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제귀인 풍씨

 

桓帝貴人 馮氏
후한 환제(후한)의 후궁이다.
궁정에 들어가 귀인이 되었다. 사료의 기록이 단편적이고 분산되어있지만, 이를 총합해보면 172년 6월 이전에 사망하여 묘장을 치루었는데, 그뒤에 묘가 도굴되고 시신이 모욕받았다고 추정된다.
영제(후한) 희평(熹平) 원(172)년에, 황태후였던 환사황후 두씨가 실권하고 남궁 운대에 유폐되어있다가 사망하자 장례에 관한 논의가 일었다. 두태후와 대장군 두무로 위시되는 두씨 일족은 환관을 주살하려다가 역풍을 맞아 정권을 잃고 가문이 몰락한 상태였다.
그녀가 사망하자 조절과 왕보 등의 환관들은 이를 원망하여, 두태후의 황후로서의 지위를 사후 박탈하고 귀인이었던 풍씨를 황후로 추증하여 환제의 종묘에 배향하고자 하였다. 영제는 이를 논의하도록 지시하였고, 수백 명의 공경 중 대다수가 조절의 위세를 꺼려서 다른 의견을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정위였던 진구는 두태후가 영제를 옹립하여 종묘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있고, 풍귀인은 묘가 도굴되어 시신이 능욕당했다고 지적하며 반기를 들어 두태후를 환제의 정후의 자격으로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동진의 역사가 간보(干寶)가 지은 소설집인 『수신기(捜神記)』 권15에는 풍귀인의 묘가 도굴되었을 때, 시신은 차가웠지만 용모는 여전히 아름다웠기에 도굴한 도적들이 시신을 앞다투어 시신을 능욕했다는 기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