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대첩(축구)
한국판 영상.
1. 소개
1997년 9월 28일 일본 국립 카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에서 벌어진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지역예선 한일전에서 대한민국이 종료 8분을 남겨놓고 일본에 2골을 몰아넣어 역전승을 거둔 명승부이다.'''"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당시 이 한일전에 대한 국민 감정은 오히려 현 시점보다 더 뜨거웠으며, 독도 분쟁을 비롯한 이런저런 외교 문제가 터지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한중정상회담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한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할 정도로 한일 관계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래서 1996년에 2002년 월드컵 개최지 선정을 놓고 한일 양국이 벌인 신경전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으며, 표결의 불리함을 깨달은 일본이 결국 공동개최안을 수락하면서 공식적으로 FIFA에서 2002년 FIFA 월드컵 공동개최를 결정했다.
이것으로 과열 양상을 보이던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개최지 경쟁은 일단락되었으나, '''일본은 그때까지 한 번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적이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94 FIFA 월드컵 미국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경기 종료 30초 전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해 다 잡았던 본선 진출 티켓을 그것도 한국에 넘겨준 도하의 비극을 뼈아프게 체험한 일본은 가히 절치부심이라 할만큼 1998년 월드컵 본선 진출을 치밀하게 준비했고[6] 그 일환으로 J리그 벨마레 히라쓰카의 선수였던 브라질 출신 로페스 바그너를 귀화시켜 대표팀에 발탁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렇게 지역예선 일정이 흘러가며 최종예선 조 추첨이 다가왔는데, '''B조에 한국과 일본이 함께 편성되어 두 국가는 월드컵을 향한 마지막 길목에서 만나는 운명의 장난을 맞게 된다.''' 게다가 단판 승부를 거친 뒤 풀리그 순위로 본선 티켓을 결정했던 4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서로의 안방을 오가며 결전을 치르는, 즉 홈 앤드 어웨이로 두 번의 진검승부를 벌여야만 하는 상황. 당시 한국 대표팀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지 않았는데, 불과 몇 달 전인 1996년 AFC 아시안컵 8강전에서 이란에게 2:6으로 대패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박종환 감독이 물러나고, 선수들의 태업 의혹까지 제기되며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 것. 그로부터 불과 21일만인 1997년 1월 6일 차범근이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어 출범한 차범근호는 1차 예선을 무리없이 통과했지만, 대표팀의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다만 최종예선 직전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1:2로 선전하는 등[7] 최종예선 통과 가능성은 생각보다 긍정적이었다. 실제로 한국은 잠실에서 열린 최종예선 1, 2차전을 모두 이겼는데, 당시 아시아 최강의 공격수로 발돋움하던 최용수의 활약으로 카자흐스탄에게 3:0, 우즈베키스탄에게 2:1로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의 경우 홈에서 열린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는 6:3의 대승을 거뒀으나 아랍에미리트 원정에서 비겨서 1승 1무로 승점 4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예상대로의 전적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양 팀이 맞붙는 3차전에서 어떤 승부가 나올지는 그야말로 예측불허였으며 서로가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면서 분위기는 한창 달아올랐다.
2. 경기 내용
그렇게 1997년 9월 28일, 일본 스포츠의 성지라고 불린 국립 카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에서 마침내 운명의 한일전이 시작되었다.
전반전은 0:0이었지만 전체적으로 일본이 미드필드의 우위와 홈 이점을 잘 발휘하여 경기를 풀어냈다. 한국은 이미 1994 월드컵 예선에서 일본에 경기 지배를 내주며 패한 전력이 있었으며, 이 경기 또한 선수 진용을 철저히 일본 공격진에 대한 맨투맨 마킹으로 시작하였다.[8] 때문에 한국의 공격이 빈도가 낮았던 데 비해 일본은 경기를 점유하면서 수차례 찬스를 만들어냈고, 한국은 끈질긴 수비와 일본 선수들의 실책으로 실점을 면했다.
그렇게 경기가 팽팽하게 흘러가던 후반 20분, 고정운이 수비 진영에서 볼 터치를 성급하게 하다가 '''바로 옆에 있던 상대 미드필더 야마구치 모토히로에게 볼을 빼앗기는 실책을 범한다.'''[9] 볼을 잡은 야마구치는 그대로 한국 수비진을 돌파한 뒤 김병지의 키를 살짝 넘기는 절묘한 칩샷을 성공하며 일본이 1:0으로 앞서나가고, 일본 응원단 5만 여명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 분위기는 일본으로 급속히 쏠렸다. 후반 중반에 마침내 선제골이 나오자 가모 슈 일본 감독은 공격수 로페스를 빼고 수비수인 아키타 유타카를 투입해 승리를 굳히려고 했다. 이는 한국이 이상윤과 고정운을 빼고 스피드스터 성향의 서정원과 김대의를 투입한 데 대한 대응이다.
'''그러나 이 선택이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패착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일본이 수비를 강화한 반대급부로 로페스를 축으로 한 공격 전개가 약화되면서 이 틈을 놓치지 않은 대한민국의 공격이 거세졌는데, 경기 내내 로페스를 전담 마크했던 수비수 이민성과 수비의 핵 홍명보까지 공격에 가담하면서 오히려 일본의 수비까지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한국은 파상공세를 퍼부으며 일본 진영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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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국 후반 38분 일본 문전에서 누구의 머리도 맞지 않고 오른쪽 코너로 흘러나온 공을 이기형이 잡아서 길게 크로스를 올렸고, 최용수의 헤딩 패스를 받은 서정원이 헤딩 슛으로 동점골을 넣으며 점수는 1:1 동점이 된다. 이후로 대한민국의 일방적인 공격이 지속되었는데, 상술했듯이 일본이 수비수를 추가 투입하면서 잠그기를 한 대신 공격수를 빼버리면서 더 이상 마크할 상대가 없어져버린 이민성과 홍명보가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정원의 득점 장면에서 맨투맨을 해야 할 아키타가 서정원을 한참 놓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오무라와 아키타를 투 스토퍼로 기용하면서 제대로 전술 지시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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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후반 41분, 이민성의 역전골이 터졌다.''' 한일전의 특성상 대한민국이 매우 공격적인 자세로 나오자 일본의 수비가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된 라인을 못 만드는 와중 페널티 박스 바깥의 최용수가 패스한 볼을 받은 이민성이 조금 앞으로 터치한 뒤 그대로 슛을 날리자 가와구치 골키퍼가 쇄도했지만, '''문전에서 툭 튀어올라 골대 왼쪽 구석으로 빨려들어간 것.'''[10] 역전골이 들어가자 신문선 해설위원이 날린 "이민서어어엉~~!!" 샤우팅과 송재익 캐스터가 날린 후지산 드립도 일품. 이후 대한민국은 일본의 공세를 잘 막고 2:1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여담으로 일본이 1:0으로 앞서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일본 공격수 미우라 카즈요시는 조금만 반칙을 얻어도 잔디에 드러누워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끈다거나 공이 터치라인을 벗어나면 일부러 관중석 쪽으로 멀리 차버리는 등 노골적인 비매너 다다미 축구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하지만 한국에게 역전을 당한 이후에는 조금만 경기가 중단돼도 허겁지겁 경기를 속행하는가 하면, 경기종료 직전 한국 코너킥 때는 직접 공을 코너지점에 놓아주는 친절을 발휘하는 등 똥줄타는 모습을 제대로 연출하면서 보는 이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주었다.
3. 도쿄 대첩의 한국 승리 이후
이 경기가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B조에 미친 여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이 당시 판도를 자세히 보면 매우 흥미진진한데, 원래는 한국과 일본이 1위를 노리고 UAE는 복병 정도인 양상이었으나 이 날 경기로 인해 한국이 3연승으로 단독 1위를 마크했고 UAE가 2승 1무로 2위, 일본은 1승 1무 1패로 3위를 기록하면서 오히려 UAE가 2위를 확보할 가능성이 높아짐과 동시에 한국과 1위를 겨뤄볼 만한 구도가 된 것.
이후 한국은 잠실에서 2위 UAE마저 3-0으로 제압해 파죽의 4연승을 거둔 뒤 카자흐스탄 원정에서 아쉽게 동점을 허용하는 무승부로 조 1위를 서서히 굳혀나간 반면, 일본은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과의 2연전 모두 무승부를 기록하고[11] UAE는 한국전 패배 후 카자흐스탄 원정에서 0-3의 예기치 않은 대패를 당하며[12] 2위 싸움만 격화된다.[13]
도쿄 한일전에서의 충격적인 역전패에다가 카자흐스탄과의 경기에서마저 무승부를 기록하며 조 2위조차 위태로워지자 가모 슈 일본 감독이 국가대표팀에서 경질됐고, 오카다 다케시 코치가 후임 감독으로 발탁되었다.
여담이지만 도쿄 한일전 당시 대한축구협회 김정남[14] 전무가 일본에 같이 왔는데, 일본 언론에서는 그에게 '''"한국이 지면 김정남 전무가 감독으로 올라가기로 되어 있고 그래서 미리 왔다는데 사실이냐?"'''라면서 노골적인 힐난을 하는 식으로 질문을 하자, 김정남 전무는 "일본 감독이 바뀐다길래 궁금해서 왔다."고 받아치기도 했다.
이후 한국은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서 5-1 대승을 거두고 난 뒤 일본-UAE의 도쿄 경기를 주목하게 된다. 이 경기에서 UAE가 이기면 경우에 따라서 1위를 UAE가 탈환할 가능성이 있는 반면[15] '''일본이 이기거나 무승부를 기록하면 한국의 1위가 무조건 확정되기 때문.''' 특히 일본 입장에서는 이 경기를 잡아야 UAE를 승점 2점차로 제치고 2위로 오를 수 있었는데 전반 3분 기록한 선제골을 지키지 못하면서 '''한국의 1위를 확정시켜준 것도 모자라 일본의 자력 2위 가능성 자체를 말아먹었다.__ (.....)'''
차라리 일본이 이겼다면 한국의 1위 확정은 둘째치고 일본 스스로 2위를 사수하면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다. '''즉 UAE와의 무승부는 일본의 자존심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 그래서 이 날 경기 직후 흥분한 관중들이 선수들을 향해 엄청난 폭언을 내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의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었다.[16]
이 시점에서 일본은 1승 4무 1패 승점 7로 UAE의 2승 2무 2패 승점 8보다 1점이 뒤진 3위였고 양팀 모두 잔여 경기가 '''한국전 포함''' 2게임이었다. '''즉 한국과의 경기 결과가 조 2위를 좌우하는 상황.''' 결국 일본은 2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한국 원정 경기와 카자흐스탄전 홈경기를 무조건 잡고, 한국이 UAE 원정에서 꼭 이기기만을 간절히 빌어야 하는 굴욕적인 상황을 맞게 된다. 게다가 당시 아시아 쿼터가 고작 3.5장이었던지라 2위를 한다고 해도 A조 2위와의 아시아 최종예선 3위 결정 플레이오프에서 패하면 오세아니아 1위팀과의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하는 가시밭길이 예고되어 있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11월 1일 잠실운동장에서 열리는 한일전이 사실상 일본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기였는데, 이 시점에서 골득실만 보면 일본이 +2인 반면 UAE는 -1이었으므로 일본은 한국과 최소한 무승부라도 거둬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무승부를 거두면 카자흐스탄과의 홈경기를 대량 득점으로 이기고 한국이 UAE 원정에서 이기면 조 2위를 거둘 수 있지만, '''만약 일본이 서울에서 패할 경우 UAE가 1승만 추가해도 승점 1점차로 조 3위 탈락할 운명이었던 것.'''[17]
무엇보다도 일본이 총력전을 벌인다고 해서 서울 원정 경기를 쉽게 풀어갈 가능성도 낮았다.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것과는 별개로, 한일전을 반드시 이기기 위해 한국 또한 투지를 불태울게 뻔했으니.''' 이렇듯 한국은 여유로운 한편 또 다른 결전을 준비하는 반면에, 일본은 그야말로 비장한 각오를 한 상태였다. 심지어 경기 당일 MBC의 송재익 캐스터는 '''"벼랑끝에 매달린 일본이 한국을 구명대로 이용할지, 아니면 한국이 빨간 넥타이를 메고[18] 초상집에 가는 문상객(...) 역할을 할지 궁금하다."'''는 개드립을 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일본의 2-0 완승. 이 날 잠실 종합운동장에는 무려 '''8천여명'''의 일본 응원단이 집결했고[19] 일본 선수들 역시 지난 도쿄대첩 때의 한국팀에 맞먹는 투지로 맹렬히 움직였다. 경기 시작 후 약 2분도 채 안되어서 나나미가 선제골을 넣었고, 전반이 종료되기도 전에 로페스가 추가골을 넣은 것을 한국이 만회하지 못하면서 완패한다.
이에 따라 일본은 승점 2점차로 UAE를 제쳐 조 2위로 올라섰고, 다음날 UAE가 우즈베키스탄과의 홈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거두는 바람에 승점 1점차로 일본의 조 2위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일본은 카자흐스탄과 최종전을 치르게 된 반면, UAE는 B조 최강 한국과 최종전을 치르기 때문에 사실상 일본의 조 2위가 확정된 상태였고 실제로 일본은 카자흐스탄과의 최종전에서 5-1 대승을 거두며 다음날 열리는 한국-UAE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조 2위를 확정지어 A조 2위와의 아시아 3위 결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일본은 최종전으로부터 1주일 후 말레이시아의 조호르바루에서 단판 승부로 열린 A조 2위 이란과의 플레이오프 중립경기에서 극적인 3-2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 전반전은 일본이 1-0으로 앞섰고 후반에는 이란이 2-1 역전에 성공했다가 다시 일본의 동점골로 2-2 가 되어 연장전에 돌입했는데, 연장후반 13분 오카노의 골든골이 터졌다.[20]
여담이지만 일본과 B조 2위를 다투던 UAE는 서울 한일전 결과에 대해 당연히 격분했는데, '''"한국같은 강팀이 어떻게 일본에 지느냐? 차기 대회 공동개최국과 함께 본선에 진출하기 위한 승부조작이다!"'''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우즈베키스탄과의 홈경기에서 당초 우세가 예상되었음에도 0-0 무승부를 거두고 이후 일본이 카자흐스탄을 5-1로 제압하면서 완전히 UAE가 탈락하게 되자, 한국과의 최종전을 앞두고 현지 분위기가 매우 흉흉했을 정도.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서도 상대가 상대였던지라 UAE의 승부조작 의혹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꽤 있었다. 붉은악마의 공식 응원 걸개중에는 LET'S GO TO FRANCE TOGETHER, 즉 한일 양국이 함께 월드컵 본선에 가자는 문구도 있긴 했지만[21]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것이었을 뿐, 국민들 사이에는 '''"한국이 일본을 확실하게 뭉개서 아시아의 맹주임을 분명히 하고 겸사겸사 UAE를 2위로 올려주자!"'''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
실제로, 두 번째 골을 허용한 순간 서울 거리에서 대형 전광판으로 경기를 시청하던 시민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나라잃은 표정''' 그 자체.[22] (...) 반면 일본 팬들은 엄청 신났으며 '''"(한국은) UAE를 이겨서 함께 월드컵에 가자!"는 외침까지 나왔다.'''
승부조작설에 대해서는 차범근 감독이 2002년 5월 방영된 MBC 스페셜을 통해서 '''"승부조작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본선에 진출해서 여유로웠던 반면에 일본은 워낙 벼랑끝이다보니 악착같이 경기에 임했는데 여기에 밀려서 패한 것이다."'''라는 발언을 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미 UAE와의 무승부 때 '''날계란이 선수들을 향해 날아다닐 정도로''' 이미 일본 내의 분위기가 말 그대로 '''폭풍전야'''였는데[23][24] 만약 서울 한일전에서마저 일본이 패해 조 3위로 아예 플레이오프 기회조차 못 잡았다면 나리타 국제공항은 둘째치고 '''김포국제공항'''에서부터 일본 응원단의 난동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실제로도 말이 안되는 것이, 프로축구도 아니고 국가대표팀이 그랬다간 후폭풍이 얼마나 될지도 미지수인데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일본을 상대로 그랬다가는 당장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25] ''' 따라서 차범근 감독의 주장대로 '''투지력에서 밀려서 패배한게 맞다.''' 게다가, 당시 홍명보가 경고 누적으로 결장을 하면서 전력상 다운그레이드가 되었던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도쿄 대첩으로 인해 그간 절치부심하던 일본의 자존심이 무너진건 물론이요, 이후 경기에서도 계속된 졸전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이 또 좌절될 위기에 몰렸었지만 서울 한일전에서 반대로 일본이 이기며 기사회생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 것. 일본이 결국에는 말레이시아까지 가서 이란과의 플레이오프를 벌인 끝에 꿈에도 그리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것을 감안하면, 도쿄 대첩은 한국에게나 일본에게나 절대 잊지 못할 역사의 한 순간으로 기억될 듯.
4. 뒷이야기
- 도쿄 대첩이라는 표현은 경기 당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처음 나왔고 이후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다.
- 당시 MBC에서 중계를 맡았던 송재익의 명언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가 이 경기에서 나왔다. 위의 일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도 한국 중계석의 상황을 보여줄 때 이 멘트에 자막을 달아서 보여줬던 걸 보면 일본 입장에서도 상당히 굴욕적임과 동시에 꽤 인상적인 발언이었던 듯하다. 송재익 본인은 2020년 KBS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원래 덴노를 운운하며 더 수위 높은 멘트를 하려다가 자제하여 차순위로 생각해낸 멘트라고.(...)
- MBC에서 단독 중계하여 무려 56.9%의 시청률을 기록했다.[26]
- 붉은 악마가 결성된 이후 처음으로 해외 원정을 간 경기이다.
- 일본이 당했던 패턴[27] 은 4년 뒤 한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도 당했다. 상대는 똑같이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 안정환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이민성의 골을 '얻어 걸린 것'이라 평했다. 김성주 캐스터의 후지산 운운에는 '산을 올라가긴 했는데 잘못 올라간거다.'라든가, '실력이 그만큼 안되는데 기대치만 올렸다' 등 절친이라 가능할 듯한 가열찬 디스를 남겼다.
- 약 20년 후인 2017년 다시 한번 도쿄 대첩이 일어났다.
- 이민성의 역전골은 수년동안 방송국 애국가 영상에서 정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틀어줬다.
- 이때를 끝으로 한국과 일본은 아직까지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다른 조에 편성되어 서로 경기를 치른 적이 없다.
- 응답하라 1997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다뤘다. 《제4화-페어플레이》에 나온다.
5. 관련 문서
[1] 사진에 있는 한국 선수들은 좌측부터 유상철, 최용수. 가운데의 28번의 일본 선수는 나카니시 에이스케. 후일 최용수와 나카니시는 제프 이치하라에서 동료로 만나 2년간 같이 뛰게 된다.[2] 한일전에서 대한민국이 일본에 극적으로 2:1 역전승을 거두고 희비가 엇갈리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3]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FIFA 월드컵 첫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조호르바루의 환희와 관련된 영상이기도 하다.[4] 국제신호와는 별개로 제작된 중계방송이다. 일본에서 경기가 열리면 자주 있는 일.[5] 심지어 후반전 일본측 골대 뒷편의 한국 응원단을 정면으로 잡아준 덕분에, 동점골과 역전골 리플레이에서 환호하는 한국 관중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또한 경기 종료 후 기자회견장에서 차범근 당시 한국 감독이 인터뷰하는 모습도 잠시 나오는데, '''이를 지켜보는 나카야마 마사시의 분노를 곱씹는 듯한 표정이 백미.'''[6] 심지어 어부지리격으로 미국 월드컵에 나간 한국이 스페인과 2:2 무승부를 기록하고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밀어붙인 끝에 2:3 으로 아깝게 패하는 선전을 벌이면서, 한국이 운 좋게 월드컵에 나갔다는 정신승리조차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7] 그것도 한국이 선제골을 기록했을 정도로 제법 경기력이 좋았다. 비록 역전패를 했지만 그 당시의 브라질은 디펜딩 챔피언이자 차기 월드컵의 유력 우승후보였기도 하고.[8] 투톱 미우라 가즈요시와 로페스 바그너는 최영일과 이민성이, 공격 미드필더 나나미 히로시와 나카타 히데토시는 유상철과 장형석이 마킹하는 전형이었다. 일본 또한 이례적으로 최용수에게 오무라 노리오를 붙였으나, 포백인 만큼 최영일같은 찰거머리 마킹을 하지는 않았다.[9]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고정운이 볼을 잡고서 주변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자기 골대 방향으로 볼 터치를 했다. 바로 옆에 야마구치가 있는데도.....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 캐스터는 '''"저건 웬 패스인가요? 아 위험합니다~ (리플레이 장면에서) 여기서 저 저.. 이상한 짓을 했어요.."'''라는 멘트로 대놓고 깠다.[10] 2002년 5월 한일전 축구 역사를 다룬 MBC 스페셜에서 이민성이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자신의 슛이 그대로 역전골로 연결되자 머리 속이 새하얗게 되면서 그라운드에 아무 것도 안 보였다는 언급을 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원래 오른발 위주로 슛을 때리지만, 도쿄 대첩 당시에는 오른발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왼발로 찼던게 그대로 들어간거라고. [11] 카자흐스탄전은 1-0으로 앞서가다 극장골을 먹혔고, 우즈베키스탄전은 1-0으로 뒤지고 있다가 종료 직전에 미우라의 극장골로 겨우 무승부를 거뒀다.[12] 만일 UAE가 이 경기를 잡았다면 여전히 1위를 넘볼 수도 있었으나 당시의 카자흐스탄은 '''홈깡패''' 수준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B조 최강 한국의 연승 행진까지도 저지했으니.....[13] 이 때 UAE는 2승 1무 2패 승점 7, 일본은 1승 3무 1패 승점 6, 카자흐스탄이 1승 3무 2패 승점 6으로 세 팀이 물고 물리는 상황이었다.[14] 1986 월드컵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15] 이는 말 그대로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 한국이 1위를 놓치는 시나리오는 일본과 UAE에 '''총 10골차'''로 패하는 것뿐이었으니, 한 마디로 믿기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상황이다.[16] 조호르바루의 환희 문서의 영상을 보면, 험악하게 항의를 하는 장면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다.[17] 당시 UAE의 전력상 한국전은 그냥 버리는 패였지만 우즈베키스탄은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18] 왜 하필 빨간 넥타이냐 하면 당시 한국팀의 유니폼 상의가 빨간색이었기 때문.[19] 월드컵 지역예선이라는 특성상 어느 정도의 원정 응원단 규모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 때의 일본 응원단 숫자는 매우 이례적으로 많은 수준이었다. 당시 영상을 보면 마치 중립 지역에서 경기를 치르는 듯한 광경이었을 정도. 물론, 이 때 일본의 상황이 매우 절박했기에 응원단이 예상보다 많이 집결한 것도 있다.[20] 이 때 나카타 히데토시는 혼자서 3도움을 기록했다.[21] 여담으로 나가누마 켄 당시 일본 축구협회장이 이 문구를 보고 엄청난 감동을 느꼈다고 술회했다.[22] 참고로 영상 속 거리는 삼성역 5번출구 쪽으로 추정된다.[23] 공공장소에서 눈에 띄는 집단 행동 자체를 꺼리는 일본인들의 특성상 저 정도면 축구팬들의 분노 지수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반증이기도 하다.[24] 아니 그전에 일본 답지 않게 서포터가 접이식 의자를 사람들쪽에 집어던지는데다가 폭언은 기본이요 난동이나 몸싸움도 벌어졌다.이때 그 의자가 미우라 카즈요시의 아내와 아이의 부근에 떨어져서 미우라가 대폭팔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웬만큼 폭언도 안하고 비겨서 침울한 미우라가 쳐나와 새끼야 라는 대사가 공공연연하게 말할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하고 선수들은 SP들의 보호로 겨우 버스에 탈정도 였다. 다시말하지만 이건 일본이 학생운동으로 험악했던 시절이 아니라 '''1997년'''이다.[25] 요즘은 한일전의 영향력이 많이 희석됐지만 당시엔 사실상 한국인들이 즐길 수 있는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였다. 심지어 당시 예선을 승승장구하며 범국민적 인기를 구가하던 차범근도 져도 상관없는 이 한일전을 패한 뒤 인기가 확 꺾였다. [26] 그리고 경기당일에도 재방송을 해줬고, 그 다음 날엔 정파시간까지 할애해가며 삼방을 했다.[27] 빗장을 걸어잠그다가 종료 몇 분 전에 동점을 허용하고 주도권을 되찾지 못한채 밀리는 패턴.