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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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대로 아사히 신문사 마크, 신문, 깃발[1][2]
1. 개요
2. 상세
3. 한국 관련
4.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 폭로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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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あさひしんぶん
홈페이지

1. 개요


일본신문.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정론지다. 산하에 있는 방송사로 TV아사히아사히 방송 등이 있다. 발행부수는 2018년 12월 기준, 조간신문 약 595만 부, 석간신문 약 183만 부이다. 발행 부수로는 요미우리 신문에 이은 2위이다. 소속 기자의 규모만 해도 2000명이 넘는 대형 언론사이다.

2. 상세


일본의 전국 신문지들 중 상대적으로 가장 좌파성향이 강하다고 평가받으며 해외에선 중도좌파 정도로 본다.[3] 일본에서 요미우리 신문에 이어 2번째로 많이 팔리는 신문이며,[4] 요미우리가 보수 정론지라면 아사히는 진보 정론지라고 할 수 있다.[5] 참고로 발행부수 3위를 달리는 마이니치 신문은 아사히보다 좀 더 온건한 중도진보성향이다.[6]
당연히 아베 총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라, 아베 본인이 스스로 2014년 2월 5일 참의회 예산위원회에서 아사히 신문을 직접 거론하며 "아베 정권 타도가 사시(社是)인 신문이라고(들었고). 그런 신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일본 넷 우익들이 많은 사이트에선 아사삐(アサピー)나 아카히(アカヒ)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하며, 사원의 70% 정도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근거없는 공격도 받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우익 단체가 종종 본사 앞에서 '조선인 물러가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또 아사히('''朝日''')가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줄임말 또는 조선일보 일본지국('''朝'''鮮日報'''日'''本支局)의 줄임말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1987~1990년 사이에는 극우 성향으로 추정되는 범인에 의해 일어난 신문사 테러인 아사히 신문 습격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엔 오히려 전쟁을 독려하고 찬양했던 흑역사가 있다. 그러다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자마자 논조가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어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물론 이는 당시 군국주의에 대해 해당 신문에서 비판을 하면 군부(혹은 정부)에서 '''바로''' 폐간 조치를 내렸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있었다.[7][8] 물론 사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조건적인 면죄부가 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3. 한국 관련



일본에선 한국의 입장을 많이 대변해주는 신문사로도 평가받는다. 대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알린 신문사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일본군 위안부 증언을 아사히신문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기자가 '''한국 언론보다 먼저''' 보도했다.[9] 때문에 일본 우익들에겐 지금도 반일매국 신문이라고 공격을 받고 있다.
특히 일본의 우경화와 함께 2012년 아베 내각이 들어서면서, 일본 극우 인사들과 오피니언들이 아사히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부 잘못된 사실도 섞어[10] 최초로 퍼뜨린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친자민당 언론을 중심으로 당시 아사히신문을 집중 공격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지속적인 압박 때문인지 아사히신문은 2014년 이미 고인이 된 위안부 납치 증언을 한 요시다 세이지 관련 자사 보도를 일부 취소하기도 했다.# 다만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며 역사수정주의는 여전히 비판했다. 이에 대해 요미우리 신문이 딴지를 걸기도 했다. #.[11]
2014년 1월 22일, 사설에서 안중근 의사를 '''영웅이자 테러리스트'''라면서 팔레스타인의 아세르 아라파트나 동티모르의 사사나 구스마오[12]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해 한일 양국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아사히 신문 사설의 취지는 한일 양국의 역사 인식의 간극이 깊은 만큼 서로의 주장만 앞세우지 말고 다양한 시각을 인정하고 접점을 찾아나가자는 주장이었지만, 똑같은 사설인데도 일본에서는 '''영웅'''이란 단어를 썼다고 우익들에게 까이고, 한국에서는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썼다고 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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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국가별 모금 순위에서 한국을 뺀 도표를 만들어 보도하였다.
이러한 잘못된 표는일본 내에서 한국이 '''일본을 도와주지 않은 국가'''로 낙인 찍는데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 표는 일본 인터넷에서 급속도로 퍼졌고, 지금 현재까지도 일본 내에서 한국이 도와주지 않았던 근거로 정말 많이 쓰이며, 실제로도 대부분 일본인들은 한국이 안 도와준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아사히 신문이 왜곡해서 보도한 건 아니다.대한민국의 성금은 대부분 적십자를 통한 기금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성격이 다른 의연금 순위에 없는 것이다. 적십자 순위에서는 5위로 나와있다.'''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일한병합의 진상'이란 기사에 일제 시절 조선인들이 일제 모병에 상당한 경쟁률로 참여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물론 언론이 팩트 전달은 해야겠지만 결국 아사히 신문도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일제강점기를 정당화하는 것 아니냔 말이 일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자세하게 지면에 싣거나 일제 통치 때문에 징용, 위안부 문제가 발생했다고 일본의 책임을 묻는 기사를 넷우익들의 집요한 공세 속에서도 꾸준히 연재하는 등 반한이라고 보긴 어려운 것도 사실이라 이 신문의 성향을 이거다라고 명확하게 정리하긴 쉽지 않아보인다. 확실한건 일본 보수 언론보단 확실히 사리에 맞고 양심적이라는 것이다.

4.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 폭로


2018년 아베와 극한 대립을 해왔던 아사히는 기어이 모리토모 학원 문서 조작 특종을 터트려 아베 내각을 최대 위기로 몰아넣은 주인공이 되었다.[13] '아베가 죽느냐 아사히가 죽느냐' 란 말이 나왔을 정도로 언론사의 명운을 건 승부였고, 마침내 결정타를 날렸다. 아사히 신문은 이 보도를 위해 도쿄오사카의 사회부 정예기자들을 투입했고, 담당 기자들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보안 때문에 편집 주간에게도 보고를 하지 않을 정도로 이 보도에 극도로 신경을 썼다. 만약에 이 보도가 오보로 판별된다면 반대 세력의 결집으로 인해 아사히가 궁지에 몰릴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 보도는 점점 사실로 판명되었고, 이 보도 이후 아베 내각의 지지율은 급속도로 추락, 재무성육상자위대가 문서를 조작한 것이 밝혀진 가케학원 비리와 자위대문서 비리가 연이어 폭로되며 시민들의 분노가 커져갔다. 당시엔 진짜 총리 관저 앞에서 시민들이 시위하고 외신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등 아베 내각이 이번엔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올 정도로 나름 기세가 대단했다.
하지만 이후 사건은 자민당 내각하에서 용의자 전원 불기소처분이란 형식으로 흐지부지되어 버렸으며, 20%대까지 떨어졌던 아베 내각 지지율도 다시 4~50%로 회복되었다. 다만 검찰이 권력의 개가 되었다는 식의 비토 수위는 여전히 높은 상황. 해가 바뀌어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라 아베 내각이 지속되는 한 꾸준히 달고 다닐 시한폭탄 수준이 되었다.[14][15]
그리고 이 여파로 자민당 내에서 아베의 영향력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본래 자민당 자체가 여당 내 야당 컨셉의 각 계파를 찍어누르며 정권을 잡는 정당이라 틈을 내주면 다른 계파에게 몰리기 십상인데, 그에게 등을 돌리는 계파가 늘어났다는 것은 아베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16] 실례로 각종 말 실수로 스캔들의 한 축을 이룬 아소 다로 부총리가 계속 재임하게 된 것도 아베에겐 여론이 부담되지만 그럼에도 아소 계파가 집권에 필요하기 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취한 측면이 있다.[17]
게다가 지지도와는 별도로 평화 기류에서 벗어나 국방비를 과학이나 의료비보다 많이 사용한다는 비판, 사회적 양극화 심화, 오키나와 기지 건설, 원자력 발전소 재가동 때문에 반발 시위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을 볼 때 일본의 시민들 또한 아베 내각 장기집권으로 인한 피로를 호소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베 입장에선 아사히가 치가 떨리긴 할듯.[18]

5. 여담


  • 일본 단카이 세대들의 리버럴함을 드러내는 신문이라 보는 평가도 있다. 단카이 세대는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와 비슷한데 196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기 학창시절을 보내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다. 그들이 사회에서 물러나면서 일본의 우경화가 심해진다는 분석도 있다.
2010년에 만화 케이온! 해설 기사를 실은 전력이 있다. 케이온까는 기사를 실었다고 뭇 케이온 팬, 빠들이 분노했지만, 딱히 까는 기사가 아니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케이온은 BECK처럼 음악 활동 자체에 중점을 둔 만화가 아니라 밴드활동을 하는 캐릭터의 느슨한 일상에 중점을 둔 만화로 일상을 유토피아적으로 표현한 것이 지루한 일상에 지친 현대인의 취향을 저격했다'는 내용이다. 참고글.
  • 격월로 만화 잡지인 네무키를 발행하고 있다. 원래는 자회사인 '아사히 소노라마'에서 발행하였으나, 실적 부족으로 자회사를 없애고 현재는 아사히 신문 출판에서 발행한다.
  • 일본의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우에노 치즈코에게 상을 준 적이 있다. 참고로 이 사람은 국내에서도 발매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란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 '천성인어(天声人語)'라고 하는 오피니언이 있는데 일본어 공부하는 사람들이 학습 자료로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여러가지 소재를 다루며, 일본 정부의 행보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적인 편이다. 다만 일본인들을 위한 사설이니만큼 공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엔원 정도는 하고 하는 편이 좋다. 어휘 같은 경우도 제2외국어로서의 일본어가 아닌, 진짜 일본인이 배우는 일본어가 나오기 때문에 어려운 편이다.
  • 아사히 신문의 한국어판 뉴스인 아사히 아시아 안테나(AAA)가 2012년에 서비스를 시작하여 꽤 괜찮게 독자를 모았으나 한국어판 서비스를 2015년 8월 31일까지만 제공한다고 공지가 나왔고 9월 1일부터 신규 기사가 올라오지 않고 중단되었다. 페이스북 공지. 아사히 아시아 안테나 홈페이지에는 이와 함께 9월 30일에는 서비스가 중지될 예정이라고 공지하였다. 중국어판은 계속 제공되는데 한국어판이 중단된다는 점에 대해 아쉬움과 의문이 서비스 제공중단 공지의 리플에도 꽤 나왔다. 이에 관한 독자의 소회를 그것은 알기 싫다 145a회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2016년 이후 시점에서 정기적으로 아사히 신문 번역문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아사히 신문의 기사를 인용보도 형태로 복제한 TV아사히의 기사를 정기적으로 가져오는 JTBC 디지털뉴스룸 계정을 구독하거나, 아사히 신문 필진이 참여한 허핑턴포스트 일본판 기사를 번역한 한겨레신문의 한국어판 허핑턴포스트를 구독하는 방법 밖에 없다.
  • 홈페이지에서 원래 무료회원은 하루에 기사 3편까지만 풀버전으로 볼 수 있었으나, 2016년 10월에 들어서면서 아예 대놓고 유료화를 선언했다. 무료회원은 하루에 기사 한 편만 풀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 2020년 주간문춘이 보도한 쿠로카와 히로무(黒川弘務) 도쿄 고등검찰청 검사장의 마작 내기 스캔들에 아사히신문 기자도 끼여있어서 정직 1개월을 받았다.# 재미있는건 산케이 신문은 자사 기자가 걸렸음에도 처분을 최대한 미루며 스캔들이 지나가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아사히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과도 하고 처분 조치도 신속하게 내렸다는 것. 아베 정권에 카운트펀치를 날릴 수 있는 사안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1] 깃발에서 욱일기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텐데, 한국에서 욱광(旭光) 이미지는 일본 제국주의를 추종하는 우익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정작 일본 내에서는 전통 문양의 하나 정도로 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선 하켄크로이츠보단 미국의 남부연합기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게다가 아사히(아침해)란 말 자체가 이 문양과 어울리기도 하고, 아사히 신문 자체가 욱일기 인식이 망테크를 타기 이전인 1800년대 후반에 설립된 신문사이기도 하다.[2] 사실 일본 제국 시절 일본군이 쓴 공식 욱일기는 햇살이 16개로 엄밀히 따지면 이것과는 다르긴 하다. (작금의 육상 자위대는 햇살 8개짜리 욱일기를 쓴다. 다만 해상 자위대는 여전히 16개로 얄짤없다.) 그리고 2010년대 이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 내에서도 굳이 주변국 사람들이 싫다는데 이런 문양 쓸 필요가 있냐는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된 바는 있다. 사실 다른 언론이라면 씨알도 안 먹힐 말이지만, 아사히 신문은 오히려 위안부 문제에서 꾸준히 한국을 지지하는 칼럼을 내는 등 일본 내에서 우익 세력과는 대척점에 있는 진보좌익을 대표하는 신문이기에 어느 정도 의식은 하는 모양.[3] 중도좌파인 아사히보다 혁신/좌파 성향이 뚜렷한 쪽은 주니치 신문인데 이쪽은 전국지가 아니다.[4] 전세계 기준으로도 2위다. 이렇게 된 이유는 미국이나 인도, 중국 같이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대국의 경우 지방지가 강세이기 때문인 점도 있다. 다만 21세기 들어 인터넷, 스마트폰의 보편화 등과 맞물려 일본 역시 종이신문의 발행부수가 눈에 띄게 하락하는 추세긴 하다.[5] 그 외 요미우리 신문이 도쿄에서 창간되었고 간토 지방을 대표하는 신문이라고 한다면, 아사히 신문은 오사카에서 창간된 킨키 지방을 대표하는 신문이라 볼 수도 있다. 아사히 신문은 1879년 1월 25일 오사카에서 키무라 노보루(木村騰)가 창간하였는데, 1888년에 메사마시 신문을 매입하여 도쿄에 진출, 이후 '도쿄 아사히신문'으로 개칭, 발간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듬해 오사카의 아사히신문은 '오사카 아사히신문'으로 개제된다. 물론 세월이 한창 흐른 지금에 와선 둘 다 전국지라 딱히 관동, 관서 따지는 것 같진 않다만. 여담으로 코시엔 대회도 아사히 신문 주최로 시작되었다.[6] 다만 인권, 언론의 자유에 관한 문제라면 아사히보다 더 강경한 논조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7] 이는 1905~1925년까지 아사히가 주도하기도 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이를 못마땅하게 본 군부와 우익 세력이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의 효과가 매우 컸다. 심지어 1936년 2.26 사건 때는 아사히 신문사가 쿠데타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8] 사실 한국 언론도 군부독재 시절에는 비슷하게 답습한 현상이기도 하다. [9] 기자는 1990년도 여름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으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서울 지국장에게 피해 할머니들이 증언을 시작하셨다는 정보를 얻고 정대협의 윤정옥 공동대표를 찾아가 조사 내용과 함께 증언 테이프를 듣게 되었다.#[10] 주로 요시다 세이지 관련 증언이 허구라는거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11] 참고로 이렇게만 보면 위안부 문제가 마치 여전한 논쟁거리인냥 보일 수도 있는데, 한일 협정 등으로 인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배상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위안부의 강제성 문제는 이미 글로벌 학계에선 종결이 난 사안이다. 당장 한국 뿐만 아니라 여러 해외 위안부들의 강제연행 사례가 보고되었고 심지어 요시다 세이지 외에도 강제연행을 자백한 진술은 많다.# 이때 국제적으로 아베가 욕먹고 꼬리내린 것만 봐도.. 역사수정주의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게 아닌 것.[12]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지배 당시 독립 투쟁에 나선 인물로, 이후 동티모르가 독립하자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13] 아사히 말고도 모리토모 비리를 조사한 존재가 하나 더 있었는데 오사카부 도요나카시의 키무라 마코토(木村真) 시의원이었다. 그는 2016년 5월에 우연히 학교 건설 현장에서 포스터를 보고 처음에는 이런 곳에도 학교가 들어서는 거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으나, 포스터에 디자인 되어 있었던 일장기와 신사를 보고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극우 성향의 교육기관이 들어서면 안된다는 생각에 뒷조사를 하였으나, 알고 보니 단순한 극우 교육기관을 뛰어넘어 아예 정치권 거대 비리의 산물이였던 것. 참고로 키무라 마코토는 학창 시절에 반제국주의 운동에 참여한 이력이 있을 정도로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해당 사안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14] 오죽하면 아베의 정치적 스승이라 평가받는 고이즈미 전 총리조차 2020년 한 인터뷰에서, 아베가 이 사건 관련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며 사퇴하는 것이 옳다고 지적하기도 했다.[15] 아베 정부를 적극적으로 쉴드치던 우익정치논객들도 이 사건 이후론 아베 정부에 대해 침묵하는 빈도가 늘었다.[16] 자민당의 계파 갈등은 각복전쟁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정당의 계파갈등 저리가라 할 정도로 험악한 편이다.[17] 한국에서는 자민당이 장기집권하는 것에 대해 일본인 특유의 정치적 무관심을 비꼬며 조롱을 하기도 하는데, 이 계파 간의 암투 때문에 자민당이 선거에서 이기더라도 아베가 불안해 하는 것이다. 자민당이 수십 년 동안 여당으로 군림했지만 자민당 출신 총리들의 숫자가 수십 명이었던 것도 이런 내부의 계파 갈등이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18] 아사히 신문이 해당 스캔들에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베 내각에 대한 악감정이 일본 공산당에 버금가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베 내각의 극우적인 정책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아베 내각이 매스컴을 자기 입맛대로 통제할 계획을 세운것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