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공학/역사
1. 태동기
화학공학은 영국, 미국, 독일에서 각각 태동하였다.
1.1. 영국
1870년대 2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영국의 화학공장에도 증기엔진, 회전식 용광로 등 기계공학 지식을 요구하는 장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화학과 기계공학 지식을 모두 갖춘 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다. 1882년 6월 영국 화학산업회 (SCI)가 최초로 전체회합을 지녔는데 300여명의 참석자 중 15명이 자신을 chemical engineer로 자처했다.
맨체스터 기술학교 (현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1887년 조지 E. 데이비스에 의해 12회의 화학공학 강의가 이루어진 것을 화학공학 강의의 시초로 본다. 그는 학자 출신은 아니었고 파트타임 직업학교와 1년간의 왕립광산학교 학력이 전부였다. 그는 알칼리 규제법에 따른 생산공장 현장감독관으로서 지역 내의 화학공장의 환경오염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화학공업 업계의 시행착오를 관찰한 끝에 오퍼레이션 컨설턴트 사무실을 개업한 후 기술학교에서 자신의 새로운 지식을 강의했다. 당대에는 영국 화학공업 업계의 기업비밀을 민간과 외국에 누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일련의 강의들은 세월이 지난 후 단위조작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1901년 화학공학 핸드북을 최초로 저술했는데 이책은 최초의 화학공학 개론서이기도 하다.
1880년대 영국 City and Guilds of London Institute에서 3년제 화학공학과 학위를 주기 시작한 것을 화학공학과의 시초로 본다. 그 기관의 화학과 교수였던 헨리 에드워드 암스트롱이 영국의 산업을 돕겠다고 이 과정을 개설했다.
화학공학이라는 분과가 존재해야 하는지도 당시에는 갈등이었다. 1894년 한 화학과 교수는 “화학산업 인력에 대한 훈련은 순수 화학자 양성을 목표로 해야 하며, 요즘 논의되고 있는 chemical engineer 양성에 대한 요구는 당장의 필요에 의해 산업가들이 요구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880년대에는 영국이든 미국이든 화학공학과는 고용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대규모 공업화학을 아는 화학과나 화학 장치를 약간 아는 기계공학과를 뽑는 쪽을 선호했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1차 대전의 발발로 인해 상황이 반전되었다. 영국 정부는 대량의 폭약이 필요했다. 그래서 약 2천여명의 화학 및 기계공학 고급인력이 폭약 생산에 투입되었다. 전쟁 전에는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던 화학자가 폭약 공장에 징용되어 대규모 공업화학 시설의 운영 경험을 갖춘 뒤 종전 후에는 화학공학자를 자처하게 되는 식이었다. 그래서 1900년 화학산업회 (SCI)에서 chemical engineer를 자칭하는 이는 42명밖에 없었으나 종전 직후인 1918년 화학산업회에서 화학공학 분과가 창립할 때는 400여명의 창립회원을 모을 수 있었다.
종전 후 화학공학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난 후에도 화학공학이 화학의 일종인지 기계공학의 일종인지에 대해 여러 차례 다툼이 벌어졌다. 1920년 해롤드 탈보트는 “화학공학은 화학의 한 분과도 그리고 기계공학의 한 분과도 아니다. 독자적인 전문직으로 교육 및 실행돼야만 하는 과학의 한 분야이다."고 주장했다.
1.2. 미국
1888년에는 영국의 영향을 받아 미국의 MIT에서도 미국 최초로 4년제 학사 화학공학과를 개설했다. (첫 졸업생 7명) 미국에서는 독일과 달리 산-알칼리 공업의 소품종 대량생산을 주로 했다. 따라서 연속공정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공학적 문제들이 주류가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최초의 화학공학과들은 화학과에서 scale-up 연구를 하기 위해 분리된 경우가 많았다.
한편 20세기 초 내연기관의 발달과 함께 정유, 석유 화학 산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14년에는 미국에서 광산야금석유공학자회가 창립되었고 1915년에는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최초의 석유공학과가 생겨났다. 이러한 석유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최적의 상태로 설계하고 운전하기 위해 화공과의 수요가 매우 커졌다. 즉, 석유의 발견으로 대폭 확대된 학문으로 미국 같은 산유국에서 특히 우선적으로 발달했다. 미국의 경우 21세기 초까지 화학공학 엔지니어가 모든 직업 중 최고의 연봉을 자랑했다.
1.3. 독일
독일은 19세기 중반부터 염료와 제약 등의 정밀화학공업을 발전시켰다. 1900년대 초에만 해도 독일의 화학공업이 미국을 50년은 앞서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회분식 반응이 주류였기 때문에 복잡한 공학적 문제가 적었다. 이 때문에 주로 화학자와 기계공학자가 팀을 이루어 scale-up 연구를 수행했다. 그래서 독일은 별도의 화학공학과를 만드는 것은 늦었다.
2. 2차 대전 이후
오늘날 전화기 및 토목공학은 국가 기간 산업의 기초가 되는 공학이다. 세분화된 여러 공학 학문 분과들이 이 4가지 공학에서 분리되고 있다. 1950년대부터 금속공학과 환경공학, 1960년대부터는 나머지 재료공학, 1966년부터는 생명공학이 화학공학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국내 대학의 환경대학원 교수들을 보면 대부분 화공 출신이고, 국내 최상위권 대학의 학부과정에는 환경공학과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는 화학공학에서 친환경적 문제의 해결책들을 많이 다루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3. 한국에서
1908년 경성공업학교 응용화학과를 시초로 볼 수 있다[1] . 당시 매년 2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38년에는 경성제대 응용화학과가 개설되었고 이 학과는 광복 직후 서울대 화학공학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화학공학은 광복 이후 비료 산업의 육성과 함께 가장 먼저 발달한 공학이다. LG그룹은 락희화학공업사 (LG화학의 전신), 롯데그룹은 오늘날의 전문대 수준 화학공학 지식으로 비누 만들던 장사에서 시작한 것이다.
현재의 한국의 산업은 전자, 자동차가 주력이기 때문에 전자공학이나 기계공학에 비해 화학공학은 조금 올드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21세기 넘어 화학공학과라는 명칭을 신소재화학공학이나 생명화학공학 등으로 학과 명칭이 다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