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일본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결승전
[image]
[1]
결승에서 격돌한 마츠야마 상고와 구마모토 공고는 고교야구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공립교들이었다. 에히메의 마츠야마 상고는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 모두 우승을 거둔 바 있으며, 1996년 대회에서는 1986년 이후 10년만에 학교 역사상 8번째로 결승전에 진출한 상태였다. 상대인 구마모토 공고는 1927년 이후 59년만이자 학교 역사상 3번째의 결승 진출이었다.
마츠야마 상고는 팀타율 0.313에 1회전부터 3회전까지 두자릿수 안타를 뽑아낼 만큼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니타, 와타나베의 2인 계투 체제로 결승까지 순항했다. 구마모토 공고는 이전 년도 지역예선 1회전에서 패배하며 "'학교 역사상 최악의 팀"'이라고 혹평받기도 했으나, 1996년에는 지역예선 전 경기를 콜드게임으로 제압하며 고시엔에 진출했고, 고시엔에서도 평균득점 10.4라는 압도적인 공격력을 자랑했다.
결승전은 매우 치열했다. 마츠야마가 1회초에 3점을 선취했으나 2회말에 구마모토 공고가 1점을 따라붙으며 경기는 접전으로 흘러갔다. 8회말 구마모토 공고가 안타와 보내기 번트, 볼넷과 패스트볼로 만든 1사 만루 상황에서 희생플라이를 기록하며 1점을 따냈고 9회말, 선두 타자와 그 다음타자가 연속으로 삼진을 당하고 맞이한 2아웃 상황에서 신입생 사와무라[4] 가 좌측담장을 라인드라이브로 넘어가는 '''동점 솔로포를 쏘아올리며 극적으로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연장 10회초, 마츠야마 상고가 득점을 기록하지 못한 채 10회말에 돌입했다.
10회말, 구마모토 공고는 1사 만루로 끝내기 우승 찬스를 잡았다. 희생플라이만 나와도 마츠야마 상고는 끝내기 패배하는 상황.
결국 마츠야마 상고는 희생플라이 상황에 대비해 우익수를 교체했다. 새로 투입된 선수는 어깨는 좋았지만 컨트롤이 엉망이라 시합에는 좀처럼 써먹을 수 없었던 야노 카츠지. 이 야노는 송구의 제구가 워낙 제멋대로라 연습에서 매일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에 감독에게도 허구헌 날 혼나고 동료들로부터도 은근히 무시당하던 선수였다. 마츠야마 상고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이 열등생에게 희망을 걸어본 것이었다.
여기서 구마모토 공고의 타자 혼다의 타구가 우측 펜스 근처까지 날아갔다. 모두들 희생플라이로 경기가 끝날 것이라 생각했으나..
[image]
'''공을 잡은 야노가 드넓은 고시엔 구장 전체를 가로지르는 다이렉트 백홈 송구를 포수의 미트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적중시키며 3루 주자를 홈에서 아웃시켰다.''' 당시 영상 12분 45초부터가 야노의 '''기적의 백홈'''. 캐스터가 외친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는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고시엔의 명대사 중 하나.
그리고 바로 다음의 11회초, 직전 장면의 주인공인 우익수 야노가 쳐낸 타구를 구마모토 공고의 좌익수 사와무라[5] 가 포구에 실패하면서 좌전 2루타가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마츠야마 상고가 일제히 3점을 뽑아냈다. 그리고 11회말, 마츠야마 상고는 수비를 완벽하게 틀어막으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후일 야노는 비슷한 거리에서 송구를 수십 번이나 연습해보았지만, '''단 한 번도 적중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결승전을 취재한 아사히 신문에 의하면 그 백홈은 '''신이 들린 플레이'''였다고.
[1]
1. 소개
1996년 여름 고시엔은 '''4강팀 전원이 일반 공립고교'''였다는 사실로도 유명하지만[2][3] 이 대회를 헤이세이 시대의 기념비로 만든 것은 고시엔 100년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이라 불리는, 마츠야마 상고 vs 구마모토 공고의 결승전 10회말에 나온 '''"기적의 백홈"'''이었다.'''奇跡のバックホーム'''
'''헤이세이의 명승부(平成の名勝負)'''
2. 대망의 결승전
2.1. 10회초까지
결승에서 격돌한 마츠야마 상고와 구마모토 공고는 고교야구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공립교들이었다. 에히메의 마츠야마 상고는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 모두 우승을 거둔 바 있으며, 1996년 대회에서는 1986년 이후 10년만에 학교 역사상 8번째로 결승전에 진출한 상태였다. 상대인 구마모토 공고는 1927년 이후 59년만이자 학교 역사상 3번째의 결승 진출이었다.
마츠야마 상고는 팀타율 0.313에 1회전부터 3회전까지 두자릿수 안타를 뽑아낼 만큼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니타, 와타나베의 2인 계투 체제로 결승까지 순항했다. 구마모토 공고는 이전 년도 지역예선 1회전에서 패배하며 "'학교 역사상 최악의 팀"'이라고 혹평받기도 했으나, 1996년에는 지역예선 전 경기를 콜드게임으로 제압하며 고시엔에 진출했고, 고시엔에서도 평균득점 10.4라는 압도적인 공격력을 자랑했다.
결승전은 매우 치열했다. 마츠야마가 1회초에 3점을 선취했으나 2회말에 구마모토 공고가 1점을 따라붙으며 경기는 접전으로 흘러갔다. 8회말 구마모토 공고가 안타와 보내기 번트, 볼넷과 패스트볼로 만든 1사 만루 상황에서 희생플라이를 기록하며 1점을 따냈고 9회말, 선두 타자와 그 다음타자가 연속으로 삼진을 당하고 맞이한 2아웃 상황에서 신입생 사와무라[4] 가 좌측담장을 라인드라이브로 넘어가는 '''동점 솔로포를 쏘아올리며 극적으로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연장 10회초, 마츠야마 상고가 득점을 기록하지 못한 채 10회말에 돌입했다.
2.2. 기적의 백홈
10회말, 구마모토 공고는 1사 만루로 끝내기 우승 찬스를 잡았다. 희생플라이만 나와도 마츠야마 상고는 끝내기 패배하는 상황.
결국 마츠야마 상고는 희생플라이 상황에 대비해 우익수를 교체했다. 새로 투입된 선수는 어깨는 좋았지만 컨트롤이 엉망이라 시합에는 좀처럼 써먹을 수 없었던 야노 카츠지. 이 야노는 송구의 제구가 워낙 제멋대로라 연습에서 매일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에 감독에게도 허구헌 날 혼나고 동료들로부터도 은근히 무시당하던 선수였다. 마츠야마 상고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이 열등생에게 희망을 걸어본 것이었다.
여기서 구마모토 공고의 타자 혼다의 타구가 우측 펜스 근처까지 날아갔다. 모두들 희생플라이로 경기가 끝날 것이라 생각했으나..
[image]
'''공을 잡은 야노가 드넓은 고시엔 구장 전체를 가로지르는 다이렉트 백홈 송구를 포수의 미트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적중시키며 3루 주자를 홈에서 아웃시켰다.''' 당시 영상 12분 45초부터가 야노의 '''기적의 백홈'''. 캐스터가 외친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는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고시엔의 명대사 중 하나.
그리고 바로 다음의 11회초, 직전 장면의 주인공인 우익수 야노가 쳐낸 타구를 구마모토 공고의 좌익수 사와무라[5] 가 포구에 실패하면서 좌전 2루타가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마츠야마 상고가 일제히 3점을 뽑아냈다. 그리고 11회말, 마츠야마 상고는 수비를 완벽하게 틀어막으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후일 야노는 비슷한 거리에서 송구를 수십 번이나 연습해보았지만, '''단 한 번도 적중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결승전을 취재한 아사히 신문에 의하면 그 백홈은 '''신이 들린 플레이'''였다고.
3. 여담
- 도시전설처럼 야구팬들 사이에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로는 당시 감독은 원래 외야수들의 수비위치만 조정한 후에 돌아가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당 경기의 얼마 전에 사망한 부친의 목소리로 "외야수는 바꾸지 않을게냐?"라는 소리가 들려서 급히 우익수를 야노로 교체했다는 이야기. 물론 워낙 황당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실제로 타임아웃이 끝나기 직전에 갑자기 우익수가 교체되었고, 야노 본인도 교체투입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수비위치로 달려가면서 팔을 푸는 장면이 보이는 등 기묘한 상황은 확실히 있었기 때문에 재미삼아 꾸준히 돌아다니는 이야기라고 한다.
- 당시 백홈을 시도하던 야노를 보며 팀원들은 전원 "어이쿠, 야노 저자식 또 저질렀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8] 하지만 야노 본인은 벤치에서 시킨대로 한 것 뿐인데, 어깨는 좋지만 워낙 조준이 엉망이었던 야노에게 백홈을 시도하는 상황을 정해줬었다고 한다. 9회 끝내기를 당할 상황에서, 자신의 수비 정위치보다 뒤에서 공을 잡았을 시에만 홈 송구를 하라고 못을 박았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고[9] 딱 그 상황을 맞이하자 송구를 한것. 실제로 송구 자체는 꽤 높았던 편이었는데 평소라면 속도가 모자랐거나 아예 홈까지 닿지도 않았을 높은 송구가, 오히려 높은 위치에서 불던 바람을 타고 그대로 포수 미트로 빨려들어가듯이 날아가면서 기적이 벌어진 것.
- 후일담으로 이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 야노는 마츠야마 대학에서 선수생활을 지속, 주장으로서 메이지진구 야구대회에도 출전했으며, 졸업 후에는 에히메아사히TV(EAT)에 취업해 도쿄 지사 영업부를 거쳐 2014년부터 보도 제작국 기자로 근무 중이다. 본인은 자신이 기적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으나 결국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서 회사 선배들에게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10] 야노 본인에게 사실인지 확인하고 나서 선배들의 반응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투로) "네가?"라는 반응이었다고(...).
- ## 당시 홈에서 아웃된 구마모토 공고의 3루주자 호시코 타카시(星子崇)는 현재 구마모토에서 '터치 업' 이라는 이름의 바를 운영하고 있다. 2013년에는 지인을 통해 자신의 가게에서 야노와 17년만에 재회하기도 했다고.
- 2015년, 아사히 방송에서 이 내용을 다룬 프로그램이 나왔다.
- 야노의 명함에는 "저는 언제나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4. 관련 문서
[1] 위의 사진 좌측 중단에서 가장 왼쪽의 모자를 벗고 있는 키 큰 선수가 '기적의 백홈'의 주인공 야노 카츠지 이다.[2] 이제나 저제나 고시엔의 대표 강호교들은 야구 특기생들을 끌어모은 사립학교들이다. 하지만 대도시지역이 아닌 작은 현에서는 고시엔에 단골로 출전하는 야구명문 '''공립학교'''들도 더러 있기는 하다. 대표적인 예가 1980년대 초반 전국 최강자로 군림하던 "메아리 타선"의 이케다 고등학교.[3] 이 대회 이후로 10년동안 공립고교는 여름대회 결승에 오르지 못했고 11년 후인 2007년에야 공립고교에서 결승 진출팀이 나오는데, '''바로 사가키타 고교 되시겠다.''' 그리고 그 사가키타고교 이후로 공립학교가 결승전에 오르는데 '''또 11년'''이 걸렸는데 그 팀이 100회 대회의 주인공 취급을 받으며 선풍을 일으킨 아키타의 가나아시농고이다. [4] 당시 스타팅 멤버 중 유일한 1학년이었고, 1984년 갑자원의 오가타 고이치(전 교진 외야수, 현 카프 감독과는 동명이인) 이 후 최초로 1학년 스타팅 멤버였다고 한다.[5] 9회말에 동점포를 쏘아올린 그 타자.[6] 新田浩貴 당시 2학년으로 마츠야마 상고의 에이스였다.[7] 園村淳一.[8] 영상에서 보면 야노의 등번호는 9번이다. 즉 봄 대회에선 주전 외야수였지만 가을대회때는 벤치멤버로 떨어져 있었다는 뜻인데 그만큼 송구미스가 잦았다는 뜻[9]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팀원들은 물론이고 그렇게 지시한 감독도 야노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홈송구를 날렸을 때 다들 저질렀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0]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에히메아사히TV는 여름 고시엔 대회를 주최하는 아사히 신문계열 방송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