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제(후한)

 


<colbgcolor=#a11><colcolor=#ece5b6> '''후한 제26대 황제'''
'''桓皇帝 | 환황제'''
[image]
'''묘호'''
[1]
'''시호'''
효환황제(孝桓皇帝)
'''연호'''
건화(建和, 147년 ~ 149년)
화평(和平, 150년)
원가(元嘉, 151년 ~ 152년)
영흥(永興, 153년 ~ 154년)
영수(永壽, 155년 ~ 158년)
연희(延熹, 158년 ~ 167년)
영강(永康, 167년)
'''출생'''
132년
'''사망'''
168년 1월 25일
'''재위'''
'''후한의 황제'''
146년 8월 1일 ~ 168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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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
유(劉)
''''''
지(志)
'''생모'''
여오후의 잉첩 언씨
→ 박원귀인[6]
→ 효숭황후[7]
'''황후'''
환제의헌황후 양씨[8]
환제황후 등씨
환사황후 두씨

1. 소개
2. 생애
3. 후비와 자녀
4. 미디어 믹스에서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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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나라의 제26대 황제이자, 후한의 제11대 황제. 휘는 지(志). 장제의 증손자로 하간효왕(河間孝王) 유개(劉開)의 손자이며, 여오후(蠡吾侯) 유익(劉翼)의 아들이다. 유개는 손자 덕분에 효목황제(孝穆皇帝)로 추존되었고, 그의 아내이자 유익의 모친 조씨도 효목황후로 추존되었다. 유익도 마찬가지로 효숭황제(孝崇皇帝) 추존된다.

2. 생애


본래 황제로 즉위할 수 없었는데[2] 조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즉위했다. 당시 조정은 간신이자 권신양기가 떡 주무르듯 하고 있었는데, 당장 전임 황제인 질제마저 양기가 한 방에 독살시킨 것이라 그 힘이 막강하였다. 환제의 즉위 자체도 양기와 양기의 여동생인 양 태후의 뜻으로 이뤄진 것이라 환제는 그걸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없었고 양기는 권세를 마음껏 자랑할 수 있었다.
양기의 부인인 손수의 외삼촌 중에 양기(梁紀)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양기의 부인인 선(宣)씨에게는 이전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만든 딸인 등맹(鄧猛)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얼굴을 보고 괜찮다고 생각한 손수는 등맹의 성씨를 양(梁)씨로 바꾸고 환제의 후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입막음을 위해 남편 양기를 시켜서 선씨를 죽이게 했는데, 어찌된 것인지 선씨는 살아서 궁궐로 달려갔다.
사정을 다 들은 환제는 '황제를 능멸했겠다? 짜증나는데 잘 됐다!' 싶어 환관인 선초(單超) 등과 손을 잡고 한 번에 들이닥쳐 다 박살을 냈다. 양기의 집은 포위되었고, 양기와 손수는 절망해서 자결하였다.
이렇게 양기를 처리하는 데 성공하자 백성들이 기뻐했지만, 환관들의 도움을 받은 것 때문에 이번에는 환관들의 세력이 막강해져버렸다. 그들은 막강한 권세를 바탕으로 전횡을 일삼았고, 내정에 간섭하고 자기들의 일족을 지방으로 파견시켜 토지겸병(土地兼倂)을 벌였다. 이에 청류파들은 나서서 환관들을 비난하였다. 위기를 느낀 환관들은 환제에게 거짓말을 해서 이들을 청류당의 이응(李膺)을 비롯한 200여 명을 잡아들였다.
헌데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청류당은 저마다 입을 모아 환관의 죄상을 폭로하는 법정 진술을 택해서 환관들을 물먹였다. 그대로 놓아두면 진짜로 큰일이 나겠다 싶었던 환관들은 외척 두무(竇武) 등이 상주하여 간한 것을 기회로 청류당에게 금고형을 내렸다. 이것이 1차 당고의 금이다.
이렇게 환제는 환관이 비정상적인 권력을 가지게 만들어 후한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다음 황제가 유능하여 이걸 수습했으면 좋았겠지만 그 황제가 …결국 2차 당고의 금이 터지고 정권은 십상시가 잡게 되고, 이제 시대는 '''개판 난세'''로 바뀌게 된다.
환제는 재위 20년 만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5촌 조카 유굉이 뒤를 이어서 황제로 즉위했다. 문제는 영제 유굉은 그를 능가할만큼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서 환제와 같이 '''환령'''으로 싸잡혀서[3] 동아시아 몇 천 년 역사 내내 암군의 대명사가 되어 자자손손 대차게 까이게 된다. 그리고 환령지말(桓靈之末)은 환제와 영제가 재위했던 이 혼란했던 시대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환령지말은 한국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정사 삼국지 한조에서는 이 시기 살기 힘들어진 중국의 백성들이 한반도로 많이 유입됐다고 쓰고 있고 실제 고고학적으로도 이 시기 한반도 남부까지 기존과 다른 외부문물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환제는 딸만 세 명 있었는데 그중 장녀였던 양안장공주는 불기후 복완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복완의 딸이자, 헌제의 황후였던 복황후는 그의 소생이 아니라 복완의 다른 아내인 영(盈)[4]의 소생인 듯하다.

3. 후비와 자녀


  • 의헌황후 양씨
  • 효환황후 등씨
  • 환사황후 두씨
  • 귀인 곽씨
  • 귀인 풍씨
  • 채녀 전성 > 귀인[5]
  • 생모 미상
    • 양안장공주 유화
    • 영음장공주 유견
    • 양적장공주 유수

4. 미디어 믹스에서


조카와 함께 삼국연의(1994)에 단역으로나마 잠시 비춰졌다.(?)

5. 둘러보기




[1] 190년 좌중랑장 채옹의 건의로 취소되었다.[2] 전대 황제인 질제의 재종숙(再從叔, 아버지의 육촌 형제)이라, 항렬을 거스르는 즉위가 된다.[3] 참고로 정사에서 쓰는 호칭이다.[4] 성씨는 기록이 실전되어 알려져 있지 않다.[5] 영강 원년에 환제가 병이 위중하자 다른 8명의 여관과 함께 귀인으로 임명되었지만, 환제 사망 직후 환제의 관 앞에서 두태후에게 끔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