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2세

 




[image]
'''왕호'''
카를로스 2세 (Carlos II)
'''출생'''
1661년 11월 6일
스페인 마드리드 알카사르
'''사망'''
1700년 11월 1일 (38세)
스페인 마드리드 알카사르
'''재위'''
스페인 왕국의 왕 등
1665년 9월 17일 ~ 1700년 11월 1일
'''배우자'''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 (1679년 결혼 / 1689년 사망)
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아나 (1689년 결혼)
'''아버지'''
펠리페 4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형제'''
마르가리타 테레사[1], 펠리페 프로스페로[2]
'''서명'''
[image]
1. 소개
2. 왕위 계승 사연과 어린 시절
3. 근친혼의 결정체
4. 스페인의 쇠퇴
5. 가족관계
5.1. 조상
5.2. 결혼과 후계


1. 소개


통일 스페인의 제5대 국왕이자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 재위 1665~1700. 일명 '''바보왕'''(El hechizado)[3]
1661년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그의 두 번째 왕후 사이에서 4남으로 출생했다. 펠리페 4세의 다른 아들들이 전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카를로스 2세의 출생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있어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그가 성장하면서 그 기쁨은 한숨으로 바뀌게 되고 나중에는 이웃 나라에서 왕을 수입해 오는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2. 왕위 계승 사연과 어린 시절


원래 4남이라서 왕이 될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의 형들이 전부 요절했기에 왕위 계승자가 된다. 그의 큰형이자 펠리페 4세의 장남이었던 돈 발타사르 카를로스[4]는 카를로스 2세보다 무려 32년이나 앞서 태어났다. 펠리페 4세도 이 장남에게 상당한 기대를 가졌으나 16살 때 병에 걸려서 죽게 된다. 차남 펠리페 프로스페로는 4살 때에 사망했고, 3남 토마스 카를로스 역시 1살의 나이에 죽게 되어 살아남은 카를로스 2세가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카를로스 2세는 몸이 매우 허약하여 6세가 되어서야 젖을 뗐으며 걸음마도 매우 늦었다. 이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을 수가 없었다. 또 10살 때까지 유모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665년 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모후 마리아나가 섭정을 하게 된다.

3. 근친혼의 결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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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1st Cousins는 사촌, 2nd Cousins는 육촌을 의미한다. inbred level은 근친도 정도로 높을수록 유전병 등의 발현 확률이 높다.
합스부르크 가문근친혼이 너무 심했는데 카를로스 2세는 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부모에 이르기까지 5~6대에 걸쳐 계속 사촌, 육촌 또는 숙질 사이의 근친혼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근친혼이 없는 경우에는 부계로 치면 5대 조상이고 모계로치면 6대 조상이 족보의 시작점인데, 근친혼이 하나도 없었더라면[5] 5대 핏줄은 16명에게, 6대는 32명의 핏줄이 섞여야 할 것이나 그의 5대, 혹은 6대 조상[6]필리프-후아나[7]와 그 둘 사이의 장남 카를 5세를 비롯해 몇 명 없다.
주걱턱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의 대표적인 집안 내력인데, 카를로스 2세의 경우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턱뼈가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바람에 입을 제대로 다물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서 침을 자주 흘리고 음식을 씹지 못했다. 게다가 35세에 탈모가 와서 대머리가 되었고 상체가 큰데 비해 하체는 지나치게 가늘고 짧아 '''다리가 상체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서''' 제대로 서 있지 못했으며 절름발이가 되었다. 더욱이 뇌전증을 앓는데다 혀도 커서 말을 하기에 거북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백치 수준까진 아니라도 낮은 지능의 소유자였다.[8] 위에서 나온 '''바보왕'''이라는 별명은 정말 농담이 아니었던 셈.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카를로스 2세의 뇌하수체 호르몬에 이상이 있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친누나인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동생처럼 장애나 저지능, 심각한 만성 질환에 고통받지 않고 멀쩡하게 자랐다. 결혼 후 요절한 이유도 유전병이 아닌 유산의 후유증 때문으로 보인다.[9] 심신이 이상하기는커녕 아름답고 명랑하며 머리도 좋아서 아버지인 펠리페 4세의 애정을 독차지했고 남편도 그녀를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두 가지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동일한 근친 계수를 지닌 자손들도 상태는 제각기 달리 나올 수 있는데,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운이 좋았고 카를로스 2세와 나머지 형제들은 운이 없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카를로스 2세가 어릴 때 옮은 병(헤르페스 혹은 수두)이 심신에 강한 후유증을 남겼는데 그게 근친상간의 결과물로 오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4. 스페인의 쇠퇴


국왕의 상태가 무척 나빴음에도 국정 운영이 가능했던 건 섭정이 대신 통치를 했기 때문이다. 모후 마리아나[10]는 10년간 섭정을 했는데, 카를로스의 이복형이자 펠리페 4세의 사생아, 돈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11]는 이걸 아니꼽게 봤다.[12] 결국 돈 후안은 군대와 귀족들의 도움으로 마리아나를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다.[13] 그는 카를로스 2세에게 그리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서, 국왕에게는 머리만 빗고 나오라고 부탁했고 통치는 본인이 했다.[14] 그러나 섭정이 된지 3년만인 1679년에 후안이 사망하자 다시 마리아나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만 19세가 되는 해인 1680년에 종교재판이 열렸는데 이때 카를로스 2세는 교회가 종교재판을 하는 것을 묵인하여 120명이 체포되고 그중 21명이 화형당한 것을 사실상 모른체 했다. 스페인 종교 재판이라는 게 세간의 상상과 달리 종교 재판소 설립 초기와 종교 개혁 초기 시절에나 열정적으로 활동했지, 그 시대의 대부분은 대규모의 체포나 탄압을 벌일 능력도, 의지도 없는 기관이었다. 오히려 실질적으로는 당시 교회의 관할이었던 결혼 문제, 즉 상속과 이혼소송을 전담하는 기관이라 평소에는 '아 그런 기관도 있었지' 하는 식으로 스페인 사회의 일상에서나 정계에서나 그리 설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방관 아래 교회 권력자들의 내분이 결국 종교 재판소의 대대적인 동원을 야기하여 스캔들이 된 것이다. 이후에 귀족들의 압력을 받아 진상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무능한 카를로스 2세가 종교재판소의 말에 혹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되도록 방조하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2세는 병약하여 실질적으로 통치를 하지 못했으므로, 오히려 당시의 섭정 및 관료들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래도 통치를 아예 못할 정도의 지능은 아니었는지 섭정 모후가 물러난 후 카를로스 2세는 드디어 친정을 시작하였다. 사실 카를로스 2세 이전의 스페인 국왕들은 정사를 직접 보지 않고 총신들에게 나라를 맡겼지만, 이 체제는 행정 체제의 심각한 부패를 야기했다. 이를 혁파하기 위해 카를로스 2세는 총신을 두지 않고 직접 정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위 관료들과 각 지방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데다, 당시 스페인의 경제는 이전 정부들의 실정과 전쟁, 기근 탓에 깊이 침체되어 있었다. 그래서 설령 능력이 좋은 국왕이 정사를 돌보아도 스페인은 나라 형편이 나아지기는 힘들었을 상황이었다. 게다가 국왕 카를로스 본인의 건강이 너무 안 좋고 능력이 따라주지 못해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결국 카를로스 2세의 무능은 전 유럽에 알려졌으며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또한 카를로스 1세가 구축한 이탈리아의 점령지는 이 시기까지도 유효했으나 카를로스 2세가 자식없이 사망하면서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상실했다.[15] 결과적으로 국력 탈진 때문에 수세에 몰려가던 스페인 제국의 몰락을 방치한 암군이다. 그러나 이는 조상들의 근친혼으로 인해 가지게 된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결함이 원인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관점에서 카를로스 2세가 직접 비판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이 사람의 결점은 그냥 생물학적 존재 그 자체(...)였고 그것은 그의 잘못이 결코 아니라 지나치게 가까운 친척들끼리 결혼을 계속해온 조상들 탓이었기 때문이다.

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카를로스 2세
(Carlos II)
펠리페 4세
(Philip IV)
펠리페 3세
(Philip III)
펠리페 2세
(Philip II)
오스트리아의 아나
(Anna of Austria)[16]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Margaret of Austria)[A]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
(Charles II, Archduke of Inner Austria)[17]
바이에른의 공녀 마리아 안나
(Maria Anna of Bavaria)[18]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Mariana of Austria)
페르디난트 3세
(Ferdinand III)
페르디난트 2세
(Ferdinand II)
바이에른의 공녀 마리아 안나
(Maria Anna of Bavaria)[19]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of Austria)
펠리페 3세
(Philip III)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Margaret of Austria)[A]

5.2. 결혼과 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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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2세는 루이 14세의 질녀인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1662~1689)[21]와 결혼했다. 마리 루이즈는 원래 그랑 도팽 루이와 결혼하고 싶어 했으나 루이 14세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22][23]
둘의 사이는 처음에는 좋지 못했다. 외모가 흉하고 지능도 정상 이하인데다 성불구자인[24] 왕을 남편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마리 루이즈는 자기 운명을 비관했다고 한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모자라긴 했지만 헌신적인 남편이었고, 마리 루이즈를 위해 심부름을 하거나 프랑스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등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지나자 마리 루이즈도 카를로스를 남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마리 루이즈는 낯선 스페인 궁정에서 적국의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굉장히 박한 대접을 받고 있었고, 후계자를 생산하라는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에게 친절한 사람은 모자란 남편 한 사람뿐이었으니,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1689년 마리 루이즈가 식중독 혹은 맹장염으로 추정되는 병 때문에[25] 급사하자, 카를로스 2세는 무척 슬퍼하였다.
혼자가 된 카를로스 2세는 여러 공주들과 혼담이 오갔고, 최종적으로 2명의 공주들이 카를로스의 신붓감 후보에 오르게 된다. 한 명은 토스카나 대공 코지모 3세의 딸이자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예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였다. 다른 한 명은 팔츠 노이부르크 선제후의 딸인 마리아 안나였다. 이때 카를로스는 두 공주의 초상화를 받게 되었는데, 초상화를 본 카를로스는 "메디치 가 공주는 굉장히 아름답고, 팔츠 공주는 평범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던 마리 루이즈의 초상화를 보고 "이 공주가 가장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며 죽은 아내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정치적 상황들로 인해 카를로스는 마리아 안나와 결혼하게 되었다.[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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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부인은 팔츠 노이부르크 선제후의 딸인 마리아 안나(1667~1740)[28][29]였다. 그녀는 레오폴트 1세의 처제가 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도 아무런 자녀가 없었으며 남편을 존중해주던 첫째부인과 달리 마리아 안나는 인성도 좋지못하고 남편을 우습게보아 카를로스 2세는 그야말로 무능한 남편이 권력을 등에 업은 아내에게 당할 수 있는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일례로 마리아 안나는 스페인에 있는 각종 비싼 그림을 훔쳐서 친정에 보낸 적도 있고 이에 카를로스가 반발하자 오히려 화를 냈다. 또한 자신의 보석이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보다 적어 화를 낸 적도 있다고 한다. 이는 '''스페인 내부문제는 알바 아니던 프랑스인들조차 이건 참지 못해''' 펠리페 5세를 시켜 이 인간을 성에 유폐시킨다. 이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영국과 블레넘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바르셀로나를 점령하여 근거지를 확보한 덕에 풀려날 뻔 하다가 요제프 1세의 후사 없는 죽음으로 카를 6세가 신성로마 황제가 되고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으로 정식 승인받자 프랑스로 아예 쫓겨난다. 그리고 죽기 1년 전인 1739년에 74세로 돌아오게 된다. 게다가 마리아 안나는 성추문도 굉장히 많았는데, 어떤 백작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가 생 제르맹 백작이라는 설도 있다.
1690년대 말에 이르러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카를로스 2세에게 후계자를 지명하라는 압력이 강해졌으며[30] 카를로스 2세 자신도 이 점을 의식하여 후계자 지명을 최종 결정한다. 그에게는 자식은 없었지만 친척 중에서 유력한 후계자가 둘 있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와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 대공이다. 카를로스 2세의 조부인 펠리페 3세의 장녀(안 도트리슈)는 루이 14세의 모친이고, 차녀(마리아 아나)는 레오폴트 1세의 모친으로 둘 다 카를로스 2세의 고종사촌이다. 거기에 이 둘은 카를로스의 누이들(마리아 테레사&루이 14세, 마르게리타 테레사&레오폴트 1세)과 결혼했기 때문에, 저 둘은 카를로스 2세의 매형이 되기도 한다. 다만, 루이 14세의 아내(마리아 테레사)는 카를로스 2세의 이복누이라서 혈연 관계로 보았을 때 필리프가 더 유력한 후계자였다. 근데 또 루이 14세의 모후(안 도트리슈-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테의 장녀)와 아내(마리아 테레사-펠리페 4세와 프랑스의 엘리자베스의 장녀)는 둘 다 레오폴트 1세의 모후(마리아 아나-펠리페 3세의 차녀)와 아내(마르가리타 테레사-펠리페 4세의 차녀)보다 언니라서 서열로 보면 루이가 우위에 있었다.
본래 카를로스 2세가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던 건 외조카인 마리아 안토니아(1669~1692)[31]였으나 그녀가 산후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이후에는 그녀의 갓 태어난 아들인 바이에른의 호세 페르난도(요제프 페르디난트)[32]가 계승자가 된다. 그러나 이쪽도 그만 8세에 천연두에 걸려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으며 이렇게 되자 후보군은 세 명[33]으로 압축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대공[34]에게 왕관을 넘겨줄 생각을 하였으나,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이 국왕 몰래 비밀협정을 맺고 후계를 멋대로 결정한 것에 분개하여[35][36] 마리아 안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700년 10월 2일 앙주 공작 필리프를 차기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였으며 그가 사양할 경우 앙주 공작의 동생인 베리 공작, 베리 공작이 사양할 경우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이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도록 유언장에 서명하였다. 이는 그가 실질적으로 내린 거의 유일한 결정 중 하나였다. 한 달 후 그가 죽자 필리프가 유언에 따라 바로 스페인 왕관을 물려받았으나 이에 오스트리아가 반발하여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된다.
[1]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그림에 등장한 것으로 유명하다.[2] 이 외 이복형제들이 더 있다.[3] 영어로는 'the Bewitched'로 쓴다. 직역하면 witch(마법)에 홀렸다는 뜻인데, 음악의 선율이 기가 막힌다든가 등의 좋은 뜻으로도 쓰인다. 하지만 여기선 당연히 안 좋은 뜻으로 쓰임.[4] 1627~1644. 앙리 4세의 딸인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 소생. 즉 루이 14세와 겹사촌이다. 이 사람의 동복동생인 마리아 테레사는 카를로스 2세보다 22살이 많다. 여담이지만 이 사람의 아들 그랑 도팽 루이와 카를로스는 동갑이다.[5] 귀천상혼이라는 특성상 이 모든 결혼이 족외혼이 되는 건 불가능한 가정이긴 하다. 이런 극단적인 4촌 이내의 근친혼이 문제가 됐을 뿐. 19~20C에도 6~8촌의 근친혼은 많이 일어났다. 당장 現 영국 여왕과 그 부군도 둘 다 빅토리아 여왕의 4대손(=현손, 고손)으로서 8촌이다.[6] 삼촌-조카 간 결혼 때문에 댓수가 꼬여버렸다(...)[7] 필리프는 신성로마제국 막시밀리안 1세의 장남이고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둘 사이도 같은 트리스타마라 가문의 친가(부계) 6촌이다.)의 장녀 후아나와 결혼했지만 일찍 사망한다.[8] 루이 16세처럼 어리바리해서 알아서 호구로 찍히거나(이쪽은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의외로 뛰어난 지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요제프 2세가 말하긴 했지만 달리 보면 첫인상은 어리버리했다는 거다.) 혹은 유선처럼 사람은 멀쩡한데 바보짓을 많이 하고 유혹에 약해 백치 이미지가 박힌 것이 아니다.[9] 합스부르크 왕실 출신들에게서 난 적자들은 당시 에스파냐 농민의 아이들보다도 사망율이 높았다. 이 역시 근친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는 결과다.[10] 부계로만 따지자면 카를로스에게 마리아나는 '''고종사촌 누나'''였다. 여담이지만 이 사람은 루이 14세와도 이종사촌이다. 이 사람의 어머니인 마리아 안나와 루이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자매이기 때문이다.[11] 카를 5세의 사생아인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s-1와 동명이인이기 때문에 보통 미들네임인 호세까지 같이 표기한다. 영미권에선 John of Austria '''the Younger'''로 표기하여 카를 5세의 사생아인 돈 후안보다 후세의 인물임을 강조한다.[12] 당시 돈 후안과 마리아나는 서로 싫어하여 관계가 굉장히 안좋았는데 심지어는 돈 후안이 이복동생, 카를로스 2세의 추천으로 국왕 자문이 되었을 때 마리아나가 아들에게 압력을 넣어 취소시킬 정도였다.[13] 이는 마리아나가 섭정이었으나 총신인 발렌수엘라를 재상에 임명하여 정치를 맡겼는데 재상이 된 발렌수엘라가 전횡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특히 발렌수엘라는 일부러 궁전에 파티를 자주 열어 대비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렸고 정부위원회의 위원 2명을 파면하고 나중에는 아예 정부위원회를 해산시켜 버릴 정도로 권력을 남용했다. 이는 귀족들이 반발하게 되었고 귀족들은 돈 후안을 지지했다. 그래서 돈 후안이 이를 이용해 군대를 이끌고 마드리드로 입성하여 발렌수엘라를 체포하고 마리아나를 궁전에서 쫓아내 톨레도로 추방했다.[14] 이때 섭정이 된 후안은 사치를 금지하고 생필품 공급을 정상화시키며 상공위원회를 창설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15] 위트레흐트 조약 때문인데 이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에 참가해 다시 수복한다.[16] 펠리페 2세의 사촌인 막시밀리안 2세와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인 스페인의 마리아의 장녀, 즉 펠리페 2세의 '''외조카'''이다. 카를 5세의 손녀이기도 하다.[A] A B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이다. 펠리페 3세와 6촌간으로 카를로스의 '''매형 루이 14세, 첫 장인인 필리프 1세 도를레앙과 외삼촌 레오폴트 1세의의 외할머니'''.[17] 페르디난트 1세의 3남이자 블라디슬라프 2세의 손자이다.[18]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이다.[19] 위의 마리아 안나와는 동명이인이다.[20] 다소 못생겨보이게 그려진 초상화. 이보다 더 사실적인 초상화는 이것이다.[21] 마리 루이즈(스페인식 이름은 마리아 루이사) 역시 근친혼 태생으로, 부계로 보면 5촌간(카를로스 2세와 마리 루이즈의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는 21살 차이 나는 사촌 형이다.-고모인 안 도트리슈의 아들), 모계로 보면 어머니 마리아나(작은고모 겸 외할머니 마리아 아나와 페르디난트 3세의 1녀)와 필리프(큰고모 안 도트리슈의 차남)는 이종사촌이고 마리 루이즈와 카를로스는 이 두 사람의 자녀이니 6촌이다.[22] 이는 마리 루이즈가 사실 루이 14세의 조카가 아닌 '''친딸'''이라서 그렇다는 말이 있다. 난봉꾼이었던 루이 14세는 동생 필리프의 아내와도 염문이 있었는데, 이때 불륜을 통해 마리 루이즈를 낳았다는 루머가 있다. 필리프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도 했기 때문에 의혹이 더 확산되었다. 마리 루이즈의 초상화를 보면 확실히 치켜올라간 눈썹 등이 루이 14세를 더 닮긴 했다.[23] 카를로스 2세가 무능력자에 장애인이라고 해도 엄연히 스페인의 국왕이었으므로, 프랑스 왕가에서 공주를 카를로스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정치적으로 당연한 선택이었다. 또한 마리 루이즈는 어렸을 때 예쁘고 명랑하여 부친의 사랑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못생겼다는 평은 스페인에서든 프랑스에서든 발견되지 않으며, 프랑스에서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그 당시 유럽이 미녀로 간주하던 인상에 가깝다.[24] 고환이 하나밖에 없었고, 조루와 발기부전을 앓았다.[25] 당시 마리 루이즈는 후계자를 얻지 못하고 궁전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폭식을 하였다. 특히 하루에 32파운드의 설탕이 들어가는 레몬 요리와 계피 음료수를 즐겨먹었다. 그래서 이로 인해 죽기 전에는 과체중과 비만 상태였다. 시어머니의 손에 독살당했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근거는 부족하다.[26] 팔츠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인 오스트리아와 동맹이었기 때문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었던 레오폴트 1세도 마리아 안나의 언니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27] 여담으로,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마리아 안나의 오빠이자 카를로스의 처남이었던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과 결혼한다. 요한 빌헬름이 아내를 내버려두고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남편의 성병이 옮아 불임이 되는 등, 매우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한다. [28] 펠리페 5세의 후처 이사벨 파르네제의 이모다. 여담이지만 이사벨 파르네제도 영 국민들에게 평이 좋지 못했다. 실제로 둘 다 권력욕이 굉장히 심한데다 장애인이나 호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여자는 자기 조카인 카를 6세가 스페인을 다스리게 하려고 남편을 압박했고 파르네제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카를로스 3세가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왕이 되게 했다.[29] 아버지 필립 빌헬름은 원래 한미한 신분이었다가 팔츠 본계가 끊기면서 선제후가 되었고 이 상황에서 루이 14세는 자기 제수씨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팔츠 공녀와 동생 오를레앙 공작에게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9년 전쟁을 일으킨지라 위기를 느낀 필립 빌헬름은 합스부르크와의 동맹 강화를 위해 자기 큰딸 엘레오노르는 레오폴트 1세에게 시집을 보내고 이 인간은 카를로스에게 시집보냈다. 여담이지만 언니인 엘레오노르는 '''굉장히 신앙심이 깊고 병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노력했다.''' 1710년 즈음 되면 이 인간의 오빠 팔츠 선제후는 바이에른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친프랑스파가 되고''' 언니조차도 이 여자에게 경악해서 쫓겨난 이후 '''받아주지도 않는다'''.[30]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15권인 에스파냐편에서 신하들이 빵이 되든 수프가 되든 빨리 결정하시라며 재촉하는 것으로 묘사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결정을 했는데도 전쟁이 터졌는데 결정도 안 했다면 더 개판이 되었을테니.[31]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딸로 바이에른 선제후비가 되었다.[32] 카를 7세의 이복형으로 일찍 요절했기에 카를 7세가 바이에른 선제후가 된다. 누나인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딸 마리아 안토니아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엠마누엘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다. 여담이지만 펠리페 5세프티 도팽 루이의 어머니인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막시밀리안과 오누이니 서로 사촌이다[33] 앙주 공작 필리프, 베리 공작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34] 훗날의 신성로마황제 카를 6세.[35] 이게 중요한 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이제 스페인 합스부르크와는 사실상 괴리되었다는 게 입증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카를로스 2세는 분명 현대 기준으로 보면 한정치산이 필요하지 않나 싶을 정도의 얼간이었으나 이 정도도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36] 여담이지만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은 스페인 왕위 전쟁 때 당숙인 루이 14세의 '''우리가 이기면 오스트리아를 너에게 줄게'''라는 말에 현혹되어 프랑스 편에 서지만 1704년 블레넘 전투(프랑스군 '''56,000명 중 40,000명 사망, 포로''')에서 존 처칠에게 비참하게 깨지고 땅을 몰수당한다(...). 이후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와 팔츠 선제후 그리고 블레넘에서의 공으로 '''주권을 가진''' 민델하임 공 (Prince of Mindelheim)이 된 말버러 공작(존처칠)에 의해 삼등분된다. 뭐 나중에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다시 막시밀리안에게 돌아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