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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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19일, 1986 멕시코 월드컵 동아시아 1차예선에서 중국 대표팀이 자신들의 식민지로 여기는 홍콩 대표팀에게 '''홈에서 패배하여''' FIFA 월드컵 진출이 좌절된 사건. 중국에서도 五一九事件이라고 불리는 '''중국 축구 희대의 흑역사'''이며 홍콩 축구계에는 한국의 도쿄대첩에 맞먹는 최고의 경기이다.[1]
FIFA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내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함으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은 1979년 FIFA에 재가입하여 다시 월드컵 예선에 참여하게 되었다.(자세한 내용은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고.) 복귀 후 처음 참여한 FIFA 월드컵 예선은 1982 스페인 월드컵 예선이었다. 중국은 대륙 플레이오프에서 뉴질랜드에게 패하며 월드컵 티켓을 눈앞에서 놓쳤다. 그리고 1984년에는 AFC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하며 중국 내 축구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중국에게 또 한번의 월드컵 기회가 찾아왔다.
이 당시 FIFA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서아시아와 동아시아를 나눠서 예선을 치렀다. 각 지역에서 1팀씩 본선진출을 해서 AFC 통틀어서 2팀이 본선진출을 하는 형식이었다. 중국은 홍콩, 마카오, 브루나이와 한 조에 걸렸다. 1위만이 2라운드로 진출하는 시스템이었지만 나머지 3개국의 전력이 거의 (그들 보기에는) 있으나 마나한 수준이라 중국의 무난한 1위가 예상되었다.
그런 와중에 1차전 홍콩 원정경기에서 중국이 0-0으로 비겼다. 단독정부도 없는 '''식민지''' 하나 못 이기냐며 온갖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만(당시 영국령이었다.) 이제 첫 경기였고 그 이후 중국이 연승을 이어가며 그저 예선 도중의 해프닝 정도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홍콩 역시 1차전을 제외하고 전승을 했고 마지막 경기에서 중국과 홍콩이 대결하게 되었다. 둘 다 4승 1무였고 득실차에서 중국이 앞선 관계로 중국은 비기기만 해도 2라운드에 진출하는 상황. 거기다 중국 본토의 심장부인 베이징에서의 경기였기에 당연히 중국의 승리만이 예측 가능했다.
FIFA 공식 유튜브에서 이 경기를 다룬 영상을 제작할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참고로 썸네일 사진은 본 경기가 아니라 중국과 뉴질랜드의 82년 월드컵 플레이오프 경기 장면이다.
전반 19분 홍콩의 프리킥 상황에서 홍콩의 라이트백 충치탁이 대포알 중거리슛으로 선제골을 넣는 파란을 일으켰다. 중국 선수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전개에 당황한 듯 보였으나 빠른 시간에 동점골을 성공시키면서 다시 중국이 안정권에 들었다.
그러나 늘 넣어야 할 때 못 넣는 고질적인 결정력 부족이 문제였다. 골은 못 넣겠고 잠그기에는 시간이 애매하여 이도저도 아닌 경기를 하고 있던 후반 15분 홍콩의 오른쪽 뒤편에서 올라온 아무나 받아라(...) 크로스를 중국 수비들이 걷어내지 못하고 공을 내주었고 홍콩의 쿠캄파이에게 다시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중국은 홍콩 상대로 추가시간 세트피스에서 골키퍼까지 올리는 굴욕을 감행하고도 득점에 실패. 결국 비기기만 해도 되는 경기에서 홍콩에게, 그것도 홈에서 패하면서 월드컵 진출 기회를 '''아깝지도 않게''' 날려버렸다. 4년 전에는 아깝기라도 했지...
8만명에 달하는 홈 관중들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흥분과 분노를 표출했다. 하도 난리를 쳐대서 결국 공안이 경기장으로 대거 출동해야 했으며 127명이 체포되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중국어)
한편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고 2라운드로 진출한 홍콩은 일본과의 홈앤어웨이 결전에서 합계 5-1로 패하며 월드컵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로 한번도 월드컵 근처에 가보지 못한 것을 보면 홍콩 축구팬들은 이때가 절호의 기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을 베이징에서 물먹였다는 점'''에서 분명 기분좋은 추억일 것이다.
1. 개요
1985년 5월 19일, 1986 멕시코 월드컵 동아시아 1차예선에서 중국 대표팀이 자신들의 식민지로 여기는 홍콩 대표팀에게 '''홈에서 패배하여''' FIFA 월드컵 진출이 좌절된 사건. 중국에서도 五一九事件이라고 불리는 '''중국 축구 희대의 흑역사'''이며 홍콩 축구계에는 한국의 도쿄대첩에 맞먹는 최고의 경기이다.[1]
2. 배경
FIFA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내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함으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은 1979년 FIFA에 재가입하여 다시 월드컵 예선에 참여하게 되었다.(자세한 내용은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고.) 복귀 후 처음 참여한 FIFA 월드컵 예선은 1982 스페인 월드컵 예선이었다. 중국은 대륙 플레이오프에서 뉴질랜드에게 패하며 월드컵 티켓을 눈앞에서 놓쳤다. 그리고 1984년에는 AFC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하며 중국 내 축구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중국에게 또 한번의 월드컵 기회가 찾아왔다.
이 당시 FIFA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서아시아와 동아시아를 나눠서 예선을 치렀다. 각 지역에서 1팀씩 본선진출을 해서 AFC 통틀어서 2팀이 본선진출을 하는 형식이었다. 중국은 홍콩, 마카오, 브루나이와 한 조에 걸렸다. 1위만이 2라운드로 진출하는 시스템이었지만 나머지 3개국의 전력이 거의 (그들 보기에는) 있으나 마나한 수준이라 중국의 무난한 1위가 예상되었다.
그런 와중에 1차전 홍콩 원정경기에서 중국이 0-0으로 비겼다. 단독정부도 없는 '''식민지''' 하나 못 이기냐며 온갖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만(당시 영국령이었다.) 이제 첫 경기였고 그 이후 중국이 연승을 이어가며 그저 예선 도중의 해프닝 정도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홍콩 역시 1차전을 제외하고 전승을 했고 마지막 경기에서 중국과 홍콩이 대결하게 되었다. 둘 다 4승 1무였고 득실차에서 중국이 앞선 관계로 중국은 비기기만 해도 2라운드에 진출하는 상황. 거기다 중국 본토의 심장부인 베이징에서의 경기였기에 당연히 중국의 승리만이 예측 가능했다.
3. 경기
FIFA 공식 유튜브에서 이 경기를 다룬 영상을 제작할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참고로 썸네일 사진은 본 경기가 아니라 중국과 뉴질랜드의 82년 월드컵 플레이오프 경기 장면이다.
전반 19분 홍콩의 프리킥 상황에서 홍콩의 라이트백 충치탁이 대포알 중거리슛으로 선제골을 넣는 파란을 일으켰다. 중국 선수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전개에 당황한 듯 보였으나 빠른 시간에 동점골을 성공시키면서 다시 중국이 안정권에 들었다.
그러나 늘 넣어야 할 때 못 넣는 고질적인 결정력 부족이 문제였다. 골은 못 넣겠고 잠그기에는 시간이 애매하여 이도저도 아닌 경기를 하고 있던 후반 15분 홍콩의 오른쪽 뒤편에서 올라온 아무나 받아라(...) 크로스를 중국 수비들이 걷어내지 못하고 공을 내주었고 홍콩의 쿠캄파이에게 다시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중국은 홍콩 상대로 추가시간 세트피스에서 골키퍼까지 올리는 굴욕을 감행하고도 득점에 실패. 결국 비기기만 해도 되는 경기에서 홍콩에게, 그것도 홈에서 패하면서 월드컵 진출 기회를 '''아깝지도 않게''' 날려버렸다. 4년 전에는 아깝기라도 했지...
4. 경기 후
8만명에 달하는 홈 관중들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흥분과 분노를 표출했다. 하도 난리를 쳐대서 결국 공안이 경기장으로 대거 출동해야 했으며 127명이 체포되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중국어)
한편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고 2라운드로 진출한 홍콩은 일본과의 홈앤어웨이 결전에서 합계 5-1로 패하며 월드컵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로 한번도 월드컵 근처에 가보지 못한 것을 보면 홍콩 축구팬들은 이때가 절호의 기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을 베이징에서 물먹였다는 점'''에서 분명 기분좋은 추억일 것이다.
5. 둘러보기
[1] 도쿄대첩은 그나마 피해자인 일본이 리턴매치에서 한국에 복수했고 둘 다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했지만 여기서 이긴 홍콩은 다음 경기에서 일본에게 아무것도 못하고 나가떨어졌다는 점에서 중국에게 크나큰 굴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