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성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비밀경찰, 정보부장. 공안기관과 정보기관의 수장을 맡아 마오쩌둥의 정적들과 반 공산당 성향의 인사들을 숙청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문화대혁명 시기 사인방과 정치적 보조를 맞추며 수많은 관료들을 숙청했다. 사후 중국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공포정치의 대명사로 사람의 등 뒤에서 온갖 사악한 계책을 꾸몄기 때문에 '개똥참모'(狗頭軍師:구두군사)라는 멸칭이 있었다.
2. 생애
2.1. 혁명에 입문하다
2.1.1. 초년기
캉성은 1898년 11월 4일 산둥성 제성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학자이자 대지주였고 할아버지 장홍이는 관료였다. 그는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예술 작품에 접촉했으며 서예에 능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농민들을 착취하는 것을 지켜보며 가슴아파했고 때로는 그들을 위해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다 얻어맞기도 했다. 그후 캉성은 1915년에 첸이와 결혼했고 칭다오의 독일계 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1917년, 비적이 집에 침입해 캉성의 남동생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그의 가족은 주청 시로 이주했다. 그후 캉성은 1920년에 주청 교사 연수원에 들어가 공부하고 주청 고등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1922년 무렵, 공산주의를 처음 접한 그는 모두가 평등하고 공정한 조건하에 잘 살 수 있다는 공산주의의 이상향에 감명받았다. 그는 1924년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를 더욱 깊게 파고들기 위해 상하이로 떠났다.
2.1.2. 상하이 시절
상하이에 도착한 캉성은 이름을 장슈핑(張叔平)에서 장룽(張溶)으로 바꿨다. 그후 그는 상하이대학에 입학하여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여러 젊은이들과 접촉했다. 이듬해 취추바이의 영향으로 공산당 청년연맹에 가입한 그는 당의 지시에 따라 지하에서 노동 운동을 조직하고 1925년, 일본인 공장 감독관이 중국인 노동자를 살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5.30 운동에 참가하여 상하이의 노동운동을 조직하였으며 이때 류사오치, 리리싼, 장궈타오 등 공산당 고위 지도부와 접촉하게 되었다. 1926년 7월부터 국민당의 1차 북벌이 행해지자 상하이를 지배하는 쑨촨팡에 맞서 저우언라이의 지도 아래에 1926년 상하이 폭동에 참가하였다가 그 인연으로 1927년,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원이 되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감행하자 상하이의 공산당 조직들은 대대적으로 숙청당했고 캉성도 숨어야 했다.
1927년, 캉성은 상하이 대학생이자 자신처럼 산둥성 출신이었던 조일구(曹軼歐)와 결혼했으며 두 사람은 평생 정치적 행보를 함께 했다. 그리고 캉성은 강소성 조직부장에 임명, 상하이 경찰을 상대로 첩보 활동을 전개했고 살인 청부업자들을 동원해 공산당을 이탈하거나 배신한 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 공작을 폈다. 그는 이 시기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6차 총회에서 선전부장을 맡았던 리리싼과 긴밀히 협력했다. 그런데 1930년, 캉성은 여러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뜻밖에도 며칠만에 풀려났다. 후에 루푸탄은 그가 자신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동지들을 팔아넘겼다고 비난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그후 1930년 7월 창사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를 주도한 리리싼이 실각하자, 캉성은 소련의 지지를 받고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왕밍의 밑에 들어갔고 '28명의 볼세비키'와 긴밀히 교류했다. 그는 왕밍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왕밍과 함께 리리싼을 강력하게 비난했으나 왕밍이 속한 28인의 볼셰비키가 공산당을 주도하는 것에도 불만을 품고 있었던 허멍슝을 제거하기로 했다. 1931년 1월 17일, 그는 국민당 비밀경찰에게 허멍슝이 있는 곳을 제보했고 결국 허멍슝은 체포되었다. 그후 허멍슝은 2월 7일 밤에 22명의 동지들과 함께 상하이에서 처형되었다. 왕밍 라인에 제때 붙었던 캉성은 공산당 비서장으로 승진했다.
1931년 6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역임했던 샹중파가 리리싼의 지지자이자 공산당의 비밀경호원 대장이었던 구순장이 국민당 경찰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체포되어 곧바로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비밀결사 조직 겸 정보기관인 남의사에 의해 공산당 최고 지도부 상당수가 검거돼 전향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정보, 보안기관인 중앙군사위원회 특별 임무위원회 특별공작과를 발족했다. 이때 캉성은 저우언라이의 천거로 2인자에 올랐다가 저우언라이가 그해 8월에 새로운 공산당의 근거지인 장시성으로 떠나면서 특별공작과의 최고 책임자로 부상했다. 1931년 9월, 총서기 보구를 중심으로 중국공산당 임시중앙정치국, 소위 상하이 임시 당중앙이 설립되자 캉성은 장원톈, 리주성, 천윈, 루푸탄과 함께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캉성은 2년간 상하이를 중심으로 국민당에 맞서 첩보공작을 벌였고 공산당 내에 잠입한 첩자들을 상대로 한 방첩활동에 관한 전권을 행사했다.
2.1.3. 모스크바 시절
1931년 7월, 왕밍은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에서 중국 대표를 맡았다. 캉성과 아내 조일구는 2년 뒤 왕밍을 따라갔다. 캉성은 4년 동안 모스크바에서 체류하며 코민테른에서 왕밍의 부관으로 활동하며 입버릇처럼 왕밍을 천재적인 지도자로 칭송했다. 그는 1934년 중국공산당 제6차 중원회 기본 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중앙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던 1934년 12월 1일, 스탈린과 친밀했던 레닌그라드 공산당 지도자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왕밍에게 중국 출신 공산당원들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에 캉성은 왕밍의 지시에 따라 1936년 반혁명 철폐 사무소를 설립하고 소련의 비밀경찰 NKVD와 긴밀히 협력하여 니콜라이 예조프로부터 정교한 숙청법에 대해 배웠으며 모스크바에서 수백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을 숙청하는데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한편, 스탈린은 일본 제국이 극동을 침략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 때문에 코민테른은 1936년 시점부터 각국의 공산당에게 부르주아 세력과 연합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라는 교시를 내렸지만 마오쩌둥은 이 교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동정항일을 실시하는 등 국민정부에 대한 군사적 대결주의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1936년, 동정항일이 실패한 다음에야 마오쩌둥은 군사노선을 버리고 반장항일을 핍장항일로 바꾸었으나 1936년 서안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장제스를 처형할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항일 역량을 갖춘 지도자가 장제스밖에 없다는 것을 간파한 스탈린은 신속히 개입하여 장제스를 무사히 돌려보내고 국민당과의 항일연합전선을 구성할 것을 지시했다. 이로 인하여 장제스는 무사히 석방되었으며 2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었다.
이듬해인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중국 공산당은 국민혁명군 산하 팔로군을 개편되어 평형관 전투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일본군이 타이위안을 함락시키자 일본군과의 교전을 회피하고 세력확장에 골몰했다. 스탈린은 이를 국제 프롤레타리아주의에 대한 배반이라고 격렬히 비판하며 1937년 11월, 공산당이 국민당의 영도 하의 항일에 나서게 하기 위해 스탈린의 노선을 충실히 추종하는 왕밍과 캉성을 소비에트 비행기에 실어서 옌안으로 파견했다.
2.2. 마오쩌둥의 사형집행인
2.2.1. 정풍운동의 주역
1937년 11월, 캉성은 옌안으로 돌아와 왕밍의 측근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스탈린의 뜻에 따라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 협력해 일본군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게 하려 했으며 왕밍이 스탈린 노선에 반발해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던 천두슈를 공산당에 복귀시키려 했던 저우언라이와 둥비우의 노력을 무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옌안의 상황을 살펴본 그는 1938년에 왕밍을 버리고 마오쩌둥에게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사회부'라 불리는 정보기구를 이끌었다. 역사학자 로더릭 맥파커 교수는 마오쩌둥에게 캉성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자백을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자백을 하지 않으면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처박혀야 한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꾸며내면 더 좋은 대우를 받게 된다."
정풍운동을 지휘하는 캉성의 모습에 대한 스저의 묘사.
한편, 캉성은 연안에서 장칭과 만났다. 일설에 따르면, 장칭은 1931년 산둥에 있을 때 캉성의 정부가 되었다고 한다. 캉성은 천보다와 함께 장칭이 마오쩌둥의 연인이 되도록 도와줬고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에 대한 당의 반발을 무마시키는 데 기여해 마오쩌둥과 장칭의 신임을 얻어냈다. 그후 캉성은 마오쩌둥을 위해 왕밍을 공격하여 그를 실각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마오쩌둥의 정적으로 분류된 인사들을 국민당과 일본의 첩자로 몰아 숙청했다. 이때 독립운동가 김산도 일본의 첩자로 몰려 처형되었다가 1942년에 복권되었다. 또한 소련의 의도를 의심하는 마오쩌둥의 뜻을 받들어 소련 요원들을 감시하고 그들이 왕밍을 만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1942년 2월, 마오쩌둥은 "중국 사회의 철저한 재탄생"을 목표로 정풍운동을 개시했다. 캉성은 펑전, 류사오치와 함께 총학습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총학습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 팔로군 병사들과 당원들의 학습을 지도했다. 또한 캉성은 공산당 산하 모든 조직에 자신이 지도하는 1급 학습위원회를 세우고 그 외에 개별 기구에 지부를 세움으로 조직 단위에서 정풍운동을 책임질 간부를 선발하고 그 조직의 정풍운동을 감독하게 했다. 정풍에 참가한 이들은 자신의 모든 내력, 배경과 행동, 심지어 마음의 생각까지 자세하고 성실하게 적어서 제출하도록 요구받았고 조직은 이 제출자료에 기인해 서로 비판하고 각 동지의 결점을 지적하여 교정해주도록 했다.
캉성은 이 정풍운동을 주도하며 왕밍과 장궈타오의 잔당을 뿌리뽑으려 했다. 이른바 닭을 죽여 원숭이를 겁먹게 한다는 전략이었는데 격리, 비판군중대회, 신문과 성토, 고문, 회유가 총동원되었다. 급기야 그는 잠재적인 배신자나 스파이로 분류된 인사들을 체포해 고문을 가하고 재판 과정도 거치지 않고 처형했다. 1943년 전쟁이 악화되어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이 더욱 고립되자, 캉성은 정풍운동의 강도를 더욱 강화했다. 캉성은 홍기당이라 불리는 국민당 간첩들이 공산당에 암약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감숙, 사천, 하남, 호북, 운남, 귀주, 절강, 섬서에서 성장한 지하당원은 모두 국민당의 첩자라면서 이들 지하당의 사업을 감독한 저우언라이와 남방국까지 겨냥해 공격했다.
그 결과 수백명이 넘는 인사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대표적인 피해자는 스탈린의 대숙청에 의문을 표했던 당원 왕스웨이 등이었다. 마오쩌둥의 러시아어 통역 스저는 이 시기의 캉성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옌안을 방문한 표트르 블라디미로프는 캉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하지만 미국에게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항 세력이라고 포장하던 마오쩌둥은 캉성의 존재를 철저히 숨겨서 1944년에서 1945년에 걸쳐 미국의 사절단이 옌안에 방문하게 되었을 때는 캉성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그가 나타나지 못하게 했다. 캉성의 이 같은 적색테러는 저우언라이, 예젠잉, 녜룽전 등 당내 원로들의 비판을 받았고 결국 1945년 제7차 공산당 당 대회에서 캉성은 중앙사회부장과 군 정보국장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캉성의 조직은 다이리의 남의사와 달리 민주적이고 혁명적이라고 캉성을 옹호했다.
2.2.2. 계급독재를 구축하다
1946년 12월, 캉성은 마오쩌둥에 의해 간쑤성 롱동의 토지 개혁을 집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5주 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토지 개혁을 더욱 강화시킬 필요가 있으며 사회 정의의 이름으로 부농들을 죽이고 농민들을 공동 농장에 배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그의 진언을 받아들여 1947년 3월 캉성을 산서성에 보내 토지 개혁을 진두지휘하게 했다. 캉성은 이 곳에서 토지 주인들을 조사한 후 공산당에게 불만을 품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 이들에 대해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그의 부농 탄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먼저, 공산당 집행분대는 각지에서 토지개혁 조직을 조직한 뒤 가난한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부농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 분노가 충분히 끌어올랐을 때, 토지개혁 조직은 "고충 회담"을 열어서 농민들이 부농들에게 모욕당해온 것을 낱낱이 밝히게 했는데, 그 중에는 사전에 쓰여진 각본에 따라 거짓으로 발언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걸 지켜본 농민과 노동자들은 격노하며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를 연호한다. 이에 간부는 부농들이 중범죄를 저질렀다며 사형을 선고하고 즉시 집행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부농의 숫자는 수백에서 수천에 달했다.
또한 베이징대학 총장 출신의 지식인 신문 <광명일보> 편집인 마인추가 정부에 산아제한 정책을 건의하자 캉성은 즉각 마인추를 체포하였다. 이는 산아제한은 3세계를 약하게 만들기 위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음모이고 따라서 마인추는 제국주의 주구라는 것이 캉성의 논리였다. 당연히 그의 행동은 마오쩌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캉성은 베이징대학 학생 및 교수 집회를 소집하여 마인추를 조리돌렸다. 이후 마인추는 모든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리고 마인추는 오로지 한가지 예에 불과했다. 작가 왕뤄왕, 추안핑, 인류학자 페이샤오퉁 등은 공산당이 민주적일 것이라 착각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다가 모두 참혹하게 숙청당했다. 그러나 일본의 만주를 차지하기 위한 역사 왜곡에 대한 대응으로 제시된 중화민족 개념을 발전시킨 페이샤오퉁의 경우 여전히 중국 공산당을 지지했고, 개혁 개방 이후 정협 부주석 등의 지위에 올랐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그의 중화민족 이론을 받아들였다. 중국에 신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짧은 기대는 사라졌다.
2.2.3. 소련 견제
캉성은 이 시기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마오쩌둥의 주치의인 리즈수이는 베이징 병원에서 캉성의 치료를 담당한 의사로부터 캉성이 정신 분열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술회했다. 실제로 캉성은 조울증과 측두엽 간질을 포함해 심각한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러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마약을 상시 복용했다. 그렇게 정신병과 마약중독에 시달리며 정계에서 잊혀지고 있던 1956년 1월, 캉성은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에서 수년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무렵, 마오쩌둥은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스탈린 독재와 과오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늘어놓고 개인 숭배를 비난하는 것을 보고 자신 또한 절대권력을 상실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마오쩌둥은 캉성이 소련 문제의 전문가로 판단하고 그에게 소련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에 캉성은 후차오무, 천보다와 함께 소련의 논리에 맞서는 논문 집필에 나서 1956년 12월 29일 인민 일보에 "프로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경험에 관한 더 많은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게 했는데, 그 내용은 스탈린의 업적이 그의 실수를 덮을 만큰 훌륭하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소논쟁의 공식문헌집인 <9평>을 작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캉성은 1956년과 1964년 사이에 소련과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방문하여 흐루쇼프와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수정주의적 정책에 대한 경멸을 표명했다. 특히 1960년 2월, 캉성은 바르샤바 조약 정치 협상회의에서 "미국 지도자들에 대한 폭력적 공격"을 주장하면서 미국에게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소련의 외교 정책에 대해 냉소적으로 비판했다. 이는 중소관계가 악화되는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중병에 시달리던 캉성은 정치일선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으며 정풍운동으로 동지들을 너무 많이 해쳤기 때문에 당내에서 미움을 받았다. 이 때문에 1956년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지위가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2.3. 광기의 끝
2.3.1. 재기와 해서파관 사건
1958년, 마오쩌둥은 영국과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목표하에 대약진 운동을 주창했다. 캉성은 이 운동의 열열한 지지자가 되어 국민들이 대약진운동에 동참하도록 선동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은 철저하게 실패했고 수천만명의 인민이 사망했다. 1959년 신임 국가주석에 취임한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에게 대약진 운동은 철저히 실패했으며 이는 인재가 원인의 7할에 해당한다고 맹렬히 공격했다. 마오쩌둥은 대노하였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이 자신이 죽거들랑 스탈린을 격하시킨 흐루쇼프처럼 자신을 격하시키고 수정주의, 자본주의를 행하려는 반혁명분자라고 믿게 되었다."사회주의 공업이 자본주의 발전으로 나아가게 된 상황은 그 형식이 공(公)이면서 실제로는 사(私)이고, 형식은 신(新)이면서 실제로는 구(舊)이고, 형식은 사회주의이면서 실제로는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과거 이런 문제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 내가 느끼기에 우리 공장이 그렇게 순수한지에 대해 연구해 보지 못했다. (...) 우리 공장에는 낡은 경제법칙들이 변하지 않은 것이 어떤 것인가? 교환문제에서 상품등가교환법칙은 변하지 않았고, 임근은 노동에 따라 지불되며, 부르주아 계급의 법적권리의 잔여도 여전히 존재한다. 마오 주석이 1958년 이 문제를 토론하려 하였지만,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잘 되지는 않았다. (...) 공장을 잘 다루지 않으면 수정주의가 출현할 수 있다. 상부구조가 토대에 나쁜 영향을 주고, 토대가 상부구조에 나쁜 영향을 준다. 공장 문화대혁명은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학교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경제토대이고, 공장에도 상부구조가 있다. (...) 우리 공장에서는 정치우위가 아니고 마오쩌둥 사상이 우위가 아니고, 이점은 아마 학교보다 심각할 것이다."
1966년 12월 4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위원회 회의에서 캉성의 발언.
이런 광풍과 맞물려 캉성도 재기하기 시작했다. 1962년 7천인 대회에 참여하여 시중쉰을 숙청했던 캉성은 1964년에는 장칭과 개인적 원한이 있던 극작가 전한을 당과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독초로 몰아 숙청해버렸다. 그리고 펑더화이 파벌과 '작은 흐루쇼프'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베이징의 문화계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1965년, 마오쩌둥의 주장으로 조직된 문화혁명 오인소조의 일원이었던 그는 류사오치가 주도했던 공작조 파견에 나서서 베이징의 교육계를 마구 비난했지만 베이징 시장 펑전과 덩샤오핑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이때 터진 것이 바로 해서파관 사건이었다. 캉성은 해서파관이 반사회주의 독초라고 주장하며 일을 키웠다. 마오쩌둥은 '주자파'에 대한 칼날을 거침없이 휘둘렀고 5.16 사건이 벌어져 뤄루이칭, 양상쿤, 펑전, 루딩이 등 펑더화이 파벌이나 류사오치 파벌로 지목된 정치인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 캉성은 즉각 공작조를 파견하여 인민대중을 핍박하였다고 류사오치를 마구 비난했다.
2.3.2. 보수파 사냥꾼에서 조반파 사냥꾼으로
이후 캉성은 공산당 중앙조직선전선동소조 책임자로 임명되어 류사오치, 펑더화이 등 마오쩌둥에 맞섰다고 간주된 유명 인사 361명의 리스트를 작성해 그들을 모조리 숙청했으며 홍위병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그들이 마음껏 날뛸 수 있게 해줬다. 또한 캉성은 원난성 당서기 자오쩬민 스파이 사건을 조작해 14,000명의 간부를 처형했으며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을 조작해 87,180명이 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17,000명에 달하는 인사들을 처형했다. 이후에도 각종 사건을 조작하고 공산당 간부들을 감시, 감독해 꼬투리가 잡히면 즉시 숙청했다. 이러한 그의 숙청과 홍위병의 지원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2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1966년 5월, 중앙문화혁명소조가 설립되자 캉성은 소조 고문에 임명되었다. 1966년 12월, 캉성은 류사오치의 부인 왕광메이를 미국 간첩으로 몰아 왕광메이 소조를 조직, 그녀를 조리돌림하고 투옥했으며 가족과 지인들도 간첩으로 마구 잡아들였다. 1967년, 캉성은 장칭과 함께 국민당 치하에서 투옥되었던 원로당원들을 국민당 간첩으로 몰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천보다와 중앙문혁소조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의 분노를 사서 2월 역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마오쩌둥이 결정적인 순간에 중앙문혁소조를 지지한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1967년 7.20 사건이 일어나자 캉성은 한발 물러나서 해방군과의 화해를 주장했으나 장칭은 인민대중을 무장시켜 해방군을 혁명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마오쩌둥의 개입으로 군부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중국 천하는 장관과 장군들까지 마구 때려죽이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허나 1967년 8월,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으로 중국이 개망신을 당하고 군부의 불만수위가 감당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솟자 마오쩌둥은 극좌파 왕리, 관펑, 치번위를 숙청하고 국민당과 소련 간첩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면서 극좌파인 척 하는 극우파들을 사냥하라고 지령했다. 캉성은 즉각 노선을 선회하여 자신의 옛 부하이기도 한 왕리 등을 사냥했다.
이후 호남성에서 코뮌 설립을 주장하는 성무련이 설립되자 캉성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이들을 맹비난했다.
또한 1968년 베트남으로 가는 소련 원조물자를 약탈한 조반파를 숙청하는데도 앞장서는 등 누구를 숙청하는데나 매우 유능함을 계속하여 입증하였다. 1967~1968년 기간 동안 캉성은 정풍운동 기간 자신이 공격했던 저우언라이와의 연합을 유지하여 <계급대오 정돈>이라 불리는 당의 권위 재확립 작업을 진행하여 다시 수백만명의 조반파를 숙청했다. 이 시기 장칭은 장춘차오, 야오원위안과 합세하여 상하이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나는 성무련의 강령만을 보았다. (...) 그들 배후에는 반혁명의 검은 손이 있다. (...) 성무련은 레닌의 말을 왜곡하고 헐뜯어 레닌의 말을 가져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반대하고 있지만 (...) 이는 만번 죽어 마땅한 죄이다."
1970년, 중국 공산당 9기 2중전회에서 린뱌오와 연합하여 천재론과 국가주석직 부활을 주장하던 천보다가 마오쩌둥에게 찍혀서 박살이 난 후 중앙문혁소조는 힘을 잃었다. 1970년 11월, 이를 대체하기 위한 중앙선전조가 조직되었는데 캉성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중앙선전조 조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비호 아래 절정에 이르는 권력을 행사했고 그의 아내 조일구 역시 여성, 대학생이 속한 조직을 결성해 문화대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함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한 캉성은 사인방과 연합함으로서 마오쩌둥 사후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홍위병들이 약탈한 문화재를 마구 빼돌려서 축재를 한 것도 덤이었다.
한편 캉성은 캄포디아의 크메르 루즈 정권에 대한 중국의 지원 정책을 주도했다. 그가 크메르 루주를 후원한 것은 중앙 위원회 내에서 자신의 대의를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중국 외교부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을 지원했는데, 캉성은 이를 반동적인 행위라고 비난하며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외교 정책으로 인해 중국은 크메르 루주에게 지속적인 원조를 제공했고, 크메르 루주는 이를 발판으로 삼아 캄보디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2.3.3. 사망, 그리고 제명
문화대혁명의 광풍을 이끌던 캉성은 1973년 8월 제10차 공산당 대회를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그는 1974년 이후 암에 시달리면서 병원에서 장기간 입원해야 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입원 기간동안 "공포증"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그는 다른 지도층 인사들이 병문안하려고 방문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종종 중앙 문화혁명부 인사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 전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 부장 릉윈은 캉성이 죽을 때까지 자신이 1930년대에 배신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은신하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죽어가는 순간까지 권력판의 전쟁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캉성은 마오쩌둥이 장칭을 숙청하려 한다고 판단하고 장칭이 상하이 시절 공산당을 배반했다는 고발 자료를 마오쩌둥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캉성은 이번에는 줄서기를 잘못했다. 마오쩌둥은 아내를 내칠 생각이 없었고 캉성이 제출한 보고서도 무시해 버렸다.
1975년 1월, 제4차 전국 인민대표회의의 첫번째 회의에서, 그는 전국 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 부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캉성은 10월에 마오쩌둥을 마지막으로 보았고 1975년 12월 16일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왕훙원의 뒤를 이어 당과 국가 지도자 중 네번째로 선정되었다. 당시 중공중앙위원회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화궈펑과 예젠잉에 의해 4인방도 숙청당하면서 죽은 캉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1978년 11월, 후야오방은 중앙 당 학교 연설에서 캉성에 대한 최초의 공식 비판을 표명했다. 그는 사인방에 대해 비판하면서 캉성 역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중국 공산당의 탁월한 당원, 중국인과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의 위대한 혁명적 전사,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 중 한 명, 그리고 중국 인민의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였으며, 영광스러운 반체제 용사였다."
사인방의 몰락과 덩샤오핑의 정계 복귀로 인해 캉성에 대한 두려움이 사그라지고 대신 캉성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캉성의 경력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 사건 조직이 편성되었다. 1980년 늦은 여름, 특별 사건 조직은 중앙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했고 중앙위원회는 그해 10월 캉성을 중국 공산당에서 제명하고 바바오산 혁명공묘에서 그의 시신을 파헤쳤다.사인방은 사고의 해방에 극히 부정적인 역할, 즉 브레이크의 역할을 해왔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여러분이 캉성과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 것이다. (...) 캉성은 기사들의 실제 주제와 일반적인 생각을 고려하지 않고 "암시"를 찾으려고 문장을 읽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공격할 수 있는 특별한 지점을 찾기 위해 일종의 재능을 보였다. 그는 스탈린, 즈다노프, 그리고 KGB로부터 이것을 배웠으며, 옌안 시대 때부터 이를 행했다.
3. 평가
오늘날 캉성은 중국의 펠릭스 제르진스키 또는 라브렌티 베리야로 일컬어지며 공산주의 중국을 수립한다는 미명 하에 수많은 이들을 숙청한 마오쩌둥의 사형집행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그가 상당히 유능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고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 내에선 캉성이 필요악이었다. 그가 등장하기 전, 공산당엔 배신자가 들끓고 기밀이 국민당에게 새기 일쑤였다. 그는 방첩 조직을 체계적으로 수립해 스파이들을 솎아내고 배신자들을 철저히 응징함으로써 바람 잘 날 없던 공산당이 어느 정도 안정되는 기반을 닦았다. 또한 그의 숙청은 매우 잔혹했지만 중국 내 반공세력의 역량을 극도로 약화시키는 효과를 거둠으로서 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확고히 장악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차질없이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조직력과 임무 수행 능력은 마오쩌둥의 독재 체제 수립에 악용되었고, 10억 중국인들은 그의 잔혹한 숙청으로 인해 고통받았다. 그는 대지주인 아버지가 농민들을 착취하는 것을 보고 고통스러워하고 농민들을 위해 아버지와 싸우다가 얻어맞던 아이었고 공산주의를 처음 접하고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이상향에 감명받아 평생 공산 국가 수립을 위해 한 몸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그는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대세에 따라 리리싼, 왕밍, 마오쩌둥으로 변경하는 기회주의적 행보를 보였고 그의 이상은 점차 변질되었다. 급기야 그는 마오쩌둥에 의해 정적들을 숙청하는 도구로 이용되었고, 결국 그는 자신이 구하고자 했던 인민들을 지옥으로 몰고 간 장본인으로 전락했다.
한국인들 중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평가가 안 좋은데 그 이유가 한국 독립운동가 김산을 일본 간첩으로 몰아 숙청을 시켰기 때문.
4. 여담
천보다와 더불어 사투리가 굉장히 심했던 정치인이었다. 중앙정부에 의한 보통화 사용이 강제되기 전에 성장한 인물이니까 당연하겠지만서도 복건성 사투리를 지독하게 쓰던 천보다처럼 산동성 사투리가 하도 심해서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람 취미가 문화재 유물과 유품과 고서 수집이었다. 문혁때 홍위병들을 사주하여 고대 유물과 유품을 횡령하고 수집하였다. 그가 죽고 훗날 공산당 제명 후에 당정에서 그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 고대 유물 콜렉션만 하더라도 수십만 점이나 되었고 현재 시가로 몇백억원이나 하였다. 사실 문혁이 모든 중국 전통을 파괴하는 운동이라는 편견과 달리 문혁은 그런 운동이 아니었다. 가령 1969년 장칭은 기습백호단 등의 현대 '경극' 5편을 혁명 모범극으로 지정했다. 즉 경극과 같은 전통문화는 변주되어 계승되었다[1] . 이런 현대 경극들은 현재는 전통을 타락시켰다는 평가를 받으나 당시에는 고평가 받았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역을 담당하는 성차별적 전통(백인이 흑인 분장한 1900년대 초 미국영화를 생각하면 된다)이 개선되어 여자가 여자역을 담당하게 되는 등 여러가지 전통의 긍정적 변형이 일어났기 때문이다[2] . 이러한 점에서 캉성의 전통문화 중시 태도는 자기가 따르는 문혁과 모순되지 않았다.
취미에서 보듯 예술에 대해 관심이 많고 조예가 깊었는데, 서화에 능통했으며 특히 초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초기 공산당 지도자인 루푸탄은 후에 1933년 국민당에 체포된 후 전향, 다이리가 이끌던 비밀경찰에서 공산당원 색출작업을 도왔다. 루푸탄은 중공정권이 창립된 후, 1951년 상하이에서 체포되었으나, 사형은 면하고 무기징역을 받았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절, 캉성이 국민당에 체포되었을 때 마찬가지로 동지의 이름을 팔았다는 청원서를 당에 제출했다가 캉성의 분노를 사서 79세의 나이인 1969년 처형되었다.
5. 참고문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 북스.
- 장칭 평전, 로스 테릴, 교양인.
-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인 선택, 리처드 번스타인, 책과함께.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의 대기근,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당대40년사, 신승하, 고려원.
-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와 조반의 시대, 백승욱, 그린비.
- 중국현대정치사, 로더릭 맥파커, 푸른길,
- 모택동 비록 상, 하권, 산케이신문특별취재반, 인물과사상사.
- 중국지 중 건국대업편, 현이섭, 문학과사상사.
- 중국지 하 대란대치편, 현이섭, 문학과사상사.
- 중국공산당 역사 1권, 상,하권,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국공산당 역사 2권, 상, 중, 하권,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