍수환은 KBC가 시합 때마다 선수들 대전료의 3%를 건강보험료로 수십 년 간 징수해왔는데 왜 이런 사고 시 보상금이나 장례비를 지원하지 않냐며 끈질기에 항의를 했다. 본인이 1974년 첫 세계타이틀 획득 시에는 후원금 2백만 원 중 절반인 1백만 원을 협회에 기부하기도 했고, 당시 1백만 원은 서울 시내 집 한 채 비용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축적되었어야 할 협회 예산은 비권투인 출신 회장들에 의해 허투루 관리되어 고갈된 것에 대해 집요하게 항의하는 홍수환에 대해 협회에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깎아내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선수들의 파이트머니 문제에도 연관이 되어있다는 소리도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107132131265
애초에 홍수환이 권투위원회 회장으로 추대된, 지난 7월4일에 이사회의 회의록이 조작되었다는 의혹도 있다. 당시 7명이 모두 만장일치로 홍수환을 투표했으며, 여기까지는 명망있는 사람 뽑아준 거기에 별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이 가운데 두명은 회의장에 출석하지도 않았고 회의장이 열렸다는 사실 자체도 몰랐다고 하니 그게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다. 즉, 자신들이 몸담고있는 권투위원회에서 회장직을 투표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회의장이 열려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실제로 당시 찍힌 도장을 보면 두명의 도장이 비어있었다고 한다! 또한 홍수환 회장 등 몇몇 관련자들을 고소한 전임권투위원회 집행부 측이 공개한 CCTV영상 중에는 한 남성이 권투위원회의 법인통장과 , 도장을 입수하기 위해서 전현직 임원을 폭행하고 있던 부분이 실려있었다.
여기까지의 의혹이나 비판점들이 사실인지는 더 밝혀져야 알겠지만, 이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홍수환 역시 한국의 몇몇 스포츠 선수 출신 원로들처럼 늘그막에 흑역사를 계속 쓰고 있는 셈이다.

4. 기타



  • 선수 활동하던 당시, 1남 2녀를 둔 유부남이었는데도 "나는 몰라요"등 히트시킨 당시 유명 가수 옥희와 염문을 뿌려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명목으로 권투협회에서 제명당하고 이혼, 옥희와 결혼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옥희를 때려서 경찰에 붙들리는 등 문제가 되었고 또 이혼... 그런데 어찌 된 건지 92년도에 다시 옥희와 재결합해 1남 1녀를 더 두고 잘 살고 있다.[1]
  • 엉덩이턱 보유자이다.
[1] 전처와 사이에 난 4명(1명은 이혼 후 출생)을 합하면 자녀가 6명이나 되는데, 산아 제한이 국가적적으로 시행되던 때라 6명은 당시에도 많은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