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사건
1. 개요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이 소위 5.16 통지를 회람시켜 정치국원 겸 베이징 시장 펑전, 정치국 후보위원 루딩이, 양상쿤, 뤄루이칭 등을 숙청한 사건을 말한다. 해서파관 사건이 불러온 중국 정치사의 대 참극이다.
2. 배경
1965년 11월, 해서파관 사건이 발생하였다. 초기에는 의미없는 학술논쟁으로 보였던 이 사건은 배후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숙청하고자 했던 마오쩌둥이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정치사건으로 비화되었다. 곧 베이징 시장 펑전, 정치국 후보위원 루딩이 등이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 무력화되었다.
마오쩌둥은 펑전, 뤄루이칭, 루딩이, 양상쿤이 쿠데타를 모의한 반당 파벌의 일부라고 비난했다. 1966년 4월 18일 해방일보는 <마오쩌둥 사상을 받들어 위대한 붉은기를 들어 문화대혁명에 적극 참가하자>라는 사설을 발표했고 1966년도 8호 <홍기>는 사설 이름을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만세>로 지었다. 4월 28일 옌웨이빙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고 며칠 후에 루딩이가 가택연금되었다. 5월 6일 인민일보는 덩퉈와 그 추종자들을 비난했으며 5월 8일 해방일보는 <반당, 반사회주의의 검은 선을 향하여 불을 지르자>라는 글을 발표했고 5월 14일에 <삼가촌의 반동 진면목을 보십시오!>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어 <홍기>와 <인민일보>도 덩퉈, 우한, 랴오모사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이들을 사주하고 이들을 지지하고 이들을 비호하고 있다."고 배후를 거론했다. 5월 16일 인민일보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내용을 실었다.
3. 전개
3.1. 정치국 확대회의
1966년 5월 4일, 정치국 확대회의가 소집되었다. 먼저 린뱌오가 궁지에 몰려 있던 루딩이를 공격했다.
이어 린뱌오는 예췬이 결혼할 당시에 처녀였으며 예췬은 바람을 핀 적이 없고 린리궈와 린리헝은 자신의 친자라고 보증하는 서한을 제시했다.[1] 당황한 루딩이가 변명했다."당신과 당신 아내는 오랫동안 음모를 꾸며 익명의 편지를 수도 없이 보내면서 예췬 동지와 내 가족을 모략중상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였는지 말해!"
린뱌오는 책상을 후려치며 "거짓말! 어떻게 자기 아내가 한 일을 모른단 말이오!"라고 소리 질렀고 루딩이는 "남편이 부인이 한 일을 모른다는 것이 이상하단 말입니까?"라고 대꾸했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린뱌오가 예췬이 바람 핀 일을 모른다고 빈정대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린뱌오가 루딩이를 죽여버리겠다고 달려들었고 캉성이 루딩이가 간첩이라고 판결했다. 펑전, 루딩이, 뤄루이칭, 양상쿤은 반당집단 괴수로 지목되어 장제스의 간첩으로 비밀공작을 해왔다고 규정되었다. 린뱌오가 천보다가 작성한 오인소조의 죄상을 발표했다."옌웨이빙이 익명의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녀와 나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논의한 바 없었으며 나에게 보여준 적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나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린뱌오는 마오쩌둥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기회를 노리며 때를 기다리는 수많은 위선자들이 있다. 그들이 우리의 죽음을 원하는 이상 우리는 그들을 박살내야 한다! 그들은 가짜 혁명가이고 가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거짓으로 마오쩌둥 사상을 따르는 배신자다. 마오 주석이 여전히 건재함에도 그를 배신하려 하고, 앞에서는 주석과 뜻을 같이하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반대한다. 출세 제일주의자들이며, 속임수를 쓰고, 바로 이 순간에도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 한다. 그들은 온갖 속임수를 동원해서 사람들을 죽이려 한다!"
저우언라이도 거들었다."마오 주석은 혹시 천재가 아닐까? 마오 주석이 없으면 새로운 중국도 없지 않을까? 왜 다른 사람은 안되고 마오 주석이어야만 할까? 마오쩌둥 사상은 정말로 창의적이지 않은가? 만일 창의적이지 않다면 왜 우리가 마오쩌둥 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겠는가?"
"나는 린뱌오 동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가 정말로 잘 이야기해주었다."
3.2. 5.16 통지
5월 16일, 당지도부 인사들에게는 펑전이 베이징을 수정주의의 요새로 바꾸었다는 공지문, 소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5.16 통지>[2] 가 회람되었다. 5월 16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당과 정부기관, 군대를 비롯한 문화계 전반에 스며든 이런 부르주아의 대변인들의 연을 끊어라. (...) 그들 중 일부는 우리가 이미 파악했고 일부는 그렇지 못하다. 일부는 우리가 여전히 신뢰하고 우리 후계자로 훈련시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요컨대 여전히 우리 곁에 바싹 달라붙어 있는 흐루쇼프 같은 자들이다."라고 교시했다. 5.16 통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편 덩퉈는 아내와 펑전에게 보내는 유서를 배게에 끼워놓은 후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정당한 중국 공산당 만세! 우리들이 경애하는 영수 마오쩌둥 주석 만세!"라고 유서에 쓰고 자신이 수집한 고서적과 예술품들 사이에서 5월 18일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해버렸다. 난징에서는 가위공장 노동자인 23세의 천즈가오가 덩퉈 신봉자로 몰리자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3.3. 중앙문화혁명소조의 구성
일찍이 마오쩌둥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새로운 소조를 만들 것을 요구하며 분노를 토한 바가 있었다.
마침내 5월 16일 정치국 확대회의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문화혁명 5인 소조를 해산하고 정치국 상임위원회 산하에 중앙문혁소조를 구성한다는 특별 통지문을 채택했다."수정주의가 문화 부문은 물론이고 당과 정부, 군대까지 파고들었다. 수정주의는 특히 당과 군대에 만연해있다."
마오쩌둥의 비서이자 대필작가 출신 천보다가 소조장을 맡아 부소장 장칭, 고문 캉성, 야오원위안, 장춘차오와 함께 문화대혁명을 지도하게 되었다. 5월 18일 린뱌오가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문화대혁명 보고서를 발표하며 류사오치에 대한 은유적인 비판을 가했다. 1966년 5월 23일, 펑전, 루딩이, 뤄루이칭, 양상쿤을 포함한 4명이 국민당의 스파이라는 이유로 해임되었고 저우언라이는 그것이 마오쩌둥 사상의 승리라고 극찬했다.
이어 5월 25일 베이징대학 철학과 당서기 녜위안쯔가 여섯명의 학생들과 함께 부르주아 세력이 베이징 대학을 장악했다는 대자보를 붙혔고 대학 수뇌부를 흐루쇼프 수정주의자들로 몰아붙혔다. 6월 1일 중앙문화혁명소조가 첫번째 논설을 인민일보에 발표,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선동했다. 이날 마오쩌둥은 항저우에 머물다가 녜위안쯔의 대자보의 복사본을 받아보고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라고 격찬하며 대중매체에 유포할 것을 지시했다. 이어 "캉성, 보다 동지에게. 이 글을 신화사를 통해 전문을 방송하고 전국 신문에 발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베이징 대학이라는 반동의 보루에 대한 타도 작업이 여기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라고 교시했고 2시간 후에 "대자보는 1960년대 베이징 공사의 선언이며 파리 코뮌보다 의미심장하다."라고 추가로 교시했다."마오 주석은 레닌처럼 타고난 지도자이다. 그는 세계 모든 인민의 지도자다!"
이어 베이징 주둔군이 마오쩌둥의 지시로 2개 사단으로 증강되었으며 린뱌오가 홍위병들에게 맞서지 말라고 지시하여 정치국 위원들을 경악하게 했다.
3.4. 광풍의 시작
6월 2일 인민일보가 녜위안쯔의 대자보 전문을 게재했고 베이징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6월 3일 펑전의 해임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고 새로운 베이징 시 당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전국각지에서는 흥분한 학생들이 "흑방분자를 박살내자!", "반사회주의 도당은 물러가라!", "끝까지 혁명을 완수하자!" 따위의 구호와 대자보를 붙이고 있었다.
5월 29일 베이징 대학에서 홍위병이 조직되었고 베이징대학총장 루핑, 북경일보와 북경만보 사장 범근도 해임되었다. 이어 난징대학, 우한대학, 절강대학, 산동대학, 난카이대학, 톈진대학, 정저우대학, 운남대학, 복단대학의 총장, 부총장 여러 주임교수들이 집단으로 숙청되었다. 이어 1966년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이 발생하면서 베이징에서는 홍위병들이 주도한 대학살극이 벌어지게 된다.
4. 참고 문헌
- 로더릭 맥파커 외, 중국 현대정치사 : 건국에서 세계화의 수용까지 1949~2009(서울: 푸른길, 2012)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서울: 이산, 2004)
-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저우언라이 평전(서울: 베리타스북스, 2007)
- 산케이신문 특별취재반, 모택동 비록 上(서울: 문학사상사, 2001)
- 신승하, 中國當代 40年史 : 1949 - 1989(서울: 고려원, 1993)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서울: 민음사, 2017)
- 에즈라 보걸, 덩샤오핑 평전 : 현대 중국의 건설자(서울: 민음사, 2014)
- 장옥법, 중국현대정치사론(서울: 고려원, 1991)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 공산당 역사 2권 하(서울: 서교출판사, 2014)
- 프랑크 디쾨터,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976(파주: 열린책들, 2017)
- 현이섭, 중국지 : 마오쩌둥과 중국 혁명 평석 下, 대란대치편(서울: 인물과사상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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