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수(권투선수)
* 실향민/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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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벤베누티와의 타이틀매치에서 승리해 한국 최초로 세계챔피언에 오른 김기수의 경기 장면
金基洙
1938년 9월 ~ 1997년 6월 10일
전 대한민국의 권투선수로 한국인 최초의 WBA, WBC 세계 챔피언.
1938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1951년 1.4 후퇴 당시 월남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여수시에 정착한 그는 1954년 여수 여항중학교 김기봉 교사의 호의로 학교에 들어가 육상부 단거리에서 활약하다 권투로 전향했다. 이후 서울 성북고등학교 복싱부에 들어갔다.
1958 도쿄 아시안 게임에서 웰터급 금메달을 딴 뒤 1961년에 프로로 전향, 1966년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주니어 미들급 세계챔피언 니노 벤베누티[1] 를 상대로 15회 판정승을 따내 한국인 최초로 복싱 세계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2][3] 그 시절 세계 챔피언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타이틀 매치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 한국의 국민소득이 200달러 수준이었던 그당시 벤베누티가 요구한 대전료는 무려 5만 5천 달러선으로, 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정부에서 지급 보증을 나설 정도였다. 사실 산드로 마징기, 미나미 히사오 등 동시대에 김기수와 경쟁을 벌이던 선수들의 타이틀 매치 전적을 봐도 판정까지 간 경우에는 사정이 비슷하다(...). 그만큼 원정경기가 굉장한 부담이었다. 21세기에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1966년 12월 17일에는 미국의 스탠 해링턴을 장충체육관으로 불러들여 15회 판정승으로 1차 방어에 성공한다. 이듬해 6월 3일에는 다시 한 번 미국의 프레디 리틀을 동대문야구장으로 불러들여 다운을 당하는 등 고전 끝에 다소 논란이 있었던 스플릿 디시전 판정승으로 2차 방어에 성공한다.[4] 하지만 결국 1968년 5월 26일 이탈리아 밀란의 산 시로에서 산드로 마징기와 가진 원정 방어전에서는 역으로 스플릿 디시전으로 판정패하며 타이틀을 상실한다.[5] 이후 아직 보유중이던 동양 태평양 (OPBF) 미들급 타이틀의 방어에 나섰지만, 오사카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미나미 히사오에게 판정패해서 동양 챔피언 자리마저 내어주었다. 김기수의 프로 복싱 패전은 이렇게 딱 2회. 1969년 삼일절에 다시 미나미 히사오를 홈으로 불러들여 판정승으로 동양 타이틀을 되찾아온 뒤 미련없이 은퇴한다.[6] 프로복싱 총 전적은 33승 (17KO) 2무승부 2패.
은퇴 후에는 명동에 다방 '챔피언'을 차렸고 제주도에서 백화점을 경영할 정도로 사업에도 성공했으나, 1997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0세.
해태 타이거즈의 레전드 김봉연의 동서이자 이상윤의 장인어른[7] 이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김응용 감독을 광주에 안착시켜준 인물로 같은 실향민 출신으로서 공통분모가 많아 함께 어울려 술을 자주 마셨다. 당시 감독 초년생이자 타향살이하던 김응용의 유일한 낙이 같은 광주에 살던 김기수와 술 한잔 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윤의 장인이었기에 선수단에서 "누군(이상윤) 장인 잘 둬서 맨날 주전이네.."라는 소문이 돌자 김응용은 오랜 친구와의 만남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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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벤베누티와의 타이틀매치에서 승리해 한국 최초로 세계챔피언에 오른 김기수의 경기 장면
金基洙
1938년 9월 ~ 1997년 6월 10일
전 대한민국의 권투선수로 한국인 최초의 WBA, WBC 세계 챔피언.
1938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1951년 1.4 후퇴 당시 월남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여수시에 정착한 그는 1954년 여수 여항중학교 김기봉 교사의 호의로 학교에 들어가 육상부 단거리에서 활약하다 권투로 전향했다. 이후 서울 성북고등학교 복싱부에 들어갔다.
1958 도쿄 아시안 게임에서 웰터급 금메달을 딴 뒤 1961년에 프로로 전향, 1966년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주니어 미들급 세계챔피언 니노 벤베누티[1] 를 상대로 15회 판정승을 따내 한국인 최초로 복싱 세계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2][3] 그 시절 세계 챔피언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타이틀 매치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 한국의 국민소득이 200달러 수준이었던 그당시 벤베누티가 요구한 대전료는 무려 5만 5천 달러선으로, 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정부에서 지급 보증을 나설 정도였다. 사실 산드로 마징기, 미나미 히사오 등 동시대에 김기수와 경쟁을 벌이던 선수들의 타이틀 매치 전적을 봐도 판정까지 간 경우에는 사정이 비슷하다(...). 그만큼 원정경기가 굉장한 부담이었다. 21세기에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1966년 12월 17일에는 미국의 스탠 해링턴을 장충체육관으로 불러들여 15회 판정승으로 1차 방어에 성공한다. 이듬해 6월 3일에는 다시 한 번 미국의 프레디 리틀을 동대문야구장으로 불러들여 다운을 당하는 등 고전 끝에 다소 논란이 있었던 스플릿 디시전 판정승으로 2차 방어에 성공한다.[4] 하지만 결국 1968년 5월 26일 이탈리아 밀란의 산 시로에서 산드로 마징기와 가진 원정 방어전에서는 역으로 스플릿 디시전으로 판정패하며 타이틀을 상실한다.[5] 이후 아직 보유중이던 동양 태평양 (OPBF) 미들급 타이틀의 방어에 나섰지만, 오사카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미나미 히사오에게 판정패해서 동양 챔피언 자리마저 내어주었다. 김기수의 프로 복싱 패전은 이렇게 딱 2회. 1969년 삼일절에 다시 미나미 히사오를 홈으로 불러들여 판정승으로 동양 타이틀을 되찾아온 뒤 미련없이 은퇴한다.[6] 프로복싱 총 전적은 33승 (17KO) 2무승부 2패.
은퇴 후에는 명동에 다방 '챔피언'을 차렸고 제주도에서 백화점을 경영할 정도로 사업에도 성공했으나, 1997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0세.
해태 타이거즈의 레전드 김봉연의 동서이자 이상윤의 장인어른[7] 이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김응용 감독을 광주에 안착시켜준 인물로 같은 실향민 출신으로서 공통분모가 많아 함께 어울려 술을 자주 마셨다. 당시 감독 초년생이자 타향살이하던 김응용의 유일한 낙이 같은 광주에 살던 김기수와 술 한잔 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윤의 장인이었기에 선수단에서 "누군(이상윤) 장인 잘 둬서 맨날 주전이네.."라는 소문이 돌자 김응용은 오랜 친구와의 만남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1] 벤베누티가 이 타이틀을 빼앗아온 상대가 바로 후술할 산드로 마징기였다.[2] 벤베누티는 김기수에게 패하기 전까지 프로전적 65전 전승으로 무패행진을 계속했다. [3] 이 두 선수는 1960년 로마 올림픽 복싱의 예선 3차전에서 서로 상대한 적이 있다. 그때는 김기수가 심판 판정 5대0으로 패배하고 벤베누티는 금메달 획득.https://www.sports-reference.com/olympics/athletes/be/nino-benvenuti-1.html[4] 이후 리틀은 김기수에게서 타이틀을 빼앗아간 산드로 마징기를 상대로 다시 한 번 타이틀 획득에 도전하지만, TKO에 가깝게 몰아붙여놓고도 심판에게 노 컨테스트를 선언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결국에는 세계 챔피언이 되고 2차 방어에까지 성공하긴 하지만.[5] 이때부터 산드로 마징기는 이렇게 따낸 생애 두 번째 통합 세계 타이틀을 프레디 리틀과의 재경기 거부로 박탈당할 때까지 이탈리아에서만 경기를 갖는다.[6] 여담으로 미나미 히사오는 이 경기에서 패하고도 주니어 미들급 세계 타이틀에 도전할 기회를 얻어 위에 언급된 프레디 리틀과 경기를 가졌지만 KO로 패했다.[7] 김기수씨의 사망 후 이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