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제(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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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나라의 제27대 황제이자, 후한의 제12대 황제. 휘는 유굉(劉宏).
시법에 의하면 靈자 자체가 혼군에게 주는 시호다. 환제와 함께 '환령'이라고 묶여 불리며, 후한 말의 대표적 암군으로 손꼽힌다.
명 4대 암군 가운데 정덕제와 만력제를 섞어 놓은 것 같은 한심한 황제. 그야말로 완전히 돈에만 미쳐버린 무능한 '''상인 황제'''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다. 후한은 그야말로 영제 때문에 망했고, 십상시와 태평도는 영제의 혼치로 벌어진 증상에 가까웠다.
또한, 영제의 아들들인 소제와 헌제는 동탁#s-1, 이각&곽사, 조조에게 실권을 빼앗겨서 자신들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고 퇴위당했기 때문에 실권이 있었던 마지막 후한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영제는 장제의 현손, 하간효왕 유개(劉開)의 증손, 해독정후(解瀆亭侯)인 유숙(劉淑)[2] 의 손자, 해독정후인 유장(劉萇)[3] 의 아들이다. 친모는 효인황후 동씨이며, 외삼촌은 동총, 외사촌은 동중, 동승이 된다.[4]
환제의 5촌 조카로 환제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그에게는 배후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환관들과 권력 다툼을 하던 대장군 두무와 두태후의 옹립으로 13세에 즉위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두무는 당고의 금 때문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버린다.
2. 생애
2.1. 2차 당고의 금(169)
즉위 직후 2차 당고의 금이 벌어졌다. 두무는 정권이 영제로 바뀐 직후, 당인의 금고를 해제하여 청류당에 속한 사람들을 등용함과 동시에 그들과 결탁하여 환관을 일소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외척 두씨 세력은 진번 · 이응 등 청류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을 등용하며 기회를 엿보았지만 오히려 환관들에게 계획이 들통나 거센 역습을 받고 패배했다.
두무는 일찌감치 자살해버렸고, 이응을 포함해서 잡혀 죽은 자만 100여 명이 넘었고, 사죄(死罪), 유죄(流罪), 금고의 처분을 받은 자는 600 ~ 700명이 되었다. 태학생 1000명이 체포되어 사인 집단은 강한 타격을 받는다. 사건에 연루된 외척들도 마찬가지였고. 결론적으로 환관을 제어할 집단들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브레이크가 사라진 것.
단순히 금고형에 처했던 1차 사건과는 달리 아예 이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호족 및 사대부 세력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면서, 후한 정권에 대한 지지는 폭락했다. 즉, 환제의 '당고의 금'은 말그대로 금령 정도였지만, 영제의 당고의 금은 다른 말로 '당고의 옥'이었다. 대규모 옥사와 국문으로 시작부터 외척과 사족에 대한 환관의 우위를 확정시켰다.
이후로도 영제는 사족들을 대대적인 언론 탄압으로 축출했고, 이후로도 직언이 들어오는 족족 목을 날려버렸다. 영제의 독재와 무능, 불통에 실망하고 질린 사대부들은 출사를 포기하고 기반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했으며, 영제의 뜻에 영합하는 친황제 세력, 즉 환관 세력과 약삭빠른 사대부들만 권세를 누렸으니 여기서 청류파와 탁류파라는 기준이 생겨났다. 황제에 영합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 칭해지고 황제에 영합하는 사람은 더럽다고 칭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2.2. 매관매직의 선두주자
원래는 황실과는 거리가 있었고 집안이 가난하여 장사꾼으로 큰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려고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배후에 세력이 없어 다루기 쉬울 것이라는 이유로 옹립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영제는 당고의 금과 두씨 일족 숙청을 통해 불과 13세의 나이에 견제 세력이 전무한 절대 왕권을 구축했다. 영제가 13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는 환관들에게 이용당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일반 사회와 격리되어있던 특성상 환관 세력은 황제권에 기생하는 방법이 아니고는 권력을 휘두를 수 없었고, 따라서 그들이 황제 독재 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렇기에 환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환관들을 통해 강력한 외척 세력을 박살낸 것 자체만으로는 논리상의 문제가 없고, 영제 본인 역시 정치를 못한 것과는 상관없이 치세 전반에 걸쳐 반대 세력에 대한 폭압적인 숙청을 통해 강력한 황권을 유지하는 일만큼은 무척 열심이었다.
문제는 영제가 가난한 시절에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일에 완전히 미쳐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되어서도 오직 돈벌이만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위 때까지는 돈을 실컷 쓸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국가 예산을 쓰는 데에는 엄연히 정해진 절차가 있었던 데다, 이미 부정부패로 엉망이 되어가던 한나라#s-3.2의 국고는 황제가 마음대로 예산을 빼서 쓸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영제는 마음 먹은 대로 돈을 쓸 수 없게 되자 각종 기묘한 핑곗거리를 만들어 비자금을 조성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아예 모든 벼슬에 정가를 매기며 직접 매관매직에 나섰다. 이미 매관매직은 환관과 외척을 통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황제 본인이 매관매직에 나선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심지어는 벼슬을 외상으로 팔고 부임 후 정가의 2배를 내는 제도까지 도입했다. 안 내면 당연히 관직을 박탈했다.
소설 삼국지 연의에서는 십상시들의 소행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전부 다 돈에 미친 영제가 벌인 악행이었다.
신임 관리는 물론 자리를 옮기는 기존 관리들도 반드시 궁궐 수리 명목으로 돈을 바쳐야 부임할 수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정직한 사람들은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가지 않는 것은 황제를 기만하는 대죄가 되며, 그렇다고 당장 돈을 낼 재력도 없고, 돈을 내려면 황제에게 외상으로 빚을 진 뒤 백성들을 수탈하는 방법밖에 없었기에 부임하기를 싫어했다. 일례로 거록태수로 임명된 사마직(司馬直)이란 관리는 평소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는데, 영제는 사마직이 청렴하다는 이유로 '특별히' 정가에서 300만 전을 깎아주면서 사마직에게 부임을 강요했다. 영제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던 사마직은 고민 끝에 임지인 거록으로 향하던 중 자살했다.
관리들은 황제에게 진 빚을 질질 끌 수 없으니 백성들에게 온갖 탈법, 불법 행위를 자행하여 돈을 긁어모았고, 이는 황제가 시킨 것이나 다름 없어 이러한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영제 그 자신도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를 하여 이러한 현상을 더욱 조장하였기 때문에 황실의 부정부패는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매관매직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자 통치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야심가와 협잡꾼들은 한몫 잡아볼 심산으로 관직 경쟁...아니, '''관직 경매'''에 끼어들었고, 영제는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관직의 재임 기간을 대폭 줄여 임기는 대체로 1년을 넘지 못했고, 거액을 바치고 관직에 출사한 협잡꾼과 야바위꾼들은 영제에게 상납금을 바치고,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바치면서도 본전을 뽑고 한몫 잡기 위해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했다. 일례를 들어보면 최고 실세였던 환관 왕보#s-2의 양자 왕길은 패국상으로 재임하던 기간 중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넘는 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왕길이 제 욕심을 충족시키고자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과 요역을 부과하고 이를 제때에 이행하지 못하는 백성들은 모조리 잡아들여 매질해 죽인 것이다. 굶어 죽거나 맞아 죽지 않은 백성들은 착취를 견디지 못해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며 도적떼가 되었다.
이런 지경이니 당대에 매관매직이 아닌 방법으로 관리가 된 사람이라는 게 도적 퇴치 전문가로 명성이 자자한 손견과 장거와 장순#s-3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현위가 된 유비 정도에 불과했다. 후에 유비가 독우를 패고 도망간 것도 벼슬을 얻는 과정에서 매관매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짤릴 걸 알고 선수를 쳤다는 설도 있다.
매관매직으로 생긴 수익의 일부는 부족한 국고에 충당되었지만 대부분은 영제 개인의 비자금이 되었고, 서원의 창고에 돈이 꽉꽉 들어차다 못해 넘쳐나자, 황궁 밖 십상시들의 창고에 나눠 보관하게 하는 꼼꼼함을 보이기도 했다. 십상시는 환관 세력 내에서도 대체로 신흥 세력에 속하는데, 이들은 영제의 비자금 마련이라는 목표에 따라 영제와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충실하게 보필하면서 떠오른 비선 조직이며, 그 중간에서 단단히 한몫 챙겼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즉, 영제는 '한나라'라는 회사의 회장이 되어서 매관 매직 사업으로 돈을 번 뒤, 이윤을 회사 자금으로도 썼지만 비자금으로 많이 빼돌렸단 소리가 된다.
이에 대해 직언하는 신하들은 내쫓거나 죽이며 영제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철저히 숙청했다.
그러나 막강한 황권을 구축하는 것과 그 권력을 통한 개인 비자금 조성에는 무척 열정적이었던 영제는 정작 국가 경영에는 관심이 없어 재위 내내 십상시의 간신질에 놀아나고 향락에만 빠져살았다. 여색은 기본이고, 대토목공사를 벌여 스프링클러로 도로를 청소하는 첨단 설비를 만들어놓고 즐거워하거나, 스스로 장군 복장을 하고 무상 장군이라 칭하며 군대를 사열하면서 놀거나, 작은 모의 시장을 만들어 스스로 말 대신 당나귀 마차를 타고 장사 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5] 이 때문에 당나귀를 타는 것이 유행이 되어 당나귀 값이 말보다 비싸졌다는 해프닝도 있다. 후한서에 나오는 영제가 타고 다닌 흰 당나귀는 바로 은거하는 자의 상징이 되었다. 또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한다.
영제가 향락에 빠져사는 동안 후한은 선비족, 강족 등의 이민족의 침입과 도적떼의 약탈이 빈발하는 가운데 관리들의 수탈이 더욱 가혹해지자 백성들은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기 시작하여 막장이 되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기근이 일어나고 질병이 돌아서 아사자와 유랑자가 속출했다. 이를 보면 후한 조정은 질서와 안보 유지라는 국가의 기본적 기능을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무한 수탈이 반복됐으니 한나라는 스스로 망한 것이지 다른 누가 멸망시킨 것이 결코 아니며, 말 그대로 대신들이 모두 벼슬하는 도둑놈들이 된 것이다. 황건적의 난이 괜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영제는 황제로서 정무는 거의 보지 않아서[6][7] 옥새가 어디 있는지 까먹는 지경까지 갔고 결국 옥새를 진짜로 분실하고 만다. 물론 옥새는 황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라 엄연히 부보랑(符寶郞)이라고 하는 옥새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직책이 있었다. 따라서 영제가 정무에 관심이 없기도 했겠지만 그것이 중요하다기보다는 나라의 혼란상이 옥새를 담당하는 관료들까지 제 소임을 하지 않거나 부재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보는 게 맞다.
2.3. 환관과 척신이 설치고 난세가 시작되다
이런 폐정의 결과 184년에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같은 해에 서량에서는 변장, 한수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186년에는 흑산적이 하북을 휩쓸었으며, 187년에는 장거, 장순의 난이 일어나는 등 하나같이 10만 이상의 초대형 반란들이 각지에서 잇다른다.
이에 앞선 178년에 영제는 황후였던 송씨를 내치고 송씨 일족을 숙청, 배후 세력이 없던 천민 출신의 하씨(영사황후)를 새 황후로 세웠다. 하씨의 오빠인 하진은 하남윤으로 승진했고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에는 대장군으로 승진해 반란 진압의 총지휘를 맡았는데, 성공적으로 진압을 마치고 영제와 십상시의 탄압 대상이었던 지방 유림 세력인 청류파에게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 위상이 크게 상승하게 된다.
지방 유림 세력이 반란에 합류할 것이 우려되었기에 당고는 해제되었고, 황건적의 난 진압에 합세했던 청류파들은 당고의 해제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했으며, 황건난 발발 이전부터 청류파를 규합하며 재야의 거두로 떠올라 있던 원소가 하진을 지지하면서 하진과 십상시와의 대립은 깊어져 갔다. 동시에 하 황후와 영제의 친어머니인 효인황후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
188년, 황건적의 난을 필두로 한 반란들이 대충 마무리되자 영제는 스스로 무상장군[8] 을 자칭하며 아껴두던 비자금을 풀어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를 설치하고, 십상시 중 하나인 건석을 상군 교위로 삼아 서원팔교위의 통수권을 맡겼고, 이하 중군 교위 원소, 하군 교위 포홍, 전군 교위 조조, 조군좌 교위 조융, 조군우 교위 풍방, 좌교위 하모, 우교위 순우경(淳于瓊)이 통솔했다.[9] 영제의 서원군 창설은 각지에서 반란이 잇다르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중앙군 강화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이며, 특히 상군 교위 건석은 무상 장군인 영제를 대리해 서원군을 지휘하는 형식으로 군부 최고위직인 대장군 하진조차 일개 교위인 건석의 명령에 따랐는데, 이는 하진에 대한 견제의 의미로 해석된다.
또 영제는 그해 유언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 제도를 부활시켰다. 원래 전한 시절 한성제 시절에 주목을 설치했다가 폐지한 것을 25년 후한이 건국된 이래로 주의 장관을 자사로 부르다가 야심을 품은 유언의 제의로 188년부터 일부 자사를 목으로 바꿔 불렀다. 이 정책은 후한의 호족들이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를 바탕으로 소작농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는 등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가, 후한 말기에 중앙 관리를 능가하는 세력을 가지게 되어 환제 대에는 호족들이 '우리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라는 말을 하고 다닐 정도로 그 횡포가 극에 달해, 후한 정권의 지방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데서 비롯된 것으로, 설상가상으로 영제의 실정으로 발생한 당고의 금,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각지의 난으로 인해 지방의 통제력이 더욱 약화된 후한 체제를 보완하기 위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중앙군의 강화를 노린 서원팔교위와 성격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목은 주의 관원들을 감독하는 감찰관일 뿐 아니라 주 전체를 다스리는 수장으로, 목이 되면 한 주의 군사력과 인력, 재력을 한손에 거머쥐게 되어 후한의 지방 자치화, 다르게 말하면 후한의 사분 오열을 가속화시켰다.[10]
황건적의 난이 진압되었지만, 난을 진압한 관리들은 후한의 분열을 이끌고 있었고, 이미 이때 후한은 국가 멸망 테크의 궤도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제는 이러한 혼란 속에 중병에 걸려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주색에 빠져서 몸에 많이 해를 끼쳤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일찍 사망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는 동씨인데 바로 하진, 영사황후와 대립하던 효인황후 동씨 되시겠다. 효인황후는 삼국지연의에서는 독살, 정사에서는 갑자기 죽었다고 하거나 병사했다고 하는데 정황상 연의처럼 독살당한 듯하다. 그의 죽음에 뒤이어 일어난 십상시의 난과 동탁의 집권은 한나라를 끝장내버렸다. '''한마디로 국민들에게 피해만 주고 죽어버린 더러운 황제다.''' 그래서 그의 시호도 어리석은 군주라는 뜻의 영(靈)이다.
3. 가족 관계
4. 평가 - '환령'의 말세
상인 마인드로 황제 짓을 하면 망한다는걸 보여준 반면교사이자 '''위진남북조라는 중국사 최악의 혼란기를 개막하신''' 위대한 황제 되시겠다. 후대의 진세조, 수양제, 당의종, 송휘종, 만력제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황제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황제로, 제갈량의 출사표에 따르면 유비와 제갈량은 후한이 어떻게 망했는지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하면서 환제와 영제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는데, 후한을 결정적으로 박살낸 것은 동탁이지만, 환제가 환관전횡의 배경을 조성했다면 영제는 망조든 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며 후한의 사회 체계 전체를 통째로 헤집어 놨고, 정통성 없는 동탁의 집권이라는 계기 하나만으로 겉껍데기만 남은 국가 시스템이 한 방에 공중분해되고 수십 년간의 내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놨기 때문. 이 시기 먹고살기 힘들어진 사람들은 옛 진나라에 의해 6국이 멸망하자 고조선으로 대거 이동한 것처럼 대규모로 이민갔다고 한다.
선황제였던 환제와 함께 세트로 엮여 아예 '환령(桓靈)'이라는 합성어가 만들어졌으며, 환령지말(桓靈之末)은 이 혼란했던 시대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환령지말은 한국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정사 삼국지 한조에서는 이 시기 살기 힘들어진 중국의 백성들이 한반도로 많이 유입됐다고 쓰고 있고 실제 고고학적으로도 이 시기 한반도 남부까지 기존과 다른 외부문물이 급증하기 때문이다.[13]
덧붙이면 그래도 환령 가운데서는 환제가 나았다고 볼 수 있다. 시법에서는 국토를 개척하고 먼 곳을 복속시킨 것을 '환(桓)'이라고 하며, 어지럽지만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을 '영(靈)'이라고 했다. 그래서 '환'이라는 시호는 제환공, 오나라 장사환왕 손책의 경우처럼 정말로 영토를 넓혀 국력을 향상시킨 군주가 받았던 반면, 영이라는 시호는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영공처럼 무도한 임금에게 내리는 시호였다. 그러나 환제 이후로 환과 영이라는 시호 모두 어리석은 임금에게 주는 시호가 되었고, "환령"은 동아시아 몇 천 년 역사 내내 암군의 대명사가 되어 자자손손 대차게 까이게 된다.
4.1. 의외의 면모, 그러나 혼군
의외로 문학에 관심이 많아 육조시대의 문학 평론서인 문심조룡에 따르면 영제가 때때로 저술에 몰두하며 글자에 관한 저서인 '황희편(皇羲篇)'을 썼으며, 홍도문을 열어서 문인들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영제가 들여온 문인들은 학식이 떨어지고 취향도 천박해서 채옹은 이들을 어릿광대에 비유했다고 하며, 문심조룡의 저자는 영제와 그 막하의 문인들이 남긴 글과 풍속들은 워낙 천박하여 기록으로 남을 만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라고 극딜했다.
자치통감에선 토로 교위 갑훈에게 연습한 무예를 자랑했는데, 갑훈이 '무사를 더럽혔을 뿐!'이라고 꾸짖었다. 평소 같으면 목이 날아갔을 일이었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는지 영제는 "그대를 늦게 본 것이 한스럽구나! 많은 신하들이 애초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갑훈을 칭찬했고, 갑훈은 원소에게 "황상을 직접 뵈니 매우 총명하신데 다만 좌우 사람들에게 가려졌을 뿐입니다."고 평가한 일화가 있으며. 말로만 칭찬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갑훈에게 여러 차례 자문을 구하며 나름대로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갑훈의 일화는 영제가 죽기 전 해의 시점인데 30대에 들어선 시점에서는 나이도 찬 데다, 그동안 싸지른 똥으로 이리저리 반란이 터지면서 어느 정도 현실을 인지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영제가 후계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상황에서 즉위한 탓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대의 사마염에 비하면 단순히 자신의 사치향략에만 돈을 쓴 게 아니라 국고도 나름대로 신경썼다. 그러나 돈을 밝힌다는 하나의 특성만으로 그야말로 암군의 전형이 되어버렸다. 요컨대 황제가 아니라 출신 그대로 장사치를 했어야 할 인물.
영제가 비판받는 것은 무엇보다 영제의 시대가 한나라를 살릴 마지막 골든타임이었다는 것이다. 영제는 저술 활동을 통해 나름대로 영민함을 뽐내는 등 적어도 지능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며, 기괴한 방향으로 추진력을 발휘해서(…) 문제였지만 나름대로 강단도 있는 군주였기에 마음만 먹었다면 환제 때의 적폐를 청산할 능력이 충분했다. 그러나 영제는 자기 대에 한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고, 단지 30대에 죽었기에 끝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십상시나 태평도 등으로 묻어가서 망정이지 중국사에 손꼽히는 암군으로 부족함이 없다.
5. 미디어 믹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주름, 노망, 노환 등의 표현을 써서 이 사람을 노약자로 표현했다. 그래서 늙어 죽은 영감처럼 표현했지만, 상술했던 것처럼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람이다. 고우영 삼국지 역시 이문열 평역 삼국지처럼 사리판단이 어둡고 어리석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창천항로에서는 생김새뿐만 아니라 지능 수준 또한 영락없는 아둔한 돼지로 나온다. 그나마 한 순간이지만 맨정신이 들 '''뻔'''했던 때가, 당고의 금에 대해 조조가 올렸던 상소를 받고 고심하는 장면. 그러나 그 직후 장양의 새치혀에 바로 넘어가며 장양에게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이 '''네가 하는 모든 일은 짐을 위한 것이겠지?''' 였다. 머리가 돌이 아니고서야 왕의 저런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할 놈은 없다. 그전에 애초부터 황제가 이러한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답이 없다. 조조는 이런 영제의 모습을 보고 한나라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는다.
성관계 중 하태후의 슴가에 눌려 질식사하는데, 원작에서는 그냥 와병 중에 하태후가 고의적으로 슴가로 질식사시킨다. 사망 이후에는 동탁에게 무덤을 파해쳐 고인능욕을 당한다. 성우는 뜻밖에도 사사키 노조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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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등장하며 애니메이션 성우는 모리카와 토시유키다. 여기서는 젊은 미남이지만 여전히 방탕하고 무능한 암군으로 등장한다. 목소리 못지 않게 외모 역시 멋지기는 한데 기존의 이미지와 비슷한 방탕한 생활이 나오며 얼마 가지 않아서 사망한다. 죽기 직전 병상에서괴로워 죽겠소(とてもつらい)라고 하는 장면은 일종의 네타화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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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삼국지톡에서도 놀다가 건강 망친 암군으로 묘사되는데 특히 황건적의 난 파트에선 황건적들이 나라 전토를 휘젓고 다니며 개판을 내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십상시랑 클럽에 가서 술판을 벌이는 걸 인수다구래무(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추태를 보였다. 이후 십상시의 난 파트에서 병사하는 것으로 퇴장.
삼국지 시리즈 중 몇 개의 게임 시리즈에서는 영제를 옹립하면 혜택을 볼 수 있기는 하다. 삼국지 6에서는 장각이 이끄는 황건 세력조차 장군직을 임명해 지휘 병력 수를 늘리려면 영제를 옹립해야만 하는 어이없는 상황도 나왔으나, 이후에는 황건 세력으로 플레이해서 영제가 있는 도시를 점령하면 자동으로 폐위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하진 이외의 세력으로 옹립하여 플레이하기에는 하진의 장수진이 빵빵하다. 조조, 원소, 유표#s-1 등이 하진의 수하 장수다. 물론 삼국지 10 이후 시리즈부터는 손견, 유비, 유언, 동탁이 종속되어 있지만 독립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떨어져 나간다. 그래도 나머지 부하들은 건재해서 장수진이 좋은 편이다. 영제를 옹립하기도 쉽지 않은 편인 데다가 삼국지 시리즈는 3탄이 189년에 시작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무조건 184년부터 시작하여 영제의 혜택을 받을 기회가 5년밖에 안 되므로 소제에 비하면 그나마 덜하지만 외면받는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하진의 죽음과 동탁의 낙양 입성으로 시작하는 고로 이 인물은 언급만 된다.
삼국지 가후전에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영제(삼국지 가후전) 문서 참조.
김경한 삼국지에서는 십상시에게 대놓고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연희 시리즈에서도 등장한 자세한 것은 영제(연희 시리즈) 참조
SD건담 삼국전에서는 동탁 자쿠에게 이미 시해당했다는 설정으로, 등장은 본디 없었으나 애니메이션에서 시해되는 장면이 나와 디자인이 공개되었다. 사실상 기존 미리샤(후한)의 마지막 황제였으며, 여기서는 딱히 암군이란 말이 없다. 초기 설정에서는 윙 건담 제로(EW)이 모티브였다는 루머가 있다.
삼촌과 같이 삼국연의(1994)에 단역으로나마 잠시 비춰졌다.(?)
토탈 워: 삼국의 DLC 천명에서 노식, 유총과 함께 한나라 진영의 플레이어블 군주로 등장했다. 토탈 워: 삼국/유굉 참조.
190년 캠페인에서는 사망한 상태이기에 182년 시점에서만 플레이가 가능하며[14] 부인 하태후와 함께 전장에서 사용할 수 없는 군주로 등장 한다. 영제로 플레이하지 않는 경우엔 189년에 영제가 붕어하면서 본격적인 군웅할거가 시작되나, 영제로 플레이하는 경우엔 자신의 사망을 선택할 수 있는 이벤트가 있어 역사 진행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군웅들은 한나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기에 빠른 황건적 진압이 필요하다. 장각 3형제를 죽여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면 엔딩이지만, 이 후에도 군웅들을 진압하고 영토를 수복해 한나라의 재건하란 미션이 주어져서 끝까지 진행하도록 이벤트가 주어진다.
6. 둘러보기
[1] 삼국지의 시작이 이 사람의 말년이어서 부각이 안 되는 감이 있는데 삼국시대 세 나라의 시조격 군웅들하고 같은 세대였다. 조조보다 1살 연하이며 손견과 동갑이다. 유비보다는 5살 연상. 후한이 얼마나 소년 황제 부자 국가였는지 알게 해주는 점.[2] 손자가 황제가 된 후 효원황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하씨도 효원황후로 추존되었다.[3] 익주목 유언의 아들 유장(劉璋)과 동명이인이다. 아들이 황제가 되자 그는 효인황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동씨도 효인황후로 추존되었다.[4] 선주전 주석. 이른바 '동태후'는 사실 황후였던 적이 없고, 친자인 영제에 의해 효인황후로 높여지고, 궁호를 영락(永樂)으로 하며 태후로 예우되었던 것이다. 동태후는 아들이 매관매직을 하는데 앞장서고, 자신이 직접 기른 진류왕을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는 등 영제의 혼치를 보태는 입장이었지만, 하태후와 하진에게 쫓겨나 귀양지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이유로 삼국지 소설 등에서는 상대적 보정을 받은 바 있다.[5] 중국사에 장군 놀이를 하는 황제는 간혹 있었으니 장군 행세는 그렇다고 쳐도 당시 천한 신분으로 여겨진 상인을 따라하면서 놀던 황제는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가난했던 기억이 정말 사무치게 박혀서 재물에 극도로 집착하게 된 듯하다.[6] 일반적 상황에서, 대신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정책현안을 황제에게 올리는데 황제는 검토한 다음 이걸 가부결정을 해야 한다. 가부결정에서 승인을 하면 옥새를 찍는 것이고 기각을 하면 옥새를 찍지 않는다. 물론 황제가 직접 생각해낸 정책현안은 자기가 직접 옥새를 찍으면 되기 때문에 굳이 가부결정을 할 필요는 없지만 명군 반열에 올라간 황제들은 이걸 대신들에게 물어보고 상의한 다음 결정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무를 열심히 보는 황제는 손에서 옥새가 떨어질 날이 없다.[7] 현대 국가들도 최고지도자(대통령이나 수상(의원내각제), 국왕 등)들이 의회에서 통과된 안건이나 행정명령을 발령해야 하는 상황에서 열심히 서명을 한다. 미국 대통령들을 보면 온갖 안건들에 대해 최종 가부를 결정할 때 서명(사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서명이 옛날 옥새 날인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8] 無上將軍으로 이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즉 최고의 장군이라는 의미로 144년 11월에 도적인 서봉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칭했던 적이 있다.[9] 이 중 원소, 조조는 후한에서 삼국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이끌 주역이 되어 적수가 되었으며 순우경은 원소의 부하가 되었다.[10] 영제 시절만 해도 마등, 한수, 공손찬, 동탁이 어느 정도 군벌화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들은 변경에서 강족, 선비 혹은 자기네들끼리 난투를 벌이느라 중앙정계 입장에서는 관심도 없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군벌화가 되는건 유언의 건의로 군정권을 가진 주목이 설치되면서부터였고 그전까지 한나라 내륙으로는 군벌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십상시의 난과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한 왕조의 영향력이 사라지면서 그때부터 군웅할거라는 군벌들의 난투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조정이 "인정해줄 테니까 우리한테 세금 꼬박꼬박 잘 바치고 개기지 마라"라면서 줬던 게 주목이라는 관직이었으니까.[11] 생전에는 후궁이었는데 헌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12]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사료에 某(아무개)라 되어 있다.[13] 서진 무제 사마염은 사예교의 유의에게 환령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왜냐하면 영제는 매관매직을 통한 수익의 일부나마 국고를 채우는 데 썼으나, 진 무제는 순수하게 비자금 조성에만 썼기 때문이다. 이에 사마염은 화를 내지 않고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 며 웃어넘겼는데, 영제는 이런 신하가 나오는 족족 목을 날렸으니 확실히 그런 점에서는 사마염이 영제보다 낫다고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후한 시대와 서진 시대에서 황제가 가지는 위상의 어마어마한 격차를 느낄 수 있다. 영제가 절대 왕권을 누리고 귀족과 관료, 지방 세력을 탄압하며 직언을 듣는 족족 목을 날리면서도 20년이 넘는 치세를 이어갔던 것과 대조적으로 서진의 황제권은 시작부터 무척 취약했기 때문.[14] 이는 184년에 사망한 장각 3형제와도 마찬가지. 노식의 경우 190년 캠페인에서 기용은 가능하지만 독자 세력으로 출현하지는 않으며, 유총 세력은 군웅할거에서도 플레이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