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1. 南宮
1.1. 성씨
1.2. 예조
2. 신라 왕조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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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 경북 경주 국립경주박물관 부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신라의 궁궐.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기록에서 신라의 남궁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음 보위를 이을 태자가 거주하는 동궁(東宮, 흔히 알려진 안압지), 진성여왕이 퇴임한 후 옮겨 살았던 북궁(北宮)은 언급되지만 남궁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그런데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의 신축 미술관과 기존 건물의 냉난방 상하수시설을 연결하기 위해 연결통로를 파는 과정에서 '남궁지인(南宮之印)'이라는 글이 새겨진 암기와가 출토되었다. 신라에 남궁이라는 별궁이 있었던 것이 밝혀진 것이다.[1]
그러고보면 1970년대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을 짓기 위해 기초공사를 했을 때도 엄청난 양의 석재가 나왔으며, 바로 옆의 석축만 남은 다리 일정교 실측조사 때도 단순히 남천을 건너는 다리가 아니라 어떤 중요한 시설로 이어지는 듯한 통로가 확인되기도 하는 등 정황상 경주박물관 미술관 근처가 남궁 터로 막연히 추정되었다.
그런데 2006년에는 뜬금없이 경주 시내 반대편인 북쪽 동천동에서 또다시 남궁지인(南宮之印)이라고 쓰인 다른 기와가 나왔다. ##남쪽 궁이라는 이름을 봐선 경주 월성 남쪽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위치는 오리무중인 상태. 그런데 만약 박물관이 진짜로 남궁터에 지어졌다면, 아파트로 뒤덮인 서울의 풍납토성이 그렇듯 언젠가 박물관을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안내문에서 '남궁,경주박물관 부지,'라고 써 놓는 등 사실상 남궁의 존재와 위치는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3. 고려 왕조의 궁궐
'''南宮'''
고려 왕조에 있던 궁궐. 본궐 기준 남쪽에 있던 궁전이라 남궁이라 한듯하다. 고려 왕조 땐 남궁이라 불린 궁궐이 두 곳 있었다.
3.1. 태조 대 남궁: ???
935년 3월 (후)백제 왕실에서 내분이 일어난다. 당시 군주 견훤의 장남 신검이 4남 금강을 암살한 뒤, 견훤을 폐위해 금산사에 유폐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이다.
당시 고려는 태조의 재위 18년 차였는데 3개월이 지난 6월에 견훤은 결국 고려에 귀순을 결심, 투항해버린다. 이에 태조는 견훤에게 상보라는 존칭으로 부르며 환대해주었다.
백제대왕(百濟大王)에서 고려상보(高麗尙父)가 된 견훤은 봉지로 양주[2] 를 하사 받고 남궁(南宮)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 때의 남궁은 이름이 남궁인지 아님 이름이 따로 있는데 그냥 남쪽에 있어서 남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건지는 모른다.
3.2. 인종 대 남궁: 연덕궁
고려사에서 두 번째 남궁은 인종 대에 언급된다. 고려 역사상 최악의 간신 중 하나인 이자겸과 척준경이 인종을 강제로 남궁(南宮)에 이주시켰다. 인종은 그들의 흑심을 짐작하고 선대 군주의 어진을 우물 속에 숨긴 뒤 말을 타고 남궁으로 간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인종의 호위하던 신하들을 모조리 죽인 뒤, 본궐을 싸그리 불태운다. 이 때 이를 바득바득 간 인종은 나중에 이자겸과 척준경 본인, 그들의 가족, 수하를 모조리 유배보내거나 죽임으로서 갚아준다.
이때의 남궁은 바로 연덕궁으로 현종 원문대왕 시기에 만들어진 별궁이다. 원래 군주가 왕후, 비에게 하사하는 궁궐이었지만 점차 군주의 별궁 기능도 같이 겸하게 되었다.
처음 현종 대엔 안복궁(安福宮)이란 이름이었고 원혜태후가 안복궁주로 봉해졌다.
이후 태후가 아들 문종을 낳으면서 연덕궁(延德宮)으로 개칭되고 연덕궁주로 다시 봉해진다. 이후 문종의 왕후 인예순덕태후가 연덕궁주로 봉해졌고 숙종의 왕후 명의태후가, 예종의 왕후인 문경태후, 인종의 왕후인 폐비 이씨, 공예태후에게 봉해졌다. 이후 강종의 왕후 원덕태후가 마지막으로 연덕궁주에 봉해졌다.
이후 충숙왕이 영안궁(永安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면은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왕후들이 연덕궁의 주인이 되었다. 이를 보아 연덕궁은 나름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