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트 1세

 




[image]
'''휘'''
레오폴트 이그나츠 요제프 발타자어 펠리치안
(Leopold Ignaz Joseph Balthasar Felician)
'''출생'''
1640년 6월 9일
오스트리아
'''사망'''
1705년 5월 5일 (64세)
오스트리아
'''재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1658년 7월 18일 ~ 1705년 5월 5일
'''배우자'''
스페인마르가리타 테레사
(1666년 결혼 / 1673년 사망)
오스트리아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
(1673년 결혼 / 1676년 사망)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나
(1676년 결혼)
'''자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프 1세
마리아 엘리자베트
레오폴트 요제프
마리아 아나
마리아 테레지아
카를 6세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막달레나
'''손녀'''
마리아 테레지아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
'''어머니'''
오스트리아마리아 아나
'''형제자매'''
페르디난트 4세
마리아나
1. 소개
2. 생애
3. 평가
4. 가족관계
5. 음악적 재능


1. 소개


기존에 본 문서에 레오폴트 1세를 암군으로 철저히 평가 절하하는 내용이 쓰여 있지만, 사실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걸출한 업적을 남긴 황제 중 한 명이다. 레오폴트 1세는 개인적으로 부침은 있었지만 걸출한 외교력과 군사력으로 오스만 제국을 발칸 반도에서 몰아내며 근대 유럽의 판세를 바꾸어 놓았고, 이를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와 오스트리아의 중흥의 기반을 만들었다. 또 발칸 반도의 유럽인들에게는 이슬람의 지배와 압재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준 황제다.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는 평까지 들을 정도로 치세가 모두 전쟁으로 도배되었던, 유럽의 격동기를 살았던 신성 로마 제국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마리아 안나[1]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2]

2. 생애


원래는 형이 제위를 계승할 예정이었기에, 어린 나이서부터 가톨릭 신학교로 들어가 종교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3]레오폴트는 프랑스어를 싫어해 궁중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형 페르디난트 4세가 1654년 이른 나이에 천연두로 급사하면서 갑작스레 제위 계승을 준비하게 되었고, 뒤이어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가 1657년에 죽으면서 얼떨결에 1658년 황제가 되었다.
그가 만 18세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오른 데다, 30년전쟁으로 피폐해진 오스트리아를 맡아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거기다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영원한 원수, 프랑스부르봉 왕조는 그의 제위계승을 방해하는 공작까지 펼쳤다. 프랑스의 재상이었던 쥘 마자랭이 바이에른의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4][5] 를 황제에 옹립하려 한 것이다.
결국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로부터 제위계승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인 스페인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 술 더 떠, 프랑스와 스페인 영토를 균등분할하기로 합의한 사실까지 탄로나면서[6] 스페인에서의 감정이 크게 나빠졌다.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단절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 레오폴트는 그 대신 라인 연맹[7]에 가담하였다.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헝가리의 게오르그 라코치[8]와 짜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자 폴란드와 연합하여 대항하기도 했다. 거기다 영원한 숙적 프랑스는, 태양왕이라 불린 루이 14세의 통치하에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펼치면서 오스트리아와 잦은 충돌을 벌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의 맹공으로 여러 차례 불리한 상황에 놓이곤 했다. 거기다가 프랑스가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과 공수동맹까지 맺어, 오스만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세를 받았다. 1663년에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는 향후 20년간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맺었다. 1683년 제2차 빈 포위때에는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기도 했다. 다행히 폴란드-리투아니아얀 3세(얀 소비에스키)의 도움으로 위기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뛰어난 장군인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으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면서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맺어 헝가리를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그와 더불어 헝가리 의회에게 합스부르크 가가 헝가리의 왕위를 세습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169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낼 때는 슈트라스부르크를 프랑스에 내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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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2년의 그. 벤야민 폰 블로크(Benjamin von Block) 작
그러면서도 잦은 전쟁으로 파탄난 재정을 메꾸기 위해 헝가리 지방을 착취하다 분노한 헝가리인들의 대규모 반란에 직면하게 되어, 이를 진압한다고 착취한 거보다 더 큰 전비를 쓰는가 하면(…), 대외전쟁에서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보니 이들에게 저자세로 나가며 우대책을 써야하기도 했다. 1663년에는 제국의회가 해산되고 레겐스부르크 회의가 새로 만들어졌다. 또 하노버 공작이 선제후가 되었다.[9] 이는 안 그래도 결속력이 약한 신성 로마 제국에 큰 타격이었다. 이 와중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 왕의 지위를 내려 프로이센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는데[10][11], 반 세기 후에 일어난 일을 생각한다면….[12]
그걸로 부족해 철저한 가톨릭 국가답게 신교에 대한 탄압에 더더욱 박차를 가해서 상공업의 발전도 지지부진. 특히 오스트리아의 상공인 계층은 개신교 신자가 많았기에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죄다 프랑스[13]네덜란드 등지[14]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그나마 오스트리아가 낳은 불세출의 명장인 사부아 공자 외젠 덕분에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거듭된 전쟁과 외교, 내치의 실패는 제국에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를 가져다 주었다.
말년에는 자신이 버리다시피 한 스페인 왕위가 부르봉 왕조에 간다는 사실에 스페인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개입하여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전쟁 중인 1705년에 64세의 나이로 죽었다.

3. 평가


나무위키의 기존 문서에는 이상하리 만큼 레오폴트 1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있다. 루이 14세와 견줄 정도의 암군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 전문가들의 평가는 전혀 그렇지 않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근대 유럽 역사를 관심있게 보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레오폴트 1세는 절대로 암군으로 평가절하할 만한 인물이 아니며, 동유럽과 발칸반도의 역사가 관심을 못받아서 그렇지, 레오폴트 1세는 근대 유럽을 통털어서 가장 유능하고 수완이 뛰어난 군주 중 한명이었다.
네이버 지식평가에서 연재중인 주경철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의 서양근대인물열전을 봐도 레오폴트 1세는 유능한 군주로 높이 평가되어 있다. 레오폴드 1세는 '''외교적으로 뛰어난 인물'''로 그 전까지 경쟁관계이던 폴란드를 끌어들여 제2차 빈 포위를 풀게 만드는 등 오스만 투르크 및 유럽 다른 국가들 왕들에 비해 외교적 평범함을 넘어서 그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월등한 인물'''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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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풍으로 묘사된 레오폴트 1세와 가족들.
중앙의 레오폴트 1세와 좌측에 요제프 1세가 있고 우측에는 카를 6세가 서있다.
샤를 브와(Charles Boit) 작, 1703년
레오폴트 1세는 세 번 결혼하였는데 첫째 황후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15]였고 두번째 황후는 티롤의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였는데 두 부인 다 22살에 사망했다(...). 세번째 황후는 팔츠의 엘레노오레[16]였는데 10명의 자녀들을 낳았다. 요제프 1세카를 6세가 이 두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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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황후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년 7월 12일 ~ 1673년 3월 12일)[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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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황후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1653년 5월 30일 ~ 1676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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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황후 엘레오노레 막달레네(1655년 1월 6일 ~ 1720년 1월 19일)

5. 음악적 재능


그는 증손자 요제프 2세와 마찬가지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미사(음악)이나 오라토리오 무용조곡[18]들을 작곡했으며, 그의 전처 마르가리타가 죽었을 때도 자신이 직접 레퀴엠을 작곡할 정도였으니... 사냥과 승마에도 취미가 있었다.

[1] 스페인 왕 펠리페 3세의 딸. 참고로 루이 14세는 펠리페 3세의 큰딸의 아들이니 이종사촌 형이다.[2] 페르디난트와 안나는 서로 사촌이었다.[3] 그렇다고 순수한 종교인은 아니다. 왕위계승에서 밀린 유럽 왕실의 일원들은 이렇게 교회에 들어갔다 이후 대주교나 추기경까지 올라가서 다른 의미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일본의 다이묘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차남 이하는 승려가 되는게 관례였다. 이렇게 종교인이 된 귀족들은 사생아를 두기도 했다.[4] 루이 14세의 아들인 그랑 도팽 루이의 장인이다. 프랑스는 이러한 것을 한 번 더 벌이는데 1690년대 요제프 1세를 로마왕으로 선출할 당시 바이에른을 포섭하고 팔츠 계승전쟁으로 팔츠를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에게 내주어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바이에른의 반대로 무산된다.[5] 안습하게도 이 사람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엠마누엘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장남이 스페인 왕이 되지 못하자 왕이 되려는 욕구를 버리지 못해 프랑스를 믿고 레오폴트에게 대들다가 블렌하임에서 털린다. 손자인 카를 알브레히트?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6]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1670년에 분할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에 의하면 프랑스가 저지대와 북아프리카, 남부 이탈리아, 나바라를 얻고 오스트리아가 아메리카와 스페인 본토, 북부 이탈리아를 얻는 것이었다고. 그러나 당시 레오폴트에게는 마리아 안토니아를 제외하고 후사가 없었지만 루이 14세에게는 후사(그랑 도팽)가 있어서 후일 자신이 모든 영토를 상속받게 될 것이라 짐작한 루이 14세는 바이에른 선제후와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바이에른에게 주고 자신이 스페인과 부속 영토 전체를 차지하기로 하지만 이 계획은 바이에른 선제후가 반대하고 레오폴트가 후사를 얻음에 따라 유야무야 된다.[7] 독일 제후들의 연합[8] 헝가리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다.[9] 자신의 아들인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신교도 가문인 브라운슈바이크 가문의 딸과 결혼시키는데, 이 가문이 선제후가 됨에 따라 동맹을 강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뤼네부르크 계는 훗 날 영국 왕실이 되는 하노버 왕조이고 볼펜뷔텐계는 주로 프로이센과의 연관성이 깊은데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프로이센 원수인 페르디난트 공작이 볼펜뷔텐 계의 수장이다. 거기다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비 역시도 이 가문 출신[10] 정확히는 폴란드의 형식적인 봉신국이던 프로이센 공국을 왕국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즉, 프로이센 왕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동군연합이 이루어진 것인데 다들 프로이센 왕국이라고 하는 것.[11] 이 때는 프로이센'''에서의''' 왕으로 칭했다. (King in)[12] 사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상당히 있는 부분인데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제 1적은 프랑스였다. 특히 프랑스는 당시 유럽의 인구대국으로 국력에서 신성로마제국에게 지지않는 강대국이었다. 그러다보니 얘네를 확실히 막아야 하는 레오폴트 입장에서는 자신을 제대로 지지해줄 세력이 '''하나라도 더 필요했다'''.(당장 자기 손녀인 '''그 마리아 테레지아''' 조차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프로이센-프랑스-스페인-러시아가 제국 내의 바이에른, 팔츠, 작센과 연합했고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게 떼어 준 후에야 해결'''되었음을 생각해라) 그리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의 주요원인은 자기 아들인 카를 6세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지 이 사람이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아울러 이 사람은 희대의 군사 천재가 그 나라에서 나와 강대국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는 못했고. 더군다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를 왕으로 만들어 준 것은 황제 선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경향이 강했고 왕이 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에 파병을 해야 했으며 칭호 역시도 King in prussia 라는 조금 격이 낮은 칭호를 써야 했다. 하노버 공작조차도 후일 보면 알겠지만 영국 국왕이 된 후에도 7년 전쟁을 제외하고 아메리카 식민지 문제를 위해서 합스부르크 가와 가까운 사이였다.[13] 낭트 칙령이 폐지된 건 1685년이라 그때까진 프랑스는 개신교를 차별하지 않았기에 주로 프랑스로 도피했다.[14] 여긴 프랑스가 위그노 학살 할때부터 전통의 종교적 망명의 땅.[15] 자신의 외삼촌 펠리페 4세와 누나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딸로 카를로스 2세의 누나이다. 즉 외조카 겸 외사촌 동생(...)과 결혼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약하고 지적 장애가 있는 카를로스와 달리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머리가 좋고 예술에도 관심이 있어 사이가 좋았다. [16]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딸로 듣보잡이었다가 갑자기 선제후가 된 필리프 빌헬름은 팔츠 선제후위가 자신의 동생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전국구 깡패를 막기 위해 사위에게 의존한다. 심지어 또 다른 딸은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에게 시집보내 동맹을 강화하려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외손녀 사위인 펠리페 5세는 루이 14세의 손자이고 카를로스 3세부터 스페인 왕(+부르봉 파르마 공작, +부르봉 양시칠리아)은 모두 이 사람의 후손이다. [17] [image]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라스 메니나스'에 나오는 어린 공주가 바로 이 사람. 출산 후 22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레오폴트는 평생 이 아내를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두 부부의 사위인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엠마누엘은 자기 매형인 그랑 도팽 루이와 당숙 루이 14세를 믿고 스페인 왕위 전쟁 때 프랑스 편을 들다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블레넘 전투라미예 전투에서 '''56,000명 중 34,000명 사상자'''라는 교환비를 내며 존 처칠에게 털린다.
[18] 오페라 황금사과의 오라토리오를 썼는데, 상당한 걸작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