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유명 일화

 


1. 코시엔 역대최강 KK콤비
2. 마쓰이 히데키 5연타석 고의사구 사건
3. 기적의 백홈
4. 1998년 마쓰자카 전설
5. 칸제이 고교의 비극
6. 2006년, 치벤 와카야마 vs. 테이쿄
8. 사가키타의 기적
9. 죠스이칸 비에 울다
10. 리쇼다이 쇼난 고교의 투혼
11. 히로시마 24이닝 혈전: 야마오카 vs. 타구치
12. 2013년 치바 쇼타의 연속커트 논란
13.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이룩한 우승
14. 기적과 복수
15. 키요미야 코타로의 첫여름
16. 친구와의 약속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의 유명한 일화들을 기록한 문서.

1. 코시엔 역대최강 KK콤비


쿠와타 마스미키요하라 카즈히로, 일명 KK콤비가 활약한 1983년-1985년의 오사카 PL학원고등학교는 고시엔 역대 최강이라 불린다. 이 콤비는 참가 가능했던 다섯개의 대회(83년 여름, 84년 봄-여름, 85년 봄-여름)에 모두 고시엔 진출, 우승 2회, 준우승 2회, 4강 1회라는 말도 안 되는 업적을 남겼다.[1][2]
'''1학년 첫 대회였던''' 83년 여름대회부터 쿠와타와 키요하라는 에이스와 4번타자 자리를 획득했는데 (일본의 야구부에서 갓 입학한 1학년이 주전은 고사하고 18인의 벤치멤버 안에 포함되는 것조차 거의 기적으로 여겨진다) 이 역사적인 콤비가 결성된 과정도 나름 극적이었다. 키요하라는 처음부터 엘리트로 대접받았지만 체구가 작았던 쿠와타는 신입생들 중에서도 뒷전이었고, 결국은 주전자 담당으로 취급받으며 투수를 때려칠까말까 고민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팀의 투수코치가 우연히 쿠와타의 가능성에 주목했고 감독에게 우기다시피하여 쿠와타를 기용하게 했다. 이에 경악한 선배들이 네놈때문에 우리의 여름이 끝장나게 생겼다며 쿠와타에게 린치를 가했지만 쿠와타는 굴하지 않고 지역예선의 선발 첫 경기에서 완봉을 거두며 실력을 증명해 보였다.
이후 쿠와타와 키요하라는 팀을 이끌면서 코시엔 예선 최고의 격전구 중 하나로 꼽히는 오사카지역예선을 통과하는 대 파란을 이뤄낸다.[3] 그리고 여름 고시엔 본선, 쿠와타는 당시 2개 대회(82 여름-83 봄)를 연속 제패하고 3연속 우승을 노리던 당대 최강, 일명 "메아리 타선"의 이케다 고교를 준결승에서 7-0으로 셧아웃시키며 전국을 충격에 몰아넣었고[4] 결승에서도 최고의 격전구인 카나가와현 대표로 올라온 요코하마 상업고교를 제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키요하라는 결승전에서 홈런을 치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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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키요하라, 오른쪽이 쿠와타
2학년 봄-여름 대회에서 모두 준우승, 3학년 봄 대회는 4강전 패퇴로 콩라인에 드는가 싶었지만, 마지막 대회인 85년 여름 대회에서 끝내기로 우승한다. 이 대회 결승전에서 키요하라의 활약은 눈부셨는데, 쿠와타가 두 번이나 리드를 허용했으나, '''그 때마다 동점포를 쏘아솔려''' 승리에 일조했다. 특히 두 번째 동점 솔로포로 3-3 균형을 맞췄을 때, 아사히 방송 캐스터가 외친 한 마디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명언.

甲子園は淸原のためにあるのか!!

'''"코시엔은 키요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당시 아사히 방송 캐스터

이 KK콤비의 고시엔 5개대회 통합성적은 경악 그 자체로 쿠와타는 20승 3패 방어율 1.55에 타자로도 6홈런(역대 2위)[5], 키요하라는 타율 .440에 13홈런. 쿠와타의 20승도 통산 2위 기록에, 학제 개편 이후로는 1위 기록이며 키요하라의 고시엔 통산 홈런수는 역대 1위이다.[6][7]

2. 마쓰이 히데키 5연타석 고의사구 사건


마쓰이 히데키(세이료 고교)는 1992년 여름 코시엔 2회전 vs. 메이토쿠 기주쿠[8] 전에서 메이토쿠 기주쿠 감독 마부치 시로에 의해 '''5연속 고의사구'''를 당했고 결국 팀은 한 점차로 졌다. 5번째 고의사구가 나올 때 해설자가 "승부하지 않습니다!!!!!!"라고 비명을 지른 것은 코시엔의 유명한 명대사(?) 중 하나.
마지막 고의사구 장면에선 분노한 관중들이 3루측 내야석에서 온갖 쓰레기를 그라운드에 투척했고[9] 중계진도 메이토쿠 기주쿠를 맹비난했다. 경기 후에는 당시 고교야구연맹 회장이 '도가 지나쳤다'며 담화를 발표했고 메이토쿠 기주쿠 고교의 숙소 주변에는 야구팬들의 습격(...)을 우려해 경찰이 배치되어야 했다. 메이토쿠 기주쿠는 다음 시합에서 히로시마 공고에 8:0으로 대패하며 탈락. 경기가 끝난 이후 관객들은 "돌아가! 돌아가!"를 연호하며 야유를 쏟아냈다.[10]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마쓰이 히데키는 '상대의 작전에 대해서는 할 말 없습니다' 라고...하지만 이 사건이 워낙 임팩트가 컸던지 '''고교야구에 5연속 고의사구를 당할정도의 강타자가 있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됐고, 안그래도 유명하던 마쓰이는 완전히 전국구 선수가 되어버렸다.그래서 나온 말이 '''(고시엔에서 홈런을) 쳐서 유명해진 것이 키요하라, 안쳐서 유명해진 것이 마쓰이'''. 물론 마쓰이도 5연속 고의사구를 얻어낼 만큼 많이 때려내긴 했지만 그만큼 임팩트가 컸다는 소리.
나중에 그 5연속 고의사구를 내 준 당시 선발 투수 코노 카즈히로와 만나게 됐을 때 '''"날 전국구 유명인으로 만들어 줘서 고마워"'''라고 했다고 한다. [11] 그리고 2013년 예능프로그램에서 <21년만의 제 6타석>이란 이름으로 다시 승부하게 되는데 결과는 정면승부 볼넷 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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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의 마쓰이.
이 사건으로 메이토쿠 기주쿠 야구부와 마부치 시로 감독은 일본 고교야구에서 '''악역'''(ヒール)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메이토쿠 기주쿠 야구부는 2005년 야구부원 간 폭력사건과 2006년에 한국 수학여행 절도사건을 일으키면서 이미지가 상당히 나빠진 상황.[12] 또한 이 5연속 고의사구 사건은 '''아사히 신문'''에서도 1992년 8월 17일 칼럼인 <소중한 것을 잊어버린 메이토쿠의 벤치>를 통해 신랄하게 깠으며 스포츠신문 1면이 이 사건으로 대서특필되는 등 사회에 상당한 논란거리를 가져다 준 사건.

3. 기적의 백홈



'''고시엔 100년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4. 1998년 마쓰자카 전설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앞세운 카나가와의 명문 요코하마 고교는 1998년 봄 센바츠를 우승하고 이어 여름 고시엔에도 출전한다. 이 봄-여름 대회를 걸친 1998년 마쓰자카의 활약은 선수 개인으로서는 역대 최고의 퍼포먼스 중 하나라고 불린다.
''' 8강전''' vs. PL학원[13] : 17회 완투승 (투구수가 250개가 넘었다!) [14] 해당 경기는 아사히 신문에서 진행한 최고의 고시엔 경기 투표에서 1위로 선정되었다.
'''다음날(!) 벌어진 4강전''' vs. 메이토쿠기쥬쿠 고교 : 마쓰자카는 좌익수로 선발 출전, 요코하마 고교는 메이토쿠 기쥬쿠에게 8회초까지 0:6으로 압도당하고 있었으나 8회말에 마쓰자카의 2타점 적시타를 포함해[15] 4득점, 4:6으로 따라잡는다. 그리고 마쓰자카가 9회초에 등판해[16] 15구로(삼진-볼넷-병살타)1이닝을 막아내고, 9회말 마지막 공격에서 무사 만루 → 2타점 동점 적시타 → 마쓰자카의 희생번트 → 이어진 2사 만루에서 끝내기 안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다.
'''또 그 다음날(!!)의 결승전''' vs. 교토 세이쇼 : 마쓰자카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팀을 고시엔 우승으로 이끈다.'''[17]
요약하자면 고작 사흘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3경기 27이닝을 던지며 17회 완투승 → 구원승 → 노히트노런을 거둔 초인적인 역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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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에서 노히트노런을 거두고 환호하는 마쓰자카. 그리고 마쓰자카 세대는 2000년대의 프로야구를 이끄는 주역이 된다.

5. 칸제이 고교의 비극


'''고시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학교'''로 불리는 2005년-2006년의 칸제이 고등학교(오카야마현)는 이 2년동안 '''네번의 고시엔에 출전, 네번 모두 최종이닝에 역전패'''하며 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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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제이 고교 야구부의 즐거운 한때. 맨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선수가 다스 로마슈 타스쿠(ダース・ローマシュ匡). 이름에서 보다시피 인도 혼혈 투수로 같은 혼혈(이란)투수인 다르빗슈와 한 팀에서 뛰게 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모리나가 제과의 다스 초콜릿을 선물받기도 했고, 의외로 카레를 싫어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2005년 봄 고시엔''': 칸제이 고교는 게이오 고등학교(카나가와)와의 1회전에서 접전끝에 '''9회말 굿바이로 7:8 역전패'''한다. 여기까지는 가슴아프긴 해도 고시엔이라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으니.......'''
'''2005년 여름 고시엔''': 칸제이 고교는 교토외대니시고(교토)와의 2회전에서 2회부터 롱릴리프로 투입된 2학년 다스 로마슈 타스쿠의 혼신의 피칭과 타선의 갑작스런 폭발로 8회에는 10:4로 리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스가 갑자기 무너지며 교토외대부속고에게 '''8회초와 9회초 공격에서 무려 8점을 허용하며 10:12로 역전패'''했다. 경기가 끝나고 선배들을 껴안고 통곡하며 사죄하던 다스의 모습은 2005년 고시엔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장면 중 하나.
'''2006년 봄 고시엔''': 3학년이 되어 팀의 에이스 겸 부주장으로 승격된 다스. 봄 고시엔 2회전에서 훗날 손수건 왕자라 불릴 사이토 유키의 와세다 실업고교(서도쿄)와 격돌했다. 다스와 사이토의 피말리는 대결끝에 시합은 7:7, 연장 15회 무승부로 재시합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재시합, 재차 등판한 다스가 기백의 피칭으로 9회까지 3:2로 리드를 잡아냈다. 그러나, 최후의 '''9회 초 수비, 우익수의 실책으로 2점을 허용하며 3:4로 또다시 역전패'''했다!!
'''2006년 여름 고시엔''': 다스의 마지막 여름,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힌 칸제이 고교는 이번에야말로 한을 풀고야 말겠노라며 고시엔으로 향했다. 그리고 분세이 예대 부속고교와의 1회전, 9회말 투아웃까지 10:7로 리드하는 다스와 칸제이 고교.
그러나 '''아웃카운트 하나 남기고''', 갑자기 물밀듯이 터져나온 분세이예대 부속고 타선에 다스가 침몰당하며 '''10:11, 끝내기 안타로 역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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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안타가 외야에 떨어지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마운드로 쓰러지는 다스. 고시엔 항목 맨 위의 사진이 쓰러진 채 통곡하는 다스의 모습이다.
이후 아사히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다스는 "마운드에서 기도했다. 신님, 제발 부탁합니다. 아직 야구를 하고 싶다고요....." "왜 내게만 계속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하지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한번 더 고등학교에서 지금의 동료들과 야구를 하고 싶다!"고 밝혀 수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칸제이 고교가 다스의 한을 푼 것은 5년이 지난 2011년 여름의 갑자원이었다. 칸제이 고교는 1회전에서 봄 고시엔 준우승팀이자 우승후보 1순위였던 큐슈국제대부속고교와의 대결에서 압도적 열세가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장 12회 혈투끝에 굿바이 안타로 2:1,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며 4강까지 진출, 학교 역대 최고성적을 올렸다. 칸제이 고교는 4강에서 니치다이산 고교에 4-14로 대패했다
다스는 졸업 이후 2006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고교생 드래프트[18] 4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했지만 그 후 5년간 2시합 등판, 0승 1패에 그친 채 2011년 방출되어 은퇴하였고, 현재는 다르빗슈 유 박물관의 관장으로 재임중이다.

6. 2006년, 치벤 와카야마 vs. 테이쿄


2006년 여름 고시엔 치벤 와카야마 고교 vs. 테이쿄 고교의 준준결승전에서는 사상 최대의 역전극이 일어난다. 테이쿄 고교는 9회초 투아웃까지 4-8로 밀리고 있었으나, '''아웃카운트 하나 남기고 폭풍 8득점으로''' 12-8로 경기를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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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쿄의 9회초 대공세
여기까지만 해도 극적인 역전극인데......절체절명에 몰린 치벤 와카야마가 '''곧바로 9회말에 5점을 몰아치며''' 13-12로 재역전승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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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승리에 환호하는 치벤 와카야마 선수들
아래는 테이쿄 고교 응원단의 표정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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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수무책으로 밀리던 9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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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초 테이쿄의 대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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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대역전 패배
이 '''"2006년 치벤 와카야마 vs. 테이쿄"'''는 일본에서 대역전승을 가리키는 일종의 고유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치벤 와카야마는 준결승에서 '''다나카 마사히로'''의 토마코마이 고등학교를 만나 탈락한다.)

7. 손수건 왕자 vs. 마군


사이토 유키(와세다 실업고교)와 다나카 마사히로(코마다이 토마코마이 고교)는 2006년 여름 고시엔 결승전에서 격돌, '''15회동안 완투하는''' 초인적인 투수전을 펼쳤지만 경기는 1-1로 무승부, 재시합이 결정되었다. (고시엔에서는 15회를 채울 경우 재경기를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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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사이토 유키(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오른쪽이 다나카 마사히로(현 뉴욕 양키스)
바로 다음날 열린 '''결승전 재시합'''[19]에서 사이토와 다나카는 또다시 격돌, 9회까지 투수전을 벌였고 결국 사이토가 마지막 타자로 나온 다나카를 삼진처리하며 4-3, 2006 여름 고시엔은 와세다 실업고교의 우승으로 끝난다. 이 대회에서 사이토 유키는 7경기에서 무려 950개가 넘는 공을 던졌고, 이른바 "손수건 왕자"라 불리며 (경기 도중 흰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사이토의 모습은 전국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전국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한다. 당시 사이토의 인기는 프로선수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역사적으로도 당시 사이토의 인기에 비견할만한 선수로는 사이토의 고등학교 선배인 아라키 다이스케[20], 위에서 나온 PL학원의 KK 콤비[21] 정도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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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 일본을 지배한 사이토의 손수건 왕자 신드롬
두 투수는 고시엔 이후 열린 가을 전국체전 결승전에서 재격돌하는데, 여기서 사이토의 와세다실업고교가 다나카의 코마다이 토마코마이 고교를 1:0으로 또 이긴다(...) 이 두 선수의 대결은 그야말로 전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 전국체전 결승전이 벌어진 경기장은 "손수건 기념 경기장(ハンカチメモリアルスタジアム)"으로 개명되었다.
러키☆스타 9화에도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2006 NPB 잠시 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는 반증.
대단한 라이벌이었던 이 둘은 각각 대학진학과 프로입단을 택하게 되고, 이후 운명이 드라마틱하게 갈려버린 것으로도 유명해진다.

8. 사가키타의 기적



일개 공립학교가 고시엔에서 우승한 사건. '''가장 위대한 우승'''이라 평가받고 있다.

9. 죠스이칸 비에 울다


2009년 여름 고시엔에서 히로시마 대표 죠스이칸[22] 고교는 코치현 대표 코치 고교와의 1회전에서 '''2승 1패로 탈락(?)'''한다.
'''첫 시합''', 죠스이칸이 2:0으로 리드하지만 3회 종료 후 '''비로 노게임 선언.'''
'''다음날 벌어진 재시합''': 죠스이칸이 리드하지만 6:5로 리드하던 5회초 1아웃에 다시 '''비로 노게임 선언.''' 이 경기에서는 죠스이칸이 후공이었기 때문에 아웃 두개만 더 잡았으면 강우 콜드로 승리했을 상황이었다.
'''다음날 비가 그치며 간신히 성립된 세번째 시합''': 여기서 9:3으로 패배하며 죠스이칸이 탈락한다. 2번 이기고 한번 졌지만 결국 패배한, 이른바 '''"죠스이칸 비에 울다"''' 사건.
그리고 이 죠스이칸 고교는 2011년 여름 고시엔에서도 사상 최초의 '''3시합 연속 연장전'''을 치르기도 한다. '''(그리고 3경기 전부 이겼다! 하지만 다음 시합에서 패하며 탈락)''' 이래저래 고생하는 것으로 유명한 학교.참고로 죠스이칸을 8강에서 이긴 고등학교는 위에 언급된 칸제이 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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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스이칸 고교 야구부

10. 리쇼다이 쇼난 고교의 투혼


2009년 여름 고시엔에서 8강에 진출한 리쇼다이 쇼난 고등학교 야구부는 지난 수십년간의 고시엔에서도 가장 눈물겨운 투혼을 불태운 학교로 손꼽힌다.
이 학교의 행보는 그야말로 눈물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 2009년 여름 대회에서 학교 역사상 최초로 고시엔 출전 결정. (시마네현 대표)
  • 41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급서한 다나카 겐지 감독의 영정을 모시고 출전. 당시의 3학년은 이 감독이 지도한 마지막 제자들이었다.
  • 대회 직전 인플루엔자가 팀을 강타. 컨디션 바닥까지 떨어짐.
  • 첫 경기인 32강전에서 0-0의 격렬한 투수전을 벌이다가, 9회초 수비 1사 2루에서 얻어맞은 큼지막한 타구를 외야수의 기적적인 다이빙캐치로 막아내고 다음 타자를 1루수 땅볼로 잡으며 패배를 모면. 그리고 바로 다음 9회말 공격에서 굿바이 홈런으로 승리.
  • 다음 2회전, 18명의 선수 중 주전 2명과 모든 구원투수 등 총 4명이 인플루엔자로 출전불가 판정. 투수는 에이스 한명밖에 남지 않음.
  • 16강전에서도 경기 내내 밀리다가 8회에 3점을 몰아치는 극적인 역전극으로 4-2 신승.
  • 마침내 올라온 8강전, 그해의 전국 준우승팀이 되는 초강호 일본문리고교와 대결을 앞두고 팀의 주장까지 인플루엔자로 출전불가 판정. 고작 13명만 남음.
  • 초강호교를 상대로 엄청난 투지를 발휘, 6회에는 3-2로 역전까지 잡아냄.
그러나 6회말, 팀에 유일하게 남은 투수였던 에이스 사키타 미라의 체력이 마침내 다하면서 대량실점, 역전을 허용하고 리쇼다이 쇼난 고교는 결국 3-11로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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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말 수비에서 패배를 직감한 에이스 사키타가 눈물을 흘리며 공을 뿌리고, 수비를 간신히 마친 뒤 덕아웃에서 오열하면서 동료들을 응원하던 광경은 일본 전국의 심금을 울렸다.
비록 8강에서 패배했지만, 리쇼다이 쇼난 고교 야구부는 전국적인 찬사를 받았으며 그 해 대회의 주인공 중 하나로 꼽혔다.
참고로 리쇼다이 쇼난 고교를 8강에서 이긴 고등학교는 니가타현의 강호 니혼분리고교 이다

11. 히로시마 24이닝 혈전: 야마오카 vs. 타구치


2013년 여름 고시엔 히로시마 지역예선 결승전에서는 마치 만화와도 같던, 일본 고교야구 사상 가장 격렬했던 투수전 중 하나가 펼쳐진다. 지난 십수년간 히로시마는 2007년 사가키타에게 패해 준우승한 코료 고교와 "죠스이칸 비에 울다" 사건의 죠스이칸 고교가 고시엔 출전권을 독점해왔으나 그 두 강호는 각각 다른 다크호스들에게 패해 탈락한다. 그 장본인들은 코료를 꺾은 세토우치 고교의 에이스 야마오카 타이스케와 죠스이칸을 격파한 히로시마신죠 고교의 에이스 타구치 카즈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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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야마오카, 우측이 타구치. 이 두 에이스는 히로시마의 지배자들이었던 코료와 죠스이칸을 각각 9이닝 2실점으로 압살한다.
이 두 에이스가 이끄는 다크호스들이 고시엔 진출권을 둘러싸고 격돌한 결승전은 그야말로 처절한 투수전이었는데, 두 투수가 완투하는 가운데 '''무려 15이닝동안 양 팀 아무도 점수를 내지 못했다!''' 결국 0:0 무승부로 재시합이 선언된다. 특히 야마오카는 '''9회 1사까지 노히트, 15이닝을 1안타 15삼진'''으로 봉쇄하는 전설에나 남을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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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대회 결승 (연장15回 무승부)
그리고 이틀 뒤 벌어진 재시합, 또다시 0의 행진이 시작된다. 두 에이스는 또다시 완벽하게 상대 타선을 틀어막았고 8이닝이 지나도록 점수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8회말, 세토우치 타선이 마침내 1점을 뽑아냈고 이은 9회초 공격에서 야마오카가 히로시마신죠 타선을 막아내며 일본 전국의 관심을 불러모은 이 24이닝에 걸친 투수전은 1:0으로 마침내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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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대회 결승 (재시합)
2경기 24이닝, 총 47회의 공격기회동안 두 팀이 뽑아낸 점수는 '''세토우치의 마지막 공격에서 나온 단 1점'''에 불과했으며, 야마오카와 다구치 두 투수는 총 43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그야말로 만화에나 나올 법한 투수전이었다.[23]
'''야마오카 타이스케: 24이닝 무실점 6피안타 21삼진'''
'''타구치 카즈토: 24이닝 1실점 18피안타 22삼진'''
야마오카의 세토우치 고교는 고시엔에 진출, 1회전에서 우승후보 메이토쿠 기쥬쿠 고교와 격돌, 0:2로 아깝게 패한다. 그러나 야마오카는 완투했으며, 6안타를 허용하는 와중에 9개의 삼진을 잡아냈고 자책점은 1점에 불과했다. 야마오카의 슬라이더는 이른바 "사라지는 마구"로 불리며 유명세를 구가했고, 그 해 전국 최강의 타선 중 하나로 불렸던 메이토쿠 기쥬쿠가 2점밖에 뽑아내지 못한 것은 이 경기가 유일했다.
고시엔 종료 뒤 열린 세계야구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야마오카와 타구치 모두 일본대표팀에 선발된다. 타구치는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 2017년 13승 4패 3.01의 성적을 올리며 팀의 에이스로 발돋움했다. 2017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에서는 결승전 한국과의 경기에서 7이닝 3피안타 무사사구 삼진 6개를 기록하며 일본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사회인 야구 도쿄가스에 입단한 야마오카는 이후 오릭스 버팔로스에 2016년 NPB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로 지명되었다.

12. 2013년 치바 쇼타의 연속커트 논란


2013년 여름 고시엔에서 하나마키히가시 고교의 2번타자 치바 쇼타의 타법이 문제시된 사건. 신장이 156cm에 불과한 이 선수의 타법은 작은 키를 이용해 얼굴을 스트라이크존에 바짝 갖다 대고서 공을 바라본 뒤 가볍게 휘두른 배트를 공에 맞춰 파울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포볼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파울을 쳐댔고, 그 결과 고시엔 준준결승까지의 스탯은 7할 타율에 출루율 8할. 게다가 완전히 투수를 소모시키는 전략인지라 투수들이 한 시합에서 이 선수 한 명에게 던지는 투구수가 '''40개'''에 달할 정도였다.[24]
결국 '의도적으로 파울을 치는 타법은 그 동작에 따라 심판이 번트로 판정할 수 있다'는 일본 고교야구 규정에 의거해 치바 쇼타는 준결승에서 심판진에게 '이 타법으로 계속해서 파울을 칠 경우 3번트 실패로 간주한다'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그리고 치바 쇼타는 준결승에서 하나의 안타도 치지 못한 채 출루하지 못했고, 팀도 미야자키현의 노베오카학원고교한테 0:2로 패했다.[25] 게다가 이 선수 뿐만이 아니고 이 팀 자체가 준준결승 당시 2루에 진루한 상황에서 포수의 사인을 보고 타자에게 제스쳐로 알리는 이른바 '사인 훔치기' 의혹으로 주심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 결국 '비겁한 야구', '더러운 야구'라는 비난과 '단순히 기술일 뿐' '신체조건에서 밀리는 선수의 근성있는 야구' '8강까지는 아무런 문제제기도 없다가 준결승 직전에야 지적하는 것은 연맹의 횡포'라는 의견 등 찬반양론이 갈렸다.[26] 특히 이미지가 좋을수가 없었던 게 사인 훔치기로 주의를 받은 바로 다음경기에서 지금까지 폭발하던 타선이 식어버리면서 영봉패해버리는 바람에 더더욱...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선수는 '''95회 고시엔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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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さな巨人(작은 거인)" 치바 쇼타. 그의 야구는 근성인가, 계략인가?
현재는 니혼대학에 생산공학 전공으로 진학해 야구를 하고 있으며 2016년 전국체육대회, 메이지진구 야구대회에 출전하는 등 대학무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하고 있다. 타격폼을 보통의 폼으로 바꿔도 높은 출루율을 자랑한 건 덤. 2016년에는 니혼TV의 <Going>에서도 커트타법으로 유명한 아카호시 노리히로에게 자신이 오래 연습해야 했던 커트 기술을 잘 쓰고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아카호시는 치바의 타격폼을 보고 타석에서 체중이 1루로 쏠려 있는 까닭에 강한 타구를 치기가 어려워서, 이것을 개선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이후 프로지명을 받지 못하고 향후 프로행을 위해 사회인야구 큐슈 미츠비시 자동차 팀에 입단했지만, 신장이 156cm로 지나치게 작아서 사회인야구에서도 프로 지명이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27]
프로야구 좀 본 팬들은 이게 대체 왜 문제인지 모를 수도 있다. 커트로 투수를 소모시키는 것은 프로야구에서는 훌륭한 전략의 하나로 타석당 투구수가 많은 타자는 칭찬을 받는다. 하지만 풀리그로 치러지는 프로야구 경기와 다르게 고시엔은 토너먼트 경기로 치러진다점에서 조금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전국 도도부현에서 올라온 약 48+a 개의 팀들[28]이 맞붙는 고시엔 본선은 고시엔 구장을 비워주는홈 팀 한신 타이거스의 입장도 있고 하니 보통은 3주,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 대회가 끝나야한다.그렇기 때문에 개막일을 제외하면(개막일은 3경기) 하루에 4경기나 편성이 되고 아침 8시부터 경기가 시작되며 한국 고교야구 전국대회와는 달리 야간 경기가 없다. 다음 경기를 위해 가능한 빨리 경기를 끝내야하기에 공수교대나 사사구때도 무조건 뛰어나가야 하고 진 팀은 주저앉아 울 시간도 없이 상대팀과 인사하고 경기장을 나가지만 그럼에도 다음 경기시간이 밀리는게 부지기수다. 게다가 한창 더울 8월에 아침부터 경기를 시작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이기기 위한 전략이라 하더라도 타자 한명이 고의적으로 몇 십개의 공을 커트하는 것은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고 이는 경기진행에 차질을 줄수 있다고 볼 수 있다.물론 땡볕에 서있어야하는 수비팀과 관객들 역시 죽어나가는 일이다. 예선포함 약 한 달 동안 한여름 땡볕에서 경기를 치러야하는 선수들의 체력문제와 앞서 말한 한신의 입장, 빠른대회 진행 등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했을때 이러한 몇 십개의 고의적인 커트는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프로야구는 6개월간 거의 매일 경기를 치루긴해도 대부분 해가 질 때쯤 선선한 저녁시간에 치르고, 퍼시픽리그의 경우 4팀,센트럴리그는 2팀이 돔 구장을 쓰는 만큼 더위문제가 해결가능한 돔 경기를 치를 때도 많으면서 여러명의 투수를 운용해 한 시즌을 진행하는 만큼 한 투수만 죽어라 던지고 한 달안에 빨리 끝내야 하는 고시엔과는 이러한 커트전략이 당연히 비교하기가 힘든 문제이다. 물론 별말 없다가 갑자기 이를 문제삼아 금지시키는 것은 역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근본적으로 이러한 살인적인 일정으로 진행되는 고시엔이 제일 큰 문제점이긴 하다.
결국 치바는 아직까지 프로지명을 받지 못했으며, 이 연속커트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고교야구 선수들의 혹사 실태가 공론화되었다.

13.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이룩한 우승


2013년 여름 고시엔의 우승팀 마에바시 이쿠에이 고등학교는 감독인 아버지와 선수인 아들이 함께 전국제패를 일궈내며 일본 전역을 감동시켰다.
마에바시 이쿠에이 고교의 아라이 나오키 감독은 20년 가까이 야구부를 이끌어온 베테랑 감독. 야구부를 지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커온 아라이 감독의 아들 아라이 카이토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 "6년뒤의 나"라는 작문에서 "아버지의 학교에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고시엔에 진출, 전국제패를 이룩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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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 카이토의 초등학교 시절 작문. '''"고시엔에서 전국제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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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엔에서의 위닝볼을 아버지 아라이 감독에게 선물하는 아들 아라이 카이토
그리고 6년 뒤 고시엔, 아라이 카이토는 4번타자이자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었고 약체로 평가받던 마에바시 이쿠에이 고교는 전국의 강호들을 연파하며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아라이 카이토는 결승전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결승타를 쳐냈다.
마에바시 이쿠에이 고교는 여름 고시엔 첫 진출에 우승을 거두었고, 아라이 부자는 '''그 초등학교 5학년 꼬맹이의 장담대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전국제패를 달성했다.'''

14. 기적과 복수


2014년 여름 고시엔 지역예선 이시카와 현 대회 결승, 마쓰이 히데키의 모교인 세이료 고교는 코마츠 오오타니 고교와의 대결에서 9회까지 0:8로 압도당한다. '''그러나 9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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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료가 9점을 뽑아내며 기적적인 역전승을 거둔다.'''
이 당시 세이료측 벤치는 완전한 패배 분위기였으나, 감독의 한마디가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한마디란 "올해 우리 학교의 슬로건은 '''반드시 웃는다(必笑)''' 아니었냐? 질 땐 지더라도 우리가 내건 슬로건 만은 끝까지 지켜내자"였고, 그 말을 들은 당시 에이스 이와시타 선수가 마운드에서 포수와 함께 "야, 우리 즐기자" "그렇네, 즐겨보자"라는 대회를 나눈 후 이런 대역전극이 시작되었다.
9회 말 8점차의 상황에서 대타로 나선 선수부터 모든 선수들이 모두 웃으며 경기를 즐기려 하자, 오히려 코마츠 오오타니 고교의 선수들은 "쟤들 왜저래? 왜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지?"라는 생각에 오히려 압도당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운 나쁘게도 에이스 야마시타가 다리에 경련이 오는 상황이 되어 2학년 후보투수로 바뀌게 되고 이 투수가 고시엔 경기라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이런 기적의 역전극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1년 후''', 2015년 여름 고시엔 지역예선 이시카와 현 대회 준준결승, 역전극의 승자 세이료 고교와 코마츠 오오타니 고교가 재대결한다. 이번에는 세이료 고교가 우세, 9회까지 3:0으로 리드한다. '''그러나 9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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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코마츠 오오타니가 4점을 뽑아내며 9회말 역전승, 통렬한 복수에 성공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코마츠 오오타니 측의 선발은 바로 '''1년 전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7점차(첫 1점은 에이스 야마시타가 내 줬다) 대역전패를 당했던 당시 2학년 투수였던 키무라 쿄시로'''였는데(이 대회에선 3학년 에이스), 이 친구가 선배 야마시타 처럼 '''다리에 경련이 오는 바람에 1점을 내 준 상황에서 교체'''되어버려 후속 투수가 실점을 하며 9회까지 3:0으로 끌려갔던 것.
게다가 굿바이 점수를 낸 선수는 1년전의 대역전패를 보며 코마츠 오오타니의 분통함에 공감하여 입학한 1학년 선수가 대타로 나와 때려낸 것이라 여러 의미에서(똑같은 상황에 끌려들어갔음에도 역전에 성공, 대역전패를 보며 함께 분개하며 코마츠 오오타니에 입학한 신입생이 자기 손으로 복수를 해 줬다는 점 등) 정말 통렬한 복수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5. 키요미야 코타로의 첫여름


2015년의 여름 고시엔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선수는 뭐니뭐니해도 서도쿄 대표 [29][30] 와세다 실업 고교의 슈퍼 1년생 키요미야 코타로 (清宮幸太郎). 오 사다하루 (왕정치) 와 사이토 유키 (2006년 다나카 마사히로와의 극적인 결승전 주인공 '손수건 왕자')를 배출했고 도쿄 프리미엄까지 붙어서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고교 중 하나인 와세다 실업 고교, 거기에 1학년생이 괴물같은 포스를 낸다는 것만으로도 일본 전체가 떠들썩했다.[31] 전 럭비 일본 대표 출신인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천부적인 몸에다 어릴 적부터 럭비와 야구를 병행하며 파워까지 갖춘 그는 1학년생으로서 지역대회 타격 5할이라는 경이적인 성적으로 연일 스포츠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동도쿄 지역에서 간토이치(관동1)고교의 나이지리아 혼혈 선수인 오코에 루이가 지역대회 4할에 100미터 11초 주력[32]으로 관심을 받기도 했지만 역시나 일본인, 와세다, 도쿄 라는 매력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다 성적까지 걸출하다보니 진작에 '제 2의 마쓰이'라는 식의 수사들이 붙기 시작했고 언론에서는 프로선수들에게도 부지런히 기요미야에 대한 코멘트를 받아왔다. 과도한 관심이 부담될만도 한데 인터뷰에서 자기는 그런 압박감이 오히려 동기 유발이 된다라며 1학년생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경기에서도 보면 1학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해 보인다.
처음 맞이하는 여름 고시엔 대회이고 1학년이 3번을 맡는다는 것도 중압감을 느낄만한데 1회전에서 1안타, 2회전에서 2안타를 치더니 결국 3회전에서 3안타 1홈런, 4회전에서도 홈런을 때리며 고시엔의 스포트라이트는 거의 혼자 다 받는 듯했다. 1학년이 고시엔 대회에서 2홈런을 친 것은 1983년 PL학원의 전설의 KK콤비 중 구와타 마스미(기요하라가 아닌 것도 이채롭다 ) [33] 이래로 32년만이다. 준결승은 서도쿄의 와세다 실업 고교와 동도쿄의 관동1고가 진출함으로써 도쿄 두 팀이 한꺼번에 4강에 올랐는데 (이것도 28년만의 기록) 기요미야의 와세다 실업 고교는 이번 대회 가장 주목받는 투수 중의 한 명인 사토 세나가 버티고 있는 센다이 이쿠에이 고교와 4강전을 치뤘다. 이 경기에서 기요미야는 안타 하나를 기록하긴 했지만 이전에 만났던 투수와는 급이 다른 포크를 보여준 사토 세나에게 밀리는 모습. 결국 팀은 0-7로 패하며 기요미야의 고교 첫 여름은 이것으로 마치게 됐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고시엔에 데리고 와준 선배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다시 태어나서 야구를 또 하게 된다면 이 선배들과 하고 싶다' 라는 의젓한 멘트를 눈물을 흘리며 날리기도 했다. 타력에 비해서 투수력이 비교적 약하다는 평이었던 와세다 실업이기 때문에 격전지 중의 하나인 서도쿄에서 내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은 우려도 있지만[34] 기요미야의 포텐셜을 볼 때 벌써부터 프로팀들이 눈독을 들이는만큼 앞날이 기대되는 선수. 고시엔이 끝난 후에 세계 청소년 야구대회 일본 대표에 1학년으로는 유일하게 뽑히기도. [35]
2017년엔 주장을 맡아 준결승전에서 하치오지고교에게 승리하고 고교 통산 최다홈런 타이기록(107홈런)을 세웠지만, 결승전에서 도카이대 부속 스가오 고교에게 패하여 결국 고3 고시엔 진출은 좌절되었다. 대신 와세다대 계열 학교 중에선 사가현의 와세다사가고등학교가 개교 8년만에 처음으로 고시엔에 진출했으나 미야자키현 대표인 세이신우르술라고교에게 1회전에서 패하였다. 2017년 8월까지의 스포츠신문, 주간지 보도를 보면 기요미야 본인은 와세다대학에 진학할 것이 유력하지만 일부 언론에서는 사이토 유키의 사례를 들어 기요미야의 진학에 대해 상당히 우려를 표하고 있는 중. 그러나 와세다에서는 인간과학부 통신교육 과정도 있어서 도호쿠복지대 통신교육과정을 수강한 키쿠치 유세이의 사례처럼 학업과 프로생활을 병행할 수도 있다.
결국 2017년 9월 말경 기자회견을 통해 프로 진출을 선언했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2018년 하반기부터 1군으로 콜업되었다.

16. 친구와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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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고시엔 3회전 쥬코다이쥬코(中京大中京) vs 간토이치고[36](関東一高). 7회 우승으로 여름 고시엔 역대 최다 우승팀인 아이치현 대표 쥬쿄다이쥬쿄와 격전지의 벼랑에서 올라온 동도쿄 대표 간토이치고. 쥬코다이쥬코의 에이스 우에노 쇼타로 [37]와 간토이치고의 포수 스즈키 다이치는 초등학교 6학년때 배터리를 이뤘던 친구 사이. 아이치 시니어에서도 같이 호흡을 맞추다가 고등학교 진학을 두고 우에노는 고향 아이치에 남은 반면, 스즈키는 도쿄로 야구 유학을 가서 간토이치고에 입학. 둘은 나중에 고시엔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문제는 둘 다 1, 2학년 때는 학교 자체가 지역대회에서 밀려서 고시엔에 아예 나오지를 못한 것. 그러다가 두 사람이 3학년이 된 2015년, 나란히 출전하게 된 3회전에서 운명처럼 적으로 만나게 된다.
포수에 7번 타자로 나선 스즈키는 친구인 우에노에게 세 타석에서 좌익수 플라이, 루킹 삼진, 헛스윙 삼진을 당해 두 사람은 대결은 우에노의 압승. 7회 세 번때 대결이 흥미로웠는데 11구까지 가는 접전, 스즈키가 계속 파울로 커트하자 두 사람이 배터박스와 마운드에서 서로 웃음짓는 모습으로 훈훈한 모습을 보이기도. 경기가 끝난 후 스즈키는 자기가 당한 삼진 중에서 가장 즐거웠다고.
그러나 경기는 9회 간토이치고의 나가시마가 끝내기 홈런으로 1-0으로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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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노: 재미있었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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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지금까지 당한 삼진 중에서 제일 기분좋아떵.
그런데 이 두 선수, 고교 졸업 후 같은 코마자와 대학으로 입학하면서 다시 한번 배터리를 이루게 되었다.
[1] 아이치현의 추쿄고등학교가 2차대전 이전에 여름대회를 3연속 제패한 적은 있지만(역대 유일. 추쿄고등학교는 현재 추쿄대학부속 추쿄 고교로 개명했으며, 2009년 여름 코시엔에서 전국 제패에 성공했다), 보통 역대 최강팀은 83-85의 PL학원을 꼽는다.[2] 더 놀라운 건 재학 중이던 3년 내내 여름 대회 진출을 성공했는데, 이들이 속해 있던 지구는 전국 최고 격전구 오사카다. 전국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있는 오사카의 200여개 이상 학교 중에서 매년 단 한팀만 여름 고시엔에 출전할 수 있는데, 이들은 3년 내내 저 경쟁을 뚫고 올라왔다는 것이다.[3] 특별대회를 제외하면 약 900만이 거주하는 오사카부에서 단 한 개의 고등학교만 고시엔에 진출할 수 있다.[4] 이 경기 2회말, 쿠와타는 '''좌월 투런포를 쏘아올려''' 리드를 3-0으로 벌려놓기까지 했다.[5] 쿠와타는 1학년때 2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상술한 4강 이케다전. 1학년생의 고시엔 홈런 기록은 2015년 와세다 실업고교의 키요미야 코타로(現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2홈런으로 타이를 이뤘을 뿐 여전히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다. (키요하라는 1학년 때 1홈런. 근데 그게 결승전 홈런이었다)[6] 그것도 압도적인 1위이고, 2위가 6개의 파트너 쿠와타(...)[7] 경신이 사실상 불가능한 기록이다. 우선 고교 3년 재학중에 열리는 5회의 고시엔에 모두 출전하는것 부터 사실상 불가능하며, 키요하라의 재학 시절엔 코시엔 구장에 럭키존이 있기도 했다. 코시엔의 럭키존은 1947년 처음 설치되어 1949년부터 상설화되었다가 1991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철거되었으며 운용당시 구장 크기는 좌·우익 91m, 가운데 120m였다.[8] 고치현의 명문교로 고시엔 단골 출전학교다.[9] 이 쓰레기를 치우러 달려간 것은 세이료 고교 야구부 학생들이었다.[10] 상대 학교에 대한 예의를 그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일본 고교야구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비난여론이 엄청났다는 의미.[11] 코노는 고시엔 대회 종료 후 센슈대학에 진학하여 사회인야구단 <치바열혈 MAKING> 감독을 2016년까지 맡았으며, 2015년 주간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관중보다 감독이 더 무서웠다고 술회했다. 당시 상황이 상당히 살벌했는데 투구연습을 하고 있는데 온갖 야유와 욕설이 들렸으며, 그 때 야유(ブーイング)라는 단어의 뜻을 처음으로 알았다고 한다. 2017년에는 아들이 마쓰이가 뛰었던 뉴욕에서 세계 최대의 학생 무용대회인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결승전에 참가한다고...[12] 이 사건으로 마부치 감독도 책임을 지고 퇴임했다가 2006년 여름에 복귀했다.[13] 위에서 언급된, 구와타와 기요하라의 출신교이기도 하다.[14] 이 경기 후 방송 인터뷰에서 '''"팔이 아파서 내일은 절대 못 던져요!"'''라고까지 했다. [15] 중요한 게 이거다. '''마운드에 올라오지만 않았을 뿐이지''', 여전히 야수로서 전 이닝 출전중이었다(!)[16] 당시 요코하마고교의 감독에 의하면 전날의 혈전 때문에 경기 시작 전부터 4강전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고, 6점차로 뒤진 8회말까지만 해도 경기가 물건너갔다고 보고 마쓰자카를 등판시킬 생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 경기에서 패한다면 그 경기가 마쓰자카의 고교 최후의 경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투수 대신에 야수로 출전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8회말에 추격을 하여 역전의 가능성이 생기자 생각을 바꿔서 9회초에 등판시켰다고 한다.[17] 결승전 노히트 노런은 1939년 시마 세이이치 이후 59년만의 기록으로 여름 고시엔 사상 2번째 기록이며 2013년 현재까지 여름 고시엔 최후의 노히트 노런이다.[18] 2005~2007년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는 고등학생 대상/대학생+사회인야구 선수 대상 드래프트가 따로 있었다.[19] 1969년 이후 37년만이다.[20] 전 야쿠르트 스왈로즈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에게 다이스케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 장본인이다. 현재는 사이토 유키 소속팀인 니혼햄 2군감독으로 재임중이다.[21] 저 둘이 화제를 몰고 있을때 선수말년으로 접어들고 있었고 KK콤비 중 쿠와타는 이승엽과 같은 소속팀이었다.[22] 죠스이칸 고교도 학교 이름을 알리려는 재단의 전폭적 지원으로 단시일에 전력을 급성장시킨 신흥강호이다. 전통적으로 히로시마는 히로시마 상고와 코료 고교의 양강체제였으나 이 양강체제의 구도를 깬 것이 죠스이칸 고교이다. 최근에는 공립학교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히로시마상고가 침체기를 겪고있고 죠스이칸과 코료고교가 양강체제를 형성하고 있다.[23] 타구치는 이후 자신을 응원하던 학교 2년 후배와 결혼한다.[24] 실제로 2018년 센바츠대회 기준 1회당 평균 투구수가 15.2구, 9회당 계산시 136.8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막대한 이닝수를 소화하는 투수들에게는 이것도 어깨와 회전근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고시엔 등 아마추어 대회 투구수가 버두치 리스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어깨를 갈아먹는 데 일조한 셈.[25] 그리고 덕아웃에서 통곡했다.[26]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2013년 8월 22일 스포츠호치에 1면으로 대서특필되기도 했다.[27] 현재 MLB 최단신 선수인 휴스턴 애스트로스호세 알투베KBO 리그 최단신 삼성 라이온즈김성윤 선수도 160cm를 넘는다.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단신 선수인 하마사키 타다하루(1947년 주니치 드래곤스 입단)와 키가 같지만 고령으로 선수생활을 일찍 마감했다.[28] 도쿄는 동,서 홋카이도는 남,북을 나눠 2팀이 올라온다[29] 등록 학교수가 200개가 넘어가면 한 지역을 둘로 나눈다. 도쿄는 동서, 홋카이도는 남북. H2에서는 도쿄를 남북으로 나누는 설정.[30] 원래는 동도쿄 지역에 학교가 있었으나 학교가 신축 이전을 하면서 서도쿄 지역으로 소속지구가 바뀌었다. 서도쿄 지역 내 라이벌 학교는 일본대학제3부속고교가 있다.[31] 그런데 사실 중학생 때부터 이미 장래가 촉망받는 선수로서 학생야구 팬들 사이에선 유명했다고 한다. 광적인 고교야구 팬으로 유명한 개그콤비 안잣슈의 멤버인 와타베 켄은 2014년도에 나름 전국구로 통하는 개그맨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3이던 기요미야의 사인볼을 생일선물로 받고 엄청 기뻐했다고. 이유는 "워낙 장래가 촉망되는 중학생인지라 반드시 고교에 진학하면 고시엔의 스타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팬이 되었는데, 와타베가 기요미야의 팬이라는 걸 안 후배게닌이 '''경기장 앞에서 4시간이나 기다려서''' 겨우 사인을 받아 냈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기뻤는지 아메토--크의 '고교야구 정말 좋아하는 게닌'편에 나와서 사인 받은걸 자랑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5년 고교에 진학한 기요미야는 보시는바 대로다[32] 바로 밑의 '친구와의 약속' 항목의 그 3회전 경기에서 중견수로 출전한 오코에는 1회초 2사 만루의 위기에서 좌중간 2루타성 타구를 러닝캐치로 잡아내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게 된다.[33] 구와타는 투수로서 기록이 엄청난데다 (20승으로 역대 2위)기요하라가 13홈런을 때리면서 고시엔 역대 최다 홈런 기록을 가지고 있어서 잘 언급이 안되기는 하지만 구와타 역시 6홈런으로 공동 2위다. 83년 우승 당시 기요하라는 홈런을 하나밖에 기록하지 못했는데 그게 결승전 홈런..[34] 실제 2016년 여름 서도쿄예선에서 와세다실업고는 한번도 고시엔에 진출해보지 못한 하치오지고교에게 준결승에서 무릎을 꿇으며 여름대회 진출에 실패했다.[35] 한국과의 경기에서 4타수 2안타를 쳤다.[36] 이 경기에서 바로 위 항목의 '오코에 루이'(現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중견수로 뛰고 있었다.[37] 고시엔이 끝난 후 세계 청소년 야구대회에 일본 대표로 뽑혔고 슈퍼라운드 한국전에서 선발로 등판, 7회 무실점으로 콜드게임의 선봉장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