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흐슈테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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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3년 9월 20일 바이에른의 회흐슈테트 인근에서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과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이 완승을 거두고 전쟁 초반의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2. 배경
1700년 11월 1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사망했다. 카를로스 2세는 죽기 전 루이 14세의 외손자이며 자신의 이복 누나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1] 를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이에 대해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열강들은 필리프가 스페인 국왕이 되면 프랑스에게 귀속되면서 가뜩이나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야욕으로 가득찬 루이 14세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장될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곧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 대공[2] 를 내세웠다.
이후 양측은 첨예한 갈등을 벌이다가 1701년 7월 1일 이탈리아의 카르피에서 벌어진 전투를 시작으로 장장 14년에 걸친 전쟁의 막이 올랐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독일의 연방 국가들은 대부분 제국의 우두머리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를 지지했지만, 바이에른은 프랑스를 지지했다.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위를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자신이 속한 비텔스바흐 가문으로 대체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가 플랑드르 침공을 묵인해주는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를 퇴위시킨 후 자신을 새 황제로 추대하는 밀약을 맺었다.
1702년 9월,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이 밀약에 따라 바이에른군과 합세하기 위해 진군을 개시했다.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은 프랑스군이 바이에른군과 합세하는 걸 막으려 했지만 프리들링겐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도 라인강을 도하하는 걸 허용한 뒤 철수했다. 이후 막시밀리안 2세는 공식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선전포고하고 프랑스군에 합세했고, 바덴 변경백은 바이에른 일대에서 철수했다.
1703년 6월, 바이에른군과 합세한 빌라르 원수는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 7만 명을 이끌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심지인 빈을 곧장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2세는 적의 저항이 거셀 거라면서 티롤로 진격해 이탈리아에서 북상하고 있는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의 프랑스군과 합세하자고 주장했다. 루이 14세는 막시밀리안 2세의 주장이 일리있다고 판단하고 방돔 공작에게 빨리 티롤로 진군하라고 지시했지만, 방돔 공작은 사부아 공국의 아마데우스 2세가 프랑스에게 등을 돌릴 우려가 있고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네덜란드-영국 연합 함대가 보급로를 차단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북상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막시밀리안 2세는 빌라르의 반대를 무시하고 바이에른군 단독으로 티롤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던 1703년 9월 5일, 바덴 변경백 막시밀리안 2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다뉴브 강을 건너 아우크스부르크를 점령했다. 그는 아우구스부르크 일대를 장악함으로서 프랑스군과 바이에른군의 사이를 갈라놓고 바이에른군을 고립시키려 했다. 또한 림뷔르흐 스티럼 장군이 이끄는 16,000명의 병력(프로이센군 포함)은 다뉴브 강 북쪽의 회흐슈테트에 주둔해 아군의 후방을 경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소식을 접한 막시밀리안 2세는 급히 빌라르 원수와 합세하고자 티롤에서 북상했다. 빌라르는 적이 대다수 병력을 이끌고 아우크스부르크로 남하한 틈을 타 회흐슈테트에 주둔한 적을 격멸하고기로 마음먹고, 막시밀리안 2세에게 전령을 보내 회흐슈테트로 진군해 적을 공격하라고 요청한 뒤 듀송 장군에게 프랑스군 7천 명을 이끌고 회흐슈테트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을 치게 했다. 이리하여 회흐슈테트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 바이에른 동맹군
- 프랑스군 사령관: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 바이에른군 사령관: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 병력: 24,000명
3.2. 오스트리아군-프로이센 연합군
-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림뷔르흐 스티럼
- 프로이센군 사령관: 안할트-데사우 공자 레오폴트 1세
- 병력: 16,000명
4. 전투 경과
1703년 9월 20일, 듀송이 이끄는 프랑스군 7천 명이 회흐슈테트 인근에 도착했다. 그는 대열을 형성한 뒤 오스트리아군 진영에 대한 빌라르 원수의 공격 지시, 즉 후방에서 대포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오전 8시 경, 행진을 지시하는 나팔 소리가 울러퍼지고 신성 로마 제국의 깃발이 나타나자, 듀송은 빌라르가 공격을 연기했고 적이 역습을 가해오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급히 제 위치를 사수하고자 군대를 재배치했다. 이후 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자신들을 치러 오는 오스트리아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9시 30분이되자 더이상 적의 진격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한 듀송은 빌라르에게 전령을 보내 지원을 호소한 뒤 퇴각했다.
스티럼은 듀송의 프랑스군을 가볍게 격파한 뒤 퇴각하는 적을 계속 추격했다. 이때, 그는 대규모의 프랑스군이 동쪽에서 회흐슈테트로 접근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했다. 이에 스티럼은 듀송의 군대가 적군의 일부였음을 깨닫고 전군에 서둘러 숙영지로 돌아가 제2의 전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오전 10시경, 안할트-데사우 공자 레오폴트 1세는 좌익에 군대를 배치했고, 스티럼의 본대는 우익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군대 배치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이 들이닥치면서 전투는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빌라르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에게 뇌르틀링겐으로 향하는 도로를 점거해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해 달라고 요청했고 막시밀리안 2세는 이에 따랐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길을 가로막은 적을 향해 일제사격을 퍼부어 퇴로를 뚫는데 성공했다. 한편 빌라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한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기병대로 공격하고 정면에 보병대로 하여금 총검 돌격을 감행하게 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뇌르틀링겐으로 향하는 길을 향해 도주했다.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은 그런 적을 추격했지만 안할트-데사우 공자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맹렬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결국 더이상 쫓지 못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이 질서정연하게 철수하면서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은 회흐슈테트 전투에서 천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반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의 사상자는 5천여 명이었다. 스티럼은 전투에서 패한 뒤 북쪽으로 퇴각했고, 바덴 변경백 역시 바로 진영을 거두고 라인강으로 퇴각했다. 이후 빌라르와 막시밀리안 2세는 빈 습격 작전을 검토했지만,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결국 루이14세는 빌라르를 소환해 프랑스 남부에서 발생한 위그노 반란 진압을 맡기고 마르생 백작 페르디낭을 파견해 막시밀리안 2세와 함께 하게 했다. 이후 루이 14세는 이듬해인 1704년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해 적을 단숨에 분쇄시키려 했지만, 블레넘 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대패를 당하면서 모든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